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아가르도 레이드 (4). >
13.
히르칸은 하회탈의 작은 눈구멍을 통해 정면을 바라봤다.
아가르도.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영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백안의 기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히르칸 본인 역시 백안의 기사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원했었다.
히르칸은 자신이 오롯하게 아가르도와 맞서 싸우고, 그를 통해 모든 영광과 대가를 누리는 날을 꿈꿨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원하던 바를 이룬 히르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강한 적과의 만남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 부담감에 짓눌릴 정도였다면, 레드불스 길드를 찾아가 1대1 무대를 마련해달라는 제안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는 마음에 든다. 이기든, 지든, 이번 무대는 히르칸이 그토록 바라던 무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 무대로 오는 길이었다.
체브는 히르칸과 악수를 나누면서 제안을 했다. 차라리 1대1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이 손을 잡고 아가르도 레이드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건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 제안을 받는 순간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에 금이 갔다.
‘진짜 별거 아닌 자존심이지만, 그것까진 못하겠다.’
정신 승리라고 해도 좋다. 자기 위안이라고 봐도 좋다. 궤변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히르칸은 최소한 아가르도만큼은 홀로 맞서 싸우고 싶었다. 그 전투 과정 속에서 30대 길드의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여기서 뒈지면, 마땅히 뒈질 운명이었던 거겠지.’
동시에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죽는다면, 그건 마땅한 죽음이자 동시에 구차한 죽음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왔으면, 이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무대 위에 올라왔는데 아무것도 못한다면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하회탈을 쓰고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후우!”
그러한 심정들을 이 순간 히르칸은 전부 삼켰다.
이제는 전투에 집중할 때.
눈앞의 상대는 현재 유저가 당장 싸울 수 있는 NPC들 중에 두 번째로 강하다. 첫 번째는 대장장이 올프다.
그런 적을 앞에 두고 잡념과 자책 따위의 감정을 품는 건, 발목에 족쇄를 차는 꼴.
히르칸이 검을 뽑았다. 기사 앞에서 검을 뽑는다는 건 곧 적의를 밝히는 일. 검을 뽑을 필요도 없는 아가르도가 곧바로 히르칸과의 거리를 좁혔다.
카앙!
그렇게 시작된 그 둘의 첫인사는 격한 쇳소리였다.
그리고 그 인사는 거듭됐다. 쇳덩이들이 거듭 서로와 몸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때때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대개 그 소리는 아가르도가 의도한 소리였고, 히르칸은 거듭 공격을 피해내지 않고, 받아냈다. 충돌할 때마다 그 충격이 적잖음에도 그러는
이유, 없을 리 없다.
‘이 정도. 꽤 스탯 차이가 크군.’
가늠하기 위함이다.
대형 몬스터와 싸울 때 힘 대결을 하는 무식한 유저는 없다. 하지만 NPC와 상대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힘 대결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가늠은 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속도, 어느 정도의 파워, 어느 정도의 반사능력 그리고 어느 수준에 이르는 전투 인공지능을 가졌는지.
지피지기 백전백승, 시시콜콜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진리다.
하물며 히르칸 정도의 실력자면, 1분 남짓한 교전으로 충분히 견적을 낸다.
강하다.
힘 대 힘으로 히르칸이 감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때문에 히르칸은 자신의 무기 선택에 만족했다.
‘블코왕보다는 역시 아반이 나았어.’
현재 히르칸이 든 무기는 아반의 검이었다.
결사대의 일원 그러나 배덕의 왕자의 마수에 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간 주인이 남긴 검으로 아반의 원수를 상대한다.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는 일.
물론 그런 이유로 아반의 검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분명 아반의 검은 블랙 코볼트 왕의 검보다 데미지를 비롯한 공격력 자체는 낮지만, 대신에 파괴 불가 옵션이 있다.
‘블코왕 들었으면, 간보기에서 개박살이 날 뻔했군. 크라잉 소드, 역시 귀찮아.’
아가르도를 상대할 때 파괴 불가 옵션은 필수다. 아가르도가 가진 크라잉 소드의 특수 옵션이 바로 브레이크다. 무기 및 방어구를 보다 빠르게 파괴한다.
동시에 아반의 검에는 유용한 옵션이 하나 더 있다.
“헤이스트!”
C랭크의 헤이스트 스킬 사용 가능 옵션.
그 옵션을 지금 이 순간 히르칸이 사용했다. 자연스럽게 격전에 속도가 붙었다. 울리던 쇳소리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쇳소리의 간격이 줄어드는 만큼, 여유도 줄어들었다. 히르칸은 물론 아가르도 역시 다른 곳을 살필 여유가 사라졌다.
‘제대로 해보자.’
그 틈을 노리고 본 아머와 매드니스 헬름을 비롯해 모든 무장을 마친 해골 기사가 등장했다.
14.
레드불스 길드원들이 아직 남은 타락한 군단의 잔당들을 해치우고 있을 때 체브는 하회탈과 아가르도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을 지휘해야 하는 그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직무유기였지만, 그런 그를 탓하는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 하회탈이다.’
그만큼 하회탈과 아가르도의 전투는 볼 가치가 있었다.
해골 기사와 하회탈의 협공은 놀라웠다. 해골 기사의 전투 인공지능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런 해골 기사의 전투 인공지능에 정확히 호흡을 맞추는 하회탈의 전투 센스도 놀라웠다.
‘하회탈식 해골 부하 육성법은 나름 알려졌지만…….’
하회탈의 해골 부하들의 우수한 전투 인공지능에 대한 비밀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 하회탈의 해골들은 선방어 후공격이란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선회피 후공격이란 방법을 쓴다. 피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 그 부분과 하회탈의 캐릭터 육성 스타일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그 누구도 하회탈처럼 싸우진 못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골 부하를 훈련하더라도 하회탈과 같이 싸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번 전투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하회탈과 해골 기사의 합공은 결과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전투를 보던 체브의 눈매가 가늘어진 이유였다.
‘추가로 해골을 소환하는 건 무의미.’
현재 하회탈은 해골 기사만을 소환해둔 상황이었다. 그가 스무 마리 넘는 해골 전사와 골렘마저 소환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는 전력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머지 것들을 소환해봤자, 지금 전투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회탈만이 아니다. 유저들이 아가르도를 협공하더라도 2명 혹은 3명이 한계다. 그 이상 붙고 싶어도 붙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렇게 붙어도 결과를 내긴 힘들다. 물리 및 마법 공격에 데미지를 입지 않는 아가르도 앞에서 하회탈과 해골 기사의 공세는 소리만 낼 뿐, 흔적을 남기진 못했다.
반면 아가르도의 크라잉 소드는 차츰차츰 하회탈과 해골 기사의 몸뚱이에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쌓인 후의 결과는 뻔하다.
‘하회탈이 이제 승부수를 쓰겠군.’
때문에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체브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전장을 직시했다.
그 순간 아가르도의 검이 하회탈의 배를 뚫고, 등 밖으로 나왔다. 그 광경을 본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반면 체브는 두 눈을 더 가늘게 떴다.
15.
쉴 새 없이 이루어진 공방 속에서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건, 해골 기사였다. 아가르도의 검이 해골 기사의 두 무릎을 동시에 잘라냈다. 제아무리 대단한 해골 기사라도 해도 다리 없이 전투를 치를 순 없는 노릇.
해골 기사는 무너졌고, 아가르도와 히르칸이 다시 서로를 마주봤다.
그 순간 히르칸이 갑작스레 왼팔을 허공에 흩뿌렸다. 명백한 빈틈이었다.
쉬익!
아가르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히르칸과 거리를 좁히며 히르칸의 뱃가죽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본 아머 그리고 아이템에 피부 재봉을 비롯한 여러 패시브 스킬로 무장한 히르칸의 방어력은 굉장했지만 크라잉 소드가 가진 공격력과 특수 옵션은 그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무시했다.
파직!
그렇게 갑옷이 뚫렸고.
푸욱!
히르칸의 뱃가죽도 뚫렸으며.
파직!
뱃가죽을 뚫고 나온 검은 그 너머의 갑옷과 본 아머를 다시 한 번 꿰뚫었다.
검을 쥔 아가르도의 손과 히르칸의 뱃가죽 사이의 거리가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일 정도로 깊은 공격이었다.
이 순간 히르칸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히르칸은 그대로 아가르도를 안았다.
그와 동시에 히르칸이 틈을 주면서 흩뿌렸던 해골 조각들이 전사의 모습을 갖추었다.
모습을 갖춘 녀석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맨손.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격성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가르도의 검에 찔린 채 그를 껴안은 히르칸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해골 전사들은 맨손인 채로 아가르도에게 달려들었다.
이 와중에 아가르도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보다는 히르칸의 뱃가죽을 뚫은 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적, 그 무엇으로부터도 피해를 입지 않는 아가르도가 굳이 자신을 향한 새로운 적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히르칸이 해골을 부리는 이상, 히르칸만 죽이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히르칸은 쉽사리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
‘라이프 베슬 덕을 이제야 보는군.’
체력 수치를 대폭 올려주는 라이프 베슬을 비롯한 신체 강화 스킬 덕분이었다.
물론 라이프 베슬은 만능이 아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결국 히르칸은 죽을 터.
그러니까 이제는 이 교착을 마칠 때다.
이 순간 네 마리의 해골 전사들이 아가르도의 주변에 붙었다. 녀석들은 앙상한 뼈만 가득한 손으로 아가르도의 갑옷 위를 두드리고, 갑옷을 떼어낼 속셈으로 갑옷을 잡았다.
푹!
아가르도는 그런 해골 전사를 무시한 채 히르칸의 뱃가죽을 찌른 검에 좀 더 힘을 줬다.
츠릉, 츠릉!
크라잉 소드가 기분이 좋은 듯한 울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
콰아앙!
거대한 굉음이 히르칸을 비롯한 모든 것을 휘어 감았다. 히르칸도, 아가르도도 그리고 해골 전사까지!
그리고 그 폭발과 함께 검은 액체가 흩뿌려지며 히르칸과 아가르도를 덮쳤다.
[아가르도가 검은 수액의 영향을 받습니다.]
[검은 수액에 노출됐습니다. HP가 감소합니다.]
두 가지 알림이 히르칸의 고막을 두드렸다.
더불어 아가르도가 자신의 이상을 눈치챈 듯, 히르칸을 발로 차며 히르칸과 거리를 벌렸다.
푸홧!
그 과정에서 검이 거칠게 뽑히며 히르칸의 상처를 긁어냈다. 현실이라면 악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하지만 히르칸은 악소리 대신 미소와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
“슬롯 온.”
16.
노림수는 하나였다.
검은 수액!
제아무리 대단한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검은 수액이 주는 고정 데미지 앞에서는 무의미했으니까.
비단 히르칸만이 생각해낸 노림수는 아니었다. 레드불스 그리고 우레사냥꾼을 비롯해 나머지 인원들 역시, 대상의 방어력과 상관없이 고정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옵션을 가진 아이템 따위를 아가르도 공략법으로 판단하고 준비했다.
하지만 갑옷을 벗긴 후에야 통하는 아이템들과 다르게 검은 수액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가르도의 갑옷은 무적이지만, 방수 기능은 없으니까.
때문에 히르칸은 블랙 트리 세트로 무장한 해골 전사들을 아가르도 가까이에서 뼈폭탄을 이용해 폭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모든 전투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 따르면 히르칸도 검은 수액을 뒤집어쓰게 된다.
“슬롯온.”
그렇기에 준비해온 것이 바로 해골 판다 세트와 정화의 서클렛이다.
[정화의 서클렛이 검은 수액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줍니다.]
히르칸의 몸을 덮고 있던 검은 수액이 치지직!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반면 아가르도의 몸에서 그런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 수액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 검은 수액이 남아 있는 이상 아가르도의 HP는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검은 수액의 고정 데미지와 아카르도의 체력 예상치를 고려하면…… 최소 20분.’
아가르도의 체력은 엄청나다. 고작 몇 분 안에 검은 수액이 결과를 만들어주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상 시간은 최소 20분. 그 정도는 지나야 아가르도의 HP가 바닥을 보일 것이다.
더불어 아가르도를 비롯해 워로드의 몬스터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비전투 시에는 체력이 급속도로 회복되며, 일정 시간 후에는 걸린 모든 상태 이상으로부터 회복된다.
즉, 히르칸은 앞으로 몇십 분 동안 아가르도와 전투를 치러야 한다. 심지어 HP가 감소할 때마다 새로운 페이즈에 도달하며, 보다 가공할 능력과 스킬을 선보일 아가르도와 혼자 맞서 싸워야 한다.
아득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것을 나무라거나 폄하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수세로 시간을 벌 생각도 없었다.
공격은 최고의 방어!
더욱이 이 무대에서 어울리는 전투법이 히르칸에게는 있었다.
아가르도와 대치중이던 히르칸이 해골 조각을 흩뿌렸다. 흩뿌린 해골 조각은 해골 전사도, 해골 기사도 아니었다.
해골 마법사.
‘왈츠로 끝내주마.’
타락한 동지, 아반. 그를 위한 춤을 출 때가 왔다.
17.
왈츠.
하회탈을 일약 대스타로 만들었던 그 무대가 다시 한 번 흐반 성에서 펼쳐졌다.
하회탈은 아가르도의 공세 속에서 능숙한 솜씨를 보이며, 아가르도를 해골 마법사가 던지는 마법으로 유도했다.
물론 그 마법은 데미지가 없었지만 아가르도의 정신을 분산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시간싸움에서 그런 요소가 차지하는 가치는 천금, 그 이상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라이브로 영상을 보던 시청자들은 이 광경을 보며 열광을 넘어 발광을 할 정도였다. 심지어 라이브 도중에 실시간으로 라이브 티켓이 계속 팔려나가며 티켓 판매량이 2백만 장을 돌파했다. 라이브 티켓이 라이브 도중에 팔리는 경우는 드물며,
그 판매량이 수십만 장에 다다르는 경우는 이번에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워로드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
하지만 왈츠가 거듭될수록 그 광경을 보던 눈썰미 좋은 자들의 표정은 변했다. 하회탈을 좋게 보지 않는 자들은 미소를 지었고, 하회탈을 좋게 보는 자들은 미소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하회탈이 밀린다.’
시르의 경우에는 무표정이었다. 두 가지 감정…… 자신의 러브콜에 응하지 않으면서 레드불스의 러브콜에는 연거푸 응하는 하회탈에 대한 증오, 반면 보면 볼수록 손에 쥐고 싶은 이 값진 보석에 대한 애정, 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표현할 능력이 시르에게는 없
었으니까.
어쨌거나 시르가 보기에 하회탈의 춤사위는 시작한 지 7분째에 접어들었을 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 2페이즈에 도달한 아가르도의 공세가 달라진 탓이었다. 단순히 공세가 빨라진 게 아니었다. 스피드가 아닌 스타일의 변화였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나름 절제된 공세를 퍼부었던 아가르도가 거칠어졌다.
왈츠를 추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탱고를 추는 격. 제대로 된 춤사위가 나올 리 만무.
결국 왈츠가 시작하고, 18분째에 접어들었을 때, 3페이즈에 돌입한 아가르도가 뿌리기 시작한 검기(劍氣
당장 잘려나간 팔을 붙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다면 목마저 잘려도 이상할 게 없는 위기였고, 위기를 맞이한 히르칸은 해골 전사를 대량으로 소환했다. 찰나의 시간, 숨을 돌리고 생각을 바꿀 시간을 벌기 위한 보루(
하지만 그 보루는 아가르도의 검 앞에서 채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레드불스는 나서지 않는 건가?’
위기일발.
반대로 여기서 레드불스가 나선다면, 위기는 충분히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다.
“해치.”
- 예.
“레드불스는?”
- 안 움직입니다. 모두 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드불스의 움직임은 없었다. 시르는 그게 레드불스의 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회탈의 의지다.
레드불스의 도움을 받아 카펫을 밟았지만, 무대에서만큼은 죽더라도 혼자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시르는 그런 하회탈의 의지가 멋졌다. 여전히 오롯하게 싸우는 그가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에 만족했다.
‘이대로는 위험해.’
때문에 시르는 하회탈의 위기를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체브 역시 말없이 지켜봤다.
“돕지 않습니까? 이대로 돕기만 하면 아가르도는…….”
부하의 말에 체브는 전장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입만 움직이며 대답했다.
“본인이 원치 않는데, 나서는 게 우스운 일이지. 그리고 이대로 하회탈이 당하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최고의 시나리오 아닌가?”
냉철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질문을 던진 부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가 아는 체브는 하회탈을 누구보다 높게 평가했으며 동시에 심장은 매우 뜨거운 사내였으니까. 분명 길드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지만, 이렇게 매몰차게 말을 내뱉는 이는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으신가?’
체브의 심정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의미.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하회탈이 있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질투가 샘솟는군.’
체브도 하회탈을 가지고 싶었다. 하회탈은 바위에 꽂힌 명검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를 뽑아 쥐는 자에게는 영광과 승리가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하회탈을 바라보는 체브의 심정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체브도 저렇게 싸우고 싶었다. 아니, 과거에는 저렇게 싸웠었다. 레드불스 길드가 지금처럼 거대하지 않았을 때, 체브의 어깨와 양손에 많은 이들의 이익이 들리지 않았을 때, 체브는 저런 싸움을 했었다. 무식함을 넘어 무모한 전투를 얼마든지 강행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질투심이 생기는 거다.
체브가 그 질투심을 곱씹는 사이, 시간은 거듭 흘러갔고, 전투 역시 종국에 다다랐다.
18.
‘산 넘어 산이군.’
3페이즈에 돌입한 아가르도의 공격에는 검기 기술이 섞이기 시작했다. 거리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졌다. 멀리서 휘두르는 검조차도 바로 피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동시에 3페이즈에 돌입하자마자 대폭 증가한 아가르도의 스탯은 더 이상 맞부딪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젠장.’
결국 하회탈은 아반의 검을 버린 채, 아가르도의 모든 공격을 피하는 데에 집중했다.
더 이상 히르칸의 움직임 어디에서도 왈츠는 볼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 있었다.
‘반응이 늦어.’
그런 와중에 히르칸을 괴롭히는 또 다른 요소는 다름 아닌 집중력의 감소였다.
극한의 집중력을 고수한 채 20분 넘게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이미 컨디션은 전투 시작 전에 비해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컨디션이 내려가면, 게임 플레이에도 영향을 준다. 히르칸은 스스로 체감할 정도로 몸이 둔해진 걸 느끼고 있었
다.
‘내가 너무 상황을 낙관했나?’
히르칸의 머릿속에 패배 그리고 죽음이란 글자들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히르칸의 머릿속에는 지금 이 주변 곳곳을 채우듯 자리 잡고 있는 레드불스의 존재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히르칸을 도와준다면, 모든 것은 행복하게 끝날 수 있다. 최소한 48시간 동안 초라한 원룸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빠득!
그 생각이 히르칸으로 하여금 이를 갈게 만들었다.
이 순간 히르칸은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냐.’
그 분노가 오히려 히르칸의 각오를 다지게 했다.
‘어차피 이 비루한 자존심 때문에 많이 죽어봤는데, 이제 와서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이 순간 히르칸이 최후의 보루를 꺼냈다.
골렘 소환!
찰흙놀이 없이 곧바로 그냥 순수한 골렘을 소환했다. 찰흙놀이를 쓸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동시에 히르칸은 골렘의 등 뒤로 숨었다. 아가르도는 그런 히르칸을 쫓지 않은 채 골렘과 대치했다. 아가르도가 검을 들었고, 히르칸은 스킬을 사용했다.
“단단해지기!”
골렘의 몸뚱이가 돌처럼 변했다.
그와 동시에 아가르도가 투구 속 하얀 눈동자를 번뜩이며 골렘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골렘 뒤에 히르칸은 꼿꼿이 서 있었다.
이 골렘이 문자 그대로 최후의 보루다. 이 골렘마저 무너지면, 더 이상 보루는 없다.
더 나아가 이제 히르칸에게는 아가르도와 싸울 여력 자체도 없다.
무엇이든 간에 아가르도가 죽지 않은 이상, 히르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방법을 선택하는 게 나을 터.
“와라!”
히르칸이 전력을 다해, 뱃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쩌렁쩌렁하게 토해냈다.
그 외침은 그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올라오는 글을 읽는 게 불가능해질 정도로 난잡하던 채팅창이 잠시 고요해질 정도였다.
동시에 외침은 아가르도를 움직이게 하는 총성이 되었다.
쉬익!
아가르도가 골렘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고, 검에서 뿜어진 거대한 검기는 단숨에 골렘을 사선으로 갈랐다.
콰콰콰!
그렇게 골렘을 가른 검기는 심지어 히르칸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히르칸이 서 있는 위치가 몇 발자국 더 옆이었다면, 히르칸의 몸뚱이도 골렘과 비슷한 꼴이 되었을 터.
그렇게 골렘이 몇 초를 벌었다.
쿠구궁!
여기에 골렘이 무너지며 만들어낸 굉음과 자욱한 연기가 다시 몇 초를 벌었다.
그뿐이었다.
최후의 보루는 최후의 보루답지 못했다. 하지만 히르칸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골렘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꼿꼿이 선 채, 이제 다시 보이기 시작한 아가르도를 바라봤다.
‘와라.’
그런 히르칸의 하나 남은 오른손은 뼈폭탄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구차하게 죽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가르도가 검기를 날린다면, 그것을 피하며 뼈폭탄을 던질 속셈이었다. 뼈폭탄이 데미지를 줄 수는 없다. 하지만 폭음과 함께 자
욱해진 안개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히르칸이 아가르도와 거리를 좁힌 후에, 아가르도의 몸뚱이를 발로 뻥! 찰 수 있는 시간을.
‘공격은 최고의 방어지.’
히르칸이 처음부터 세운 그 명제를 이제 와서 바꿀 이유는 없다. 정말 여기서 이기고 싶으면, 결국 더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가 따른다면, 그 순간이 히르칸의 사망시각이 될 것이다.
‘와라.’
히르칸이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며, 집중력을 극한까지 가다듬었다.
그 순간.
[타이틀 ‘아가르도를 무찌른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대격전의 영웅’을 획득하셨습니다.]
두 가지 타이틀 획득을 알리는 알림이 히르칸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 44화. 아가르도 레이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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