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블랙 트리 (3). >
8.
게임에서 희귀, 유니크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유저는 단언컨대 없다. 유니크란 단어에 유저들은 열광한다. 희귀 보스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거나 혹은 비정규적인 낮은 확률로 등장하는 희귀 보스 몬스터는 만나기 힘든 만큼 많은 걸 준다.
좋은 옵션을 가진 아이템 재료를 주고, 매우 짭짤한 경험치도 주며, 얻기 힘든 타이틀도 준다.
그리고.
“이번에도 사냥 영상을 올릴 생각인가?”
레이드 영상이란 아주 값진 돈벌이 기회도 제공해준다.
“내 밥줄인데 당연하지.”
블랙 트리 레이드를 각오한 순간부터 히르칸의 머릿속에 더 이상 레이드 리스크 같은 건 없었다.
리턴!
사냥의 대가만이 히르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불어 이번 블랙 트리 레이드는 이제까지 히르칸이 진행한 적지 않은 보스 몬스터 레이드 중에서 가장 큰 이익이 걸려 있었다.
때문에 히르칸은 넌지시 질문했다.
“문제라도 있나? 영상에서 삭제해줄까? 모자이크 처리? 아니면 지분이라도 줄까?”
당연히 정말 주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을 해보기 위한 질문.
그런 히르칸의 질문에 씽이 고개를 저었다. 히르칸이 원하던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히르칸은 미소보다는 감탄사를 머금었다.
‘진짜 대단한 놈이야. 엘프 부족을 구하기 위해 이런 모든 걸 포기하다니…….’
본래는 씽이 가졌어야 하는 것들이다. 물론 능력이 안 되면 가질 수 없는 것들이지만, 만약 히르칸이 씽의 입장이었다면 자신이 못 가질 바에는 다른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씽의 행동을 게임 폐인의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르칸은 진심으로 씽의 행동에 감탄했다. 히르칸은 아마 다시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씽처럼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씽의 행동이 기어코 히르칸의 마음을 흔든 모양이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멜론 맥주라도 한잔하자고.”
히르칸의 입에서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그런 히르칸의 말에 씽이 대답했다.
“전투 영상을 보여주지.”
씽의 목소리와 인상에는 진지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특히 표정이 압권이었다. 투견 핏불을 닮은 외모를 가진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 순간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 괴상망측한 수준을 넘어 소름 끼치는 외형을 가진 몬스터들을 상대
할 때도 겁을 먹기는커녕, 놈들이 주는 아이템 생각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던 히르칸마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물론 히르칸 역시 곧바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꿨다. 시답잖은 소리는 뱃속 깊숙한 곳까지 삼켜버렸다.
“좋아.”
이제는 임전태세를 갖춰야 할 때다. 물론 히르칸은 영상을 보지 않아도 블랙 트리 공략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없는 노릇.
씽이 블랙 트리와의 전투 영상을 곧바로 보여줬다.
이번 블랙 트리는 꽤 큰 녀석이었다. 높이는 약 30미터, 두께는 성인 남자 열 명이 손을 잡아도 두르기 힘들 정도의 아름드리를 자랑했다. 특이점은 유난히 길고 두꺼운 십여 가닥의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라기보다는 채찍에 가까웠다.
그런 녀석의 공격 방법은 간단했다. 뿌리를 박은 채 오는 대상을 향해 채찍 닮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너무나도 단순했지만, 위력은 상당했다. 표적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나뭇가지는 내뿜는 소리만으로 목 뒤를 뻣뻣하게 만들 정도였다.
씽은 그런 블랙 트리를 상대로 두 번의 공격을 했다.
첫 번째 공격에서 씽은 난무하는 나뭇가지 사이를 아슬아슬 피하며 블랙 트리의 본체 가까이 접근했고, 원하는 거리가 마련되는 순간 돌진 스킬로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부스터 상위 스킬은 플래시 스킬을 통해 검의 위력과 속도를 증가시킨 뒤, 150레벨 파이터
레어 스킬인 삭삭(削削)을 이용해 검의 절삭력을 극대화한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세 가지 스킬 콤보를 머금은 씽의 공격은 블랙 트리의 나무껍질에 그저 손가락 한 마디 깊이만큼만 박혔다. 사람에게 그 정도 상처는 치명상이지만, 아름드리 나무에게 그 정도 상처는 생채기조차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공격에서 씽은 옹이구멍을 노렸다. 이번에도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피하며 블랙 트리와 거리를 좁힌 뒤 블랙 트리 곳곳에 있는 옹이구멍 중 하나를 향해 도약했다. 새처럼 날았고, 벌처럼 쐈다. 씽의 검이 옹이구멍에 푹! 박혔다. 이번에는 상처가 깊었지만,
그 깊은 상처에서 터져 나온 검은 수액이 삽시간에 씽을 덮였다.
동시에 블랙 트리는 제 몸에 달라붙은 씽을 벌레 털 듯 나뭇가지를 이용해 날려버렸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간 씽은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검은 수액이 자신의 HP를 갉아먹는 걸 보는 순간, 절대 자신이 잡을 수 없는 놈이란 걸 확신했다.
여기까지가 히르칸에게 연락을 취하기 세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특징은…….”
영상이 끝났고, 씽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시작하고자 했다.
“보면 알아.”
그러나 그런 그의 말을 히르칸이 제 말로 막았다.
“나무껍질의 방어력은 매우 높음. 대신 옹이구멍이 약점. 하지만 옹이구멍을 공격할 경우 나오는 검은 수액은 독이겠지. 아니, 단순한 독이라면 해독 아이템으로 커버를 했겠지만, 그런 대비를 네가 안 했을 리는 없고. 그럼 해독 아이템이나 스킬이 통하지 않는 특
수 공격이란 의미.”
그 설명에 씽은 감탄했다.
“대단하군. 고작 영상 한 번을 본 것만으로 거기까지 답을 내놓다니.”
“대단한 건 아니야.”
씽의 칭찬에 대해 히르칸은 애매한 반응을 보인 뒤 바로 공략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정화의 서클렛이 이 검은 수액의 상태 이상 효과를 막아줄 거야. 그러니까 드라 부족장이 이걸 준 거겠지.”
일단 가장 큰 난제인 검은 수액에 대한 해결법이 마련됐다.
“하지만 정화의 서클렛은 현재 너만 착용할 수 있으니까, 네가 아머 브레이킹을 해야 해.”
하지만 정화의 서클렛은 양도가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씽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면 액체 상태로 돌아갔다. 때문에 이번 아머 브레이킹, 옹이구멍 확장 공사는 씽의 담당이었다.
히르칸의 역할은 씽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블랙 트리가 휘두르는 수십 개의 나뭇가지를 잡아두는 것이었다.
“쉽지 않겠군. 특히 하회탈, 이번 일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나를 버리고 포기해도 좋다.”
사실 난이도로 보면 히르칸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어렵다. 정화의 서클렛이 있는 이상, 히르칸이 제 역할만 해주면 씽은 그냥 나무를 타고 옹이구멍만 공략하면 된다. 90도 각도를 넘어 150도 각도의 절벽도 거뜬히 오르는 신체 능력을 가진 씽에게 나무를 타는 건
일도 아니다. 더욱이 블랙 트리의 나무껍질은 굳이 무언가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칠었다.
반면 히르칸은 난무하는 수십 개의 나뭇가지를 상대해야 한다. 한 명이 그런 일을 해낸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씽이 여차하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라는 말까지 할까?
“응?”
그러나 그런 씽의 반응에 대한 히르칸의 반응은 씽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딱히 어려울 건 없는데…….”
“뭐?”
놀라는 씽. 그런 그에게 히르칸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고생은 너만 하면 돼. 어차피 내 역할은 마지막에 장식을 다는 것뿐이니까.”
그 말의 의미를 씽이 알게 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9.
블랙 트리를 찾는 과정은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다.
일단 테키이 부족으로부터 블랙 트리의 저주 퀘스트를 받는 게 첫 번째 조건이다.
하지만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숨어있는 블랙 트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나침반 가지’가 필요한데, 이 가지는 무아 부족과의 친밀도가 높아야 받을 수 있다. 동시에 블랙 트리를 깨우기 위해 필요한 ‘나무자명종’은 수르이 부족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물론 순서는 설명의 역순이다. 스르이 부족 관련 퀘스트를 진행해서 친밀도를 높이면, 무아 부족과 연결이 되고, 그다음에 테키이 부족의 부탁을 받는다.
어쨌거나 엘프 부족 관련 퀘스트만 미친 듯이 파고들어야 블랙 트리 사냥을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오로지 씽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씽은 그 어떤 것보다 히르칸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에 감사했고.
‘놀랍군.’
동시에 감탄했다.
블랙 트리의 몸뚱이에 올라타 옹이구멍 확장 공사 중인 씽이 곁눈질을 하자, 그의 눈에 블랙 트리의 나뭇가지를 열심히 피하는 열다섯 마리의 해골 전사들이 들어왔다.
후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요리조리 피해내는 열다섯 마리의 해골 전사들이 만들어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서커스였다. 전투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게 바로 히르칸이 표현한 자신감의 이유였다.
히르칸은 씽의 영상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블랙 트리의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크고 느리며, 자신에게 애정과 정성이 가득한 교육을 받은 해골들이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또한 히르칸에게는 해골 전사 말고도 블랙 트리를 잡기 위한 카드가 세 장 더 있었다.
- 마법 날아간다. 알아서 조심해.
어그로 관리를 확실하게 해줄 해골 마법사들이 첫 번째 카드였다.
두 번째 카드는 골렘이었다. 물론 그냥 골렘이 아니었다. 히르칸은 블랙 트리 레이드를 결심하는 순간, 경매장에서 140레벨의 보스 몬스터, 코끼리 거상의 재료 보석을 구매했다. 코끼리 거상은 코끼리의 머리에 사람의 몸 그리고 네 개의 팔을 가진 석상이었다.
히르칸이 이 녀석을 찰흙놀이 재료로 삼은 건, 녀석이 팔을 기가 막히게 이용할 줄 아는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히르칸의 예상대로 코끼리 거상 골렘은 때때로 블랙 트리의 나뭇가지를 잡고 줄다리기를 했다. 네 개의 손이 네 개의 나뭇가지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대활약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카드는 히르칸 본인이었다.
그런 히르칸이 카드로 활약한 건, 전투가 시작된 지 50분째에 접어들 무렵, 블랙 트리가 세 번째 페이즈에 돌입할 무렵이었다.
10.
‘역시 핏불,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히르칸은 씽의 아머 브레이킹 능력을 보며 감탄했다. 자신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씽의 능력을 폄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히르칸은 씽의 능력은 알고 있었지만, 레이드에서도 이 정도의 능력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히르칸에게 씽은 레이드보다는 PVP에 특화된 유저였으니까.
‘레벨과 아이템만 받쳐주면…… 아니, 지금 씽이라면 30대 길드 어느 곳에 들어가도 레이드 1군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씽의 능력은 레이드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30대 길드의 레이드 1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워로드에서 최상위 수준이란 의미다.
그런 그가 이제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가 됐다는 게 히르칸에게 묘한 감상을 줬다. 동시에 히르칸은 생각했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하회탈 길드가 아니라, 씽 같은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만약 히르칸이 씽처럼, 게임을 수단과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과연 히르칸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 모습을 히르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안재현 지랄하지 말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히르칸은 상상을 시도하는 자신에게 비아냥거림을 뱉었다.
히르칸에게 어울리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슬슬 타이밍이 오는군.’
히르칸에게 어울리는 건 잔잔한 판타지가 아니라, 강렬하기 그지없는 화려함이다.
그 화려함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최고가 될 수 있다.
히르칸에게 게임은 그런 거다. 그 어디에도 로망이나 낭만 같은 건 없다.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 두 가지뿐.
오늘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레이드를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아먹을 수 있는 레이드 영상을 위해 준비해온 게 있다.
“씽, 내려와. 이제 내가 마무리를 지을 테니까.”
이제는 그걸 풀어놓을 때다.
11.
콰앙!
첫 번째 폭발을 시작으로.
콰앙, 쾅!
온몸에서 검은 수액을 쉴 새 없이 흘려내는 블랙 트리의 곳곳에서 폭발 소리가 터지고, 불꽃이 터졌다. 그렇게 터진 불꽃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블랙 트리를 장식했다.
그렇게 수놓기 시작한 폭발들은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느 시골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 터지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히르칸은 마음으로는 감탄을 내뱉었고, 얼굴 위로는 울상을 지었다.
뼈폭탄.
지금 폭발의 주인공이었다. 히르칸은 블랙 트리의 마무리를 위해 수백 개가 넘는 뼈폭탄을 준비해왔다.
값은 가늠할 수 없었다. 히르칸은 뼈폭탄의 재료가 되는 뼈 재료 코인이 싸게 나올 때마다 구매해둔 후에 뼈폭탄으로 만들어 아이템 보관소에 쟁여두고는 했다. 그렇게 쟁여둔 뼈폭탄 대부분을 이번에 가지고 나왔다. 값을 가늠하기 위해 정산을 하려면 할 순 있
었지만, 그러다가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아서 일부러 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수천 골드가 지금 이 순간 터진다는 점이다.
‘그림은 나오겠어.’
굳이 이러지 않아도 블랙 트리를 잡을 순 있었다. 때문에 이 뼈폭탄의 앙상블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낭비에 불과했다. 히르칸이 속물적인 이유로 게임을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씽의 표정이 조금 무거워진 걸 보면, 씽 역시 눈앞의 광경이 가지는 의미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절박하군.’
집안에 돈이 많아서 마음 내키는 대로 게임을 하는 자신과 다르게 어떻게든 팔리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게임을 하는 히르칸이 안쓰러웠다.
물론 씽은 히르칸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를 동정할 만한 이유도, 자격도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고맙다.”
그저 감사를 표했다.
밥상은 씽이 전부 차렸지만, 히르칸이 아니었다면 밥 한 숟가락 퍼먹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그쪽 부탁이라면 한 번은 무조건 들어주지.”
히르칸 역시 감사를 표했다. 동시에 히르칸은 굳이 빚을 만들어두었다. 손해 보는 짓을 했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서까지 씽과의 접점을 남겨두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 둘에게.
[타이틀 ‘블랙 트리 벌목꾼’을 획득하셨습니다.]
사냥의 끝을 알리는 알림이 들렸다.
< 39화. 블랙 트리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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