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28화 (128/192)

< 44화. 아가르도 레이드 (3). >

8.

- 후퇴!

최전선에서의 나온 후퇴 명령이 보이스톡을 통해 치로로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 치로로는 표정을 구기기에 앞서서 자신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옆에는 아폴로가 있었다.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부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먹던 그는 처음으로 먹던 행위

를 멈췄다. 심지어 그는 먹던 것을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지. 허접한 놈들 앞세워봤자, 결국 이 꼴이지, 흥!”

치로로는 그런 아폴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지 않았다. 그의 심정이 아폴로와 다를 바 없는 탓이었다. 더불어 치로로는 아폴로를 두고 다른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왜 싱글레 님이 아폴로 같은 놈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이미 치로로의 머릿속에 빅스마일 길드의 아가르도 레이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비단 치로로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마 워로드 팬들은 빅스마일의 패전을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할 만한 공간이 그들의 마음속, 머릿속에는 없었으니까.

9.

아가르도 등장 이후 흐반 성 주변에 모인 유저의 숫자는 보통 천 명에서 이천 명 사이를 유지했다. 이중 절반은 관람객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잘 보일 리 없었다. 라이브 티켓을 구매한 뒤 보는 라이브 영상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흐반 성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야구장을 찾아오는 이들이 때때로 야구경기가 보이지도 않는 외야관중석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그 장소에 있었다, 그 사실을 자신의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다.

물론 좀 더 툭 까놓고 이야기하면, 워로드에서도 라이브 방송을 볼 수 있다. 흐반 성 근처에 자리를 잡은 채 라이브를 보면 된다.

달리 말하면, 흐반 성 주변에 모이는 유저의 숫자들은 관심의 척도이자, 인기의 척도이며, 기대감에 대한 척도이며, 능력의 척도다.

그리고 지금 흐반 성 주변에 육천에 다다르는 오천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100레벨조차 되지 못한 유저들도 다수 있었다. 흐반 성으로 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들마저 이곳에 오게 만드는 힘.

“계획은 숙지했나?”

그게 바로 지금 황소뿔을 연상케 하는 뿔이 달린 붉은 투구를 뒤집어쓴 무리가 가진 힘이었다.

라이브 티켓 179만 장 판매.

레이드 참가 인원 712명.

레이드 참가자 평균 레벨 161레벨.

이 외에도 아가르도 레이드를 준비한 레드불스를 꾸밀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았다.

“숙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떠벌리지 않았다. 그들의 우두머리, 체브의 말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점검을 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는 소리 따윈 지껄이지 않았다.

완전무결에 대한 자신감.

그렇기에 그 한 명의 대답에 체브는 입에 초승달을 품었다.

“전투.”

새하얀 것이 알알이 달라붙은 그 초승달이 나지막이 말했다.

“개시!”

10.

다수 대 다수가 붙는 대규모 교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은 마법사다. 그렇기에 대규모 교전의 승패는 효율적인 마법 전력 운영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효율적인 마법 전력 운영이란 무슨 의미일까?

일단 적재적소에 마법을 써야 한다. 강력한 마법은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한다. 어마어마한 마력 소비와 긴 쿨타임은 폼이 아니다. 작은 것을 잡기 위해 큰 것을 쓰는 건 명백한 낭비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명중률이다. 마법에는 적아의 구분이 없다. 명중률 낮은 마법은 동료를 향한 가장 효과적인 배신이다.

당연히 마법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물론 모두가 우레사냥꾼 길드의 발리스타 해치처럼 실시간으로 움직이면서도 긴 사거리와 높은 명중률을 자랑할 수 있다면 시도 따윈 할 필요가 없겠지만, 대개는 그러지 못한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표적의 움

직임이 잦을수록, 마법사 본인의 움직임이 잦을수록 마법의 명중률은 내려간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표적지다.

“F11구역 몬스터 입장! 발사!”

“발사!”

전장에 될 무대 곳곳에 표적지를 그려놓는다. 마법사는 사전에 그 표적지에 마법을 던지는 연습을 한다. 몇 시간만 연습을 해도, 그 표적지에 한해서는 매우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다.

남은 건 탱커가 몬스터를 그 표적지로 유인해오는 것.

동시에 이 방법은 공격 마법의 속성을 충분히 제어함으로써, 탱커가 입는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F, Fire의 약자다. 이 무대로 몬스터를 유인을 하는 탱커의 경우 당연히 화속성 저항 세팅을 한다.

“F11 지역 몬스터 빈사 상태, 스트라이커!”

더 나아가 이 무대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스트라이커는 비효율적인 마법의 사용을 막는다.

속칭 딸피, 조금만 더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면 죽을 게 뻔한 놈을 죽이기 위해 재차 마법을 쓸 필요는 없다. 놈들은 스트라이커의 몫이었다. 보잘것없는 역할이 결코 아니다.

더욱이 레드불스의 스트라이커들은 누구보다 빠르고, 끝내준다. 빈사상태에 빠진 몬스터의 약점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적절한 스킬 조합을 통해 한 번에 끝냈다. 단번에 적의 숨통을 끊는 그들이야말로 레드불스의 상징, 황소의 뿔인 셈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정교한 움직임.

그런 정교함 속에서 나오는 레드불스의 거침없는 움직임은 그야말로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레드불스의 팬들이 넘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여다보면 이보다 더 정밀한 기계가 없는데, 그 정밀함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로 거칠고, 거침이 없다.

“성벽이 무너졌다!”

그렇게 전투 개시 18분째, 레드불스가 시멘트 지렁이들이 간신히 복구해놓은 성벽을 무너뜨렸다.

성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곧바로 최정예 전력이 등장했다.

레이드 1군 팀, 체브를 비롯해 레드불스의 최고 전력들이 무너진 성벽을 넘었다.

그 어느 세력보다 중요한 그들을 아가르도와의 전투 이전에 투입한다는 게 부담감이 없을 리 없지만, 막상 그 부담감을 느끼는 자들은 없었다. 부담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몸풀기다. 무리하지 말도록.”

“예!”

몸풀기였으니. 이 세상 그 누구도 몸풀기에 부담감을 느끼는 자는 없을 것이다.

11.

해치는 흐반 성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레드불스 길드의 패배는 곧 우레사냥꾼 길드의 등장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해치 정도 되는 간부급 인물이 근처에서 대기한 채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달리 보면 해치 정도 되는 고급 인력이 이런 잡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해치는 이번 일에 매우 만족했다. 혼자였으니까.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하희의 부재만 보장해준다면, 해치는 무엇이든 감사할 따름이었다.

‘쉴 새 없이 칭얼거리던 애가 없으니 좀 허전하긴 하네.’

알 수 없는 묘한 서운함이 없진 않았지만, 레드불스의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그런 서운함도 사라졌다. 해치는 자신의 정면에서 펼쳐지는 레드불스 길드의 전투가 만들어내는 소음, 그 소음을 배경음 삼은 채 홀로그램 모니터를 통해 라이브를 시청했다.

동시에 라이브 방송 아래 달린 채팅창에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반응들도 봤다.

- 역시 레드불스! 엄청 빨라!

‘이 정도도 못하면, 30대 길드 접어야지.’

- 빅스마일하고 비교가 안 되는 듯.

‘게네는 접어야 하는 길드고.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차라리 파이터즈 길드가 나은 것 같던데.’

- 그런데 벌써 레이드 1군팀이 나서도 돼? 피해 입으면?

‘피해 입는 걸 두려워해서 최정예 전력이 안 움직이면 최정예 전력이 있는 의미가 없지. 저번 타락 백작 때 히드라 길드가 소행크 아꼈다가 똥된 거 모르나?’

- 아가르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지금까지 여기까진 다른 길드도 어쨌거나 했잖아?

‘얘는 게임 볼 줄 아네. 아가르도, 까다롭지. 체격이 작은 게 제일 짜증난단 말이야. 한 번에 달라붙을 수 있는 숫자는 많아야 넷, 접전 중에는 넷은커녕 둘 정도가 달라붙겠지. 한 명이 달라붙고, 다른 한 명이 아머 브레이킹을 시도. 이게 베스트 포지션이고 마법 지

원은 어림도 없지.’

- 아머 브레이킹까지는 될 듯. 그런데 아머 브레이킹을 해도 공격이 통할까? 얘는 데미지를 하나도 안 입는다고. 어쩌면 녀석을 안 잡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게 공략법일 수도 있어.

‘그래, 무적 몬스터를 피해서 다른 무언가를 수행하는 건,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 얘도 게임 좀 아네.’

- 빅스마일 길드도 여기까진 했다. 솔직히 대단해 보이는 거 하나도 없네. 내가 보기엔 빅스마일하고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이 새낀 게임 알지도 못하는 놈이고.’

실시간 반응들에 열심히 마음속으로 대꾸를 해주던 해치는 금방 레이드를 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빅케이, 생각보다 괜찮네. 요주의 인물이야.’

어느 순간부터 해치는 간식도 곁들였다.

하지만 그런 해치의 표정은 본격적인 아가르도와의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달라졌다.

“헉!”

해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런 해치와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12.

1군 레이드 팀이 성에 진입한 후에 탱커들이 스스로 성벽이 되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공간으로 다음 팀들이 속속 들어왔다. 만약 흐반 성을 하늘 위에서 바라본다면, 시커먼 종이 위에 붉은 잉크가 번지는 듯한 광경이 보였을 것이다.

이윽고 레드불스의 전력이 타락한 군단의 전력을 압도하기 시작했을 때.

[아가르도가 등장합니다.]

백안의 기사가 등장했다.

움직이는 검은 얼룩을 품은 은빛의 갑옷과 쉴 새 없이 울음을 토해내는 크라잉 소드를 든 그의 등장은 강렬했다. 자그마한 몸뚱이가 뿜어대는 느낌이 거대한 드래곤이 내뿜는 기세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그 광경을 라이브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침을 삼키느라, 쉴 새 없이 올라오던 라이브 방송 채팅창의 글들이 잠시 동안 올라오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손을 멈췄다.

그 고요함 속에서 체브가 입을 열었다.

“라이브 방송을 봐주시는 시청자 여러분께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채팅창이 물음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레드불스 길드는 이번 아가르도 레이드에 편법을 썼습니다.”

물음표는 더 많아졌다.

“레드불스 길드는 아가르도와의 전투 기회를 무단으로 다른 한 명에게 줄 생각입니다.”

여기서 물음표의 숫자는 절정에 다다랐고, 절정에 다다른 물음표는 어느 순간 느낌표가 됐다.

“하회탈, 그가 아가르도와 1대1로 붙습니다.”

13.

싱글레를 보는 순간, 히르칸은 고민했다. 과연 싱글레의 방해 없이 아가르도와의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방법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하나였으니까. 싱글레의 입김이 닿기는커녕, 싱글레가 감히 방해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가진 길드, 동시에 아가르도 레이드에 길드의 사활을 걸 만한 이들과 손을 잡는 것.

때문에 방법은 하나였고,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심지어 이마저도 고민할 건 없었다.

히르칸은 체브를 찾아갔다. 은밀하게, 세상 아무도 몰래 만났다. 그리고 제안을 했다.

“이번 아가르도 레이드에 조건부로 참가하고 싶다.”

“대가는?”

“라이브 티켓 및 유료 영상 수입에 대해 일절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

아가르도와 싸우고 싶다.

보통 이들이 그런 제안을 했다면, 체브는 아마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제안을 하는 상대는 하회탈.

“그 조건부란 놈을 듣고 결정을 내리지.”

단번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가르도 레이드와 1대1 무대를 마련해줄 것.”

“타락한 군단은 우리보고 치워라?”

“대신에 필승법은 아니더라도 아가르도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심지어 그 방법에 꼭 필요한 도구도 빌려주지.”

히르칸의 제안은 나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체브는 히르칸의 제안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린 상황이었다.

‘이득을 더 보느냐, 덜 보느냐.’

체브 입장에서는 나름 행복한 고민이었다.

만약 히르칸이 아가르도 레이드에서 실패한다면, 그다음 차례는 레드불스다. 이 과정에서 히르칸이 아가르도를 빈사상태로 만든다면 그야말로 어부지리를 취하는 셈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히르칸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 가장 크게 이익을 보는 시나리오

다.

히르칸이 아가르도 레이드에 성공한다고 해도, 무조건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아가르도를 잡은 대가를 히르칸이 누리겠지만, 레이드 성공이란 타이틀은 레드불스도 같이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히르칸이 참가한 아가르도 레이드 영상 등에 대한 모든 순이익을 레

드불스가 독점한다는 건…… 어마어마하다.

무엇보다 레드불스 길드는 히르칸에게 진 빚이 있다. 사실 그를 매수하기 위해 우레사냥꾼 길드와 히드라 길드, 둘과 손잡고 꽤 큼지막한 선물을 준비했었는데, 그 선물을 줄 필요가 없게 됐었다.

만약 체브, 개인에 대한 제안이었다면 체브는 당연히 바로 이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은 레드불스에 대한 제안.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대.”

“그쪽 조건, 들어보지.”

“배덕의 왕자 레이드에서 하회탈, 네 라이브 방송 권리. 네가 전투하는 영상을 우리 라이브 채널을 통해 방송할 수 있는 권리를 줘. 그럼 1대1을 위한 최고의 무대를 마련해주지.”

히르칸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체브가 그 손을 잡았다.

< 44화. 아가르도 레이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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