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14화 (114/192)

< 40화. 아낌없이 주는 원수 (1). >

1.

“테키이 부족에 함께 가겠나?”

열심히 블랙 트리의 나무껍질을 벗기고, 가지를 쳐내며, 재료 코인을 얻기 위해 블랙 트리를 해체 중인 히르칸에게 씽이 툭, 제안을 던졌다.

씽의 제안은 예상외의 제안이었다. 본인에게나, 히르칸에게나.

더불어 엘프 부족의 마을에 간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보통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 퀘스트를 습득하거나, 타이틀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의미에서 씽을 통해 테키이 부족을 방문한다는 건, 대단한 기회인 셈이었다.

“됐어.”

하지만 히르칸은 거절했다.

씽은 거절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제 헤어질 때군.”

“약속대로 우리 사이에 코인 정산은 필요 없으니, 먼저 볼 일이 있으면 내 신경은 쓰지 말고 그냥 가.”

“드라 부족장에게 정화의 서클렛을 받으면 보내주지.”

“기왕 보내는 거, 실수로 다른 아이템도 같이 보내도 괜찮아.”

담백하기 그지없는 대화의 끝을 그들은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그 둘이 다음을 기약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2.

‘와우.’

히르칸은 자신의 재료 코인용 가방을 터뜨릴 기세인 재료 코인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재료 보석용 가방 역시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뭐든 혼자 먹어야 해.’

그렇게 재료 코인을 정리한 히르칸은 곧바로 로그아웃을 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플레이 타임은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지만, 히르칸은 좀 더 일찍 로그아웃을 할 생각이었다.

‘일단 로그아웃을 하면…… 로매니 필름에 영상 원본하고 돈부터 보내야겠네.’

할 일이 많았으니까.

원래 거사를 치르고 나면, 뒷정리 해야 할 것도 많은 법이다.

당장 해야 하는 건 로매니 필름에 영상 제작을 맡기는 거다. 이번 레이드는 팔아먹을 수 있는 영상 제작을 위해 아주 제대로 작정을 했다. 로매니 필름에 영상 제작을 맡기는 당연했다.

정산도 해야 했다. 세밀한 정산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의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지, 그 정도는 가늠해야 한다.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히르칸이 세운 중장기 계획 및 일정의 수정이었다. 이번 블랙 트리 사냥으로 히르칸이 얻은 건 너무 많았다.

일단 정화의 서클렛 처리를 고민해야 한다.

‘정화의 서클렛을 팔까, 말까, 이거 진짜 고민되네.’

정화의 서클렛은 경매장에 나오는 순간, 개인이 아닌 30대 길드가 나서서 입찰을 시도할 만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이었다.

가격?

‘얼마를 받을…… 골드 거래는 힘들겠지.’

절대 골드로 거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골드로 거래를 하게 되면 너무 거액이 거래가 된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아이템으로 거래를 한다. 정화의 서클렛 정도라면 150레벨 유니크 세트 아이템 정도는 가뿐하게 받아낼 수 있다.

‘녹옥 이무기 한 번 노려봐?’

히르칸이 탐내던 녹옥 이무기 세트는 일도 아니다. 만약 히르칸이 비앤비 길드에 교환 요청을 하면, 비앤비 길드는 히르칸이 오히려 사기를 치는 줄 알고 거래 요청을 묵살할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어차피 언제 팔아도 되잖아?’

여차하면 히르칸 본인이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부정한 효과로부터 면역, 이건 히르칸이란 괴물을, 더더욱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일단 보스 몬스터와 싸울 때 이보다 좋은 아이템은 없다. 애초에 보스 몬스터가 상대하기 힘든 이유가 피어를 비롯해 유저들의 능력치를 감소시키는 여러 종류의 디버프 스킬 때문이니까.

유저와 싸울 때도 유용하다. 더욱이 히르칸, 본인은 강력한 저주 스킬을 쓸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저주를 비롯한 디버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히르칸을 상대하는 상대 입장에서는 욕이 절로 나올 것이다.

결정적으로 쓰다가 팔아도 된다. 정화의 서클렛은 언제 팔아도 충분히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가지고 다니다가 PK를 당해서 시계를 빼앗겼는데, 거기서 정화의 서클렛을 강탈당하면, 그때는 히르칸이 제정신을 잃고 미쳐버리겠지만.

블랙 트리 세트를 확보한 것도 중요한 일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현재 히르칸이 얻은 보석 재료로는 레어 아이템을 30개 파츠 정도 제작할 수 있다. 30개 파츠면 6개 세트다.

블랙 트리 세트 역시 써도 좋고, 팔아도 좋다. 혹은 쓰다가 팔아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물론 보통은 아이템 제작 직전, 재료 코인 및 보석 상태로 파는 게 좀 더 값을 받긴 한다. 디자인이란 게 호불호가 있으니까. 그래도 큰 차이는 아니다.

어쨌거나 히르칸의 전력이 급상승한 이상, 히르칸의 계획은 큰 수정이 불가피했다.

물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앞으로 히르칸과 싸워야 할 무리들에게는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것. 그들에게 오늘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재가 될 것이다.

3.

씽은 슬그머니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씽의 표정이 묘하기 그지없었다. 기분이 좋은 듯한데, 험악한 얼굴은 기분 좋은 표정마저도 괴팍하고, 섬뜩하게 만들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결코 표정으로 심중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얼굴…… 아주 다른 이유로 포커

페이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나쁘지 않군.’

씽의 얼굴에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건, 조금 전 마친 테키이 부족 관련 퀘스트였다.

블랙 트리의 저주로부터 부족의 구해준 씽에게 테이키 부족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사를 표현했다.

일단 굵직한 타이틀만 3개가 나왔다. 개중에는 퍼센티지로 능력치를 올려주는 타이틀까지 있었다.

여기에 테키이 부족의 보물, 두 개의 아이템을 얻었다. 150레벨짜리 유니크 등급의 칼 한 자루와 장갑을 얻었다. 옵션이 매우 좋았다. 150레벨짜리 유니크 아이템들 중에서는 상위권 수준. 귀속 아이템이라 거래가 불가능했지만 씽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씽을 기분 좋게 만든 건, 어린 엘프 소녀가 부족의 은인을 위해 자신이 직접 키운 나무의 꽃으로 만든 화관과 함께 씽의 이마에 해준 앙증맞은 입맞춤이었다.

‘나쁘지 않아.’

재차 그때를 기억하며, 아니 이제는 추억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던 씽의 발걸음은 푸레 빌리지에서 멈췄다.

푸레 빌리지에 방문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푸레 숲과 관련된 정보, 최근 동향을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다음 여행을 위해 필요한 소모 아이템 등도 구매해야 했다. 푸레 숲에서 거래되는 소모 아이템의 값은 시세보다 비쌌지만, 돈이 많은 씽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이제까지 씽은 푸레 빌리지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단 한 번도 특별한 소란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푸레 빌리지의 문을 건너는 순간부터, 그를 바라보는 빅스마일 길드원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달라진 표정으로 중얼중얼, 쉴 새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걸 보면 누군가와 긴급한 대화를 하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혼잣말을 그렇게 할 리는 없을 테니까.

‘뭔가 있군.’

씽 역시 분위기의 변화를 눈치챘다. 푸레 빌리지에서 특별한 소란이 일어나리란 걸 직감했다.

그런 씽의 직감에 화답하듯, 한 무리의 유저들이 등장했다.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라 씽의 주변을 포위하듯 전열을 갖춘 채 등장했다.

“핏불 씽.”

숫자는 열. 열 모두가 입고 있는 가지각색의 방어구에서 통일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스마일 엠블럼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통일감을 줬다.

빅스마일 길드, 그들이 씽을 포위했다.

씽은 자신을 포위한 무리들 면면을 살피지 않았다. 원래 투견은 주변을 돌보지 않는다.

오직 하나.

‘누구지?’

먹잇감을, 사냥감을, 그것 하나만을 노려볼 뿐이다.

씽, 그는 자신의 이름과 별명을 부른 자를 노려봤다. 씽과 다른 의미로 인상이 확실한 자였다.

착용한 갑옷이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씽이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자신이 봐도 자신보다 못생긴 외모의 소유자.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빅스마일이 내게 무슨 볼일이지?”

씽은 일단 대화를 받아줬다.

“볼일?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군. 파이터즈 길드의 일원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당당히 활동하는 거지? 그쪽이야말로 무슨 볼일로 이곳에 온 거지?”

그 말에 씽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동안 잘 다니던 곳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여기서 씽은 고민 대신 곧장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이름은?”

일반 길드원이긴 해도, 씽은 파이터즈 길드라는 대형 길드의 일원이다.

지금 씽에게 시비를 거는 자 역시 빅스마일 길드의 일원 혹은 간부일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이 둘이 붙으면, 그건 개인 사정이 아니라 길드 간의 사고가 된다. 괜한 사고가 터지기 전에 일단 통성명을 통해 서로의 직급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사고가 터지는 걸 지향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상대의 의중이 사고를 일으키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

라지겠지만.

“아폴로.”

상대도 그걸 알고 있는 듯, 이름을 밝혔다.

“빅스마일 길드의 간부다.”

직급까지 밝혔다.

이 대목에서 씽은 잠시 의구심을 품었다.

‘아폴로? 빅스마일 길드 간부들 중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

길드들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 씽이 30대 길드의 간부 전부를 외우고 다닐 리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빅스마일에 저 정도로 비대한 몸을 가진 간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더욱이 아폴로는 인상이 확실했다. 스쳐 지나가듯 봤다면, 분명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빅스마일 간부를 사칭을 할 리는 없으니, 사실이겠지.’

어쨌거나 분명한 건 빅스마일이 관리하는 푸레 빌리지에서 빅스마일 길드 엠블럼을 단 인간이, 빅스마일 간부를 사칭할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푸레 숲에서 활동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나? 파티도 아니고 개인 활동인데?”

“허락을 받으면 문제가 될 건 없지.”

“허락?”

“진심 어린 부탁. 고개와 허리를 적당히 숙이는 정도면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

상대가 지금 노골적인 시비를 건다는 것 역시 분명한 점이었다.

‘흥.’

여기서 씽은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이런 상황에서 머리를 쓰는 타입이 아니다.

“덤벼.”

츠릉!

씽이 곧바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4.

휴식을 마친 히르칸이 게임에 접속했다. 접속한 히르칸은 곧바로 재료 코인이 가득 찬 주머니를 들고 빠르게 이동했다. 달리는 히르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벌써 보내진 않았겠지?’

달리는 히르칸의 발걸음은 정화의 서클렛 생각을 하는 순간 더더욱 가벼워졌다.

‘아, 아이템 보관소에 갔는데 정화의 서클렛이 떡! 하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정화의 서클렛은 히르칸에게 헤이스트 스킬보다 효과가 좋은 듯했다.

그렇게 달리던 히르칸의 발걸음이 멈춘 건 적잖은 무리가 빠르게 달려오는 낌새를 먼저 눈치챈 후였다.

‘응?’

히르칸은 당연하다는 듯이 멈추고,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당연하다는 듯이 멈췄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유저들이 사냥터에서 유저를 만나면 인사를 하거나 혹은 무시를 한다. 정체를 감추는 건 뒤가 구린 자들뿐이다.

그러나 히르칸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가 겪은 말도 안 되는 고난과 역경, 워로드란 세계를 적으로 뒀던 그의 몸에는 일단 유저가 몰려오면 경계부터 하는 습관이 뱄다. 굉장히 슬프기 그지없는 습관이다.

그렇게 히르칸이 모습을 감춘 사이, 등장한 세 명의 유저들은 히르칸의 근처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그들은 히르칸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젠장, 그 새끼 대체 어디로 튄 거야?”

“못 잡는다니까. 이 넓은 곳에서 한 놈을 어떻게 잡아? 빌리지에서 놓치는 순간, 끝난 거야.”

그 짤막한 대화와 함께 곧장 그들은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모습을 감춘 채, 숨을 죽인 채, 두 눈을 감은 채 조금 전 상황을 되새김질했다.

‘빅스마일 길드 엠블럼을 박은 놈이 세 명…….’

조금 전 세 명은 빅스마일 길드 소속이었다.

‘달리기 속도나, 아이템 세팅을 보면 스트라이커 타입.’

더불어 세 명 모두 근력 스탯을 올린 검사 클래스의 유저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뭔가를 쫓고 있었다.

이것들이 의미하는바.

‘누굴 쫓기에 추격대마저 구성한 거지?’

일반적인 파티 사냥을 할 때 스트라이커 세 명이 움직이는 경우는, 도망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없다. 그마저도 보통 도망을 칠 때는 뿔뿔이 흩어지는 법.

결국 저 세 명은 빅스마일 길드가 누군가를 쫓기 위해 추격대의 일원들이다. 보통 사람을 쫓는데 추격대마저 구성한다는 건, 아주 작정을 하고 쫓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히르칸은 잠시 고민했다.

‘흠.’

빅스마일 길드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다. 그들이 무슨 꿍꿍이를 품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굳이 히르칸이 귀찮은 일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다. 지금도 빅스마일 길드와 괜한 소란이 생길 것을 피하기 위해, 푸레 빌리지를 방문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예정이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다. 빅스마일 길드가 누구를 쫓든, 히르칸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무시, 그게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게 히르칸이 현명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을 때.

“저쪽이야, 저쪽!”

히르칸을 지나쳤던 세 명이 다시금 히르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노리고?’

히르칸이 슬그머니 해골 조각이 있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들은 히르칸을 그냥 지나쳤다. 히르칸이 해골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그때 히르칸과 멀어지던 무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싸움개 사냥이군!”

히르칸,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가 생겼다.

< 40화. 아낌없이 주는 원수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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