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블랙 트리 (2). >
5.
씽.
그의 이야기는 히르칸과 헤어진 이후부터 시작됐다.
- 그때 말했던 대로 바헤임 부족의 마을에 남아서, 닥치는 대로 퀘스트를 수행했지.
씽은 바헤임 부족에 있는 적지 않은 숫자의 엘프 NPC들이 주는 퀘스트를 열심히 수행했다.
처음에는 씽의 레벨에 비해 훨씬 낮은 레벨의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레벨업은 물론 돈벌이도 시원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레벨업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괜찮은 퀘스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동시에 타이틀도 다수 획득했다. 한 우물을 깊이 판 대가를 아주 알뜰하게 받았다.
- 어떻게 하다 보니, ‘바헤임 부족의 나무’ 타이틀도 얻게 됐고, 이 타이틀을 얻으니까 다른 엘프 부족이 도움을 요청하더군.
종국에는 모든 능력치를 3퍼센트 올려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그리고 바헤임 부족의 나무 타이틀을 획득하는 순간, 씽은 엘프 사회에서 엘프 부족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실력 좋은 해결사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다른 엘프 부족이 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씽이 그토록 바라던 판타지와 모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잘 나가는 모든 것은 벽을 만나는 법.
- 그러다가 테키이 부족의 부탁을 받게 됐지. 그게 지금 얻은 블랙 트리의 저주 퀘스트다.
현재 씽은 테이키 부족을 찾아온 블랙 트리의 저주를 해결하는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퀘스트 자체가 퍼즐을 풀듯이 어려운 것도, 밑도 끝도 없는 노가다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 블랙 트리의 저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블랙 트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했어. 녀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반대로 퀘스트는 마지막 마침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 문제는 나 혼자 힘으로 블랙 트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더군.
그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것도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할 수 있는 자의 도움이.
- 그런데 지금 테키이 부족이 위치한 곳이 푸레 숲이다.
여기까지가 이야기를 듣는 순간, 히르칸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확실하게 그릴 수 있었다.
“푸레 숲이면 빅스마일의 영역. 그래서 나한테 연락을 했군.”
푸레 숲, 130레벨대의 사냥터인 이곳은 빅스마일 길드가 가장 먼저 발견했고, 더 나아가 빅스마일 길드는 푸레 숲 초입에 빌리지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푸레 숲은 빅스마일 길드의 영역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빅스마일 영역이라고 해서, 빅스마일이 독재자처럼 굴면서 행패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굳이 그런 짓을 할 만큼 푸레 숲이 가치가 넘치는 장소가 아니었다. 당연히 씽이 그동안 개인으로 푸레 숲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빅스마일은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
았다.
문제는 개인이 아닌 단체가 움직일 경우.
더군다나 씽이 당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만한 곳은 파이터즈 길드밖에 없다. 하지만 언더풋 길드로 빅스마일 길드의 자리를 내심 노린다는 소문마저 퍼져 있는 파이터즈 길드가 빅스마일 영역에 들어오는데, 빅스마일이 그들을 환대할 리는 만무하다.
아니, 반대로 파이터즈 길드가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씽은 표면상으로는 일반 길드원이고, 최근 그의 명성이 줄어든 만큼 파이터즈 길드가 씽에게 보이는 애정과 관심 역시 줄어들었으니까.
- 내가 인맥이 그다지 넓지 못한 탓에 결국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
씽이 히르칸에게 연락을 취한 이유였다.
‘쉽지 않아.’
모든 이야기를 들은 히르칸은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히르칸의 심기를 건드리는 요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빅스마일 길드였다.
‘그 새끼들 꿍꿍이를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빅스마일하고는 분명 해결해야 하는 뭔가가 있다. 그런 그들의 영역에 대뜸 홀몸으로 들어간다는 게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블랙 트리도 잡기 쉬운 건 아니고.’
두 번째 요소는 블랙 트리의 사냥 난이도였다. 블랙 트리는 정말 가치가 큰 몬스터다. 그만큼 잡기도 쉽지 않다.
‘검은 수액은 너무 까다로워.’
블랙 트리의 외형은 그냥 평범한 나무다. 시커먼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트리란 이름이 붙은 건, 상처를 입을 경우 내뿜는 검은 수액의 존재 때문이었다.
검은 수액은 닿는 대상의 HP를 갉아먹는다. 그러나 이 검은 수액은 독이나, 마법이 아니다. 차라리 독이라면 해독 마법을 쓰거나 혹은 독에 대한 저항능력을 높인 아이템 세팅으로 쉽사리 해결할 수 있겠지만, 검은 수액은 대상의 물리 및 마법 방어력도 무시한 채
데미지를 준다.
데미지가 약한 것도 아니다. 탱커 정도의 체력을 가진 유저가 아니라면, 검은 수액에 노출되는 순간 자신의 HP가 큰마음 먹고 구매한 주식 가격처럼 뚝뚝,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더욱이 블랙 트리의 나무껍질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물리 및 마법 방어력을 자랑한다. 공략법은 옹이구멍을 노리는 것. 옹이구멍은 방어력이 굉장히 낮아서, 그 옹이구멍을 중심으로 껍질을 벗겨낸 후에 공격을 퍼붓는 방법을 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옹이구멍을 찌르는 순간 검은 수액이 나온다. 그런 와중에 옹이구멍을 넓히는 작업은 굉장히 곤란하다. 탱커가 나서서 익숙하지도 않은 아머 브레이킹을 하거나, 스트라이커가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 아머 브레이킹을 시도하거나, 설명만으로도 귀
찮은 작업이다.
물론 워로드는 게임이고, 게임인 만큼 공략법이 있다.
‘정화의 서클렛만 있으면 잡는 건 일도 아니지만.’
정화의 서클렛!
그 아이템이 블랙 트리 공략의 마스터키다. 정화의 서클렛의 옵션 중 하나인 ‘모든 부정한 효과로부터의 면역’은 검은 수액 역시 부정한 효과로 인식한다.
하지만 정화의 서클렛이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일 리 만무하다.
‘젠장, 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 수고를 했으면 그냥 주는 게 예의 아니야?’
더불어 히르칸은 타락한 엘프 퀘스트를 마친 후에 정화의 서클렛을 반납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바헤임 부족의 족장은 히르칸에게 정화의 서클렛은커녕 쓸 만한 스킬북 하나 주지 않았다.
참고로 블랙 트리를 잡아 얻는 재료 코인 및 보석으로 제작 가능한 레어 등급의 아이템, 블랙 트리 세트는 5개 파츠 착용 시 ‘검은 수액’ 옵션이 활성화된다. 방어구가 손상을 입는 순간, 검은 수액이 나와 접촉한 대상의 HP를 갉아먹는 것이다. 녹옥 이무기 세트만
큼은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아이템 옵션이다.
더불어 블랙 트리는 대형 몬스터로, 잡을 경우 나오는 재료 코인의 숫자가 매우 많으며, 재료 보석이 나올 확률도 굉장히 높다. 한 마리를 잡으면 블랙 트리 풀세트를 3,4개 정도 제작할 수 있다. 대박이 터지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하나만 묻지.”
- 얼마든지.
“만약 블랙 트리란 놈을 잡을 경우, 내 몫은 어느 정도지?”
- 잡을 수만 있다면, 전부 가져도 좋아. 어차피 하회탈, 네 도움이 없으면 잡을 수도 없으니까.
‘이 말 들으니까 고민되네.’
리스크는 크지만, 리턴도 크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히르칸의 심중을 읽기라고 한 것일까?
- 필요하다면 이번 퀘스트 보상도 네게 주겠다.
흔들리는 히르칸의 마음에 씽이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렸다. 히르칸이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무슨 보상인데?”
- 주머니를 주겠다.
“주머니? 무슨 주머니?”
- 정체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 부족장이 말하기를, 블랙 트리의 저주를 푸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만약 블랙 트리의 저주를 푼다면 이 주머니를 내가 가져도 좋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히르칸의 두뇌가 유례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라? 바헤임 부족의 부족장?”
- 맞다.
“혹시 주머니가 어떻게 생겼어?”
- 그냥 평범한 주머니다. 딱히 무언가 특징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주머니.
“안에 뭐가 들었지?”
- 정체를 모를 은빛 액체가 들어있다. 사용법을 몰라서 그냥 가지고 있는 중이다.
빠르게 회전하던 히르칸의 두뇌가 답도 빠르게 내놓았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당장 골렘을 타고 가서 블랙 트리 머리통을 날려버릴 테니까!”
6.
푸레 숲 초입에 마련된 빌리지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목책 안에는 건물조차 없었고, 유저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빌리지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초라한 장소였다.
그 초라한 무리 사이에 빅스마일 길드의 길드원들도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 혹은 소란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된 일종의 경비인자, 감시인들이었다.
사실 경비인, 감시인이란 게 있어 보이지만, 당사자들은 게임에 접속해서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간은 곧 경험치이고, 경험치는 곧 레벨인 워로드에서 그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도 없다.
“이번에 그 영상 봤어? 레드불스 레이드 영상.”
“봤지. 끝내주더라.”
“그에 비해서 우리 길드는 이게 뭐야? 빅스마일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레드불스를 들어갔었어야 했어.”
그런 감시인들 입에서 불만이 나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 입 조심해.”
“뭐 어때? 어차피 여기에서 이런 소리 한다고 누가 고자질할 것도 아닌데 말이야.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래도 조심해야지.”
“별걱정을 다하네. 그보다 하회탈이 레드불스의 숨겨둔 히든카드라는데 그게 사실일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임금 호박씨도 까는 법이지만, 동료의 충고에 불만을 터뜨렸던 유저가 슬그머니 화두를 바꾸었다. 동료 역시 그 화두를 곧장 받았다.
“사실이면 대박이겠지. 지금 레드불스 1군 레이드 팀에 하회탈이 추가되면, 솔직히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몬스터들 중에서 못 잡을 몬스터는 없을 거야.”
“하회탈은 진짜 끝내주는 것 같아. 혼자서 다 해먹잖아? 길드 가입할 필요도 없겠어.”
“돈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겠지. 소문에는 집안이 어마어마한 부자라고 하던데. 얼굴 가리는 것도 얼굴을 드러내면 모두가 알만한 대부호 자식이라서 그렇다는데?”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내가 재벌집 아들이었으면, 빅스마일에 돈 좀 찔러서, 간부 자리 하나 얻고 마음 내키는 대로 게임했을 텐데.”
“부럽긴 부럽지. 하회탈은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게임을 할 테니까.”
그 무렵이었다.
“저기.”
유저 한 명이 제 목소리로 존재감을 알리며 그 둘에게 접근했다. 대화를 나누던 둘이 평소보다 좀 더 긴장한 모습으로 등장한 유저를 경계했다. 남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 없는 대화를 나눴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계심은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곧바로 누그러졌다.
‘뭐야? 이 호구같이 생긴 놈은?’
‘진짜 만만하게 보이는 얼굴이다.’
등장한 이는 경계심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고, 만만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무슨 일이지?”
빅스마일 길드원이 곧바로 긴장을 풀고, 아랫사람 다루듯 말을 뱉었다. 경계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레 숲에서 사냥할 생각인데, 혹시 무언가 순번을 대기하거나,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까?”
나온 질문은 이상할 것 없는 질문이었다. 드넓은 사냥터에도 명당이 있고, 명당은 인기가 있으니까.
“일부 사냥 지역은 사냥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순서를 기다릴 정도는 아니지.”
곧장 대답이 나왔다.
“혹시 빅스마일 길드에서 대규모 사냥을 준비하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까?”
하지만 이번 질문은 조금 민감한 질문이었다.
“그건 알아서 뭐할 생각이지?”
사실 빅스마일 길드가 푸레 숲에 터를 잡은 건, 이곳이 돈이 되는 곳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빅스마일 소속 길드원들이 보다 원활한 사냥, 레벨업을 위해서였다.
“그야 당연히 제가 괜히 빅스마일 길드의 행사를 방해하는 일은 피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는 빅스마일 길드와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본인들 동선을 짜야 한다.
하지만 자기 집 행사를 남에게 바로 대답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빅스마일 길드원들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대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3시간 후에 우리 길드가 단체 사냥을 하니까, 알아서 피하도록.”
상대가 경계심을 절로 풀게 만드는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대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3시간 후……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유저가 물러났고, 곧바로 둘이 멈췄던 대화를 진행했다.
“왜 그렇게 일일이 다 말해주는 거야?”
“어차피 상관없잖아? 딱 봐도 괜히 우리 길드 건드렸다가 봉변당할 게 겁나서 질문한 것 같은데, 불쌍한 사람은 도와줘야지.”
“하긴, 생긴 것만 봐도 호구 느낌이 물씬 풍기긴 했지. 저런 놈이 파티원이면 진짜 짜증날 것 같아.”
“그건 짐덩이지, 짐덩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던 그들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 유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
“오랜만이군.”
핏불 씽은 하회탈을 쓰고 등장한 히르칸에게 인사부터 했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 인사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긴말 하지 말고 바로 움직이자고. 3시간 후에 빅스마일 애들이 대규모 사냥을 할 테니까.”
속전속결.
히르칸의 말에 씽이 놀라며 반문했다.
“3시간?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빌리지에 상주하는 빅스마일 길드원 애들이 질문하니까, 곧잘 말해주던데?”
“신기하군. 내가 저번에 질문했을 때는 인사만 해도 날 경계하고, 당장 싸울 기세였는데.”
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히르칸은 그런 씽의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빅스마일 길드 애들이 자기 길드 행사 정보를 히르칸에게 알려준 이유를 히르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히르칸은 그냥 이 부분을 묻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 됐고, 3시간이면 긴 시간은 아니야. 블랙 트리가 있는 장소가 여기서 멀어?”
“우리 둘의 이동속도라면 1시간 좀 더 걸릴 거다.”
되도록 3시간 이내에 모든 사냥을 처리하고, 푸레 숲을 떠나는 게 좋다. 빅스마일 길드와 만나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아슬아슬하네.”
히르칸의 그 혼잣말 비슷한 대답에 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빅스마일 길드와 안 좋은 일이 있나?”
“응?”
히르칸이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없는데?”
그리고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부정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씽은 히르칸의 반문에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었다.
“아니면 됐다. 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군. 그보다 이 주머니에 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씽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드라 부족장으로부터 받았던 주머니를 꺼냈고, 씽의 의도대로 그 주머니가 등장하는 순간 히르칸의 표정이 달라졌다. 씽으로부터 주머니를 건네받는 순간 히르칸의 표정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럽게 변했다. 하회탈 덕분에 그 표
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탐욕스러운 표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난 바헤임 부족이 아니라, 대륙 평화를 위해 그 개고생을 했는데도 제대로 된 보상도 안 주면서, 자기 부족 위해서 퀘스트 좀 했다는 양반한테는 퀘스트 보상으로 정화의 서클렛을 줘? 바헤임 부족, 아주 빌어먹을 부족이네.’
생각해보니 참으로 배가 아팠다. 고생하긴 매한가지였는데, 누구는 보상으로 황금을 받고, 누구는 더 일감만 더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때문에 히르칸은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았다.
“블랙 트리 사냥에서 얻는 모든 코인 및 퀘스트 보상까지, 전부 내게 준다는 말,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씽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그 모습에 히르칸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질문을 던졌다.
“내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진짜 그래도 되겠어?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
남을 걱정한다? 히르칸의 입에서 가장 듣기 힘든 말이 나왔다.
그러나 씽은 그런 히르칸의 말에 정말 담담하게 대답했다.
“블랙 트리의 저주 퀘스트는 시간제한이 있는 퀘스트다. 시간 내에 블랙 트리를 잡지 못하면, 테키이 부족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보상 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 말에 히르칸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쓴웃음도, 어색한 웃음도, 눈살이나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억지로 표정을 억눌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자신이 너무 구차하게 느껴질 것 같았으니까.
< 39화. 블랙 트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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