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18화 (118/192)

< 41화. 대격전의 서막 (2). >

4.

탄내가 살살 올라오는 싸구려 커피. 안재현은 그 싸구려 커피에 포도당 사탕을 열심히 집어넣으며 세워둔 태블릿PC를 향해 말을 걸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 맙시다. 블랙 코볼트 왕의 검이 아무리 물량이 없다고 해도 그 금액은 어림도 없습니다.”

안재현의 목소리는 음성인식 앱을 통해 문자가 되어, 곧바로 채팅창에 한 줄로 변신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둔 뒤에 태블릿PC가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골드 거래는 시세가 높을 수밖에 없다.

“지랄하네.”

혼잣말과 함께 커피를 홀짝이려던 안재현은 아차 싶었다.

‘젠장!’

자신의 말을 곧바로 인식한 앱이 채팅창에 그 말을 그대로 문자로 올렸다. 음성 인식 채팅을 할 때 입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안재현이 잊고 있었다.

‘아, 됐어. 안 하고 말지.’

하지만 안재현은 사과 대신 그냥 이대로 거래를 마치기로 결심을 했다.

‘블코왕검을 20만 골드나 부르는 새끼랑 거래는 무슨 거래야.’

블랙 코볼트 왕의 검.

유니크 등급의 160레벨짜리 아이템이다. 아이템 옵션은 동급 아이템들 중에서 상위권이다. 특히 보스 몬스터 사냥에 유리한 옵션을 가지고 있는 탓에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됐다. 물량도 많이 없었다.

판매자는 그 아이템의 값으로 20만 골드를 요구했다. 장담컨대 20만 골드에 거래되는 아이템은 절대 아니었다.

최근 블랙 코볼트 왕의 검이 경매장을 통해 공개적으로 15만 골드에 거래가 되긴 했지만, 그건 이례적인 경우였다. 아니, 이례적이라기보다는 시세를 높이기 위한 수작이란 게 세간의 이야기였다.

종종 있다. 물량이 얼마 없는 고가의 아이템을 가지고 시세 장난을 쳐서 차익으로 돈을 버는 족속들이.

‘설마 이 새끼 나한테 정화의 서클렛이랑 바꾸자고 지껄인 새끼인가?’

또한 이렇게 수작을 부려 시세를 높인 아이템을 다른 아이템과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명 거품 세탁.

워로드의 아이템이 워낙 고가를 형성하는 바람에, 이런 경우는 생각 이상으로 잦았다. 사기꾼들 천지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화의 서클렛을 가지고 수작을 부리는 안재현이야말로 대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남이 하면 불륜이고 본인이 하면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러브 스토리인 법.

‘이 새끼, 내 눈앞에 걸리면 너도 와치맨이다.’

안재현이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할 무렵.

- 기분 나쁘군. 이번 거래는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결국 상대방이 거래를 파기했다. 안재현이 곧바로 경고를 내질렀다.

“아이템 시세로 장난치다 걸리면 피 본다! 작작해라.”

곧바로 채팅창에 문자가 떴지만, 상대는 이미 채팅방을 나가고 없었다. 안재현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커피에서 흘러나온 김이 안재현의 안경을 뿌옇게 만들었지만, 안재현은 그 뿌옇게 변한 시야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대로는 안 돼.’

160레벨이 된 안재현의 캐릭터에게는 이제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아반의 검을 쓰고자 하면 못 쓸 건 없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법이다. 아반의 검은 160레벨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에는 미치지 못한다.

‘방어구도 필요해.’

더불어 방어구 한 세트도 필요했다. 지금 착용 중인 방어구 세트가 나쁜 건 아니었다. 170레벨까지 써도 무방했다.

문제는 정화의 서클렛.

‘정화의 서클렛하고 콜라보를 할 만한 놈이.’

정화의 서클렛이 가진 옵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있었다.

일단 가장 큰 단점은 일반 투구와 같은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워로드에서 괜히 얼굴 전체를 가리는 무식한 투구를 쓰는 게 아니다. 머리를 드러내는 건, 그만큼 위험하다. 물론 일반 유저들의 이야기고, 안재현에게는 본 아머가 있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두 번째 단점은 일반적으로 세트 아이템을 착용할 때, 투구가 포함된다는 점이다. 즉, 정화의 서클렛을 착용하면 5개 파츠 착용 시 발동하는 세트 옵션이 사라진다. 사실 안재현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정화의 서클렛과 궁합을 맞춰줄 새로운 방어구 세트가 필요했다.

‘해골 판다 세트가 괜찮은데…….’

여기에 딱 맞는 아이템도 있었다.

해골 판다 세트.

공격력 옵션은 부족하지만, 방어력과 기동력 관련 옵션이 매우 준수한 아이템 세트로, 탱커들은 물론 스트라이커들이 주력 혹은 스위칭 세트로 애용한다. 물론 애용하는 자들이란 30대 길드 레이드 1군 정도 되는 자들을 말함이다. 일반 유저들은 스위칭은커녕, 그

냥 입고 싶어도 못 입는다.

더불어 시장에는 어느 정도 물량이 풀렸다. 해골 판다 세트는 레어 등급의 아이템이고, 해골 판다는 대형 몬스터로 분류됐기에, 해골 판다 한 마리 잡을 때 나오는 물량이 제법 됐다.

문제는…….

‘해골 판다 세트를 제작할 때 투구를 빼놓고 제작하는 정신 나간 놈은 없겠지.’

안재현이 원하는 건 시장에 없다는 점이다.

흉갑, 하갑, 장갑, 견갑, 부츠, 투구, 방패.

이렇게 7개 부위의 아이템이 워로드에서 방어구로 분류된다.

일단 방패는 아예 따로 취급된다. 방패는 가장 효용성이 높고 동시에 파손 위험도 높았으니까.

그럼 남은 6개 부위 중 5개 부위를 세트 아이템으로 제작하게 되는데, 이때 꼭 들어가는 게 투구와 상갑, 하갑이다. 그 외의 나머지 세 부위는 유저의 기호에 따라 누구는 부츠를 제외하고, 누구는 견갑을 제외한다.

당연히 시중에 나온 세트 아이템들은 투구가 기본이다. 정화의 서클렛과 함께 착용할 수 있는 투구가 없는 세트 아이템을 원하는 안재현의 입장에서는 결국 주문 제작을 하거나, 재료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미 시중에 나온 완제품보다, 재료를 구하는 게 훨씬 더 비싸다는 점이다.

‘일단 가격만 확인해볼까? 그래 가격만 확인해보자. 이건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경매장 검색을 통해 보다 자세한 가격을 확인한 안재현은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커피를 홀짝이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재현에게 수전증 같은 건 없다. 그런 그의 손이 떨린다는 건, 그 정도로 비싸다는 이야기.

“빌어먹을 미친 게임.”

안재현이 커피만큼이나 쓴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진짜 이 돈 주고 이걸 사야 하나? 완제품보다 재료값이 2만 골드나 더 비싸다니, 이게 말이 돼?’

열불을 토해내는 안재현.

그러나 그 분노가 사라지기도 전에 안재현은 태블릿PC의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지름신 앞에선 그 누구보다 약한 사내, 그게 바로 안재현이었다.

5.

“준비!”

체브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스트라이커 열 명이 입을 꽉 물었다. 꽉 다문 입안에서 각자의 혼잣말이 맴돌았다.

‘미치겠다.’

‘어휴, 예전 군대에 신병 훈련받을 때보다 더 빡세네.’

이윽고 가시 거북이 오른쪽 앞다리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쿵!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가시 거북의 온몸에 돋아난 길고, 뾰족한 가시가 화살처럼 발사됐다.

“땅!”

동시에 체브의 입에서 총소리가 터지자, 스트라이커 열 명이 그 가시 세례를 향해 돌진했다. 눈으로 보고 피하면 늦는다. 때문에 열 명은 사고가 아닌 본능으로 가시를 피했다.

쿵!

피하기 무섭게 가시 거북이 이번에는 왼발을 굴렀다. 다시금 가시가 발사됐고, 스트라이커 열 명은 다시 한 번 가시를 피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더군다나 가시 거북과의 거리가 좁혀진 만큼, 대처할 시간은 더더욱 줄어든 상황.

결국 두 번째 가시 세례에서 한 명이 질주를 포기하고, 수세로 전환했고, 세 번째 가시 세례에선 세 명이 포기를 했다. 네 번째 가시 세례에선 네 명. 모든 가시 세례를 뚫고 가시 거북에 닿은 이는 두 명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체브는 입을 꽉 다물었다.

‘한 달 가까이 연습을 했는데, 고작 두 명. 나를 포함하면 세 명이 전부인가? 최소 다섯 명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쉽군.’

훈련이었다.

조만간 시작될 배덕의 왕자와의 대격전을 염두에 둔 훈련.

당장 레벨업과 같은 가시적인 스펙업보다는 여러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했다.

어떤 식의 전투를 치르게 될지 몰랐으니까.

더욱이 레드불스를 비롯해 30대 길드의 실력자들은 전투 스타일이 레이드에 특화되어 있다. 대형 몬스터 사냥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지만, 소규모 교전, 수적 열세에서의 전투 능력은 레이드 전투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모든 30대 길드가 가지는 약점이기에, 반대로 이 차이가 앞으로 시작될 대전쟁에서 웃음과 울음, 그 사이를 가를 것이다.

“다섯 번만 더 한다. 몬스터 건드리지 말고, 탱커들이 가시 세례 쿨타임 동안 버텨라.”

물론 사냥이 아닌 훈련을 받는 길드원들 입장에서는 그저 죽을 맛일 뿐.

‘몬스터를 일부러 살려두고,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진짜 우리 길마도 독하다니까.’

그나마 레드불스 길드원들은 나았다. 우레사냥꾼 길드의 경우에는 상대하는 몬스터만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피해! 두 눈 똑바로 뜨고 피하라고! 해치! 너 빨리빨리 안 움직여?”

“움직입니다!”

“하희!”

“죄송합니다, 여왕님! 집중하겠습니다!”

“여긴 게임이다. 지쳤다는 소리를 하려면, 그냥 접어!”

“예.”

시르의 서슬 퍼런 외침에 우레사냥꾼 길드의 레이드 1군 멤버들이 난동을 부리는 몬스터 주변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법사는 마법을 던졌고, 탱커들은 그 마법사를 노리는 몬스터를 막아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으며, 탱커들이 몬스터를 막아내는 순

간 스트라이커들이 몸을 던졌다. 사제들인 이 난장판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죽어가는 유저를 살리고, 버프가 끝난 유저에게 새로이 버프를 걸어줬다.

“라스트 5분.”

그런 그들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담담하기 그지없는 시르의 시간 통보에 더 분주해졌다.

‘이번에도 시간 못 맞추면 우린 끝이야.’

‘몬스터보다 길마가 더 무섭다니까.’

‘계약기간만 끝나면 내가 이 길드를 나가고 만다. 계약기간만 끝나면…… 젠장.’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을 때의 시르가 훨씬 더 무섭다는 건 이미 몸으로 수도 없이 깨달았으니까.

시르의 경우에는 체브와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체브가 대처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시르는 반대로 몬스터를 보다 빨리 잡을 수 있는 사냥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많이 잡으려면, 빨리 잡아야지.’

그리고 그 시각, 두 길드와 같은 전쟁을 다른 방법으로 준비하는 곳이 있었다.

6.

“믿을 수 없소.”

근엄하기 그지없는 말투가 어울리지 않는 앳된 외모의 소유자, 테르베 성벽의 지킴이인 바이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앞에는 히드라 길드의 여덟 번째 머리, 나탈이 있었다. 나탈은 바이글에게 재차 말했다.

“믿으셔야 합니다.”

“딘 왕자님은 그 누구보다 몬스터와의 전쟁,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신 분이오.”

“하지만 이제껏 가져온 증거들이 딘 왕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제게 이 임무를 주신 건, 그 누구도 아닌 바이글 님 아니었습니까?”

바이글.

테르베 성벽의 관리인이자, 격전지의 관리인 그리고 딘 왕자의 심복 중 한 명인 그가 바로 히드라 길드가 잡은 루트였다.

비밀 결사대의 일원인 바이글, 그런 그에게 평생 모셔온 딘 왕자가 타락의 힘을 이용한 배후라는 사실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바이글은 당연히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나탈이 가져온 깃발은 타락한 군대의 배후에 딘 왕자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바이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탈은 그런 바이글의 모습을 예의주시했다.

히드라 길드의 퀘스트 진행 능력이 남들과 비교를 거부하는 건, 진지함 때문이다. 남들은 게임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건성건성 퀘스트 대화를 진행하지만, 히드라 길드는 아니다.

게임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게임에 몰입을 하는 것이다. 게임은 결국 모든 것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세계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는 단서가 된다. 히드라 길드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이제까지 그 믿음으로 놀라운 결과

를 만들어냈다.

그런 나탈의 심중을 알 리 없는 바이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딘 왕자님을 만나겠소.”

그 순간.

[‘바이글의 충심’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나탈의 귀에 퀘스트 알림이 들렸다. 나탈의 머릿속이 다시금 빠르게 계산을 했다.

‘플랜B구나. 그럼 남은 선택지는…….’

바이글, 그가 딘 왕자를 만나는 순간, 딘 왕자와의 만남에서 타락한 군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딘 왕자는 이제 가면을 벗을 것이다. 왕으로부터 대륙 북부의 수호자란 직위를 받은 그가, 이제는 타락한 군대를 앞세워 왕위 찬탈을 노리는 배덕의 왕자가 될 것이

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험합니다.”

“딘 왕자님이 정말로 모든 사건의 배후라면…… 내 목숨은 없을 터. 그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오.”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이미 증거는 명명백백합니다. 바이글 님을 이렇게 헛되이 잃을 순 없습니다.”

“나는 평생토록 딘 왕자님을 모셨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타락을 막지 못했다면, 그건 죽어 마땅한 죄나 다름없소.”

이 순간 나탈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등장했다.

바이글을 따라 딘 왕자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바이글만을 홀로 보내 그의 죽음을 지켜볼 것인가?

보통 유저들이라면 그냥 자기 깜냥대로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나탈도 다를 건 없다.

‘테르베 성벽 너머는 블럭 필드다. 그리고 이제까지 격전지 무대와 관련된 바이글의 퀘스트 대화를 보면, 테르베 성벽 너머, 북쪽 블럭 필드에는 무언가 꽤 굵직한 지역이 있을 가능성이 커. 최근에 발견된 저주받은 성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클 테고, 그 이벤트 에

어리어가 등장할 경우 바이글이 핵심 NPC가 될 가능성이 크니까…….’

단지 나탈 그리고 히드라 길드의 깜냥이 일반 유저와 비교를 거부할 뿐.

‘바이글은 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번에 바이글과 함께 행동하면 차후 메리트를 얻을지도 몰라.’

“같이 가겠습니다.”

나탈의 말에 바이글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까지 위험에 빠뜨릴 순 없소.”

“무엇이든 이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굳이 여기서 목숨을 아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바이글이 질끈 감은 두 눈을 떴다.

“고맙소. 나탈, 당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만약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내가 살아있다면, 내 남은 일생은 그대를 위해 봉사하겠소.”

봉사.

그 단어에 나탈이 미소를 지었다.

< 41화. 대격전의 서막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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