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10화 (110/192)

< 38화. 얼마면 돼? (2). >

4.

워로드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워로드의 성공비결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워로드를 구성하는 인공지능의 우수함이었다.

때문에 워로드에 존재하는 NPC들은 다른 게임의 NPC들보다 많은 관심을 받는다. 우스갯소리나 다름없지만, 팬클럽을 가진 NPC들도 있다. 물론 모두가 인기가 많은 건 아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끝내주는 미남, 미녀이거나 혹은 짭짤한 걸 주거나.

그런 관점에서 아힘브리는 굉장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는 짭짤한 수준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걸 주는 NPC였으니까.

더욱이 아힘브리의 제자 타이틀을 획득한 코코모란 유저가 돈이 궁했는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아힘브리 관련 정보를 유료로 판매하면서 아힘브리의 인기는 상한가를 쳤다.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아힘브리의 제자가 되기 위해 도전을 했다.

여기서 칭송받는 워로드 인공지능 시스템이 아주 현명한 짓을 했다. 아힘브리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유저들이 몰려서 문제가 생기자, 아힘브리의 거주지를 옮겨버린 것이다.

덕분에 히르칸은 별다른 방해 없이 아힘브리를 만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기왕 옮길 거면 북부로 옮길 것이지, 왜 하필 서부로 이동을 한 거야?’

물론 그동안 워로드의 북부와 동부에서 활동했던 히르칸이 서부로 이동한 아힘브리를 만나러 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해야 했다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점이 있었을 뿐.

그렇게 히르칸이 만난 아힘브리는 평소 지내던 자신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른 사무실에서 히르칸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방이 매우 깨끗하군요.”

너부러진 책…… 그 비싼 스킬북이 도처에 깔려 있던 아힘브리의 예전 사무실과 달리 이번 사무실은 매우 깨끗했다. 책 비슷하게 생긴 것은 물론, 종이 냄새나는 것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보통은 깨끗한 방을 보고 불안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터.

하지만 히르칸은 달랐다.

‘느낌이 이상하게 싸하네.’

맛있는 과자를 받을 줄 알고 왔는데, 과자는커녕 그냥 시간만 낭비할 것 같은 불안함.

‘에이, 그래도 스킬 하나는 주겠지. 스킬북이 꼭 너부러져 있어야 스킬북인가?’

애써 불안감을 억누른 히르칸이 아힘브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보다 스승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부모님께도 써본 적 없을 법한 단어를 쓰면서 인사를 하는 히르칸의 모습은 이보다 더 정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인사에 아힘브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그시 히르칸을 바라만 봤다. 그 모습은 매뉴얼에 결단코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바람에 잠시 시스템이 정지된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정말 그래서 대답을 곧장 하지 못한 거라면, 히르칸의 행동이 뛰어난

인공지능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 정도로 어이가 없다는 의미.

아힘브리가 입을 연 건 좀 더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나는 잘 있었네. 그러는 자네는 어떠한가?”

“여러 일을 하느라 바쁘게 보냈습니다.”

“바빴겠지. 혹여 중요한 소식을 얻었는가?”

그 질문에 히르칸은 살짝 고민했다.

‘이거 낚시야 아니면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게 아니면 간을 보는 건가?’

아힘브리는 히르칸이 비밀 결사대의 멤버로 활동하는 걸 알고 있다. 그런 그의 질문의 의미는 당연히 비밀 결사대와 관련된 것일 터. 더불어 최근 히르칸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삼사, 딘 왕자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얻었다.

어쩌면 여기서 삼사에 대해 말해주는 게 아힘브리와의 대화를 진행하고, 숨겨진 퀘스트를 열어주는 열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마웅의 경고도 머릿속에 남았다. 마웅은 그 누구에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의외로 심각한 고민 끝에 히르칸이 내놓은 답은 침묵이었다.

“조사 중입니다. 단지 제 능력이 부족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네의 활약은 바이글로부터 들었네.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자네 같은 이가 백 명만 있어도, 테르베 성벽 너머를 깔끔하게 청소한 후에 그 너머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당장 자네를 딘 왕자님께 소개라도 해줄 기세였네.”

바이글.

테르베 성벽의 관리인인 그는 히르칸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는 딘 왕자에게 히르칸을 소개해주겠다는 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감일 테니까.

물론 딘 왕자의 정체를 아는 히르칸 입장에서는 그저 어색한 미소한 흘릴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히르칸이 담담한 그 말 한마디로 의미 없는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아힘브리 역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히르칸은 숨기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지금 제 능력으로는 결사대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저번처럼, 제게 다시 한 번 기회와 무대를 마련해주십시오.”

그 말에 아힘브리는 히르칸을 지그시 바라봤다. NPC임에도 그 눈빛은 정말 묘했다. 정말 대단한 현자가 히르칸이란 인간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NPC라는 게 믿기지 않을뿐더러, NPC라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체면치레, 염치불고…… 그런 단어는 지금 히르칸의 사전에 없다.

아힘브리가 그런 히르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미 충분히 강하네. 더 이상 내가 자네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을 정도로. 무엇보다 자네 스스로가 강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결국 저번 격전지 무대처럼 자기 권력을 이용해 꿀을 빨 수 있는 곳에 꽂아줄 수 없다는 소리다.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히르칸이 곧장 돌직구를 던졌다. 격전지 무대는 꽂아줘도 갈 생각이 없었다.

“마법이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쉬운 길을 택하고자 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게 고난과 역경을 주십시오!”

히르칸이 정말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쉬운 거. 정말 쉬운 거. 제발.’

워로드의 난이도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런 워로드에서, 아힘브리 정도 되는 NPC가 주는 어려운 난이도의 퀘스트는 그냥 하지 말라는 퀘스트나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내가 아닌 마법사의 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아힘브리는 그런 히르칸에게 다시 한 번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와서 스킬을 달라고 해서 공짜로 준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일 테니까.

‘그래, 이게 정답이지.’

히르칸은 결국 인정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날로 게임을 먹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었네. 내가 아주 바보짓을 했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건 너무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힘브리를 찾아온 히르칸에게 있었다.

그 순간 아힘브리가 말을 이어갔다.

“만약 마법사의 탑에 큰 기여를 한다면, 마법사의 탑은 그에 준하는 보답을 해줄 걸세.”

‘응?’

히르칸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왠지 이와 비슷한 내용을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히르칸이 기억을 더듬기도 전에 아힘브리가 확실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마법사의 탑은 언제나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네. 실험 재료를 비롯해 다양한 것을 필요로 하지.”

‘이것 봐라?’

히르칸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힘브리, 본인이 직접 줄 수는 없지만, 마법사의 탑을 통해서 스킬북을 줄 모양이다. 히르칸 입장에서는 뭐가 되든 좋았다.

“물론 가장 급한 건 운영자금이지만.”

“예?”

그 순간 히르칸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자금? 무슨 자금? 서, 설마?’

“기부금. 이보다 확실한 건 없지.”

“헉.”

히르칸이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런 히르칸의 모습에 아힘브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략 10만 골드 정도라면, 지금 자네의 수준에 맞는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씹? 씹? 씹이라고?”

이번에도 반사적인 대답. 아힘브리가 이번 말에는 반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씹이라는 말이 욕으로 들린 모양. 실제로도 욕이 맞다.

히르칸이 급하게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씹…… 그러니까 십만 골드면 된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 정도면 기부금이라면 충분히 자네가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을 걸세.”

그 순간.

[퀘스트 ‘의미있는 기부’가 시작됩니다.]

결정타가 히르칸의 고막을 두드렸다.

5.

안재현은 맹물 한 컵을 앞에 두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안재현의 손에는 이제는 바꿀 때가 된 구식 태블릿PC가 들려 있었고, 액정에는 누군가의 SNS 페이지가 떠 있었다. 구독자 숫자를 비롯해 정말 인기가 많은 듯한 SNS 페이지의 주인은 굉장히 잘생긴 금

발에 벽안 눈을 가진 백인 남성이었다.

‘꼭 이럴 때는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생긴단 말이야.’

기부 퀘스트.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이 퀘스트를 앞에 두고 안재현은 처음에는 고민하지 않았다.

솔직히 고민이고 자시고, 10만 골드를 기부해서 140레벨짜리 스킬북을 구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현재 시장에 풀린 160레벨, 170레벨 유니크 스킬북, 그것도 인기가 아주 좋은 스킬북 정도만이 그 정도 가격에 거래가 될 뿐인데, 인기도 없는 흑마법사 신체 강

화 스킬트리의 스킬 하나에 10만 골드를 쓴다?

그래도 혹하는 마음에 조사를 해봤다. 혹시 자신 말고 이 퀘스트를 해본 인간이 있는지, 일단 찾아봤다. 솔직히 찾아보면서도 그 어떤 미친놈도 이런 퀘스트를 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확실히 비싼 돈을 내고 게임을 하는 놈이 수백만 명이 되는 게임이라서 그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돈을 지른 미친놈이 있었다.

‘차라리 찾아보지를 말걸.’

우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인 닐 휘태커의 워로드 이름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 있는 연예인 중 워로드의 굉장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레벨은 워로드 서비스 시작 때부터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육성한 것치고는 낮은 레벨, 141레벨에 불과하지만 워로드

에 쓴 돈으로 랭킹을 정한다면, 50위 안에는 가뿐하게 들 정도니, 그의 워로드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결코 작지는 않을 터.

동시에 일그러진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돈이 많다 못해, 사치를 부리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부자들이 타지도 않는 스포츠카를 자랑하듯, 자신의 SNS에 워로드에서 거침없이 돈을 쓰는 걸 자랑하는 인간이었다.

그 인간이 10만 골드짜리 기부 퀘스트를 했다. 그리고 보상으로 140레벨의 유니크 스킬 하나를 임의로 골랐다.

여기까지라면 안재현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10만 골드에 스킬북 하나를 살 바에는 그냥 호텔 뷔페에 가서 샐러드만 먹고 나오는 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소비일 테니까.

문제는 이 기부 퀘스트의 보상이 그냥 스킬을 얻는 게 아니라, 고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원하는 스킬 트리를 결정하면, 1레벨부터 190레벨까지 존재하는 스킬 트리를 보고, 개중에 본인 레벨 이하의 스킬 중 임의로 하나를 고를 수 있다. 퀘스트 자체가 140레벨 퀘스트이니, 결국 받을 수 있는 최고 레벨 스킬은 140레벨짜리 스킬뿐이다.

‘그래도 10만 골드 기부를 하면, 정보가 거의 없는 신체 강화 스킬 트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데…….’

핵심은 선택지 전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냥 스킬을 아는 것도 아니고, 스킬 트리를 파악한다는 건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다.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하면서 모은 단편적인 정보들로 퍼즐 조각을 하듯 모아도 완성되기 힘든 스킬 트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면, 10만 골드는 결코 아깝지 않았다.

‘젠장.’

안재현이 고민을 하게 된 이유였다.

물론 안재현이 바라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다른 누군가가 신체 강화 스킬 트리를 확보한 후에 공개해주는 거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애초에 워로드의 마법사들 중 흑마법사와 백마법사의 비율은 백마법사가 압도적으로 높고, 그나마 최근 하회탈의 활약으로 흑마법사 비율이 조금 올랐을 정도다.

그나마 저주 스킬 트리는 저주 법사가 인기를 끄는 만큼 어느 정도 스킬 트리가 확보되어 있지만, 소환 스킬 트리와 신체 강화 스킬 트리는 결코 아니다.

소환 스킬 트리의 경우에는 워로드에서 꾸준히 네크로맨서를 키운 유저들조차 히르칸이 쓰는 스킬들을 보고 ‘우리 직업에 저런 스킬도 있었나?’ ‘하회탈 님, 해골에 뿔나게 하는 게 뭐에요?’ 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고, 신체 강화 스킬 트리는 100레벨 이상 스킬의

경우에는 정보 자체가 없을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 흑마법사를 선택한 뒤 신체 강화 스킬 트리를 파고드는, 마검사 스타일의 캐릭터를 육성한다? 물론 있을 수 있다. 뭔지도 모른 퀘스트 진행을 위해 10만 골드도 쓰는 인간이 있는데, 그런 인간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10만 골드를 투척해서 얻은 신체 강화 스킬 트리를 공개할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다.

‘이 새끼가 약을 팔고 있을 가능성도 분명 없진 않아. 애초에 관심병 걸린 놈이잖아? 그런데 만약 내가 여기서 이 퀘스트를 깨면…….’

심지어 우디 역시 자신이 확보한 스킬 트리를 전부 공개하지 않았다. 자신의 SNS의 구독자 숫자가 늘 때마다 추가로 공개하겠다는 글을 올렸고, 현재까지는 어쨌거나 유저들이 습득했을 법한 수준의 스킬만 공개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우디가 관심을 끌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때문에 우디가 거짓말을 할 경우, 10만 골드를 썼는데 그냥 스킬 하나 얻고 끝날 수도 있다.

“후우.”

이윽고 안재현이 자신 앞에 놓인 맹물 한 컵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우디, 만약 네놈이 따봉 숫자를 받으려고 수작을 부린 거라면, 넌 내 손에 10만 번 죽는다.’

찬물을 마셨으나, 부글부글 끓는 속은 쉽게 식지 못했다.

< 38화. 얼마면 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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