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전야(前夜 ) (1). >
1.
그런 경우가 있다.
어떤 대단한 일을 봤고, 그 대단한 광경에 대해서 무언가를 한 마디를 남기고 싶은데, 막상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지금 흐반 성을 바라보는 수천 명…… 아니, 수백만 명의 이들이 지금 그 경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광경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현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감탄과 환호, 그 비슷한 감정들을 단순하게 표출할 뿐이었다.
그러한 무리에는 히르칸도 있었다.
‘어, 잡은 건가?’
죽음을 각오했다. 아니, 솔직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검은 수액의 효과가 아가르도의 HP를 완벽하게 좀먹기 전에 그를 상대하지 못한 자신은 패배자였고, 죽어 마땅했다.
심지어 후회도 했다. 그냥 두 눈 질끈 감고 레드불스 길드에게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라이브 티켓하고, 유료 영상 지분을 조금이라도 요구할 걸 그랬나? 내 시계는 누가 챙겨주려나? 설마 내 시계를 레드불스 길드가 날름 먹고 오리발을 내밀
진 않을까? 48시간 동안 뭘 해야 할까? 게임 X같네…… 이런 후회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히르칸이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어쩌면 주마등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아가르도는 죽었으나, 쓰러지지 않았다. 분명 대격전의 끝을 충분히 가늠케 하는 알림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이 환청으로 들릴 만큼, 아가르도는 꼿꼿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검으로 히르칸을 겨눈 채로 서 있었다.
때문에 히르칸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아가르도의 검이 자신을 단칼에 벨 것 같았다. 그 긴장감에 히르칸은 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승리를 축하해야 할 자가 이런 긴장감 속에 놓였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는 관중이 긴장감이 만들어낸 적막감을 쉽사리 떨쳐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적막감이 새벽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 적막감 속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체브였다.
‘진짜 해냈군.’
체브의 머릿속도 복잡했다. 누가 보더라도 히르칸의 열세였고, 반면 아가르도의 기세는 마주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멀리서 보면 아가르도는 여전히 멀쩡하게 서 있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 무대는 끝났다. 아직 커튼콜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회탈이 백안의 기사를 혼자 잡았어.’
반대로 말하면 이제 누군가 커튼콜을 해줘야 할 때다. 체브가 보이스톡을 이용해 이번 라이브 방송을 지휘하는 프로듀서에게 말을 걸었다.
“마이크 모드.”
- 네? 아, 네!
프로듀서 역시 얼이 빠져 있던 모양. 하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직 라이브 방송 중이다. 생방송 중에 PD가 정신을 놓는다는 건, 경위서 한 장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 마이크 모드, 3, 2, 1 시작!
프로듀서가 곧바로 음향팀에 신호를 보냈고, 음향팀이 체브의 말에 곧바로 체브의 음성이 방송을 통해 나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조정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체브가 입을 열었다.
“아가르도 사냥 성공. 이상 기획 레드불스 길드, 출연 레드불스 및 하회탈,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후 쿠키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무대 위로 커튼이 내려왔다.
이제는 관객들이 볼 수 없는 커튼 너머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다.
2.
히르칸이 아가르도의 죽음을 받아들인 건, 획득한 타이틀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대격전의 영웅]
- 타이틀 효과 : 모든 능력치가 5퍼센트 증가합니다.
[아가르도를 무찌른 자]
- 타이틀 효과 : 모든 능력치가 5퍼센트 증가합니다.
이 두 가지 타이틀이 명백한 증거였다.
‘진짜 잡았네.’
히르칸이 아가르도를 잡았으며, 아가르도의 죽음이 대격전 무대의 마침표가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그제야 히르칸이 제 얼굴에 새겨진 얼빠진 표정을 지웠다. 히르칸이 드디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히르칸의 걸음이 잠깐 휘청거렸다. 팔이 없어 무게감을 잠시 잃은 것이다.
히르칸이 슬그머니 자신의 왼팔을 바라봤다. 아니, 왼팔을 바라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왼팔은 없었으니까. 아마 근처에 굴러다니거나 혹은 뭉개졌을 것이다.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근처에 있는 사제에게 재생 마법을 받으면, 3분이면 자라난다.
‘아, 라이프 베슬.’
그 순간 히르칸은 지금 자신이 재생 마법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라이프 베슬 스킬을 활성화하면, 페널티로 사제 직업이 사용하는 회복 계열 스킬의 효과를 받을 수 없다. 재생 역시 회복 계열이다.
히르칸이 슬그머니 자신의 HP상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없이 체력 회복 알사탕을 입에 넣고 굴렸다. 당장 라이프 베슬 스킬을 비활성화로 돌리면, 빈사 상태에 빠져 간신히 구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였다.
‘진짜 뒈질 뻔했네.’
데굴데굴, 입안에서 알사탕을 굴리던 히르칸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미소를 지으며 아가르도 앞에 갔다. 아가르도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아가르도를 바라보는 히르칸의 머릿속과 가슴속에는 여러 종류의 감정이 어우러졌다.
일단 마음 같아서는 아가르도의 뒤통수를 손으로 한 번 빡! 후려치고 싶었다. 자신을 죽일 뻔한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들 리가 없다. 무엇보다 전투에서 히르칸이 아가르도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인 적이 없다. 검은 수액이란 수법을 통해 승리를 거뒀을 뿐이다. 통
쾌함이 있을 리 없다.
한편으로는 이런 아가르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자신에 대한 대견함 그리고 자신과 맞서 싸운 강인한 기사에 대해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심정도 피어올랐다.
물론 고작 게임 내 NPC, 더욱이 딱히 착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섬뜩하기 그지없는 악행이란 배경을 가진 NPC에게 예의를 표한다는 게 우스꽝스럽긴 하다. 더욱이 그런 게임에서의 낭만을 추구하는 건 히르칸과 거리감이 멀다.
‘키요테나 씽이라면 여기서 뭘 했을지 궁금하군.’
때문에 히르칸은 그저 가만히, 복잡한 심경을 품은 채로 아가르도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죽은 아가르도는 느끼지 못했다.
츠릉, 츠릉!
대신 아가르도의 검이 그 시선을 느낀 듯, 히르칸을 향해 울음을 내기 시작했다. 히르칸은 그 울음이 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가 크게 한 번 움찔거렸다.
‘깜짝이야.’
그와 동시에 아가르도의 몸도 움찔했다. 검의 울음이 꼿꼿하게 굳은 아가르도의 몸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은 작았지만, 파문처럼 퍼져가며, 기어코 아가르도의 몸을 무너뜨렸다.
쿵!
아가르도, 그가 드디어 무릎을 꿇었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히르칸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고꾸라진 아가르도의 손은 자신의 애병을 놓고 있었다.
히르칸이 하나 남은 팔로 그 검을, 아가르도의 애병, 크라잉 소드를 들었다.
[당신은 아직 이 검을 쓸 수 없습니다]
사용 불가 알림이 히르칸의 귀를 간질였지만, 히르칸은 그 알림을 무시했다.
“아이템 옵션 확인.”
자기 할 것만 했다.
곧바로 히르칸의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크라잉 소드]
*주요 속성
- 에픽 등급의 아이템
- 모든 능력치 +222
- 요구 레벨 : 180레벨
*보조 속성
- 공격 시 접촉하는 무기 및 방어구의 내구도 감소량 대폭 증가
- 착용 시 모든 몬스터의 방어력 20퍼센트 무시
- 착용 시 받는 데미지 20퍼센트 무시
- 착용 시 모든 데미지 20퍼센트 증가
- 이 아이템은 습득자에게 귀속됩니다.
*기타
- 대장장이 올프가 고대의 검을 개조해 만든 검이다. 주인을 위협하는 적이 다가오면 울음을 토해내 주인을 지킨다.
미소를 넘어 전율을 돋게 만드는 옵션. 히르칸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썼던 무기보다 좋았다. 어떤 의미에서 히르칸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증거인 셈.
물론 히르칸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게 전리품이라는 사실.
전리품은 전쟁의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제야 히르칸이 어렴풋했던 머릿속 글자를 확실한 글자로 바꿀 수 있었다.
‘아이템, 좋은 곳에 써주지.’
승리라는 두 글자를 말이다.
3.
폭발이란 뭉쳐진 것들의 발산이기도 하다.
하회탈과 아가르도의 전투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시청자들은 그 과정에서 쌓이고, 뭉쳤던 것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 하회탈이 진짜 이겼음? 어떻게?
- 레드불스가 공략법 발표 언제 함? 대체 뭐로 어떻게 한 거지? 직접적인 데미지는 뼈폭탄이 전부였잖아?
- 검은 액체, 그게 도트 데미지 역할을 한 모양이야.
- ㄴ 검은 액체가 도트 데미지? 그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 ㄴ 블랙 트리 아님?
- ㄴ 블랙 트리? 그게 뭐야?
- ㄴ 하회탈 유료 데뷔작임. 겁나 재미있음.
- 하회탈이 최고네. 레벨 랭킹에서는 설우가 퍼스트원이지만, 전투력은 하회탈이 퍼스트원이네.
격렬한 반응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레드불스 인터뷰 요청해! 다른 곳보다 먼저 인터뷰를 받아야 해! 당장! 당장 받아와!”
“하회탈 인터뷰 따오면 한 달 유급 휴가라도 줄 테니까 무조건 따와! 이번에도 프루트 새끼들에게 밀리면 안 돼!”
예상치 못한 하회탈의 등장이 예상치 못한 역사를 썼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뭐라고?”
- 271만 장 팔았어요.
“아무래도 내가 수치를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분명 레이드 시작 전 티켓 판매량이…….”
- 하회탈과 아가르도 전투 도중에 판매량이 급증했어요. 지금 막 공식 집계가 끝났습니다. 솔직히 저도 믿기진 않네요. 어쨌거나 우리가 결국 신기록을 세웠네요. 3백만 장을 찍지 못한 건 아쉽지만.
271만 장.
워로드 라이브 티켓 판매 역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그 기록 경신의 주인공이 체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회탈에 대한 질투심과 여러 가지가 좀 아쉽긴 했는데…….’
하회탈의 전투에서 질투심을, 아직 확인된 건 없지만 그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얻었을 것이 분명한 어마어마한 보상에 아쉬움을, 이 두 가지 감정이 체브의 심중에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체브는 그때 느낀 자신의 아쉬움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유료 영상 판매도 적지 않겠지.’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회탈은 그 대가로 유료 영상에 대한 자기 지분도 포기했다.
심지어.
‘여기에 배덕의 왕자 레이드 라이브 티켓까지 합친다면…….’
앞으로 보장된 이익을 떠올리던 체브는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 하회탈을 영입해야 해.’
그리고 그 시각, 체브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가 있었다.
- 저기, 어떻게 할까요? 그냥 철수할까요, 아니면 레드불스한테 가서 축하한다고 이야기라도 전달할까요? 아, 그보다 하회탈에 대한 건…….
해치의 보고를 듣는 시르는 그 보고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고민하고 있었다.
‘끝까지 레드불스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
당연히 그녀의 고민은 하회탈이 준 것이었다.
하회탈과 레드불스가 손을 잡은 건 배가 아픈 수준을 넘어서, 그 둘 모두를 박살을 내고 싶을 정도로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결국 하회탈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레드불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시르가 폭발하지 않은 채 고민을 하는 이유였다.
‘왜?’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레드불스가 하회탈을 돕기 싫어서 돕지 않은 건 아니다. 빚이든, 은혜든 레드불스 입장에서는 하회탈을 도와서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결국 하회탈이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홀로 싸운 건, 본인의 의지다. 레드불스의 도움을 받겠지만, 아가르도와의 싸움만큼은 혼자 해내겠다는 의지.
‘왜 이렇게까지 솔플을 고집하는 거지?’
이해하기 힘든 의지다. 보통 손을 잡을 거면 확실히 잡는 게 낫다. 그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일이다. 그리고 하회탈은 굉장히 특이하지만,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불합리함과 비상식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독보(獨步)에 대한 고집은 불합리함과 비상식, 그 자체다.
이유가 없을 리 없다. 달리 말하면 그 이유를 알아내고 해결하는 게 하회탈을 손에 넣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다른 놈 손에 들어가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시르가 고뇌를 곱씹었다.
- 저기, 여왕님? 여왕님 듣고 계십니까?
그런 시르를 향해 해치가 재차 말을 걸었다. 시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끄러워.”
고민 중에 누군가가 보이스톡으로 칭얼거리는 것만큼 짜증이 나는 일은 없다.
하물며 시르의 코털은 사자의 코털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사실을 해치가 모를 리 만무. 그런데 지금 해치는 재차 시르의 코털을 건드렸다. 시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을 품었다. 그녀의 짜증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런 시르의 표정을 알 리 없는 상황임에도 해치는 낌새를 느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치는 재차 말했다.
- 팔찌, 팔찌! 팔찌를 보십시오!
그 말에 시르는 분노 대신 자신의 팔찌를 바라봤다.
< 45화. 전야(前夜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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