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05화 (105/192)

< 36화. 공짜 점심은 없다 (2). >

5.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 알림과 동시에 블랙 라미아의 거대한 몸뚱이가 대지 위로 고꾸라졌다.

뱀의 하체와 근육질 거한의 상체 그리고 뱀의 머리를 가진, 몸길이 10미터의 거대한 몬스터의 몸뚱이가 바닥에 고꾸라지는 광경은 강렬했다.

쿠웅!

떨어지는 소리 역시 굉장했다.

블랙 라미아의 등에 달라붙어 있던 히르칸은 블랙 라미아가 고꾸라지는 순간,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붕, 떴다. 히르칸은 그 상황에서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착지를 위해 자세를 잡지도 않았고, 충격을 줄이기 위한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늘어진 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시체처럼 잠잠했다.

떨그럭 떨그럭!

그런 히르칸의 주변으로 살아남은 해골 부하들이 모여들었다. 두르고 있던 본 아머가 전부 깨져버린 해골 기사 한 마리와 사지 멀쩡한 놈이 하나 없는 해골 전사 네 마리가 히르칸을 포위하듯 둥글게 자리를 잡은 채 히르칸을 지그시 바라봤다.

묘한 광경이었다.

더욱이 시시각각 히르칸의 마력을 이용해 제 몸을 복구하는 해골 전사들의 모습은 히르칸의 부하가 아니라, 히르칸을 잡아먹으려는 몬스터처럼 보였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몬스터가 히르칸을 공격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을 정도.

이 순간 히르칸은 생각했다.

‘아, 진짜 힘들다.’

힘들다.

사실 지금 히르칸의 시간은 끝이었다. 본래 그의 일정대로라면 그는 이미 40분 전에 로그아웃을 하고, 지금은 꿈나라에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어야 한다.

더불어 히르칸에게 시간은 중요했다. 워로드에서 고수 소리 듣는 유저들, 워로드에 인생을 바친 유저들에게 가장 큰 난관은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아니라 자기 몸 건강이었으니까.

블랙 라미아 그리고 130레벨이라는 달콤한 과실이 아니었다면, 히르칸이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못 잡을 뻔했어.’

물론 블랙 라미아는 시간을 투자해서 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 몬스터였다.

우르갈 대산맥, 여전히 유저들에게는 기피 장소로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의 초입과 중턱, 그 애매한 경계선에서 굉장히 낮은 확률로 발견되는 블랙 라미아는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유저가 훨씬 많을 정도였다. 그런 녀석을 사냥하는 영상과 녀석을 잡고 나오는 재

료 코인을 이용해 만든 아이템의 가치는 매우 높았다. 심지어 블랙 라미아를 재료 삼아 만든 방어구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뱀 가죽 질감을 가지기에, 여성 유저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잡은 것에는 후회가 없었다.

단지 히르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요즘 컨디션이 말이 아니네.’

컨디션 난조.

물론 사람이란 게 언제나 컨디션이 좋을 순 없다.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 히르칸의 컨디션은 쉽사리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못한 채 거듭 히르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블랙 라미아를 더 빨리, 더 멋지게 잡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를, 히르칸을 노리는 작자들을 만났을 경우다.

‘지금 만나면 진짜 위험하겠네.’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확률보다는 와치맨 스타일이 다시 한 번 먹힐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참자.’

히르칸이 인내심을 발휘했다. 하지만 히르칸의 인내심만으로는 뒤틀린 심기가 진정되지 않았다.

그 순간 히르칸은 떠올렸다.

‘붉은 해골 세트를 떠올려서라도 참자. 그래, 이제 입을 수 있잖아?’

붉은 해골 세트.

그 아이템 세트를 떠올리는 히르칸의 입가에 간신히 미소가 걸렸다.

6.

‘어?’

처음 봤을 때 히르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지?’

레드불스를 두고 비앤비 길드와 거래를 했다. 녹옥 이무기 투구를 비앤비 길드에 넘겨주는 대가로, 비앤비 길드는 130레벨짜리 유니크 등급의 무기 아이템 ‘가고일 나이트 소드’를 준다고 했다.

솔직히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래는 아니었다. 히르칸에게는 130레벨의 무기보다는 방어구가 더 필요했으니까. 히르칸이 현재 가진 크로니클 등급의 아이템, 아반의 검은 140레벨 유니크 등급의 무기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옵션과 공격력이 좋았다. 그런

히르칸에게 130레벨의 유니크 무기는 쓸 일 없는 값비싼 계륵인 셈.

물론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계륵은 계륵이지만, 팔면 아주 비싸게 팔 수 있는 계륵이고, 여차하면 해골 기사든 해골 전사든, 해골에게 쥐여주면 얼마든지 뽕을 뽑을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그런 걸 받는 상황에서 무기 말로 방어구를 달라고 하면, 거래 자체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는 게 마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붉은 해골 세트가 들어와 있지?’

레드불스 길드가 준 아이템 목록에는 비앤비 길드가 준 무기와 함께 방어구 세트 아이템이 있었다.

그것도 보통 아이템이 아니라, 붉은 해골 풀세트였다.

‘이거 꽤 비싼 건데?’

붉은 해골 세트.

130레벨 보스 몬스터, 레드 스켈레톤 나이트를 잡아 나오는 재료 및 보석으로 제작 가능한 레어 등급의 아이템으로, 현재 워로드에 공개된 130레벨의 레어 등급의 방어구 아이템 세트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레어 등급인 만큼 유니크 등급 아이템보다는 당연히 떨어지지만, 그래도 풀세트로 구하려면 정말 적잖은 골드가 필요했다.

심지어 물량도 많지 않아, 즉시 구매를 하려면 웃돈을 주고 사야 할 정도였다.

‘잠깐, 설마 우레사냥꾼 애들 건가?’

더불어 현재 붉은 해골 관련 아이템을 시장에 가장 많이 공급하는 곳은 우레사냥꾼 길드였다.

우레사냥꾼 길드만 공급하는 건 아니지만, 130레벨 보스 몬스터를 마음 내킬 때마다 잡을 수 있는 길드나 팀이 많을 리 없고, 레드 스켈레톤 나이트는 레이드 난이도가 꽤 높은 녀석이었다. 숙련된 레이드 팀이 아니면 성공률이 높지 못하다.

히르칸이 우레사냥꾼 길드의 아이템으로 의심을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배송사고인가?’

어쨌거나 히르칸에게 올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히르칸이 배송사고를 의심할 법했다. 워로드에서 배송사고가 없는 건 아니니까. 게임 시스템이 아무리 대단해도, 사용자가 사람인 이상 언제든 실수는 생긴다.

여기서 히르칸은 고민했다.

‘그냥 날름 먹을까?’

우레사냥꾼 길드가 실수로 히르칸에게 보낸 물건이라면, 어쩌면 바로 냉큼! 우레사냥꾼 애들이 배 아파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라도 억지로 먹었을 것이다.

‘좀 힘들겠지?’

하지만 우레사냥꾼이 아닌 레드불스가 보내준 녀석이다. 레드불스는 지금 당장 히르칸에게 도움이 된다. 여러모로 함부로 먹었다가는 무조건 탈이 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히르칸은 곧바로 레드불스 길드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날, 히르칸은 처음 느꼈다.

- 배송 실수가 아닙니다. 하회탈, 당신을 응원하는 누군가의 선물입니다. 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빌어먹을 워로드에도 천사는 있구나!

“어느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나중에 현실에서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고 말씀 전해주십시오!”

7.

그때를 떠올리던 히르칸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 몰라도 복 받을 거야. 진짜.’

미소와 함께 히르칸이 자신의 손목시계 3번 슬롯에 저장된 붉은 해골 세트의 세트 옵션을 확인했다.

[붉은 해골 세트]

*2개 파츠 착용 시

- 직업 관련 능력치 +55

*3개 파츠 착용 시

- 직업 관련 능력치 +77

- 모든 스킬의 쿨타임 10퍼센트 감소

*4개 파츠 착용 시

- 모든 능력치 +50

- 모든 스킬의 스킬 사용 시 소모되는 마력 10퍼센트 감소

*5개 파츠 착용 시

- 모든 능력치 +100

- 전투 시 붉은 해골 기사의 아우라 발동.

히르칸이 만족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붉은 해골 기사의 아우라였다. 전투에 돌입하면 발동하는 이 아우라는 착용자의 HP 상황에 따라 받는 데미지를 퍼센티지로 감소시켜준다. 동시에 HP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 데미지 감소 옵션 대신 모든 스탯을 퍼센티지로 올

려주는 옵션이 발동한다.

“슬롯 온!”

히르칸은 바로 슬롯을 활성화했다.

마치 거대한 거미가 여덟 개의 다리로 히르칸을 움켜쥐듯, 히르칸의 등 뒤에서 등장한 줄기들이 히르칸을 휘감았고, 히르칸의 몸에 달라붙은 줄기들이 엄청난 속도로 형태를 갖추었다.

3초 만에 히르칸의 아이템 세팅이 바뀌었다.

히르칸은 곧바로 새로운 방어구 세트의 디자인을 확인했다. 영상 프로그램을 이용해 전신을 확인했다.

‘어?’

히르칸이 살짝 놀랐다.

‘해골뱀 세트랑 디자인이 비슷한데?’

붉은 해골 세트의 디자인은 과거 히르칸이 50레벨때 착용했던 해골뱀 세트와 비슷했다.

히르칸에게 해골뱀 세트는 꽤 의미가 컸다. 당시 수중에 자금이 마땅치 않아서 디자인은 무시한 채 옵션만 보고 구매한 아이템을 마구잡이로 착용하며, 패션 테러리스트였던 히르칸이 처음 입은 제대로 된 세트 아이템이었으니까.

물론 완전히 똑같진 않았다. 검은 타이츠 위로 해골을 입은 듯한 디자인은 비슷했지만, 일단 붉은 해골 세트답게 외골격처럼 자리 잡은 뼈의 색이 붉은색이었다. 검은색 타이츠와 붉은색 뼈는 잘 어울렸다.

여기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 무엇도 아닌 투구였다. 돼지 꼬리 모양의 굵직한 뼈가 달린 해골 투구의 얼굴 부분이 일반적인 해골 모양이 아니라 하회탈 모양이었다.

확실한 증거였다.

‘진짜 주문 제작품이네? 우와!’

그 누구도 아닌 히르칸을 위해 디자인된 오더 메이드 제품이라는 확실한 증거!

히르칸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저조했던 컨디션이 갑자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오르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좋아. 이제 슬슬 운이 올 것 같아!’

히르칸이 그 기세를 품은 채 불카스 빌리지로 향했다.

7.

불카스 레인저 마스터 마웅.

최근 그의 유명세는 워로드의 그 어떤 NPC들보다 가파르게 치솟는 중이었다. 워로드에서 내로라하는 유저들이 마웅과 자주 만나는 사실이 목격됐고, 당연히 유저들은 마웅이 현시점에서 굉장히 비중이 높은 NPC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마웅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마웅이 주는 퀘스트 정보와 퀘스트 루트에 대한 공략이 온라인을 나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히르칸이 그런 마웅을 만나러 왔다.

“하회탈 아니야?”

“아? 진짜 하회탈이다!”

정체를 감추지 않은 채.

새로운 옷을 입은 채.

정체를 감춘 채, 맨얼굴로 마웅을 찾으러 올 경우, 히르칸이 호구인 줄 알고 접근하는 놈들이 생길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히르칸은 아예 본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어중간한 유저들의 접근 자체를 막았다.

물론 이유는 더 있었다.

“어? 저거 뭐지? 새로운 아이템 세트인가?”

“붉은 해골 세트다! 분명해! 붉은 해골 세트야! 그런데 저런 디자인은 처음인데?”

“투구가 하회탈인데, 저거 하회탈 전용 오더 메이드네.”

“붉은 해골 세트를 오더 메이드로 만들다니, 하회탈이 굴지의 재벌가 자제란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네.”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수저네. 진짜 부럽다 부러워.”

새로 맞춘 아이템을 모두 앞에 자랑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이게 진짜 이유였다. 원래 비싼 아이템은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 앞에서 자랑해야 제맛인 법이다.

그런 히르칸이 마웅과 대면했을 때, 마웅은 히르칸을 보자마자 반겼다.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마웅은 곧바로 자신의 책상 위에 지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히르칸의 의사를 무시한 채 곧바로 퀘스트를 줬다.

“저주받은 영지와 관련된 던전 지도를 발견했네. 저주받은 영지의 성, 그 아래에 비밀 던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필시 그곳에서 무언가 실험이 진행됐을 걸세. 자네의 역할은 그 던전에서 증거를 찾아오는 일일세.”

[퀘스트 ‘흔적’이 시작됩니다.]

히르칸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은 채 퀘스트를 준다는 것.

강제로 퀘스트를 진행시킨다는 것.

‘여기서…… 왕가의 문장이 나오겠군.’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배덕의 왕자 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의미였다.

8.

아홉 명의 유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입고 있는 아이템들의 종류는 가지각색이었지만, 워로드를 잘 아는 유저라면 놀랄 정도로 비싸고, 높은 레벨을 요구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런 아이템으로 무장한 아홉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면,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

하지만 지금 대화를 나누는 아홉 명의 모습은 마치 중요한 회사 프로젝트 발표를 앞둔 회사원들처럼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그 정보 어디서 나왔어? 퀘스트 정보 확실해? 다시 검토해봐! 그거 나도 넘겨줘! 아까 말한 거 어떻게 됐어?

정말 어수선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 그들의 대화가 질서를 찾기 시작한 건, 무리의 우두머리로 되는 인물이 나름 분위기를 잡고 말을 뱉는 순간이었다.

“주목! 결국 정리하면 타락 백작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건, 아서스 왕자가 아니라 딘 왕자라 이건가?”

정리된 분위기 속에서 대답이 나왔다.

“공개적으로는 아서스 왕자가 타락 백작의 후원자였지만, 타락 백작과 관련되었던 지역의 여러 퀘스트들의 정보와 내용을 분석하면, 타락 백작과 딘 왕자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시 아서스란 이름은 함정이었군.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아서스라니, 너무 노골적이잖아?”

우두머리의 말에 남은 여덟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불스 길드는 딘 왕자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번 타락 백작은 솔직히 얻어걸린 거니까요.”

“그렇지. 그게 문제지.”

잠시 그때를 떠올리던 우두머리는 이를 꽉 물었다.

“이번에는 결단코 타락 백작 때와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무조건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머리가 아홉 개인 짐승이 하나밖에 없는 짐승에게 밀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대답은 없었다.

결의에 찬 표정이 대답을 대신할 뿐.

< 36화. 공짜 점심은 없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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