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카타콤 (1). >
1.
저주받은 영지.
강력하기 그지없는 몬스터인 부두 키메라가 득실거리는 곳이다.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 유저들에게도 쉽지 않은 무대였고, 간간이 등장하는 이블 아이는 퀘스트를 통해 이블 아이의 저주를 막아주는 ‘사라보의 액막이’를 가지지 못한 유저들을, 심지어 140레벨을
훌쩍 넘기는 유저들조차도 가차 없이 현실로 보내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좋은 아이템이 나오는 장소도 아니었고, 부두 키메라가 사냥 난이도에 비해 경험치가 괜찮은 것도 아니었으며, 부두 키메라 공략법은 여전히 연구 중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효율을 추구하는 고레벨 유저들에게 저주받은 영지는 말 그대로 저주받은 곳, 발을 들여놓을 이유는 물론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저주받은 영지에는 의외로 적지 않은 고레벨 유저들, 14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머물고 있었다.
“퀘스트 상황은 어때?”
“확실히 다른 곳과는 다른 종류의 퀘스트가 많이 나오네. 단순한 사냥 퀘스트보다는 탐색 퀘스트나, 의뢰 퀘스트가 많아.”
누피 패밀리가 저주받은 성에 다다른 이후, 저주받은 성에 토벌협회 지부가 들어섰다.
동시에 저주받은 성에는 흐반 성이라는 번듯한 이름이 붙었고, 토벌협회 관련 NPC를 비롯해 이제까지 유저들에게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새로운 NPC들이 흐반 성의 이곳저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게 이유였다.
새로운 NPC의 등장은 곧 새로운 퀘스트의 등장을 의미했고, 새로운 퀘스트는 곧 기회를 의미했다.
저주받은 영지는 이제 기회의 땅이 됐다.
그런 저주받은 성, 흐반 성에 히르칸이 등장했다.
“저기 누구지?”
“누구?”
“저기 검사 클래스.”
“저기 녹철 세트 입은 검사? 알게 뭐야. 녹철 세트는 90레벨짜리 방어구 세트잖아? 그냥 구경하러 왔나 보지. 신경 쓸 거 없어.”
몰래.
어느 고마우신 분이 만들어준 붉은 해골 세트 대신, 해골이 입고 있던 방어구를 입은 채, 정체를 감춘 채 등장했다.
정체를 감춘 이유는 간단했다.
‘지도에 따르면 저기쯤에 비밀 입구가 있겠군.’
던전.
그게 이유였다.
마웅은 히르칸에게 저주받은 성의 지하에 위치한 비밀 구역이 표시된 지도를 건네줬다.
말이 비밀 구역이지, 던전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던전으로 가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켜서 좋을 건 없다.
더군다나 이곳, 저주받은 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저들은 워로드란 게임에서 나름 도를 깨우친 귀신같은 작자들이다. 심지어 그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혹시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하회탈이 정체를 드러낸 채 활동하면 마치 어미 오리를 쫓는 오리
새끼들처럼 아주 긴 꼬리가 붙을 게 뻔했다.
어쨌거나 히르칸의 노력은 나름 통했다. 저주받은 성에 있는 유저들 중에 히르칸을 신경 쓰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덕분에 히르칸은 빠르게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어?’
그런 히르칸의 이목을 갑작스럽게 끄는 게 있었다.
동상이었다.
네 명의 유저들이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상, 이블 아이를 가장 먼저 해치우고, 저주받은 성에 가장 먼저 다다른 네 영웅, 누피 패밀리를 기리며 토벌협회가 만들어준 동상이었다.
‘젠장.’
물론 히르칸에게 누피 패밀리는 자신의 것이었을 사라보의 칼을 훔쳐간 자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옵션 끝내줬지.’
곧바로 온라인에 공개된 사라보의 칼 옵션을 떠올린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140레벨의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인 사라보의 칼은 정말 괜찮은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거래가 가능한 물건이었고, 결정적으로 희소성이 매우 높은 아이템이기도 했다.
좀 비싸게 팔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아이템.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만약 싱글레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필시 히르칸의 것이 되었을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 상황을 떠올린 히르칸은 게임 속임에도 불구하고 속이 쓰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히르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좀 더 강해지면, 그땐 진짜 게임 접을 때까지 내가 쫓아가서 죽여 버리겠어.’
고개를 흔들며 각오를 다짐했다.
그와 동시에.
‘제발 이번 던전에서 좋은 거 하나만 먹자.’
애절하게 기도했다.
여러모로 분주한 히르칸이었다.
2.
쿵!
어둠이 꽉 차 있는 통로 천장이 무너지며, 천장을 이루고 있던 벽돌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거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친 울음을 달래듯, 그 위로 사람 하나가 털썩!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떨어진 사람은 곧바로 손목에 찬 시계를 조작하며.
“슬롯 온.”
짧게 외쳤다.
곧바로 붉은 뼈로 만든 갑옷이 등장했다.
붉은 해골 세트의 주인 히르칸, 아이템 스위칭을 마친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숨을 죽인 채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근처에 아무것도 없고.’
다행히도 특별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 후에 히르칸이 한 건 불평을 내뱉는 것이었다.
‘그보다 왜 아무런 알림도 안 뜨지? 던전 입장이면 관련 알림이나, 타이틀 획득 알림이 들려야 할 텐데?’
히르칸이 손목시계에 설치된 라이트앱을 켜서, 주변을 밝히는 건 그 불평불만을 두어 번 더 곱씹은 다음이었다.
팟!
등장한 작지만, 강한 빛이 사방을 비추며 통로의 크기를 가늠케 해주었다.
통로는 꽤 컸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는 3미터 남짓했고, 폭은 5미터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 어지간한 자가용 자동차라면 무엇이든 지나갈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분명 잘 찾아온 것 같긴 한데…….’
그 크기에 히르칸은 안심했다. 적어도 이 정도 크기의 통로를 도주를 목적으로 성 지하에 만들어두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통로라는 의미다.
히르칸이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해골 조각 하나를 꺼냈다. 소환한 건 해골 기사였고, 소환하자마자 히르칸은 해골 기사의 머리 위에 라이트앱의 빛을 올려놓았다.
해골 기사가 걸어 다니는 전구가 되었다. 성큼성큼 걷던 해골 기사에게 히르칸은 상으로 이것저것을 해줬다. 매드니스 헬름을 발동시켰고, 본 아머도 소환해줬으며, 해골 기사가 들고 있는 검에 자신이 걸어줄 수 있는 저주도 듬뿍 걸어줬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오케이.’
히르칸이 밟고 있던 통로의 재질이 달라졌다. 갑작스레 반듯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는 상황.
[던전 ‘카타콤’에 입장하셨습니다.]
[타이틀 ‘카타콤의 방문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잠을 깨운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그 순간 들린 알림이 직감을 확신으로 바꾸어줬다. 히르칸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래, 이거지.’
그와 동시에 고요했던 공간에 잡음이 끼어들었다. 떨그럭떨그럭, 히르칸에게는 퍽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히르칸 입가에 그어졌던 미소가 묘하게 바뀌었다.
‘어쭈?’
해골 기사의 앞에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니라 백골이 된 부두 키메라, 키메라 스켈레톤이었다. 히르칸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이것 봐라?’
녹이 슬긴 했지만, 완전 무장을 마친 키메라 스켈레톤의 기세는 결코 가소롭지 않았다.
더불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두 마리의 키메라 스켈레톤이 자리를 잡자, 통로가 꽉 찬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고, 압박감 역시 더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유저라면 긴장을 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히르칸에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해골 따위가!’
히르칸은 추가로 해골 전사나 마법사를 소환하지 않은 채, 골렘도 소환하지 않은 채, 그저 해골 기사의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저런 놈들에게 당해서 내가 너를 재소환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오늘부터 일주일 내내 내 주먹을 피하는 연습만 할 줄 알아라.”
그 말을 마치 이해라도 한 듯, 해골 기사가 평소보다 입을 더 크게 벌리며 등장한 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3.
히르칸의 해골 기사 스킬 랭크는 C랭크다. 레벨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랭크가 오른 케이스다. 해골 기사가 전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활약을 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히르칸이 소환하는 모든 해골들은 A랭크 등급인 해골학의 영향을 받아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증가한다.
또한 매드니스 헬름의 스킬은 해골 기사에게도 적용된다. A랭크의 매드니스 헬름의 효과는 모든 능력치 30퍼센트 증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해골 기사에게 줄 수 있는 건 더 있다.
A랭크의 본 아머는 해골 전사의 전신을 다시 한 번 강인한 뼈갑옷으로 보호해준다.
물론 본 아머의 방어력은 레어 등급의 방어구보다는 떨어진다.
하지만 A랭크의 무장 스킬을 통해 히르칸이 착용했던 투명 거미줄 세트와 가고일 기사의 검을 들고 있는 해골 기사에게 본 아머는 강철 위에 방탄 코팅을 하는 것과 같다.
화룡점정 매일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이루어지는 히르칸의 교육이다. 해골 전사들은 검사 클래스보다 더 높은 근력 수치를 자랑하는 히르칸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을 익힌다.
이런 요소들로 무장한 해골 기사가 비슷한 모습의 해골에게 밀린다는 건, 히르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다.
“그래, 그렇지! 뚫어버려!”
해골 기사는 히르칸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듯, 통로를 막아선 두 마리의 키메라 스켈레톤을 몰아붙였다.
휘익!
좁은 공간에서 키메라 스켈레톤이 휘두른 핼버드를 가뿐하게 피해낸 해골 기사는 곧바로 자신의 돌덩이로 된 검으로 키메라 스켈레톤의 갑옷 위를 두드렸다.
콰직!
거듭된 일방적 공방 그리고 강력한 해골 기사의 검격 앞에서 키메라 스켈레톤의 갑옷은 기어코 고물이 됐다. 이제 남은 건 녀석들의 몸뚱이가 고물이 되는 일뿐.
뒤에서 뼈폭탄과 해골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며 바라보던 히르칸은 눈앞의 광경에 만족했다.
‘내가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키운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하는 모습을 보는 듯한 심정이었다. 진심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동시에 확신을 가졌다.
‘리치리치보다 내가 더 낫다.’
이제는 자신할 수 있다. 히르칸은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리치리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제 히르칸에게 부족한 건 오직 하나, 자금력이다. 자금력만 뒷받침된다면 리치리치가 보여줬던 모든 것을 히르칸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돈만 있으면 돼.’
물론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애초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지만.’
히르칸이 대학에 등록한 자식을 보며, 곧바로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는 심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히르칸은 굉장하게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후발주자들은 이제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 정도다. 몇몇 유저들이 히르칸의 해골 전사들이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전투 능력의 비결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하회탈식 네크로맨서 육성을 시도 중이지만, 히르칸에게는 조
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 중에 누군가가 트럭에 치여,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이제부터 히르칸은 정말 워로드란 게임에 인생을 건 재능 넘치는 자들과 그 재능과 노력으로 많은 걸 이룩한 자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아이템 시세부터 달라진다. 히르칸이 자신의 레벨에 맞는 최고 수준의 아이템은 이제 히르칸이 가진 자금력으로는 절대 맞출 수 없다. 자금력이 있어도 히르칸이 구매자라는 사실에 거래를 중지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히르칸의 얼굴 표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해골 기사의 활약으로 달아오른 가슴 역시 식어버렸다.
식어버린 마음이 히르칸의 손을 움직이게 했다. 히르칸이 해골 조각들을 다수 꺼냈고, 그 해골 조각들을 키메라 스켈레톤 너머로 던졌다. 키메라 스켈레톤의 뒤에서 모습을 갖춘 해골 전사들이 입을 크게 벌리며 주인의 명령을 재촉했다.
히르칸이 그들을 위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해골 전사들이 주인의 심정을 위로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 37화. 카타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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