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33화 (133/192)

< 46화. 배덕의 왕자 (1). >

1.

[푸른 뱀이 바라보는 하얀 지붕. 그 지붕 아래 붉은 거울을 찾아라. 그리하면 앙상한 표지판이 보일 터. 그 표지판의 왼쪽으로 갈지어다. 하염없이 갈지어다.]

대격전 무대가 끝나고, 모든 이들의 초점은 곧바로 배덕의 왕자를 향하게 됐고, 결전의 증표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 배덕의 왕자와의 결전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은 결전의 증표에 뜨는 문장을, 배덕의 왕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암호를 해석하는 것밖에 없었다.

의외로 적지 않은 유저들이 이것을 즐겼다.

- 푸른 뱀 타입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이 어디지?

- 블루 드래곤 말하는 거 아니야?

- 드래곤이 뱀은 아니지. 블루 자이언트 스네이크를 말하는 게 분명해. 명확하잖아!

- ㄴ 배덕의 왕자가 퍽이나 60레벨 보스 몬스터 등장하는 사냥터에 숨겠다. 차라리 곰이 토끼굴에 숨는 게 말이 되겠지.

즐겼다기보다는 사실 할 게 이것밖에 없었다. 여기에 하나 더, 이번 배덕의 왕자 레이드에 참가한 3개의 길드는 이 문장 해석에 현상금을 걸었다. 약 5천 달러 정도의 금액으로 용돈벌이로 치부할 만한 액수는 결코 아니었다.

어쨌거나 워로드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냥터들, 개중에서 한 곳을 두루뭉술한 힌트만 가지고 찾는다는 건 어렵다기보다는 짜증 나는 일이었다. 또한 그 형태나 특징이 비슷한 것들이 꽤 많았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인 것처럼.

이런 이유로 앞서서 두 번이나 참패를 기록한 배덕의 왕자 레이드의 경우에도 팔찌에 표시된 암호를 해석하는데 각각 3일 그리고 4일이 걸렸었다. 그런 주제에 레이드 시간 자체는 1시간을 버틴 팀이 없고, 레이드가 실패하는 순간 배덕의 왕자는 그 자리를 떠나

버리니, 여러모로 무참한 패배가 될 수밖에 없다.

‘정말 재수도 없지.’

그런 의미에서 우레사냥꾼은 운이 좋았다. 배덕의 왕자 레이드 2차 실패 이후 세 번째 암호를 우레사냥꾼은 바로 그 당일에 해석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우리가 막 발견한 지역에서 배덕의 왕자가 등장할 줄이야.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푸른 뱀이 뜻하는 바는 푸른 강, 하얀 지붕은 눈이 덮인 만년설산, 여기까지는 모두가 해석을 마쳤다. 단지 원래 강은 푸르고, 워로드에 눈 덮인 산이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약 50개라는 점이다.

결국 핵심은 붉은 거울과 앙상한 표지판이란 단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놀랍게도 우레사냥꾼은 이 두 가지 요소를 품은 지역을 특정할 수 있었다.

파타고니아 산.

최근 우레사냥꾼이 발견한 지역으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블럭 필드였던 무대였다.

그 파타고니아 산에 붉은 호수가 있고, 그 붉은 호수 지척에는 벼락에 맞아 앙상한 꼴로 타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역시 발견하기 쉬운 건 아니었다.

만약 파타고니아 산을 발견하고, 우레사냥꾼 길드가 보다 전문적인 탐사를 하지 않았다면 결코 붉은 거울과 앙상한 표지판을 특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190레벨의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파타고니아 산 탐색에 적잖은 시간이 걸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이게 이유였다.

‘이걸 왜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이 사단이 일어난 거야?’

우레여왕 시르, 그녀가 이번 배덕의 왕자 3차 레이드의 독행(獨行)을 결정한 이유 말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위치라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우레사냥꾼과 손을 잡은 두 길드가 우레사냥꾼의 행보에 간섭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부의 배신자가 없는 이상, 우레사냥꾼의

행보를 두 길드가 알아낼 방법은 결코 없다.

반대로 이번 레이드를 그 누구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해치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은 불운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붉은 호수 주변을 가득 채운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들, 그사이에 바짝 타버린 앙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해치의 심정은 퍽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야, 뭐해!”

심지어 그런 그의 옆에서 괜히 시비를 거는 우레공주 하희의 존재는 불운이란 이름을 가진 화룡의 눈깔이었다.

“뭘 하긴, 한숨 쉬지.”

“한숨? 왜?”

반문하는 하희를 해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을 보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쉬익!

그런 해치의 얼굴에 하희의 주먹이 날아왔다.

“헉!”

해치가 기겁하며 주먹을 피했다. 주먹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해치의 왼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왜 갑자기 주먹을 날리고 지랄이야!”

“너 지금 나보고 이상한 생각 했지? 죽을래?”

“오냐, 어디 한 번 죽여 봐! 죽여 봐!”

험악해지는 그 둘의 분위기에 좌중의 시선이 몰렸다. 하지만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시르의 한마디에 해치와 하희는 서로를 노려보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시르가 가진 카리스마는 그 정도였다. 이 모난 돌보다 더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을 짧은 말 한마디로 다스릴 수 있을 정도.

“앞으로 6시간 후 배덕의 왕자 레이드를 시작한다.”

때문에 그런 그녀의 분노 섞인 그 한 마디에 반문을 지껄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해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 뒈지거나, 찔려 뒈지거나 어떻게든 뒈지는 건 피할 수 없겠군.’

2.

“파타고니아 산?”

- 우레사냥꾼 길드가 최근 발견한 지역이라고 한다. 발리스타의 말에 의하면 일단 그렇다.

“최근 발견지역…… 정말 여러모로 운이 좋았군.”

퍼스트 헤드의 설명에 체브는 실소와 함께 제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시정잡배도 아니고, 30대 길드 중 한 곳인 우레사냥꾼 길드가 기존의 협의를 깨고, 독단적인 행동에 나섰다. 심지어 그 행동의 배경이 보다 나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리더의 고집에 의해서 생겼다는 건,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체브는 이 상황이 짜증 날지언정 납득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미친년답군.’

다른 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놀람보다는 의구심부터 생기겠지만, 우레여왕이라면 얼마든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우레사냥꾼은 선택을 했고, 행동에 나섰다. 그에 맞는 대응을 할 차례다.

-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쪽은?”

- 어차피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지.

방관 혹은 합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레사냥꾼이 배덕의 왕자 레이드를 단독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낮으며, 괘씸죄를 적용해서라도 이대로 당하는 걸 방관하는 게 맞다. 굳이 그들과 합류를 해서 그들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레사냥꾼에게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 우레사냥꾼이 여기서 레이드에 실패하면, 그들은 절대 이번 배덕의 왕자 레이드에 참가하지 않겠지.

“그게 골치 아픈 거지.”

우레사냥꾼 길드가 이번 레이드를 실패할 경우,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을 할 가능성은 제로다. 동시에 우레사냥꾼 길드는 곧바로 배덕의 왕자 레이드를 포기할 것이다. 우레여왕의 자존심에 재도전은 없다. 그녀는 이미 그 결정을 염두에 두고 결단

을 했을 것이다.

- 우레사냥꾼이 빠지면, 배덕의 왕자 레이드는 쉽지 않아.

우레사냥꾼의 부재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둘은 배덕의 왕자 전투 영상을 봤다. 워로드란 세상에서 닳고 닳은 그 둘이 배덕의 왕자가 가진 무서움을 모를 리 없다.

더욱이 배덕의 왕자 레이드는 결전의 증표를 가진 이들만이 참가할 수 있다. 우레사냥꾼의 부재로 생긴 전력 부족을 채우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레사냥꾼을 도와 움직이는 게 나을까? 이 역시 정답이라고 보긴 힘들다.

“우레사냥꾼과 합류했을 경우 손익, 혹시 계산해봤나?”

배덕의 왕자 레이드는 사업이다. 사실상 손익 계산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우레사냥꾼과 합류하는 게, 이 상황을 방관하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할 것이다.

- 라이브 티켓 얼마나 팔았지?

“사전 판매로 팔 수 있는 만큼은 팔았지. 그쪽은 광고 얼마나 팔았어?”

- 일단 전부 팔긴 했지. 그쪽만큼 단가가 높진 않았지만.

그리고 지금 두 길드는 당장 우레사냥꾼을 도와 레이드를 하더라도 예상 이상으로 큰 손해를 보진 않았다. 라이브 티켓은 사전 판매로 이미 예상 판매량만큼 팔았고, 광고도 전부 계약 완료했다.

- 당장 도와도 손해 볼 건 없겠군.

“손해를 안 볼 순 없겠지만, 나중에 우레사냥꾼에게 손해 배상 청구하면 되겠지.”

여기에 혹여 손해가 나더라도, 우레사냥꾼을 도와 배덕의 왕자 레이드를 성공한다면 차후 우레사냥꾼으로부터 손해 배상을 받을 수도 있다.

- 레이드 준비는?

다음 고려 대상은 레이드 준비 현황이다.

“10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다.”

준비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 배덕의 왕자 레이드에 참가할 자격을 가진 자들만으로 이미 전문팀을 구성했고, 그동안 레벨업 겸 훈련을 위해 사냥터에서 거듭 사냥을 하는 중이었다.

레이드에 사용할 장비 및 소모 아이템 준비도 전부 마쳤다. 심지어 활동 시간도 맞췄다. 모두 똑같은 시간에 게임에 접속하고, 똑같은 시간에 로그아웃을 하고, 똑같은 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다. 여기에 최근 모두 건강검진도 받았다.

준비상황을 염려하는 것 자체가 히드라 길드나, 레드불스 길드에게는 모욕이나 마찬가지.

이쯤 되면 우레사냥꾼 몰래 그들과 합류해서 배덕의 왕자 레이드에 나서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 보다 많은 이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 만약 작전을 짠다면, 우레사냥꾼을 먼저 보내고 우리가 난입을 한 뒤, 각자 팀을 구성해 유물을 파괴하는 식의 작전을 짰으면 좋겠는데.

“우레사냥꾼을 미끼로 삼자?”

- 우레사냥꾼을 미끼로 삼아서 유물을 2개 파괴…… 아니, 우레사냥꾼들도 결국 배덕의 왕자를 상대하는 사이 유물 파괴팀을 조직해 유물 파괴에 나서겠지. 운이 좋다면, 우레사냥꾼을 미끼로 삼아서 현재까지 3개로 추정되는 유물을 파괴할 수 있겠지.

우레사냥꾼을 미끼로 삼는다는 것. 대개 그러하듯 미끼는 사냥의 성공 여부를 떠나 큰 상처를 입는다. 때문에 미끼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희생양이 있다.

만약 세 길드가 합의를 이룬 상황이라면, 누구 하나를 미끼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희생양이 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러자 지금 그 합의를 먼저 깬 건, 그 누구도 아닌 우레사냥꾼 길드다. 우레사냥꾼 길드가 미끼로 쓰인다고 해도, 우레사냥꾼 길드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출할 순 없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겠지만, 레드불스와 히드라 길드 역시 우레사냥꾼과 비교해 밀릴 것 하나 없다. 우레사냥꾼을 무서워할 이유가 그 두 길드에는 없다.

“좀 더 자세한 작전 계획서를 읽고 싶군.”

- 바로 보내주지. 단, 그 전에 하회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우선이다. 하회탈을 배제한 채 작전을 세울 순 없으니까.

“10분 후에 다시 연락하지.”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체브는 퍼스트 헤드에게 연락 대신 간략한 문자 한 통만을 보냈다.

[하회탈은 차후 합류]

문자를 보내는 체브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3.

시르를 선두에 둔 우레사냥꾼 길드 소속 25인의 유저들이 일렬로 줄을 맞춘 채, 앙상한 나무의 왼편으로 차례차례 걸음을 옮겼다. 서로 간격을 2미터 정도 둔 채 그들의 행보에 이상이 생긴 건, 10분 정도를 거듭 걸어갔을 무렵이었다.

가장 먼저 시르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녀를 기점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이들이 하나하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장 후미에 있던 해치는 어느 순간 모든 동료를 시야에서 놓쳤다. 해치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았다.

‘잘됐군.’

인스턴스 던전.

배덕의 왕자와의 결전을 선택받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주고 동시에 패배가 곧 전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무대로 만들어준 배경이다.

앞선 이들이 차례차례 인스턴스 던전에 입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선두에 있던 이들이 보이스톡을 이용해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순간 해치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낌새들이 보였다.

해치가 그 낌새가 보인 방향을 향해 수신호를 딱 한 번 보냈다.

- 야! 해치! 너 어디야? 뒈지기 싫으면 빨리 들어와!

그때 해치의 귀로 하희의 앙칼진 외침이 들렸고, 해치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모두가 사라진 경계 너머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결전의 증표에 의해 결계의 힘이 무력해집니다.]

해치의 귀에 알림이 들렸고, 곧바로 그의 모습도 다른 이들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해치가 느낀 두 낌새들이, 히드라 길드의 여덟 번째 머리 나탈과 레드불스를 대표하는 실력자 중 한 명인 투우 킴스, 그 둘이 서로를 한 번 마주본 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레사냥꾼, 결전의 장소에 입장했습니다.”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마지막 무대, 배덕의 왕자와의 최종 결전이 시작됐다.

< 46화. 배덕의 왕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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