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저주받은 영지(2). >
3.
히르칸이 큼지막한 바위 하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바위였고, 실제로도 특별하지 않은 바위였다.
툭툭, 히르칸이 바위 근처를 제 발을 삽처럼 이용해 고운 흙덩이를 퍼내고, 그 안에서 재료 코인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다면, 그 바위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쳇.”
재료 코인을 확인한 히르칸이 혀를 찼다. 그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뚱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
재료 코인을 다시 주워 주머니에 넣는 히르칸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두 눈을 감았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는데.’
히르칸, 그는 저주받은 영지의 위치를 알고 있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인 그곳의 위치를 모를 리 없다.
위치는 미산드라 성을 기준으로 남동쪽에 위치한 드높은 산, 리키 마운틴 너머 보이는 구불구불 길게 뻗은 이누 강 너머! 그 너머가 바로 저주받은 영지의 경계였다.
워로드에서 이 정도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면, 내비게이션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지금 히르칸은 리키 마운틴조차 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설마 여전히 블럭 필드로 남아있을 줄이야. 이런 건 진짜 예상도 못했는데.’
블럭 필드.
그 어떤 유저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지금 히르칸을 가로 막고 있는 게 그 이유였다.
리키 마운틴 너머가 블럭 필드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도, 아직 그 블럭 필드가 해제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 몇 번이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퀘스트를 받았는데도 블럭 필드로 남았다니…… 골치 아프네.’
히르칸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받았으니까. 대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블럭 필드 개방의 열쇠 역할을 한다. 때문에 히르칸이 고민하는 건 블럭 필드가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빨리 리키 산을 넘은 후에 저주받은 영지에 닿아서 타이틀을 냠냠, 먹어치우는 것
이었다.
‘별 이상한 새끼들이 앞길을 막더니, 이제는 별 시답잖은 경우가 내 앞길을 막는군.’
물론 이 사실이 히르칸에게 마냥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긍정적인 요소로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저주받은 영지 구역이 블럭 필드로 남아있다는 건…… 우레사냥꾼 애들이 여기 도달하지 못했거나 혹은 나랑 다른 루트로 퀘스트를 진행 중이란 의미일 테니…… 그건 마음에 드네.’
우레사냥꾼 길드가 히르칸과 똑같이 저주받은 영지 탐색 퀘스트를 받고, 히르칸보다 앞서서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니까.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이다.
‘좋아.’
히르칸은 심기를 풀고,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당장 과제는 정해졌다. 블럭 필드를 해제해야 한다. 블럭 필드는 무력으로 해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미산드라 성이 개방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으니, 분명 퀘스트는 어느 정도 진행됐을 거야.’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일단 미산드라 성으로 돌아갈 때다.
‘응?’
그 순간 마치 히르칸이 고개를 돌리기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에서 몬스터가 등장했다.
크르르……!
크헝! 크헝!
두 발로 선 늑대 인간, 웨어 울프. 그러나 보통의 웨어 울프들과 다르게 놈들은 양손에 녹이 잔뜩 슨 비루한 칼 따위를 들고 있었다.
100레벨의 몬스터, 웨폰 웨어 울프였다.
100레벨 중소형 몬스터 중에서는 보통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괴물들로, 잡기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쉽지는 않은…… 쉽게 정리하면 그저 그런 놈이었다.
등장한 숫자는 네 마리였다. 적어도 유저 한 명이 혼자서 상대하기에 쉬운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무리의 등장이 히르칸은 아반의 검을 뽑기는커녕,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르칸의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골 전사들과 황금으로 제련한 듯한 금빛 검을 든 해골 기사가 웨폰 웨어 울프 등 뒤에서 등장했다.
컹!
해골의 등장에 놀란 듯, 웨폰 웨어 울프들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전투는 곧바로 시작됐다.
크왕!
웨어 울프가 소리치며 먼저 달려들었고, 해골 전사들과 기사는 소리 없이 칼을 쥔 채 오는 웨어 울프 무리를 보며 두 눈동자를 활활 불태웠다. 다가오는 적의 공격을 피해내며, 단칼에 적의 몸뚱이를 베어낼 투사의 기질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히르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 홀로그램창을 열고 정보를 검색했다.
‘미산드라 영지에 자리 잡은 30대 길드는 없고. 언더풋 길드도 없고. 오히려 좀 귀찮겠군. 그보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히르칸, 그가 점차 네크로맨서에 어울리는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4.
미산드라 성이 워로드 유저들에게 정체를 드러낸 건, 약 2개월 전이었다.
게임 세상에서 2개월은 2년 같은 시간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미산드라 성을 찾아왔고, 미산드라 성 너머에 보이는 블럭 필드를 해제하기 위해 열심히 퀘스트를 찾고, 클리어했다.
그러나 블럭 필드는 쉽사리 해제되지 않았다. 무언가 단서가 보일 듯하면서도, 그 누구도 열쇠를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놓였을 때 유저들의 판단은 간단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다른 곳 가서 사냥하자.”
“어차피 블럭 필드 해제해봤자 타이틀 하나 얻고 끝이겠지. 그 시간에 다른 사냥터에서 레벨업하는 게 더 이익이잖아?”
포기.
당연한 선택이었다.
굳이 자기 시간을 투자해서, 레벨업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도전하는 자는 많지 않다.
더욱이 미산드라 성은 사냥터로써 애매한 위치였다.
미산드라 성에서 얻을 수 있는 퀘스트는 80레벨에서 100레벨 사이의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80레벨 유저들은 열심히 퀘스트를 받아 수행하고, 레벨업에도 열심히 한다.
그러다가 90레벨이 되면?
워로드에서 90레벨이 된 유저들의 목적은 무조건 하나다. 빨리 레벨을 올려서 100레벨 찍고, 승급을 하는 것! 보다 빠른 승급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사냥터를 찾는다. 효율이 좋은 사냥터라고 보기 힘든 미산드라에 집착을 가질 이유가 없다.
결국 어느 정도 퀘스트를 진행했던 유저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 후에도 유저는 유입되지만, 그들 역시 앞선 이들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물론 모두가 떠나는 건 아니었다.
“퀘스트 같이 하실 분?”
지트.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퀘스트 수행을 위해 미산드라 성에 남아 있는 소수 중 한 명이었다.
레벨은 91레벨, 직업은 마법사다.
마법사인 만큼 혼자 필드 활동이 불가능한 그는 퀘스트 수행을 위해 토벌협회 미산드라 지부에서 동료를 모집했다.
“무슨 퀘스트죠?”
“수색 퀘스트입니다. 유골을 찾는 퀘스트인데…….”
“경험치 많이 주나요? 보상은요?”
“탐색 퀘스트라서 보상이나, 경험치는 많지 않습니다.”
“왜죠?”
“네?”
더불어 그의 모집활동은 언제나 좋지 못한 식으로 마무리가 되고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왜죠? 그 한 마디를 뱉은 유저는 지트를 평생 안 볼 기세로 등을 휙 돌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살짝 모멸감도 느낄 정도로 매몰차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지트가 이를 꽉 물었다.
‘젠장! 차라리 검사 클래스를 고를 걸…… 그랬으면 혼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퀘스트를 진행했을 텐데!’
지트는 말과 함께 시계를 조작해, 자신의 퀘스트를 확인했다.
[검은 유골]
- 퀘스트 등급 : 레어
- 퀘스트 가능 레벨 : 90레벨 이상.
- 퀘스트 내용 : 검은 유골을 회수해, 도망자 ‘차도스’에게 전달하라.
- 퀘스트 보상 : 차도스의 지팡이.
검은 유골 퀘스트.
레어 등급의 퀘스트다. 쉽게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트 혼자만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아주 특별한 퀘스트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미산드라 성에서 80레벨부터 90레벨 초중반까지 열심히 퀘스트를 통해 레벨업을 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퀘스트였다. 이미 습득 루트가 공개된 퀘스트였다.
동시에 졸업증이라고 불리는 퀘스트이기도 했다. 이 퀘스트를 받을 무렵이면, 미산드라 성을 졸업하고 다른 사냥터로 이동하는 유저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런 퀘스트에 지트가 나름 레벨업을 손해 보면서까지 매달리는 이유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퀘스트가 무조건 블럭 필드를 깨는 열쇠야.’
적지 않은 유저들이 미산드라 성에서 순차적으로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검은 유골 퀘스트에 다다르는데, 막상 이 퀘스트를 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현재 블럭 필드도 열리지 않고 있다. 충분히 의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의심을 가질지언정, 확신을 가지긴 힘든 게 사실이다. 지트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다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차도스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차도스는 도망자다. 저 너머에서 어떤 이유로, 불행한 사건을 피해 도망친 도망자.’
차도스는 저 블럭 필드 너머에서 온 도망자다. 그 이야기를 미산드라 성의 성벽관리인 NPC 두두를 통해 알게 됐다. 더불어 이 사실은 현재 온라인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었고, 지트 역시 그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 없었다.
지트 입장에서는 나름 비장의 카드인 셈.
사실 이 정도 확신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파티를 모집하는 게 정답이다.
문제는…….
“아니, 이게 누구야? 지트잖아?”
지트에게 남들이 가지지 못한 약점이 있다는 점.
“아직도 미산드라 성에서 활동하나? 응?”
지트, 그에게 세 유저가 다가왔다. 세 유저 모두 똑같은 길드 엠블렘을 가슴팍에 박고 있었다. 배트 하나가 휙! 돌아가는 모양의 길드 엠블렘. 스윙 길드였다.
“그때 일은 다 정리됐잖아!”
스윙 길드.
가입자는 3백 명 정도 되는 중소규모의 길드였다. 30대 길드나, 언더풋처럼 본격적인 길드라기보다는 상호보완을 목적으로 모인 길드로, 길드 구성원들 역시 저레벨 유저부터 제법 레벨이 되는 유저들까지, 여러 종류의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지트와 안 좋은 관계의 길드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고 했어? 응? 우리가 널 필드에서 만나면 박살 낼 거라는 말이라도 했어?”
“이상한 놈이네. 그냥 아직도 여기 있는 게 궁금해서 질문한 거야. 궁금해서!”
‘젠장, 그냥 대놓고 협박을 해라 이 개새끼들아!’
게임을 하다 보면 흔히 생기는 충돌이었다.
우연히 파티 사냥을 하던 와중에,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서 논쟁이 오고 가고, 그 논쟁의 수위가 ‘넌 왜 그렇게밖에 못해?’ 에서 ‘어머님은 잘 계시니?’ 으로 바뀌면서 감정이 크게 틀어지고, 생기는 충돌.
지트가 그런 식으로 유저 한 명과 충돌했고, 그러다가 파티 사냥 도중 사고가 생겼다.
지트의 지원이 늦는 바람에 탱커 역할을 하던 상대가 게임오버를 당한 것이다.
실수에서 나온 사고였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로 느껴졌을 터.
그 이후 스윙 길드는 거듭 지트를 안 좋게 보고 있었고, 그 때문에 미산드라 성에서 나름 오래 사냥을 한 유저들은 지트와 거리를 둔 채 활동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30대 길드도 아닌 주제에…… 내가 혼자라고 개처럼 달려드는군.’
지트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였고, 처음 보는 얼굴의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로 호객행위 하듯 파티 가입을 유도하는 이유였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 지트 앞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어?’
스윙 길드의 이목을 피해 토벌협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에서 유저 한 명과 마주 봤다.
평범한 철제 갑옷, 허리춤에는 평범한 칼 한 자루를 차고 있는 유저의 인상은…….
‘잘 속을 것 같은 얼굴이네?’
참으로 인상이 속여먹기 딱 좋았다. 그 순간 지트의 눈빛이 잽싸게 상대의 아이템 세팅을 살폈다.
‘검사 클래스!’
누가 봐도 검사 클래스 세팅이었다. 지트는 그런 사내에게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혹시 퀘스트 받으러 여기 왔습니까?”
상대가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같이 퀘스트 안 할래요?”
그와 동시에 지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이 퀘스트를 하면 블럭 필드를 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유저들이라면 결코 블럭 필드를 운운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지트는 눈앞의 상대가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무조건 낚여주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호구라는 느낌에 제대로 된 미끼를 던졌다.
그런 지트의 미끼가 제대로 먹힌 듯, 호구 인상을 가진 유저가 지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얼마 줄래?”
“예?”
의외로 나오는 말과 말투는 호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트의 표정이 굳었고, 상대가 말을 이어갔다.
“그 퀘스트 했는데 블럭 필드가 안 열리면 보상으로 얼마 줄래?”
호구는 호구인데, 진짜 호랑이 입을 만난 지트였다.
< 34화. 저주받은 영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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