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공짜 점심은 없다 (1). >
1.
워로드에서 획득한 시계는 장물아비 NPC를 통해서 아이템으로 교환이 가능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장물아비 NPC가 위치한 곳은 언제나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는 했다. PK를 당해 아이템을 잃은 자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물아비 근처에서 잠복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가 정말 원수와 만나는 일도 종종 생긴다.
물론 싸움은 없다. 장물아비 근처에서는 PK금지라는 암묵적인 합의 때문이다. 이 불문율을 어길 경우 치를 대가는 시계 하나를 잃는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때문에 보통은 그냥 예의주시한다. 살벌한 분위기를 풍긴 채 그냥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래서 분위기는 더더욱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혹자는 워로드에서 가장 진지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보스 몬스터 레이드 장소가 아니라 장물아비 근처를 가라! 그렇
게 말할 정도다.
“수고비는 1골드일세.”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가 먹잇감이 되는 법이다.
히르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지금 히르칸의 표정은 그 사실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고비는 1골드이네. 설마 내게서 수고비를 떼먹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장물아비 NPC의 거듭된 협박 섞인 어조, 그제야 히르칸이 정신을 차린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윽고 동전을 꺼낸 히르칸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사 세 개 정도 빠진 듯한 표정에 헤프기 그지없는 미소가 걸렸다.
이윽고 히르칸이 장물아비에게 골드 코인을 건네줬다.
“응?”
코인에 적힌 숫자는 1이 아니라 10이었다.
10골드.
적은 돈은 결코 아니다. 현금으로는 만 원 남짓한 돈이다. 세상천지에 천 원짜리 상품에 만 원을 지불하는 인간은 없다. 더욱이 장물아비는 거스름돈을 주는 NPC가 아니다.
더욱이 1골드가 아니라 0.1골드에도 목숨을 거는 히르칸 아닌가? 분명 해프닝이었다.
“내 수고비는 1골드일세.”
곧바로 수정될 해프닝.
“팁.”
하지만 히르칸은 10골드를 그대로 놔둔 채, 곧장 받은 아이템을 챙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장물아비는 그런 히르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표정은 없었다. 장물아비 NPC에게 과도한 요금을 지불한 유저를 쫓아가 정당한 값을 지불하게 하라는 프로그래밍 같은 건 없었으니까.
장물아비의 표정은 금방 평소 표정으로 바뀌었고, 곧바로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2.
[녹옥 이무기의 영혼이 깃든 투구]
*주요 속성
-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
- 근력 +144
- 체력 +144
- 요구 레벨 : 150레벨 이상
*보조 속성
- 착용자의 체력 회복 속도 5퍼센트 증가
- ‘녹옥 이무기의 영혼이 깃든’ 세트 아이템을 착용할 때마다 직업 관련 능력치 상승
- ‘녹옥 이무기의 영혼이 깃든’ 세트 아이템 3개 파츠 착용 시 모든 능력치 +50
- ‘녹옥 이무기의 영혼이 깃든’ 세트 아이템 5개 파츠 착용 시 모든 능력치 +100
- ‘녹옥 이무기의 영혼이 깃든’ 세트 아이템 5개 파츠 착용 시 ‘녹옥 이무기의 저주’ 발동
*기타
- 강력한 원혼을 가진 녹옥 이무기의 정수가 깃든 아이템이다.
자신의 창고에 보관된 아이템의 능력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안재현은 묘한 감정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와우.’
이미 뇌리에 각인이 될 정도로 많이 본 아이템 옵션이지만, 볼 때마다 가슴의 두근거림은 계속됐다. 갑자기 심장이 정지해도 이 아이템 옵션을 보면 심장이 다시 뛸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지금 안재현의 손에 들어온 아이템은 대단한 아이템이었다.
안재현이 재차 감탄했다.
‘이미 1등 당첨이 예상된 복권을 긁는 심정이 이런 심정이구나. 진짜 끝내주네.’
150레벨짜리 유니크 아이템.
더욱이 비앤비 길드만이 독점 제작 및 유통을 하고 있는 아이템이었고, 심지어 비앤비 길드는 이 아이템을 자기 길드 내에서만 다루고 있을 뿐, 공개적인 판매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감히 시세를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안재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안재현의 심장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근거림이 잦아들었다. 안재현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대박은 대박인데, 아무한테나 못 판다는 게 문제네.’
안재현의 생각 그대로, 녹옥 이무기 투구는 공개적으로 판매가 불가능했다.
‘파는 순간 비앤비 길드가 거품을 물고 덤벼들겠지?’
이 투구가 경매장에 나오는 순간, 비앤비 길드가 곧장 나설 것이다. 녹옥 이무기 투구를 구매하시면, 서비스로 우리 길드와 전쟁을 하실 기회를 드립니다! 그렇게 나올 게 분명하다. 그러면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비앤비 길드가 무서워서라도 아이템 구매를 꺼릴 수
밖에 없다.
더욱이 풀세트라면 비앤비 길드와 마찰을 감수하고 지를 만하지만, 그마저도 아니었다. 녹옥 이무기 투구는 세트가 모여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단품은 인기가 없다.
때문에 이미 이 아이템은 판매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주인에게 돌려주는 수밖에 없겠네.’
원래 주인에게 파는 수밖에 없다.
그 생각에 안재현의 입가에 실소가 그어졌다. 안재현은 지금 이 상황이 꽤 재미있었다.
도둑놈이 장물을 본래 주인에게 판다는 것, 분명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것을 돈을 주고 구매한 주인은 물건을 받는 순간 도둑놈을 때려죽이기 위해 나설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재현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안재현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오히려 그런 놈에게 엿을 한 번 더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안재현의 입가에 미소를 짙게 만들어줄 정도.
더욱이 안재현이 봤을 때 이 아이템의 주인은 자신을 공격한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비앤비 길드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혹은 대여를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에 거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선물로 나온 물건은 준 쪽이나, 잃어버린 쪽이나 어떻게든 회수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 손에서 놀아나는 꼴을 보기 힘들다.
문제는 안재현은 자신을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모르며, 비앤비 길드와도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점. 대뜸 비앤비 길드를 찾아가서 거래를 요청하는 것도 우습다.
그럼 답은 하나.
‘레드불스를 통해서 비앤비 길드와 접촉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리가 놓이겠지.’
인맥을 동원하는 것.
‘레드불스 애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는군.’
안재현, 그가 열심히 인맥을 만든 보람을 느낄 때가 왔다.
3.
“싱글레, 너 하회탈한테 당했다면서? 너보다 레벨이 30레벨 이상이나 낮은 유저에게 당하다니, 그게 말이 돼?”
뱀 가죽으로 만든 듯한 묘한 재질의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의 비아냥거림 섞인 말에 싱글레는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닥쳐. 그놈이 도망친 거야. 난 지지 않았어.”
당연한 반응……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계를 빼앗겼다면서? 그럼 당한 거지.”
“놈의 수작에 넘어갔을 뿐이야. 빼앗긴 게 아니야.”
“그거나 저거나. 그보다 대체 무슨 템을 잃은 거야? 넌 3개 슬롯 전부 세팅해두잖아?”
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저거 입고 있는데 그 무식하기 그지없는 투구 없는 거 보면 견적은 금방 나오잖아?”
시계를 빼앗긴 유저는 시계를 재발급 받을 때 슬롯에 저장된 아이템 중 1개를 제외한 상태로 받는다. 투구가 없다는 건, 싱글레의 시계 속 아이템 슬롯에서 투구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설마 녹옥 이무기 투구? 맙소사.”
이제까지 싱글레를 놀리듯 말을 하던 여인의 얼굴에 진심으로 걱정 어린 표정이 지어졌다.
“하필이면…… 그거 비앤비 길드에서 대여받은 거잖아?”
그런 여인의 반응에 싱글레의 기분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싱글레는 대답 대신 입을 꽉 물었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기 싫었다. 그나마 게임 속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여기가 현실이었다면 싱글레, 그의 얼굴은 폭발하기 직전의 홍
당무가 되었을 테니까.
‘젠장, 하회탈 그 빌어먹을 새끼.’
자연스럽게 싱글레는 하회탈을 떠올리며 그를 잘근잘근 씹었다.
‘와치맨 스타일? 개새끼.’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와치맨 스타일이란 거짓말에 자신이 넘어갔다는 사실이. 더욱이 와치맨 스타일을 검색해본 결과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혹여 그게 하회탈이 멍청한 유저로부터 시계를 받아내기 위해 만든 독특한 전법이라면, 그 전법의 첫 번째 희생양은 싱글레가 된 셈이다.
무엇이든 간에 싱글레에게 좋은 이야기는 없었다.
‘기필코 죽인다.’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싱글레의 기분을 더더욱 더럽게 만드는 건, 히르칸에게서 받은 시계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노멀 등급의 로브가 나왔다는 점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아이템은 아니더라도, 120레벨에서 130레벨대 유니크 아이템은 나오리라 예상했다. 하회탈은 언제나 값비싼 아이템으로 치장을 하니까.
쉽게 말해서 명품으로 도배한 사람의 지갑을 훔쳤는데, 지갑은 짝퉁에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 두어 장과 십 원짜리 동전 서너 개만 있는 격.
‘하회탈, 네놈은 내가 게임을 접을 때까지 만나는 족족 죽여주마.’
여기에 싱글레는 녹옥 이무기 투구를 잃은 대가로 벌금을 내고, 현재는 조직의 처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단 비앤비 길드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싱글레의 처분은 비앤비 길드와의 이야기가 끝난 후다. 매도 한 번에 맞는 게 나은 법이다.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매를 맞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
‘젠장.’
무엇보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실패도 경험하지 못했던 싱글레에게 이번 일은 자존심에도 상처가 나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직이 통보를 했다.
- 하회탈에게 빼앗긴 녹옥 이무기 투구를 비앤비 길드가 회수했다. 당분간 비앤비 길드와 관련된 모든 업무는 싱글레가 담당한다. 이 기간 동안 싱글레는 비앤비 길드원으로 활동한다. 싱글레, 최대한 봉사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도록.
“예.”
싱글레, 그가 복수의 칼을 가슴에 담았다.
4.
타락 백작 레이드 이후 레드불스와 우레사냥꾼, 두 길드는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관계는 비공개적인 관계였다. 30대 길드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두 길드가 공식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공개되면, 다른 길드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을 할 테니까.
당연히 비공개적으로 은밀하면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핫라인의 존재가 필요했다.
우레여왕 그리고 마타도르, 둘 사이에는 언제든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핫라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그 둘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각자의 폰 번호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채설연이 그 번호를 통해 체브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통화를 하는 채설연의 얼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팩으로 뒤덮여 있었다.
“체브.”
- 지금 레이드 도중인데, 할 말이 있으면 짧게 해줬으면 좋겠군.
반면 통화 상대인 체브의 상황은 긴박했다. 전쟁통에 전화를 받은 격이다.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전화를. 체브의 심기가 그다지 좋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체브의 심기는 채설연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하회탈과 비앤비 길드 사이의 거래를 레드불스가 가운데에서 주관했다는 정보를 확보했어.”
말을 내뱉는 채설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표정변화도 없었다. 팩 덕분이었다. 여기서 화를 내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팩을 하는 의미가 사라질 테니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체브는 채설연의 반응에 조금 놀라면서, 반문했다.
- 정보력이 대단하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실 체브는 채설연의 연락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비앤비 길드의 주요 스폰서 중 한 곳이 채설연의 집안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그런 비앤비 길드와 하회탈 사이의 거래를 주관했는데, 그 소식이 채설연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심각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체브는 채설연이 연락을 하는 순간, 굉장히 분노 섞인 일갈을 내지르라고 예상했다. 그녀의 성정은 생긴 것과 다르게 굉장히 섬뜩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저번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물론 채설연은 경고를 할 속셈이었다.
“하회탈은 우레사냥꾼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그 경고에 체브가 피식, 웃었다.
- 건드린 적은 없어. 단지 그쪽에서 먼저 거래를 제안했을 뿐이고, 몇 번 인연이 있어 다리를 놓아줬을 뿐.
“만약 내가 지금 팩을 한 게 아니었다면 그리고 게임 속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면 넌 죽었어.”
팩.
그제야 체브가 채설연의 담담함 기색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네가 지금 팩을 하는 중이라서 참 다행이야, 내가 그런 대답을 해야 하는 부분인가?
“하회탈에 대한 정보를 넘겨.”
여전히 담담한 음색.
그러나 체브는 그 담담함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말장난은 필요 없다.
- 일단 분명하게 말하지. 하회탈에게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영입 의사는 있다.
“흠.”
- 그 결과가 우레사냥꾼 길드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하회탈을 영입할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하지.
“그래?”
- 하지만 반대로 그런 각오를 하고도 하회탈을 영입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한데.
“정보를 넘겨.”
- 하회탈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단지 거래 루트가 있을 뿐. 거래 루트는 우리에게 타락 백작의 정체를 알려줬던 정보 상인이다.
이 대목에서 채설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주 작은 주름이 생겼다.
-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이것도 우레사냥꾼 길드와 관계를 고려해서 준 선물이다. 이 이상은 정보가 있어도 줄 수 없다. 레드불스는 우레사냥꾼과 협력 관계지, 주종 관계가 아니니까.
채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체브는 그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쉬이 오지 않았다.
결국 체브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 대신에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언을 해주지. 하회탈은 거래를 한다. 주는 만큼 보답은 한다는 의미다. 만약 정말 하회탈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일단 그에게 빚을 만들도록.
여전히 채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필요하다면, 내가 중간 다리가 되어주지. 조만간 하회탈과 접촉할 예정이거든. 그보다 지금 통화 중인 건가? 응? 대답이 없는데, 설마 통화가 끊긴 건가?
그제야 채설연이 입을 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나보고 키다리 아저씨가 되라는 건가?”
아무래도 팩을 새로 해야 할 듯싶었다.
< 36화. 공짜 점심은 없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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