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42화 (142/192)

< 49화. 얼어붙은 땅 (1). >

1.

쉴 새 없이 퍼붓는 눈이 매몰찬 바람에 휘말렸을 때, 세상은 마치 몸서리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휘이이잉!

바람의 울음 소리에 귀는 멀었고,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눈도 멀었으며, 맡을 수 있는 냄새는 그저 차갑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눈밭은 자신의 맨몸뚱이를 밟은 자들에게 무례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푹푹, 새하얀 포식자가 되어버린 눈밭이 침입자의 무릎까지 집어삼키는 소리가 무척 섬뜩했다.

“발사!”

- 전황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무대에서 10미터 몸길이의 얼음으로 된 곰, 아이스 베어의 박치기를 방패 하나만으로 막아내는 건, 소행크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치겠군.’

소행크가 이미 질리도록 곱씹은 말을 재차 곱씹는 순간, 크오오! 아이스 베어가 괴성을 토해냈다.

‘온다.’

소행크가 긴장하고, 대비했다.

이윽고 아이스 베어가 힘을 꾹! 모은 후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박치기를 날렸다.

꽈앙!

들고 있는 방패 너머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소행크의 몸이 그대로 밀려났다.

간신히 넘어가지 않은 채 어쨌거나 포지션을 유지한 채 박치기를 견뎌낸 소행크는 속으로 열심히 이를 갈았다.

‘그냥 평지였으면 이런 곰새끼 정도는…….’

아이스 베어.

지금 처음으로 상대해보는 이 녀석은 덩치는 거대하지만, 상대하는 게 어려운 놈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특수한 스킬이 없고, 덩치에 비해 어마어마한 힘과 우수한 전투 인공지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어그로 관리도 쉬운 편이었다.

문제는 주변 환경. 무릎까지 먹어치우는 눈밭과 그 아래 깔린 빙판이 소행크를 처절할 만큼 괴롭혔다.

소행크는 이제까지 그토록 굳건하게 여겨졌던 대지가 이토록 나약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고,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을 의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게 이토록 등골 오싹한 일이란 걸 깨달은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사!”

그렇기에 소행크는 재차 외쳤다. 그건 우두머리가 지휘를 내리기 위해 내지른 외침이 아닌, 구조 요청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소행크의 게이머 인생에서 찾아보기 힘든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 정말 안 보입니다! 이대로 마법을 쓰면 같이 휘말립니다!

심지어 도움 받는 것도 쉽진 않았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최대한 아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코앞도 잘 안 보이는 이 눈보라 속에서 제아무리 명중률이 뛰어난 마법사도 제 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상황.

“발사!”

하지만 소행크는 재차 발사를 외쳤다.

- 갑니다!

결국 마법사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던 불덩이를 정면을 향해 던졌다.

마법사가 던진 불덩이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굴러가면서 몸을 부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곰의 형태를 갖추었다.

크와앙!

플레임 베어, 그 무시무시한 마법이 눈밭을 녹이며 질주했다.

그렇게 질주하는 플레임 베어의 동선에 가장 먼저 놓인 건, 다름 아닌 소행크였다.

‘어이쿠.’

본인이 마법 사용을 명령했지만, 설마 자기 바로 뒤통수를 향해 플레임 베어가 달려올 줄이야?

소행크가 짧게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중요하다. 넋놓고 있다가는 플레임 베어와 아이스 베어, 두 곰 사이에 껴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게 뻔하다.

찰나의 순간, 소행크가 틈을 포착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방패를 머리로 두드리던 아이스 베어의 머리통을 방패로 후려쳤다.

꽈앙!

굉음이 터지며 아이스 베어의 몸이 살짝 돌아갔다. 아이스 베어가 터질 듯한 울음을 멈추고, 크르르…… 낮게 깔린 울음을 토해냈다. 맹수들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나 내뱉는 울음이었다.

하지만 아이스 베어가 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똑바로 했을 때, 아이스 베어의 눈앞에 소행크는 없었다. 아이스 베어의 머리통을 치는 순간, 소행크는 도약했다.

그리고 도약한 소행크의 착지점은 아이스 베어의 목덜미였다.

착지하면서, 소행크는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꺼낸 단검을 아이스 베어의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파각!

단검이 아이스 베어의 목덜미에 꽂혔다. 깊이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결코 깊다고 할 수 없는 깊이였다.

크아아!

하지만 아이스 베어의 분노를 부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스 베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단검을 손잡이 삼아 매달린 소행크를 뿌리치기보다는 그대로 물어뜯을 속셈이었다.

쿠오오!

그때 타이밍 좋게 플레임 베어가 아이스 베어를 향해 몸을 날리며 앞발을 휘둘렀다.

퍼엉!

플레임 베어의 앞다리가 거친 소리를 내며, 아이스 베어의 머리통을 거세게 후려쳤다.

휙! 돌아간 아이스 베어의 얼굴에 섬뜩한 발톱 자국과 그을림 자국이 생겨났다.

그 순간 아이스 베어의 모든 분노는 소행크가 아닌 눈앞에 있는 플레임 베어를 향했다.

곧바로 두 곰의 전투가 시작됐다. 두 마리의 곰은 두 발로 선 채, 앞발을 이용해 공격을 주고 받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 전투였지만, 멋진 전투는 아니었다.

아이스 베어가 압도적으로 강했으니까. 플레임 베어의 공격은 아이스 베어의 몸뚱이에 흉터와 그을림을 남겼지만, 아이스 베어의 공격은 플레임 베어의 몸뚱이를 뜯어냈다.

때문에 그 둘이 주고받은 공격 횟수가 합쳐서 열 번이 넘기도 전에 플레임 베어는 난도질당한 채 눈보라 속에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소행크는 아이스 베어의 등허리 부분에 상처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상처 자체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위치가 절묘했다. 아이스 베어의 발과 이빨이 닿을 수 없는 곳, 일종의 사각이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소행크가 다시 소리쳤다.

“발사!”

마법사들은 반문 대신, 마법 주문을 외쳤다. 그 외침과 함께 불덩이와 벼락이 아이스 베어를 향해 그리고 아이스 베어의 몸에 달라붙은 소행크를 향해 날아왔다.

크오오!

아이스 베어는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고, 그 몸부림 속에서 소행크 역시 적잖은 데미지를 입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소행크는 거듭된 공격으로 아이스 베어의 어그로를 끌었다.

그야말로 소행크의 목숨을 건 활약.

그런 전투에서 나머지 인원들이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없었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나탈 역시 이 순간 이렇다 할 말조차, 응원 섞인 말조차 뱉지 못했다.

‘빌어먹을.’

때문에 나탈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금, 후회를 곱씹었다.

후회의 시작은 8일 전, 얼어붙은 땅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법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한 눈보라를 앞에 두고 무리를 이끌어야 할 나탈은 고민했다. 과연 이대로 적응기를 거친 후에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탐사를 하면서 적응을 할 것인지……

사실 원래 계획은 전자였다. 적응을 마친 후에 탐사를 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에 나탈에게 온 속보였다.

‘빅스마일만 아니었어도…….’

빅스마일 길드가 대규모 인원을 데리고 테르베 성벽을 넘었다는 내용의 속보였다.

사실 그 자체로는 상정 범위 내의 일이었다. 머리가 있다면, 노스랜드가 세 번째 시나리오 퀘스트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아니, 싱글레만 아니었어도…….’

그런데 그 무리 속에 싱글레가 있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0대 길드의 간부라면 모를 수가 없는 실력자였고, 이제껏 30대 길드의 적극적인 러브콜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채 자기 소속을 바꾸지 않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빅스마일 길드의 심볼을 달고, 심지어 그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내용을 받는 순간, 나탈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냥 빅스마일이라면 동네에 있는 덩치 큰 개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싱글레가 포함된 빅스마일 길드는 동네에 내려온 맹수나 다름없었다.

결국 나탈은 빅스마일 길드와의 충돌 대신 퀘스트 빠른 진행을 택했다.

그런데 얼어붙은 땅이 예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무조건 따라잡힌다.’

장애물 경주를 하는데,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장애물에 가로막힌 꼴이 됐다.

당연히 후발주자에게 잡힐 수밖에.

- 잡았다! 그만!

그 순간 소행크의 목소리가 나탈의 귀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사제들이 소행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힐링 스킬을 비롯해 신속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버프 스킬을 걸어둘 예정이었다.

“나탈!”

그렇게 사제들의 스킬을 받는 와중에 소행크는 곧바로 나탈을 불렀다.

나탈은 소행크를 향해 다가가며, 보이스톡을 통해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융! 시간 없으니까 자료용 영상은 간략하게 촬영하고, 촬영 끝나자마자 도축 시작해. 깨끗하게, 재료 코인은 단 하나도 흘리지 마.”

“예.”

“누누이 말하지만, 흔적을 남겨서는 안 돼. 재료 코인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예.”

잔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거듭 경고를 한 후에도 나탈은 심기가 좋지 못한 듯 표정을 구긴 채 소행크와 대화를 시작했다.

2.

푸욱!

해머 헤드의 외눈박이 눈동자에 날렵한 폭을 가진 검 한 자루가 깊숙하게 꽂혔다. 해머 헤드의 몸뚱이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깊은 상처인 듯, 해머 헤드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쿠웅!

이윽고 해머 헤드가 딱딱한 통나무처럼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해머 헤드의 몸을 계단처럼 밟고 내려오는 유저, 싱글레는 해머 헤드의 몸을 곧바로 뒤집었다.

슈욱!

그렇게 뒤집어진 해머 헤드의 외눈에 꽂힌 검을 뽑아낸 싱글레는 곧바로 검을 칼집에 넣었다. 전투 종료를 알리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었다.

그제야 이 전투를 보던 이들이 전투에 대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네, 진짜 대단해.”

“싱글레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탄사를 그냥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말도 안 돼. 해머 헤드의 머리 위에 올라가다니? 자칫 잘못하면 해머 헤드의 박치기에 휘말릴지도 모르는데…… 난 절대 못해.’

‘아이템도 아이템이지만, 엄청난 실력이야. 대체 왜 이런 실력자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거지?’

‘왜 이런 실력자가 우리 길드에 들어온 거지?’

물론 모두가 감탄사를 뱉고, 삼키는 건 아니었다.

“수고했소.”

아폴로는 감탄사 대신 마치 높으신 양반이 아랫사람을 칭찬하듯 말을 담담하게 내뱉었다. 싱글레 역시 담담하게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아폴로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자신의 존재가 거듭 초라해지는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은 모양.

싱글레 역시 지금 심정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아무리 일이라지만, 이딴 놈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얼굴을 드러낸 채 활동하지만 않았을 뿐, 그동안 핸즈 길드의 헬퍼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싱글레다. 그런데 아버지 후광을 빼면 보잘것없는 아폴로가 거듭 자신의 상전 역할을 하는 모습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참자, 이제 조만간 이런 고생도 끝이니까.’

그나마 이번 일이 중대함이 싱글레의 인내를 견고하게 다듬어줬다.

‘얼마 안 남았어.’

테르베 성벽을 넘은 이후 싱글레는 빅스마일 길드원들을 이끌고 히드라 길드를 뒤쫓았다. 이유는 하나, 히드라 길드를 상대로 길드전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전면전은 히드라 길드 입장에서도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 어떤 주변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성은커녕 마을조차 없는 테르베 성벽 너머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건, 결국 다 같이 죽자는 자폭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결국 1대1 승부, 대장전이 펼쳐질 것이고 그것이 싱글레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소행크, 놈만 잡으면 모든 게 바뀐다.’

히드라 길드의 최강자 소행크. 그와 1대1 승부에서의 승리가 가지는 가치는 얼마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의 가치는 된다.

싱글레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고, 그 미소를 발견한 유저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기분이 좋으시나 봅니다.”

“응?”

“아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시기에…….”

질문의 주인공은 초우룽이었다. 격전지 무대에서 자주 활약하며 쌓은 바이글과의 높은 호감도를 기반으로 노스랜드 탐사 퀘스트를 받아온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폴로와 달리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그를 싱글레는 높게 평가하며, 잘 대해주고 있었다.

“조만간 실력자와 싸우는 게 너무 기대가 되는 바람에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야.”

그렇기에 싱글레는 초우룽 앞에서는 나름의 진심을 드러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초우룽은 그런 싱글레를 보고 존경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싱글레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런 걸 원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우러러 보는 걸 원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고수보다는 세상 모든 이들이 아는 유명인이 되고 싶었다.

“소행크와 붙는 걸 이렇게 기쁘게 기다리는 건 싱글레 님밖에 없을 겁니다.”

“과찬이지. 이기지 못하면 그저 만용이 될 뿐인데.”

“아닙니다. 제가 봤을 때 싱글레 님이 무조건 이길 겁니다. 그쪽이 수작을 부리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모르는 사람마저 싱글레를 알아보는 날이!

싱글레의 미소가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때였다.

“어? 여기 코인이 있습니다!”

“뭐?”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코인이라는 단어가 모두가 한 곳에 몰려들었다.

“코인이라고?”

“예.”

“줘 봐.”

“여기 있습니다.”

곧바로 싱글레가 코인을 들고, 홀로그램창을 띄운 후에 코인의 내용을 확인했다.

[고목 원숭이의 피부]

[고목 원숭이의 피부]

[고목 원숭이의 뼈]

코인의 정체는 고목 원숭이의 재료 코인.

“이걸로 스무 개째인가?”

“잊을 만하면 코인이 떨어져 있네.”

“히드라 길드가 가지고 다니는 코인 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난 모양입니다. 자기들 동선을 그대로 보여주는군요.”

재료 코인은 유저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이다.

“졸지에 헨젤과 그레텔을 쫓는 신세가 됐군.”

당연히 이 흔적을 남긴 건 히드라 길드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빅스마일 길드가 히드라 길드를 잘 쫓아온다는 의미.

여기서 더 이상 싱글레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좀 더 빠르게 이동한다.”

< 49화. 얼어붙은 땅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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