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타락한 엘프 (4). >
13.
‘진짜 죽을 뻔했다.’
해골 전사들이 시간을 버는 틈을 이용해 코카트리스로부터 거리를 벌린 히르칸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떠올릴 것도 없었다. 마법사가 던진 마법은, 명백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마법사의 실력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정확도였다. 좀 더 과장하면 왜 메이저리그에 가서 투수를 하지 않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 정도로 마법은 정확하게 히르칸에 적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준비를 해서 다행이야.’
대비.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비싼 사탕과 비싼 껌, 비싼 구렁이 내단까지! 무려 세 가지를 입안에 넣고 있었다.
‘그래도 HP가 30퍼센트 근처까지 떨어졌으니…… 신체 강화 스킬에 투자를 안 했으면 죽었겠네.’
여기에 하나 더, 페라또는 히르칸의 체력을 너무 얕잡아봤다. 히르칸은 신체 개조 스킬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마법 및 물리 방어력을 올려주는 스킬 '피부 재봉', 체력을 대폭 늘려주는 스킬 '가짜 심장', HP 회복 속도를 올려줌과 동시에 화상, 출혈 효과로 HP가 감소하는 양을 줄여주는 스킬 '끓는 피'.
신체 강화 스킬 트리에 투자를 한 도움을 제대로 봤다. 여기에 그동안 열심히 타이틀을 확보하며, 체력 스탯을 최대한 확보한 것 역시 큰 도움이 됐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상, 이제 주도권은 히르칸의 몫이었다.
“아까 말했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움직이는 놈은 내 유튜브 페이지에 손목만 나올 줄 알아.”
히르칸의 경고에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나한테 마법 던진 마법사 씨, 명심해.”
히르칸을 공격했던 마법사는 아예 얼어붙었다. 페라또 역시 굳어버렸다.
‘설마?’
페라또 입장에서는 이런 히르칸의 말들이 그냥 하는 말로 들릴 리가 없었다.
‘눈치를 챈…….’
공대장인 페라또가 침묵을 고수하는 이상, 다른 공대원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두가 눈알만 굴리며, 상황만 살폈다.
그들 눈에 비친 전황은 시시각각 변했다.
키이, 키이!
코카트리스는 모두를 무시한 채, 자기 몸에 달라붙은 해골 전사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격한 몸부림으로 달라붙은 해골 전사를 뿌리쳤고, 해골 전사가 바닥에 쓰러지면 가차 없이 발로 짓밟거나 혹은 닭이 콩을 쪼아 먹듯, 해골 전사의 두개골은 제 부리로 쪼았다.
해골 전사들은 나름 잘 피했고, 때때로는 코카트리스의 몸뚱이에 재차 칼을 찔러 넣었지만, 해골 전사들만으로 전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해골 전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열이었던 숫자가 이제는 넷밖에 남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었다.
넷이 셋이 되고, 셋이 둘을 거쳐 하나가 된다면, 코카트리스의 관심은 다른 이를 향하게 될 터.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야?’
‘포메이션이라도 바꿔야지.’
공대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언제까지 이대로 얼음땡 장난을 할 수는 없다.
“경고했을 텐데?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만 히르칸이 대응을 막았다.
그 이유.
‘지휘권은 절대 못 넘겨.’
상황을 본인이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페라또가 히르칸, 자신을 노린다는 확신이 있는 상황에서 페라또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그저 말만으로,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만으로 지휘권을 가져온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제는 실력을 보여줄 때다.
‘진짜 지휘가 뭔지 보여주지.’
히르칸, 그가 보석을 꺼냈다. 검다기보다는 시커멓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탁한 흑색빛을 품은 보석은 히르칸의 움켜쥔 손안에서 검은 구정물이 되었다.
뚝뚝, 떨어진 검은 구정물이 바닥을 적셨다.
쿠쿠쿠!
땅바닥이 울음과 함께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7미터나 되는 몸길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뱀, 뱀 골렘이었다.
재료가 된 보석의 주인은 블랙 아나콘다!
워로드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뱀 타입 몬스터들 중에서도 먹잇감을 휘감는 재주만큼은 두각을 나타내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뱀 골렘은 히르칸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코카트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콰콰콰!
바닥 위를 기어가는 뱀 골렘은 블랙 아나콘다와의 움직임에 비해 우악스럽고, 거칠고, 투박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키이!
코카트리스와 거리가 지척이 되었을 때, 여전히 해골 전사를 상대하느라 한 눈이 팔린 녀석을 단숨에 휘감는 솜씨는 블랙 아나콘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단단해지기!”
곧바로 히르칸이 단단해지기 스킬을 사용했다. 흙으로 된 골렘이 돌처럼 굳었다.
쿠웅!
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 코카트리스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몇몇 유저들이 숨을 꿀꺽 삼켰다.
‘저런 방법이?’
‘기똥차구만!’
찰흙 놀이 스킬을 이용해 뱀 골렘을 만들고, 그 뱀 골렘으로 표적을 휘감은 후에 단단해지기 스킬을 쓴다?
멋진 조합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
키이이!
당하는 코카트리스 입장에서는 비명이 나올 지경이다. 코카트리스는 자신의 온몸을 휘감은 뱀 골렘, 돌덩이가 된 녀석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뿌득, 뿌득!
물론 코카트리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녀석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칠 때마다 뱀 골렘에 균열이 갔다.
그 광경을 보던 이들이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이거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공격 타이밍인데?’
코카트리스를 완벽하게 결박했다.
동시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뱀 골렘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네크로맨서가 아닌 유저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길지 않았다.
1분 남짓.
사실 이마저도 엄청난 일이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서 보스 몬스터를 1분이나 잡아주는 건, 유저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보통은 이 타이밍에 작업을 한다. 마법으로 준비하거나, 스트라이커들이 달라붙어 갑옷을 해체하거나, 포메이션을 바꾸거나.
하지만 모두가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움직여?’
‘명령은?’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까. 히르칸이 그리 말했으니까.
그 무렵, 히르칸이 보이스톡 프로그램을 조작했다.
“골라.”
단체가 아닌, 1대1 대화를 시도했다.
- 뭐?
대화 상대는 페라또였다.
“나랑 같이 코카트리스를 상대할 건지, 아니면 나랑 코카트리스를 같이 상대할 건지.”
- 그게 무슨…….
뿌득, 뿌드득!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코카트리스의 몸부림에 뱀 골렘의 온몸에 균열이 생겼다.
이제 분 단위도 아닌, 초 단위 시간이 남았다.
페라또는 다급해졌고, 히르칸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누가 사주했지?”
그 순간 페라또는 선택을 내렸다. 지금 히르칸의 모습을 보면, 보통이 아니다. 또한 그는 페라또의 의중을 알고 있다. 결정적으로 지금 이 히르칸이 작심하고 레이드를 방해한다면, 페라또는 결코 코카트리스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히르칸을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는 일
- 아, 아폴로. 아폴로 길드다.
히르칸이 곧바로 보이스톡 설정을 바꾼 후에 모두에게 소리쳤다.
“마법사 마법 준비, 사제들은 스트라이커에게 풀버프 주고, 마법 폭격 후에 스트라이커들이 달려든다.”
공대장이 아닌 히르칸의 외침. 보통은 공대장이 아닌 이의 명령은 개소리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나왔다.
- 여긴 서쪽 마법사 팀이다. 시간이 부족해.
- 맞아! 지금 캐스팅 들어가면 못해도 1분은 필요하다고!
- 사제팀입니다. 풀버프 한 번 돌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모릅니까?
시간이 더 필요하다!
히르칸은 레이드를 하다 보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그 말에 피식, 미소를 흘렸다.
시간벌이.
히르칸이 가장 자주 했던 일이다.
“시간은 내가 번다.”
히르칸이 곧바로 새로운 해골 전사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소환된 해골 무리 중심에는.
[특수능력‘기사도’가 발동합니다]
해골 기사가 있었다.
14.
우레사냥꾼의 우레여왕, 레드불스 길드의 마타도르, 히드라 길드의 퍼스트 헤드.
이들의 공통점은 30대 길드라는 거대한 길드의 우두머리라는 것과 검사 클래스 유저라는 것 그리고 언제나 최전선, 몬스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지휘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혹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정도로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 아니냐고.
하지만 그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최전선에서 싸우기에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워로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혹은 탱커다. 최전선에서 몬스터를 다루는 자들이 사실상 보스 몬스터 레이드의 성패를 좌우한다.
당연히 실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나 탱커가 지휘하는 레이드는 느낌이 다르다.
지금 그랬다.
“몸 부르르 떤 거 봤지?”
- 어 그랬나?
“3페이즈 돌입 징조인 게 분명해.”
- 어떻게 하지? 3페이즈 내용 모르잖아?
“모르면 정석대로 해야지. 탱커들을 동서남북으로 포메이션 잡아. 돌발 상황 대비해. 마법사들 강력한 마법 한 방 준비하고.”
- 마법 투하 위치는?
“내가 정하지. 내 귀여운 해골들이 몸 바쳐서 시간을 끄는 거니까, 헛방 날리면 각오하도록.”
- 예스, 보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 그 바다 위 부표나 다름없는 코카트리스의 등 위에서 레이드를 지휘하는 히르칸의 솜씨는 이번 레이드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뛰어났다.
그 증거는 코카트리스의 온몸에 가득했다.
히르칸, 그가 코카트리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곧장 해골 전사를 이용해 코카트리스의 어그로를 돌렸을 때, 보이는 코카트리스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입고 있던 갑옷은 사라졌고, 회색빛 가죽은, 마치 가죽을 벗긴 후 뒤집어서 입은 듯한 몰골을, 처참하
기 그지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히르칸의 지휘가 완벽했다는 증거였다. 이제 코카트리스에게 방어력이란 개념은 무의미한 개념이 됐을 것이다.
“카운트다운 들어간다.”
해골 전사를 미끼 삼아 자리에서 벗어난 히르칸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런 히르칸의 입에서 제로!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쿠어어어!
불로 만들어진 거대한 곰 세 마리가 코카트리스를 향해 돌진했다.
코카트리스의 머리 위로는 생성된 수십 개의 얼음창들이 창끝을 내세운 채 추락했다.
절정은 코카트리스의 머리 위에 생성된 시커먼 구름이 토해내는 노란 섬광이었다.
꽈르릉!
120레벨, 유니크 등급의 마법 메가 선더볼트가 떨어지는 순간, 모두의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그렇게 연쇄적으로 발동된 마법들의 위력은 땅을 갈아엎을 정도였다. 초목 따위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키이이!
하지만 그 공격 속에서도 코카트리스는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 질린다, 질려.
- 방어력이 0이나 다름없는데, 이 정도 마법을 맞고 버티다니, 대체 뭐하는 놈이야?
- 뭐하는 놈이긴, 몬스터지.
그 광경을 보고 공대원들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히르칸이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뚝뚝!
움켜쥔 주먹 사이로 시커먼 물방울이 떨어졌다.
쿠쿠쿠!
땅이 들썩거리며, 곧바로 뱀 골렘이 등장했다.
뱀 골렘은 엉망이 된 땅덩이 위를 잽싸게 가로지르며 코카트리스와의 거리를 시시각각 좁혔다.
코카트리스가 그런 뱀 골렘을 바라보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흉물스러운 녀석에게 남은 건 독기밖에 없어 보였다. 코카트리스는 거대한 부리를 이용해 뱀 골렘의 몸을 쪼았다. 콰직! 코카트리스의 부리가 뱀 골렘의 몸뚱이 깊숙이 박혔다.
그와 동시에 뱀 골렘이 몸을 놀려, 코카트리스의 몸부터 몸통 부근까지를 휘감았다.
“단단해지기!”
곧바로 골렘이 돌이 되었고, 코카트리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코카트리스가 몸부림을 치자, 곧바로 골렘의 몸뚱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히르칸이 소리쳤다.
“30초, 스트라이커들 피날레다.”
- 라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풀버프를 받은 스트라이커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야 하는 스트라이커들은 그 누구보다 지휘관을 의심한다. 지휘관을 믿지 못하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히르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는 스트라이커의 모습은, 그들이 히르칸의 실력과 지휘를 완벽하게 믿는다는 증거였다.
‘마무리만 남았군.’
완벽한 지휘.
‘오늘 쓴 돈은 전부 페라또에게 청구해야지.’
동시에 완벽한 계산을 마치던 히르칸의 눈에.
푹!
코카트리스를 향해 날아온 화살이 코카트리스의 몸에 꽂히는 광경이, 그 단 한 발의 화살에 그 질기기 그지없던 코카트리스의 목숨이 끊어지는 광경이 들어왔다.
- 뭐야?
- 누가 화살 날렸어?
- 활 가진 놈이 워로드에 있을 리 없잖아!
모두가 당황했다.
오직 히르칸만이 당혹감을 잊은 채,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 히르칸의 귀로.
[타락한 엘프가 등장합니다. 추적하십시오]
퀘스트 진행을 도와주는 알림이 들렸다.
15.
헤비빈은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상황이 풀리는군.’
트리플윙과의 전쟁으로 궁지에 몰렸던 빅스마일은 최근 여러 호재를 만났다. 중국 인기 배우를 섭외한 워로드 관련 프로그램이 라이브 채널을 넘어, 중국 공영 방송에 편성되었다.
사실 프로그램 기획 자체는 예전에 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편성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방송이 시작됐다. 그런데 그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트리플윙과의 전쟁도 소강 사태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두 길드 사이의 분위기는 안 좋았지만, 당장 서로의 길드 운명을 건 사생결단은 피하고자 했다.
특별한 교섭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언더풋 길드들이 연맹을 통해 그 두 길드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식에, 어부지리의 희생양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다시 전력을 추스르면,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분명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그래도 충분히 반등을 할 여지를 마련해뒀다는 것에 헤비빈은 감사했다.
기분도 좋았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저기, 혹시 이거 알고 계십니까?
빅스마일 길드에서 아이템을 관리하는 직원이 갑자기 헤비빈에게 연락을 했다.
“뭐 말인가?”
- 저번에 말씀해주신 대로 아폴로 길드에서 아이템 대여를 요구하면, 대여해주라고 하셨잖습니까?
아폴로 길드.
그 단어에 헤비빈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다시 풀어졌다.
“그래, 내가 그랬지.”
아폴로 길드에 약점이 잡힌 헤비빈은 아폴로 길드의 편의를 조금씩 봐주고 있었다. 아이템 대여도 그랬다. 아폴로 길드가 필요하다면 아이템 대여를 해주도록, 힘을 썼다.
솔직히 그게 문제가 되리란 생각은 안 했다. 아이템 대여를 해줄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그 아이템을 잃어버렸을 경우인데, 아폴로의 재력을 고려하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이야기가 언급되는 걸까?
- 최근 아폴로 길드가 유니크 아이템을 비롯해 꽤 많은 아이템을 대여해갔습니다.
“혹시 잃어버린 건가?”
여기서 헤비빈은 차라리 아폴로가 아이템을 잃어버렸기를 소원했다. 그럼 그걸 빌미로 대충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 그건 아닌데…… 그 유니크 아이템이 아무래도 붉은 호수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헤비빈의 소원은 바로 물거품이 됐다.
“뭐?”
붉은 호수.
헤비빈이 모를 리 없는 곳이다.
‘아폴로 길드가 붉은 호수에 갔나?’
아폴로 길드의 핵심 유저들 레벨대를 떠올린 헤비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폴로 길드가 못 갈 곳은 아니지만, 붉은 호수는 아폴로 성격에 맞는 장소가 아니었다.
일단 그곳은 아폴로가 감히 길드를 앞세워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폴로가 일반 필드에서 하는 것처럼, 붉은 호수에서 행동하면 아폴로는 박살이 난다.
더욱이 아폴로는 거기서 사냥을 할 만한 실력이 없다.
‘아니야. 그 돼지놈이 거기 갈 이유는 없어.’
보스 몬스터 레이드는 아이템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본인의 실력이 매우 중요하다. 아폴로는 그 실력이 없다. 그런 그가 붉은 호수에 가봤자 자신이 허접쓰레기란 걸 자각할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뒤에서 경험치나 받아먹는 것뿐.
그 순간 헤비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최근 소식.
‘설마…….’
붉은 호수에 타락한 그레이 코카트리스가 등장했고, 녀석을 잡기 위해 누군가가 공격대를 모집한다는 소식.
그리고.
‘……하회탈을 잡으려고?’
그곳에 하회탈이 등장했다는 소식.
두 가지 소식을 합친 헤비빈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의 머릿속에 안 좋은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만약 아폴로가 빅스마일로부터 빌린 유니크 아이템을 이용해, 하회탈을 잡으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과연 그 일에 대한 책임자는 누가 될까?
‘……아닐 거야.’
헤비빈이 다급하게 아폴로에게 연락을 했다.
< 31화. 타락한 엘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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