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저주받은 영지(1). >
1.
[히르칸]
- 레벨 : 122
- 직업 : 네크로맨서
- 타이틀 : 66개
- 능력치 : 근력(1351)/체력(598)/지력(789)/마력(883)
홀로그램창을 통해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하던 히르칸의 입술 한쪽 꼬리가 축, 울상을 짓듯 찌푸려졌다.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히르칸은 그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우거진 나무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히르칸의 모습이 나무 기둥 사이사이를 오고 가다 어느 순간 나무 기둥 사이에 가려 사라졌다.
그렇게 히르칸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그로부터 10초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어? 어디 있지?”
“뭐야? 아까까지 여기 있었잖아? 왜 안 보여?”
“잘 찾아봐! 아까 여기에 있었잖아!”
세 명의 유저들이 히르칸이 사라진 부근에 자리를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유저 둘, 사제복을 입은 유저 하나. 검사 클래스 두 명과 사제 한 명으로 조합된 파티였다.
그다지 비싼 아이템들은 아니었다. 레어 등급과 노멀 등급의 아이템이 섞인 듯, 착용한 아이템에는 통일감이 없었다. 특히 갑옷을 입은 두 유저의 외형은 몹쓸 꼴이었다.
그런 유저들을 나뭇가지 위에서 내려다보던 히르칸의 얼굴에는 여전히 기분이 별로 안 좋은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히르칸은 그 미소를 지은 채, 주머니에서 해골 조각 한 움큼을 꺼내 바닥을 향해 던졌다.
투투툭!
우박처럼 떨어지던 해골 조각 중 하나가 한 유저가 쓰고 있는 투구 위를 퉁! 가볍게 두드렸다.
“응?”
자신의 투구를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유저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한 뒤 그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리 위를 바라본 유저의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물체가 떨어지는 장면, 그게 전부였다.
푹!
자신의 투구 틈을 비집고, 자신의 두 눈을 제대로 찌른 새하얀 검의 검극을 볼 여유 같은 건 그 유저에게 없었다.
“어, 뭐야?”
공격을 당했다기보다는 봉변을 당한 느낌. 실제로도 히르칸에게 공격을 당한 유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가 보더라도 봉변을 당한 이나 내뱉을 법한 말이었다.
제대로 된 반응은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두 동료에게서 나왔다.
“하회탈이다!”
“젠장!”
그 외침과 함께 두 동료 중 한 명이 제 동료의 눈덩이에 검을 꽂은 채 바닥에 착지한 히르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쉬익!
수평으로 휘두르는 그 검을 히르칸은 가뿐하게 피했다. 딱히 빠르지도 않고, 기술적이기도 않고, 스킬이 사용되지도 않은 그 공격은 히르칸에게 공격이라기보다는 장난에 가까웠다.
표적을 잃은 검은 곧바로 히르칸의 옆에 있던 동료의 몸뚱이를 후려쳤다.
까앙!
장난에 가까운 검이었지만, 휘두른 유저의 근력 스탯은 나름 준수한 듯, 검격이 단숨에 동료의 갑옷을 찌그러뜨렸다.
“으악!”
장님이 된 동료의 입에서 그제야 상황에 어울리는 소리가 나왔다.
“미, 미안!”
“미안? 지금 네가 날 공격한 거야?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회탈이 머리 위에 있었어!”
“그래? 지금은?”
“네 옆에!”
“뭐?”
장님이 된 유저가 기겁을 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물론 블라인드 상태에서 뭔가가 보일 리 만무했다.
“큐어! 나 큐어 좀!”
“응, 알았어!”
그 과정을 히르칸은 몇 발자국을 떨어진 곳에서 하염없이 바라봤다.
오합지졸이 아등바등하는 장면은 히르칸에게 재미보다는 허탈감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히르칸의 배려 덕분에 마련된 대치 국면 속에서 정신을 차린 세 명이 포메이션을 잡고는 히르칸을 향해 소리쳤다.
“히르칸! 우리의 도전을 받아라!”
그 외침에 히르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런 히르칸을 대신해 이미 모습을 갖춘 해골 전사들이 움직였다.
“어? 어!”
상황은 그것으로 종료였다. 포이즌 밍크로 만든 털갑옷을 입고 있는 다섯 마리의 해골 전사들은 어중이떠중이 3인 파티에게는 너무나도 위력적인 괴물이었다.
히르칸이 굳이 전투에 참가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상황은 싱겁게 끝이 났고, 히르칸은 시체가 된 유저들의 손목을 자른 후에 그들의 손목시계를 챙기며, 퉁명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걸로 열 개 째.’
왈츠 영상의 조회수가 7천만을 돌파했다. 조회수의 상승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파급 효과는 오히려 더 커지는 중이었다.
눈으로 덮인 산을 굴러내려 오는 눈덩이였다.
왈츠 영상의 빅히트는 당연히 언론을 통해 언급되었고, 그 언급이 다시 대중의 관심을 부르는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회탈의 몸값은 자연스럽게 올라갔고, 몸값이 오르니 히르칸을 잡으려는 무리들의 머릿수도 늘어났다.
물론 히르칸을 잡는다고 현상금을 주는 곳이 없다. 워로드에 그런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애초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바닥 아닌가? 히르칸은 왜 날 잡으러 이토록 많은 이들이 덤벼드는 걸까? 그런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저 작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을 뿐.
‘진짜 별 이상한 새끼들까지 덤비네.’
예전이라면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시계를 보고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시계를 기부하기 위해 와준 고객들의 손목을 잘라내며,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히르칸은 예전의 히르칸이 아니지 않은가?
‘만만한 게 나다, 이거지?’
일단 지금 히르칸에게는 어중이떠중이 유저들의 시계는 큰돈이 되지 않는다. 그 유저들에게 쓸 시간과 집중력으로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잡는 게 이득이 될 정도다.
동시에 어중이떠중이 유저들이 히르칸을 노린다는 건, 히르칸이 그만큼 만만하게 보인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없진 않다. 일단 공식적으로 히르칸은 길드 소속이 밝혀지지 않았다. 무소속이다. 무소속이란 건, 히르칸을 건드려도 뒤탈이 날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다.
여기에 히르칸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는 솔플을 한다. 워로드 유저들에게는 머릿수가 삼팔광땡이다. 머릿수를 이기는 건 없다! 그 법칙이 워로드 유저들에게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다.
그런 워로드 유저들에게 히르칸은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존재로 보일 수밖에.
더 큰 문제는 이런 생각을 일반 유저들만이 할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길드!
유저가 아닌 무리들이, 세력은 히르칸을 더 얕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영부영 개판에 휘말리면 개 같은 꼴이 되겠지.’
위기다.
여기서 치고 올라가면 그때는 아성이 생기지만 반대로 여기서 덤벼드는 족속들과 어영부영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면, 선발 주자들과의 거리는 좁히지 못한 채 비슷한 수준을 맴돌게 된다.
그 위기감을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 히르칸의 기분이 좋지 못했다.
히르칸이 여전히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보석 하나를 꺼냈다. 꺼낸 보석을 찰흙놀이 스킬을 통해 녹였다. 녹은 보석이 땅바닥을 적시자, 곧바로 날렵해 보이는 긴 다리를 가진 도마뱀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르칸이 그 도마뱀 등에 올라탄 뒤, 도마뱀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운전 모드, 목적지는 미산드라 캐슬.”
명령을 받은 도마뱀 골렘이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 히르칸이 홀로그램창을 열고,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 지금부터 2페이즈에 돌입합니다. 현재까지 피해는 전무. 계획 달성률은 98퍼센트입니다.
우레사냥꾼의 보스 몬스터 레이드 영상이었다.
레이드 공략 영상을 보는 건, 워로드 유저들에게 예습이자, 복습이었다. 모든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물론 이것만으로는 강해질 수 없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크로니클 유니크 좀 듬뿍 챙기고.’
워로드에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옵션을 가진 아이템 역시 꼭 필요하다.
‘얼른 기반을 마련해서, 랭킹에 들 정도로 레벨을 올려야지.’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기반으로 레벨을 올려야 진짜 강자가 되는 것이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레벨 랭킹에 들어가는 순간 나 건드리는 새끼는 길드까지 묶어서 손모가지를 뽑아줄 테니까.’
히르칸은 지금 고비를 넘기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히르칸이 저주받은 영지를 향해 이동했다.
2.
입은 갑옷을 불쌍하게 만드는 비대하고 비루한 몸을 가진 아폴로에게 로브를 입은 유저 한 명이 다가왔다.
“하회탈이 남동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동하는 도중에 유저를 적잖게 잡은 모양입니다.”
“그래?”
아폴로의 대답은 매우 짧았다. 그런 아폴로의 대답에 로브를 입은 유저, 쟝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굳이 하회탈을 이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으십니까?”
쟝, 그는 그저 아폴로 밑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기 위해 아폴로 길드에서 간부가 됐다. 솔직히 아폴로가 뭘 하든, 그는 떨어지는 콩고물만 받아먹으면 될 뿐이었다. 다른 간부들도 딱히 아폴로가 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까라면 앞에서는 까고, 뒤에서
는 호박씨를 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폴로의 행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쟝은 궁금증을 참다못해 질문을 했고, 그런 질문을 한 건 아폴로 길드 간부들 중 쟝이 처음이었다.
아폴로는 쟝의 질문에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떴다. 누가 보면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일 지경.
쟝이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하회탈이 우리 길드원들을 잡은 건 맞지만, 굳이 그렇게 투자를 하시면서까지 복수를 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저번에 붉은 호수 건에 투입된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흥.”
그 말에 아폴로가 콧바람을 크게 내뱉었다. 그 콧바람과 함께 처음으로 속마음도 내뱉었다.
“하회탈 같은 반짝하는 놈 따윈 아무래도 좋아.”
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폴로는 욕심이 많고, 집착도 강한 돼지이지만, 그렇다고 지능까지 돼지 수준인 건 아니다.
나름 머리를 굴릴 줄 안다. 아니, 욕심과 집착이 많은 만큼, 자기 뱃속을 채우려는 일 앞에서는 때때로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갈 때도 있다. 배고픈 돼지가 먹이를 앞에 두고 때때로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지금이 그 비상한 무언가를 발휘할 때인 모양.
“쟝, 잘 들어. 우린 지금 헤비빈의 약점을 잡았어.”
쟝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비빈에게 하회탈 사냥을 의뢰했지만, 헤비빈은 실패했다. 재미난 점은 하회탈 본인은 헤비빈 그리고 빅스마일이 자신을 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사실을 아폴로는 안다는 점이다.
심지어 빅스마일에서 빌려준 무기가 하회탈 사냥 대가로 사용되었고, 이 사실 역시 하회탈은 모르고, 아폴로는 알고 있다.
헤비빈에게 이 부분은 분명 약점이다.
“그리고 지금 빅스마일은 아주 상태가 안 좋지. 안 그래?”
“그렇죠.”
여기에 하나 더, 빅스마일 상황은 30대 길드 중에 여전히 좋지 못하다. 최근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리플윙과 공식적인 휴전 협정을 맺은 건 아니다. 다시 전쟁을 할 여지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무엇보다 빅스마일은 고질적인 약점이 있다.
킬러 콘텐츠의 부재.
30대 길드 중에 상위권을 논하는 길드들은 저마다의 강점 혹은 특색 있는 콘텐츠가 있다.
레드불스나, 우레사냥꾼 길드 같은 경우는 레이드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히드라 길드는 메인 시나리오 및 기타 퀘스트 진행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스위퍼즈 길드 같은 경우는 몬스터 청소라는 독특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빅스마일 길드는 조금 다르다. 분명 몸집은 크고, 나름 이것저것 하기는 하는데 딱히 잘하는 게 없다.
막말로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만든 길드가 아니었다면, 중국이란 시장이 아니었다면 30대 길드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자력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력이 안 된다면,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설마?”
이야기를 듣던 쟝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래, 내가 노리는 건 하회탈 같은 찌꺼기 놈이 아니야. 빅스마일의 간부 자리.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아폴로가 씨익, 웃었다.
“이미 부르크하고는 거래가 끝났어. 부르크는 언제든 내 뒤를 봐주겠다고 했지.”
아폴로, 그는 빅스마일 간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빅스마일의 간부 중 한 명인 부르크를 포섭했다. 부르크는 여건이 되면 아폴로의 빅스마일 가입을 봐주겠다고 했다. 부르크 입장에서도 배경이 든든한 아폴로와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문제는 부르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트리플윙과 빅스마일의 전쟁이 터졌고, 그 바람에 부르크의 발언이 약해졌으며, 그런 부르크와 반대편에 있던 헤비빈의 입김이 커졌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헤비빈의 약점을 쥐고 있다?
쟝이 감탄했다.
‘이럴 땐 정말 기가 막히게 머리가 굴러가는군.’
욕심과 돈밖에 없는 줄 알았던 아폴로의 머리에서 이런 계획이 마련됐을 줄이야?
동시에 쟝은 욕심을 품었다.
‘물어보길 잘했어. 이건 대박 기회야.’
만약 아폴로가 빅스마일 길드의 간부가 된다면, 아폴로 길드 역시 빅스마일 길드에 흡수되고, 아폴로 길드의 간부들은 빅스마일 길드에서 나름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터.
30대 길드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건, 중세시대로 따지면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것과 같다.
쟝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길드 마스터, 생각하는 크기와 배포가 다르시군요. 고작 하회탈 같은 쥐새끼를 노리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그 쥐새끼를 미끼 삼아 고래를 잡으실 생각을 하실 줄이야.”
“그래, 나 정도 되면 잔챙이가 아니라 고래 정도는 낚아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곧바로 아첨을 뱉었다.
아폴로가 그런 쟝의 아첨에 미소를 듬뿍 머금었다.
< 34화. 저주받은 영지(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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