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테르베 성벽, 그 너머 (1). >
1.
청년조차 되지 못한 채 청년과 소년 사이에 머물고 있는 앳된 외모.
“정말인가?”
가지고 있는 여린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말투.
“정말 그렇게 해주겠는가?”
얼굴 위로 그려진 깊은 자상들이 조금이나마 앳된 느낌을 희석해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내.
“정말로 테르베 성벽을 넘을 생각인가?”
테르베 성벽의 관리소장이자, 딘 왕자의 충신이었으며, 타락한 무리와 맞서 싸웠던 세상의 숨겨진 영웅, 바이글은 눈앞에 있는 사내의 제안에 반색했다. 반색 정도가 아니었다.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윽!”
그러자 바이글의 입에서 곧장 신음이 나왔다. 임전태세의 각오, 집무실 안에서도 갑옷을 입은 채 항시 무장 상태로 지내는 바람에 갑옷 안의 상처를 볼 수 없을 뿐, 그의 몸에는 딘 왕자의 배신, 그 배신을 행한 백안의 검사 아가르도가 남긴 상처가 여전했다.
목숨을 구한 게 다행일 정도였고, 이렇게 갑옷을 입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게 경악할 정도의 상처였다. 때문에 완쾌되지 않은 것에 아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괜찮네, 괜찮아.”
그런 그의 신음에 방문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려 하자, 바이글은 손을 내저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할 뿐이지. 자네 같은 영웅에게 이런 일로 손을 빌리고 싶진 않네.”
방문객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고, 바이글은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을 한구석을 채우고 있는 책을 하나 꺼냈다.
“이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구한 것이네.”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두꺼웠다. 하지만 그 책을 채우고 있는 페이지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 책장의 두께 때문이었다. 책 안을 가득 채운 건 얇은 목판이었다. 바이글은 그 책을 꺼내면서, 책장을 살피면서 목판에 새겨진 것을 바라봤다.
“테르베 성벽의 관리소장이 되기 전부터, 내가 그분을 따라 이 북쪽 땅의 수호자로 임명받기 전부터.”
목판 안을 채우고 있는 음각의 형태는 지도였다. 바이글은 책을 들고 다시 자기 책상 앞에 앉았다. 앉는 과정에서 철컹철컹, 갑옷의 묵직한 출렁거림이 그의 상처를 건드린 듯 바이글의 표정이 구겨졌으나 이번에는 신음을 내뱉진 않았다.
바이글은 고통 어린 표정마저 풀며, 책을 채우고 있는 목판들을 꺼내 퍼즐을 맞추듯, 목판을 맞추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목판은 지도였다.
“이것은 지금의 시대, 끝없는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의 노스랜드 지도일세. 지금 우리가 차지한 노스랜드가 결계와 성벽에 가로막히지 않았던 시절, 노스랜드 너머에 찬란한 전설마저 존재하던 시절의 지도이지.”
거창한 설명에 비해 지도의 내용은 매우 허접했다. 추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길이 있고, 그 길 주변에 불을 뿜는 괴물이 있고, 그냥 산이 뭉텅 그려져 있으며, 숲은 나무인지 그냥 낙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표시로 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지도는 완벽한 지도가 아니었다. 지도의 머리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목이 잘린 듯, 지도는 잘려있었다.
“워낙 오래전 유물이라 완벽하지 않네.”
툭툭, 바이글이 지도의 부족한 부분을,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결국 이곳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네. 그리고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는 아는 이조차 없지.”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듣던 방문객은 그제야 질문을 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시 직접 모으신 다른 정보는 없으십니까?
그러한 정보들을 들은 바이글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테르베 성벽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네. 때때로 부하를 시켜 성벽 너머를 탐사했으나, 결과는 넘치는 몬스터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부고뿐.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서는 대군을 이끌고 가야 했지만, 두꺼운 성벽과 신묘한 결계를 뚫고 대군을 노스랜드 탐사에 보낼
수는 없었네. 고작 내 호기심 때문이라면 더더욱.”
방문객은 다시 바이글에게 몇 마디를 던졌다. 그 말에 바이글이 두 손을 모아 턱을 바친 채 말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이곳에 어쩌면 타락의 힘이…… 올곧았던 그분마저 타락시킨 힘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 모르네. 때문에 과거에는 이곳을 알고 싶다, 그런 호기심을 품었다면, 지금은 이곳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네. 하지만!”
하지만, 그 묵직한 단어에 방문객이 재차 내뱉으려던 질문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 대한 탐사는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걸세.”
곧바로 바이글이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움직임이 있네.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되고 있네. 당분간 노스랜드의 그 누구도 권력을 쥐지 못할 걸세. 그런 상황에서 그분과 같은 사례가 나오지 못하도록, 노스랜드는 금지(
반 왕국은 물론 토벌협회까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걸세. 미지에 대한 탐사, 그 자체만으로도 해주던 포상은 결단코 없네.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이 포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세.”
그 인상 그대로 바이글은 질문했다.
“그리하여도 저 성벽 너머로 가겠는가?”
방문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바이글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바이글은 능숙한 솜씨로 목판에 먹칠을 하고, 하얀 종이를 덮었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지도, 바이글은 그 지도를 방문객에게 건네줬다.
“무사하게.”
2.
“무사하게.”
[퀘스트 ‘테르베 성벽 너머’가 시작됩니다.]
바이글의 말 그리고 퀘스트 알림을 들은 히르칸의 표정이 실룩거리고 있었다.
‘젠장.’
억지로 표정을 감추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좋은 감정의 표정이 아닌 안 좋은 감정의 표정을 감추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그 이유.
“자네 그리고 자네보다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뿐일세. 무사하게, 그리고 부디 그때와 같이 희망을 가져와주게.”
선객(先客)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간 새끼가 대체 누구야?’
얼어붙은 왕국에 가기 위해 무조건 거쳐야 하는 문, 테르베 성벽에 온 히르칸을 바이글은 반갑게 맞이했다. 히반 왕국의 영웅이며, 타락 심판자이며, 심지어 바이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아가르도마저 무찌른 자인 히르칸은 바이글에게 은인이자, 영웅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예전처럼 까칠하던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히르칸을 바라보는 바이글의 그 표정이 히르칸에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 후배가 멋진 선배를 동경과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었으니까. 하물며 미소년에게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 없는 히르칸 입장에서는 부담을 넘어 당혹
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고, 그 대화가 진행될수록 히르칸의 심기는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대화가 끝에 다다른 지금, 히르칸의 심기는 비틀림을 넘어 뒤틀렸다.
‘누군지 몰라도 그 새끼 때문에 타이틀 하나 날렸군.’
누군가 먼저 바이글을 만났고, 얼어붙은 왕국으로 향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경쟁자의 등장을 반기는 자는 그 누구도 없다.
‘숭고한 걸음 타이틀…… 체력을 50포인트나 올려주는 놈을 이렇게 놓치다니. 그냥 다른 일 말고 여기부터 와서 퀘스트랑 타이틀부터 받았어야 했어. 젠장!’
더욱이 선객은 히르칸의 기준에서는 마땅히 본인이 가져갔어야 하는 타이틀을 빼앗았다.
‘결국 고귀한 탐사만 얻었군.’
타이틀 ‘고귀한 탐사’,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탐사 퀘스트를 습득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타이틀로 지력을 25포인트 올려준다.
그리고 히르칸이 놓쳐서 아쉬워하는 타이틀 ‘숭고한 걸음’, 고귀한 탐사 타이틀을 받을 수 있는 퀘스트를 최초로 진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타이틀로 체력을 50포인트 올려준다.
체력을 50포인트나 올려주는 타이틀을 놓친 건, 단순히 아쉬움에서 끝날 만한 일이 아니다.
‘대체 어느 새끼지?’
속이 쓰리다 못해 쓰려 문드러질 만한 일이지.
하지만 그 속쓰림은 등골을 싸하게 만드는 오한 앞에서 사그라졌다
‘설마 우레사냥꾼 애들인가?’
테르베 성벽 너머로 가는 건, 그냥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일단 바이글과 어느 정도 접점이 있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토벌협회와 관련된 업적이 매우 많아야 한다. 토벌협회 관련 업적이 많다는 건 몬스터를 이골이 날 정도로 잡았다는 증거다.
지금 시점에서 얼어붙은 왕국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건 최상위 수준의 유저들 밖에 없다.
그리고 우레사냥꾼은 그 조건을 충분히 충족하고 있다. 더욱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얼어붙은 왕국은 우레사냥꾼의 독무대였다. 히르칸이 지금 타이틀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우레사냥꾼이 얼어붙은 왕국을 독점하고 그와 관련된 타이틀 및 아이템, 스킬북 등을 공
개해준 덕분이다.
흔히들 물건에는 인연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 정도로 인연이란 무시하지 못한다. 우레사냥꾼이 지금 시점에서 얼어붙은 왕국 퀘스트를 진행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무엇보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얼어붙은 왕국에 도전하던 우레사냥꾼 길드보다 지금의 우레사냥꾼 길드가 더 강하다.
‘미치겠네.’
“알겠습니다.”
고민 속에서도 대화를 마치기 위해 히르칸이 마침표와 다를 바 없는 말을 뱉었다.
마침표를 찍으면, 이제 끝내야 할 때. 히르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갈 생각인가?”
“예?”
그런 히르칸을 바이글이 갑작스럽게 잡았다.
“위험한 길이 될 터인데, 좀 더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내 자네의 탐험에 도움이 될 법한 걸 준비해주겠네.”
히르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바이글이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을 텐데…… 호감도가 높아지니까 별 이상한 꼴을 다 보는군.’
이 순간 히르칸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내가 자기 죽일 뻔한 놈을 목숨 걸고 잡아줬는데, 공짜로 사지로 보낼 리가 없지. 아무렴.’
무언가를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최근 히르칸은 예정 외의 과소비를 했다.
‘스킬북 같은 거 줘라. 제발.’
[기사도] 스킬 습득 이후, [지휘자] 스킬마저 구해본답시고 다시 한 번 노네임 스킬북을 질렀다.
물론 결과는 참패.
그때를 떠올리던 히르칸은 결국 표정을 구기고 말았다. 허공에 돈을 뿌렸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조금만 기다리게.”
그런 히르칸의 심중을 알 리 없는 바이글은 히르칸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혼자가 히르칸이 다시 고민했다.
‘진짜 누구지?’
거듭되는 고민…… 중요한 것을 놓친 고민이었다.
3.
나탈은 홀로그램 창을 앞에 둔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초상화였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런 그의 뒤로 소행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접근하기 전 기척을 있는 만큼 낸 덕분에 나탈은 놀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우리가 퀘스트를 습득한 이후 바이글과 접촉한 유저들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
워로드에는 현실에서 결코 촬영할 수 없는 온갖 각도에서 영상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찍히는 쪽이 얼굴 인식 불가 설정을 해두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 얼굴을 찍을 수 없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재주가 좋은 이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가상현실 그리고 워로드, 모든 것이 최첨단으로 이루어진 기술의 세계 속에서 사람의 손기술이 더 가치를 발휘하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런 아이러니에 소행크나 나탈은 관심이 없었다.
“이들 중에 우리를 쫓는 놈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바이글과 대면하는 유저들의 면면을 저장해둔 건, 경쟁자에 대한 정보를 미리 모으기 위함이다.
“유명한 얼굴은 없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만약 유명한 얼굴이 있다면, 그 유저를 경계해서 나쁠 건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얼굴은 모르지만 큰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유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 자료를 모아서 나쁠 건 없다. 다른 길드는 몰라도 히드라 길드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들은 자료 그리고 정보의 중요함을 알고, 그것을 무기로 쓰는 길드이니까.
“그런데 얘는 좀 아닐 것 같네.”
물론 그렇다고 전부를 경쟁자로 규정하는 건 아니다. 때때로 얼굴만 봐도 얘는 무시해도 좋겠다, 하는 경우가 있다. 게임에서 그런 판단을 선입견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쉽사리 떨칠 수 없는 것이기에 선입견인 법.
“아, 이 호구처럼 생긴 사람이요?”
나탈 역시 그런 선입견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순 없었다.
“게임에서 얼굴 보고 판단 내리기는 좀 그런데, 얘는 내가 보기엔 경쟁자 같진 않아.”
“저도 동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복권을 구매할 때도 다들 그런 생각으로 구매하지.”
소행크의 말에 나탈이 피식 웃었다.
그런 나탈의 웃음에 소행크가 슬그머니 표정을 바꾸고, 조금 가라앉은 음색으로 말했다.
“여러모로 참 귀찮은 일이야. 나야 몸만 쓰면 되지만, 나머지 여덟은 아닌 것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하니까.”
“그게 우리 역할 아닙니까?”
“때때로 내가 길드에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단 말이야.”
말을 뱉은 소행크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휴식시간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동료 머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모양이다.
나탈이 곧바로 부정했다.
“그건 결코 아닙니다. 머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소행크 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니야. 나만으로는 부족해. 솔직히 내 실력은 내가 알아. 동일 스펙이면 마타도르는 모르겠지만, 우레여왕에는 확실히 밀려. 그리고 하회…….”
그렇게 둘이 좀 더 진솔한 대화를 막 나누려고 할 때.
- 몬스터 등장했습니다! 숫자 아홉, 쉽지 않을 듯합니다.
보이스톡을 통해 긴급한 말소리가 들렸다.
소행크가 말을 끝내지 않은 채 새로운 말을 뱉었다.
“간다. 그 전까지 탱커들 중심으로 방어만 해! 내가 가기 전까지 무리한 공격을 자제해!”
- 예!
콰앙!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굉음이 터졌다. 소행크와 나탈은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움직였다.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 방심이나, 여유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 테르베 성벽 너머는 히드라 길드의 우수 전력들조차 언제나 경계심을 품어야 하는 곳, 200레벨의 몬스터들이, 그것도 이제까지 맞서 싸운 것과 다른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 그런 곳이었다.
< 48화. 테르베 성벽, 그 너머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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