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배덕의 왕자 (2). >
4.
사람은 패배를 통해 배운다.
당연히 두 차례의 배덕의 왕자 레이드는 참패로 끝났지만, 동시에 배덕의 왕자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기회이기도 했다.
배덕의 왕자를 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역할이 필요하다.
유물을 지키는 유물 수호자를 제거할 유물 파괴팀과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덕의 왕자를 역으로 방해하기 위한 왕자 방해팀.
유물 파괴는 생각 이상으로 어렵진 않다. 유물 수호자들은 높은 방어력과 많은 HP를 장점으로 삼는 타입으로, 공격력과 공격 패턴, 사용하는 스킬 역시 평균 이상으로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백안의 아가르도 같은 괴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몬스터
와 비교한다면 사냥 난이도는 훨씬 낮았다.
그렇기에 배덕의 왕자로부터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소규모 전력으로도 유물 파괴 및 배덕의 왕자 레이드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즉, 시르가 혼자서 배덕의 왕자를 붙잡아둘 수만 있다면 25인으로 구성된 우레사냥꾼 팀이 배덕의 왕자를 잡는 건 불가능하기만 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 점에서 시르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워로드의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에 영향을 준 건, 오로지 하회탈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영향을 줬을 뿐이다. 시르는 하회탈을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자신이 그보다 못하다고 받아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배덕의 왕자.
대장장이 올프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고대의 왕국에서 발견한 신묘한 금속을 녹여 만든 잿빛의 갑옷은 매우 거대해, 가뜩이나 큰 딘 왕자의 몸을 곱절로 부풀려주었다. 그런 거대한 갑옷 위로 쓴 투구는 머리 모양이 일반적인 투구와 다르게 왕관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투구의 T모양의 구멍으로 보이는 배덕의 왕자의 눈빛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검은 빛을 뿜고 있었다. 이런 거대한 무장한 몸체를 두르고 있는 망토에는 세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삼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넘치는 위용,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게 하는 위엄, 상대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득하게 만든 기세를 가진 그 왕자 앞에서 우레여왕은 명성에 걸맞은…… 아니, 명성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맙소사, 5분을 버티셨어.’
‘솔직히 죽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정말 레이드에 성공할지도 모르겠네.’
5분이었다. 시르가 배덕의 왕자를 상대로 벌어낸 시간은.
호각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슬아슬했으니까.
보통 실력자라면 방어하는 순간 그대로 몸이 날아갔을 강력한 공격을 몸을 한 번 휘청거리는 것만으로 막아냈고, 방어구와 함께 통째로 몸뚱이를 박살냈을 강력한 공격을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 와중에 피해냈으며, 이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속에서 수세만 취하
지 않은 채 공세를 퍼부었다. 배덕의 왕자가 제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방패처럼 공세를 막도록 유도했다.
그야말로 분전.
“하희!”
“예! 버티겠습니다!”
그리고 조건이 붙는 분전이었다.
시르의 외침에 하희가 배덕의 왕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감히 여왕님을! 넌 뒈졌어!’
시르의 전투를 보면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지만, 자신의 임무를 위해 그 근질거림을 참고 있었던 하희의 돌진은 매서웠다.
그렇게 배덕의 왕자를 하희가 상대하는 동안, 시르는 뒤로 빠졌고, 대기 중인 사제 세 명이 그녀에게 달라붙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버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분전의 조건, 그건 바로 풀버프였다. 5분이란 시간 역시 모든 버프가 유효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실력에 대한 폄하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배덕의 왕자는 정말 강했으니까. 그 증거는 곧바로 하희가 증명했다. 시르에 근접한 스펙을 가지고, 풀버프를 받은 상태였지만 하희는 전투가 시작하고 1분이 지나는 순간 치명상을 입었다.
배덕의 왕자가 휘두른 검격을 받아내지 못한 하희의 오른팔이 뒤로 젖혀졌다.
쉬익!
배덕의 왕자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팔꿈치를 단숨에 잘라냈다.
하희가 당하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스트라이커 세 명이 배덕의 왕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개중 두 명이 배덕의 왕자에게 공격을 시도했고, 남은 한 명이 하희를 가방처럼 불쑥 든 채 전장에서 빠졌다.
“버틸 수 있어! 버틸 수 있다고!”
하희가 몸부림을 쳤지만, 팔이 잘린 그녀의 몸부림은 평소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시간을 야금야금 버는 사이, 다시 한 번 풀버프를 받은 시르가 소리쳤다.
“대기!”
전투 중인 사제와 검사들이 썰물처럼 빠졌고, 시르가 다시 한 번 배덕의 왕자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를 모두가 말없이 바라봤다.
5.
3미터의 작지 않은 체격과 신장을 가진 아이언 골렘의 머리 위에는 성인 남자의 주먹보다 큰 다이아몬드가 달린 왕관이 있었다.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골렘의 강철 머리통을 부수지 않고는 왕관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심어져 있었다.
유물 수호자였다.
그런 유물 수호자를 앞에 두고 두 명의 탱커가 쉴 새 없이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마법사 한 명이 골렘의 주변을 빙글빙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포지션! 포지션만 잡으라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내가 알아서 맞추니까 괜히 힘들게 움직이지 마!”
발리스타 해치.
평소에는 하희와 웃기지도 않는 콩트를 하고, 언제나 불평불만을 입안에 달고 다니는 사내인 그는 그런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달리 워로드에 내로라하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실력과 명성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
장기는 무빙 캐스팅 스킬을 이용해 전투 중 쉴 새 없이 이동하면서 마법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다.
그저 목적 없이 움직이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적의 공격을 실시간으로 피해내며 탱커의 부담감을 크게 줄여줬고, 탱커와 대치중인 몬스터의 주변을 이동하며, 굳이 탱커가 몬스터를 특정 장소,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필요 없이, 알아서 마법을 던질 타이밍과 포
인트를 찾아냈다.
“억지로 버티지 마! 내가 어그로 끌고, 시간 버는 동안 전열 가다듬어! 버프 다시 돌려!”
심지어 탱커가 흔들리는 순간, 본인이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고, 쫓고 쫓기는 상황 속에서 마법을 이용한 전투로 동료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마저 버는 해치는 워로드를 이용하는 탱커들이 같이 사냥하고 싶은 마법사 1위에 뽑힐 정도였다.
몬스터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상황에 따른 뛰어난 대처 능력, 전투 상황을 실시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답을 내리는 지휘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때문에 그런 해치가 유물 수호자 사냥의 지휘를 맡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리고 현재, 해치의 지휘 아래 전투는 매우 순조롭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계획한 그대로 진행 중이었다.
“풀버프 완료!”
“다시 탱커가 어그로 끕니다.”
유물 수호자와 전투를 시작한 지 7분째,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 한 명 나오지 않았다. 백점만점에 구십점 이상을 줘도 무방할 정도로 멋진 지휘였다.
‘어렵진 않은데…….’
하지만 해치는 이 전투에 만족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어.’
전투는 순조롭지만,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멈춤 없이, 본연의 속도 그대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때렸는데, 이제야 금이 좀 가는 정도라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녀석만 잡는데 최소한 15분 이상 걸려. 그럼 나머지 수호자 둘을 처치하는데 최소 40분 이상…….’
그 순간 해치는 조금 전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시르가 무려 첫 번째 전투에서 5분이나 버텼다는 소식은 해치도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시르 본인이 자기 입으로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설마 정말 그 말을 지킬 줄이야?
‘여왕님이 괴물은 괴물이지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해치는 자신의 우두머리가 새삼스러웠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다. 그리고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시르의 독재에 가까운 길드 운영을 길드원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난관 앞에서도 시르는 주저함과 망설임 없이, 본인 스스로 최
전선에 나서서 돌파구를 만들어내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다음 소식이 해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머지는 그냥 게임 좀 하는 놈이지.’
하희가 1분을 간신히 버틴 이후 팔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를 얕잡아 볼 생각은 없었다. 단지 해치는 하희와 시르, 둘 사이의 실력 차를 알고 있었다. 그 둘은 1분과 5분의 차이가 날 정도로 실력 차가 크지 않았다.
그건 곧 한쪽이 무리해서 달린다는 의미.
시르는 1시간이라도 버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해치가 보기에 15분이 되는 시점, 세 번째 교전이 끝나는 순간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에 자신의 계약 기간 2년을 걸 자신이 있었다.
‘젠장,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어?’
결국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다. 그리고 해치가 믿는 유일한 구석이었다.
그런 해치의 마음을 읽은 듯, 곧바로 속보가 왔다.
- 큰일 났습니다! 히드라 길드와 레드불스 길드가 배덕의 왕자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두 길드의 라이브 방송 시작, 그건 곧 두 길드가 이곳에 왔다는 의미다.
해치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래, 다 잃고 망하는 것보단 뭔가 배상을 하더라도 얻을 건 얻는 게 맞아.’
이번 일로 칭찬을 받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해치는 자신의 판단이 시르의 독단보다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확신은 있었다.
- 두 길드가 작전 발표했습니다. 우레사냥꾼이 미끼가 되는 동안 전력을 다해 유물 수호자를 처치…… 합의된 내용입니까?
하지만 해치의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꾹 다문 그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아.’
해치, 그가 깨달았다.
‘이 새끼들이 개수작을…….’
자신이 부른 게 범이었단 사실을, 그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는 걸,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6.
레드불스 길드와 히드라 길드는 배덕의 왕자 레이드 무대에 입장하는 순간, 우레사냥꾼과 일말의 접촉도 없이 유물 수호자 사냥에 나섰다. 일사불란하게 유물 수호자를 잡으러 이동하는 그 두 길드의 모습은, 마치 세 길드가 일부러 이런 식으로, 서프라이즈 파티
를 열 듯 이번 레이드를 기획한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세 길드의 호흡은 너무나도 잘 맞았다.
“어떤 새끼야!”
물론 우레사냥꾼 입장에서는 욕이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 실제로 현재 이 레이드 과정이 우레사냥꾼의 채널을 통해 라이브 방송 중임에도 하희는 거침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레드불스 길드나 히드라 길드를 때려잡
으러 갈 기세였다.
“어떤 새끼가 배신했어!”
그나마 다행히 하희가 이미 몇 차례 사고를 친 전적 때문에 그녀의 말이 방송 스피커로 나오지 않도록 설정이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고, 마땅했다. 이번 일은 내부자의 정보 유출 없이는 그 누구의 난입과 개입도 있을 수 없었으니까.
달리 말하면 배신자가 무조건 있다는 의미. 때문에 그녀가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해준 덕분에 나머지 이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분노 속에서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뱉어주면, 일단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니까.
물론 그 물음에 대답해줄 자는 하나다.
배신자.
- 접니다. 제가 두 길드에 정보를 건넸습니다.
해치는 이 순간 자신이 배신자임을 고백했다. 그 순간 모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하희, 그녀가 모두의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해치를 향해 일갈을 내지를 게 뻔했으니까.
“어? 왜? 진짜? 어째서?”
그런데 하희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분노 대신 그녀는 정말 당혹감이란 감정이 가득한 반문을 내뱉었다. 그녀를 알고 지낸 우레사냥꾼 길드원들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머지 이들은 더 당황했다.
일단 해치의 배신…… 납득하기 힘들었다. 해치는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지만, 우레사냥꾼을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였다. 무엇보다 그가 배신으로 얻는 게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배신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여기에 하희가 보인 반응 역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
당혹감은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전투 집중.”
그 분위기를 정리한 건 시르였다.
다시 풀버프를 받기 위해 잠시 전투에 빠져 있던 그녀는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마치 권투선수가 마우스피스를 물듯, 무언가를 꽉! 물었다.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흡혈나무 진액 사탕’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그녀는 곧바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해치의 배신이나, 두 길드의 난입에 대한 건 하나도 없었다.
배덕의 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몸을 숨기기 위해 만든 결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 앞에서도 그는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시르가 재차 자신을 향해 돌진을 하는 순간에도 배덕의 왕자는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손바닥을 펼쳤고,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로 불줄기들이 솟아올랐으며, 솟아오른 불줄기들이 거대한 새가 되어 시르를 향해 날아갈 뿐이었다.
화려하고, 강렬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지만, 배덕의 왕자에게 있어서는 담담한 공격일 뿐이었다.
끼아아!
불새가 괴성과 함께 시르를 집어삼켰다. 불새 앞에서 갑옷은 무용지물, 불길은 갑옷이 틈을 파고들며 시르의 피부를 녹이고, 그녀의 HP를 사정없이 갉아먹었다. 게임임에도 그녀의 온몸이 갑자기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들어왔다는 증거.
하지만 그녀의 HP는 곧바로 회복됐고, 그녀의 상처 역시 곧바로 회복됐다. 흡혈나무 진액 사탕 덕분이다.
당연히 불새는 시르의 질주를 조금도 늦추지 못했다. 어느새 배덕의 왕자와 거리를 좁힌 시르는 아직 남은 불새의 찌꺼기, 불길로 휘감긴 검을 휘둘렀다.
배덕의 왕자는 그런 시르의 공세를 피할 생각 없이, 본인 역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휘두르는 왕자의 검은 붉은 오러를 머금고 있었다.
‘젠장!’
시르가 기겁하며 모든 것을 멈추고, 억지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배덕의 왕자가 휘두른 검이 공기를 갈랐다.
스읏!
그 소리는 무척이나 얄팍했다. 너무나도 가벼워서, 검을 휘두른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
하지만 그 얄팍한 소리와 함께 대지 위로 그리고 초목 사이로 거대한 칼자국이 등장했다.
마치 세상이 반으로 잘린 듯한 광경이었다.
억지로 그 공격을 피한 시르가 바닥을 굴렀고, 배덕의 왕자는 시르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 배덕의 왕자는 새로 등장한 무리들을, 자신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처치하러 움직일 생각이었다.
무시당한 시르는 이를 꽉 물었다.
“전투 집중.”
꽉 문 이 사이로 내뱉는 그녀의 음색은 이제 단호함보다는 초조함과 약간의 침울함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배덕의 왕자를 향해 달려갔다. 이 순간 그녀에게 주변 무언가를 신경 쓸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당연히 알 리 없었다.
‘……이게 초승달베기 강화스킬인 적월검기였나? 이거에 맞았으면…… 진짜 어이없게 뒈질 뻔했네.’
자신의 전장 가까이에 그녀가 그토록 가지길 원하던 히르칸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7.
적월검기(赤月劍氣).
아마 몇 달 후에 검사 클래스의 유저들을 달아오르게 만들 그 무시무시한 스킬이 만들어낸 깊은 칼자국, 그 옆에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던 히르칸은 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홀로그램 모니터를 통해 3개 길드의 라이브 방송을 확인했다.
‘개판이네.’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히르칸. 그런 히르칸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 심지어 히르칸과 계약서를 쓴 레드불스조차 히르칸이 레벨업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중으로 알고 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히르칸, 그가 레드불스를 속인 것이다.
속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렇게 해도 계약서상에 문제 될 게 없었다는 것. 히르칸은 레드불스의 레이드 계획에 따를 필요가 없다. 그 반대, 레드불스가 히르칸의 레이드 영상을 방송하고 싶으면 히르칸의 일정에 맞춰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것.
‘뭐, 내가 소새끼나, 뱀새끼였어도 이렇게 행동했겠지만.’
우레사냥꾼 길드를 미끼 삼아 남은 두 길드가 알짜배기를 먹으려는 작금의 상황, 히르칸은 예상했다.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유상종, 비슷한 놈들이 서로의 생각을 읽는 건 어렵지 않은 법이다.
‘역시 마음에 들 수가 없는 족속들이야.’
이 순간 히르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배덕의 왕자와 열심히 싸우는 시르와 그녀의 전투에 집중하는 우레사냥꾼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전투에 온전히 집중한 그들에게 히르칸의 존재를 알아차릴 여유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히르칸은 그 광경을 보며 입꼬리 한쪽을 낚싯바늘에 걸린 것처럼 올렸다.
우레사냥꾼 길드가 지금 미끼가 되어버린 이 상황, 히르칸에게는 나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동안 쓰린 속이 하루아침에 편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 상황 자체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히르칸이 입꼬리를 다시 본래 자리에 내려놓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레사냥꾼에 대한 감정은 접어두고 생각을 하자. 그래, 그렇게 생각을 해보자고.’
지금 상황은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서 우레여왕이 죽으면, 우레사냥꾼 길드는 전력 상황에 상관없이 무조건 비협조적으로 나오겠고.’
사고는 우레사냥꾼이 먼저 쳤고, 레드불스와 히드라는 그런 우레사냥꾼의 행동을 비슷한 짓으로 맞받아쳤다. 이런 와중에 시르가 게임오버를 당할 경우, 우레사냥꾼은 결코 두 길드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방해만 안 해도 다행이지.’
심하면 오히려 우레사냥꾼 길드가 남은 두 길드의 배덕의 왕자 레이드를 방해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우레사냥꾼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결국 레드불스와 히드라 그리고 하회탈, 이 셋이 배덕의 왕자를 상대하게 된다.
못할 건 없다.
‘어쨌거나 우레사냥꾼이 사라지면, 내가 채설연 꼴이 되기 딱 좋단 말이야.’
문제는 두 길드와의 협업에서 히르칸이 제 발언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죽기 싫으면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고.’
두 길드가 히르칸의 사정을 정확히 알 리는 없다.
하지만 히르칸이 배덕의 왕자 사냥에 필사적으로 나오리란 것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적어도 배덕의 왕자 사냥에서 히르칸이 손을 놓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실제로도 그렇다. 배덕의 왕자는 잡지 못하면, 그 대가는 전멸이다. 더욱이 배덕의 왕자 시리즈를 원하는 히르칸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활약을 펼쳐야 한다.
‘그보다 채설연이 저 정도로 싸워줄 줄이야. 우레사냥꾼하고 같이 움직이면, 승산은 9할 이상이다.’
또한 우레사냥꾼의 부재 속에서 배덕의 왕자를 잡는 건 마냥 쉽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에 배덕의 왕자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무리수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두 길드가 히르칸의 무리수를 방관할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
최악의 경우는 하회탈이 배덕의 왕자를 상대하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벌고 게임오버를 당하는 경우 그리고 이후 레드불스와 히드라 길드가 손에 손잡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경우다.
‘어쨌거나 두 길드는 절대 못 믿어.’
히르칸에게 30대 길드 중 가장 싫은 길드를 말하라고 하면 우레사냥꾼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은 29개 길드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다는 건 결코 아니다.
레드불스도 마찬가지다. 그들과는 손을 잡았다. 신뢰가 아닌 이익을 위해서.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히르칸의 이익을 노린다면, 히르칸에게 손해가 된다면 히르칸은 언제든 안색과 태도를 바꿀 것이다.
그렇다면 베스트 시나리오는 뭘까?
가장 좋은 건 3대 길드 전부 전멸하고, 히르칸 혼자 살아남는 거다. 확인된 바는 아니고,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배덕의 왕자 시리즈를 하회탈이 독식하면, 하회탈은 그 날로 게임에서 아이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사실상 일어날 수 없다.
원래 언제나 그렇듯 최선의 상황은 쉽게 오지 않는 법이고, 때문에 사람은 선택을 할 때 최선이 아닌, 최악을 피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상황에서 히르칸이 고를 수 있는 차선책은 배덕의 왕자를 일단 확실하게 잡는 것이다. 리스크와 리턴을 떠나서, 일단 무조건 배덕의 왕자를 잡고, 히르칸 본인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르의 생존, 우레사냥꾼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후우.”
히르칸이 숨을 골랐다.
‘내 인생 참 지랄 맞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많은 후회를 했었던 나날들, 하지만 어찌 보면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날들, 이 시점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는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나날들이 히르칸의 선택을 힘들게 했다. 히르칸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자존심을 설득해야 했다.
우레사냥꾼을, 채설연을 돕는 게 아니다. 그들을, 모든 이들을 짓밟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일 뿐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그 설득은 기어코 통했다.
히르칸이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위해서다.’
8.
전력질주를 연거푸 하면, 기록은 향상되기보다는 내려간다.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르는 배덕의 왕자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5분을 벌었다. 하지만 두 번째에서는 4분만을 벌었고, 세 번째 시도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그녀의 세 번째 전투는 시작 3분째에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사고가 일어났다.
배덕의 왕자의 검이 붉게 물들며, 붉은 초승달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시르는 질주를 멈추지 않고, 스텝을 살짝 대각선 상향으로 바꾸는 것으로 붉은 초승달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피하면서, 그녀는 동시에 질주 스킬을 사용했다.
15미터 남짓한 거리를 단숨에 좁혀졌다. 좁히는 와중에 부스터 스킬을 사용했다.
심지어 초승달베기마저 사용했다. 뒤로 피하는 건 회피의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데미지는 상관없다. 공격이 닿으면, 교전이 시작된다. 시르가 노리는바 역시 그 점이었다.
‘뒤로 빠지면, 몸통박치기로 초근접전을 시도하고…….’
당연히 시르는 머릿속으로 다음, 다음, 그다음 수를 염두에 두었다. 격전 속에서는 3수 이상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리는 무용지물이 된다.
문제는 체력의 저하로 인해 시르의 판단력이 둔해졌다는 것.
시르는 다음 수를 떠올리느라 배덕의 왕자의 반격을, 왕자가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향해 질주 스킬을 쓴 것을, 심지어 그녀가 사용한 질주 스킬보다 훨씬 더 빠른 강화된 스킬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아!’
시르가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배덕의 왕자의 검은 어느새 시르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콰직!
그리고 그 검은 갑옷째로, 시르의 왼쪽 어깻죽지를 그대로 잘라냈다.
쿵!
동시에 곧바로 이어진 왕자의 몸통 박치기에 팔을 잃은 시르의 몸뚱이는 구차할 정도로 바닥을 굴러갔다.
그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하희였다. 그녀는 이제까지처럼 여왕님! 같은 외침 없이 그냥 몸을 날렸다.
풀버프를 받은 상태도 아니고, 자가 버프 스킬도 사용하지 않은 그녀의 돌진은 스피드란 무기를 가진 배덕의 왕자에게 쓸 수 있는 최악의 수, 악수(
휘릭!
배덕의 왕자는 투우를 하듯 가뿐하게 하희의 몸통박치기를 피했다. 그런 하희를 기다린 건 물수제비처럼 수평으로 날렵하게 날아오는 검뿐이었다.
스윽!
그 검이 하희의 왼쪽 허벅지를 잘라냈다.
다리를 잃은 하희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배덕의 왕자는 휘두른 검을 순식간에 거꾸로 고쳐 잡았다. 이대로 하희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꽂을 속셈.
‘아!’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일어난 긴박한 상황에 남은 이들은 쉽사리 반응할 수 없었다. 반응을 떠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사람조차 없는 게 현실.
결국 움직인 건 그들이 아닌 제삼자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폭발 소리와 함께 불쑥 튀어나온 제삼자가 배덕의 왕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배덕의 왕자에게 인사 대신 쇳소리를 나눈 자, 하회탈이었다.
< 46화. 배덕의 왕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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