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타락한 엘프 (1). >
1.
몸길이 10미터, 두 발과 날개를 가진 짐승은 닭과 비슷했다. 하지만 깃털 대신 도마뱀의 질긴 회색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꼬리는 공룡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길쭉했다.
또한 볏이 인상적이었다. 머리 위에 달린 붉은 볏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였고, 부리 아래로 늘어진 아랫볏은 은은한 빛을 내며, 묘한 불길함을 풍겼다. 그 볏 사이에 있는 부리는 거대한 창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녀석의 몸통 위를 덮고 있는 갑옷이었다. 말의 안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붉은 갑옷이었다.
이름은 그레이 코카트리스.
120레벨의 중형 몬스터로 붉은 호수에 위치한 많은 붉은 호수 중 하나를 자기 식수로 삼는 녀석이었다.
쉽게 볼 순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녀석.
붉은 호수에서 4주째 사냥을 진행 중인 갓텐 파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잡아본 녀석이었다.
“젠장!”
하지만 지금 반응은 앞선 다섯 번과는 달랐다.
“저번 주에 타락한 몬스터를 잡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게 말이 돼?”
언성 높은 투정에 그레이 코카트리스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녀석의 눈동자는 회색빛 호수에 검은 잉크를 잔뜩 떨어뜨린 듯, 검은색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바라본 갓텐 파티 소속 열 명의 유저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해?”
“붙어야지.”
“쉽지 않을 텐데?”
“저 새끼 다리 빠르잖아? 도망치면 서너 명은 죽을 거야. 차라리 여기서 붙으면서, 헬프 요청하는 게 나아.”
그 순간.
“물어!”
그레이 코카트리스를 예의주시하던 한 명이 소리쳤다. 모두가 그레이 코카트리스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녀석이 부리를 크게 벌린 게 보였다. 벌린 부리는 사람 머리통도 들어갈 정도로 컸다.
그렇게 벌린 부리에서.
끼루루루!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이 터졌다. 괴성은 소리가 아닌 바람이 되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위력이 상당해, 붉은 호수를 채우고 있는 초목들이 파르르, 몸을 떨 정도였다.
그 괴성 사이로.
[타락한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괴성이 엄습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감소합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움직임이 15퍼센트 느려집니다.]
알림이 들렸다.
[신비한 탄산 캔디가 공포와 저주를 무효화합니다.]
열 명은 그 알림 이후 새로운 알림을 들었다. 일찌감치 입에 머금고 있던 소비 아이템, 신비한 탄산 캔디를 씹은 덕분이었다.
톡톡, 열 명의 입안에서 소소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묵직한 갑옷, 거대한 방패, 무시무시한 해머를 들고 있는 유저 두 명이었다. 비슷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 둘이 여전히 괴성을 내지르는 그레이 코카트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개중 한 명이 해머를 높게 늘며 소리쳤다.
“라이트닝 스턴!”
외침과 함께 한 명이 던진 망치가 바퀴처럼 휘리리, 회전하며 날아갔다.
파직, 파지직!
회전하면서 뇌전을 머금었다. 심지어 날아가는 망치는 야구선수의 변화구처럼 휘어지는 궤적을 그리며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머리를 제대로, 정확하게 후려쳤다.
콰앙!
폭발음이 터졌고,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괴성이 멈췄다.
괴성을 멈춘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시선이 망치를 던진 자를 정확하게 향했다.
망치를 던진 유저가 방패를 앞세운 채 이제 닥칠 공격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 사이 나머지 여덟 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 명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준비했고, 두 명의 스트라이커들은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뒤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로 잽싸게 이동했다. 사제 두 명은 마법사 뒤에서 대기했고, 한 명은 스트라이커를 따라 이동했다.
분주한 움직임.
그 움직임에 정점을, 개전을 알리는 소리를 찍은 것.
까앙!
그레이 코카트리스의 부리가 탱커의 방패를 제 부리로 세차게 내리치는 소리였다.
2.
“속보! 속보!”
스마우프 빌리지.
붉은 호수 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스마우프 빌리지는 그렇게 큰 마을이 아니었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정확히 12채가 전부였다. 개중 가장 큰 3층짜리 건물은 토벌협회 지부로, 이곳을 찾는 모든 유저들은 당연하게 토벌협회 지부에 모여 있었다.
“갓텐 파티 전멸!”
그렇게 1층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유저들에게 속보라는 단어는, 호수 위에 떨어진 우박과도 같았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파문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갓텐 파티가?”
“걔네들 평균 레벨 127레벨이잖아? 그런데 전멸이라니, 붉은 호수에서 전멸할 수준이 아니잖아?”
“사실상 졸업 레벨이지. 훈련하려고 여기서 좀 더 사냥을 하는 중이고.”
파문이 지나간 자리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그 의구심을 깔끔하게 자른 건.
“타락한 그레이 코카트리스에 당했네!”
속보를 외친 이가 아닌 다른 이의 설명이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몇몇 이들이 푸후! 푸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또 타락이야?”
“요즘 들어 붉은 호수가 이상하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툭 하면 타락 몬스터가 리젠되다니.”
“저번 주에 한 놈 잡았는데,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버그는 아닐 테고.”
“리젠 타임이 바뀐 거겠지.”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당혹감에 몸서리를 차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몇 명이 곧장 의견을 냈다.
“그냥 놔둘 순 없고, 잡긴 잡아야 하는데 저번 주에 그랬던 것처럼 공대를 조직해야 하나?”
“공대를 만드는 거야 할 수 있는데, 과연 공대에 가입할까? 저번 공대, 손익 계산하니까 참가자당 3,4백 골드 손해 봤다는데?”
“손해 봤어? 재료 보석 꽤 나왔잖아?”
“많이 죽었잖아. 게임오버 당한 애들 위로금 챙겨주는 것 때문에 이익이 날 리가 없지.”
“너무 세. 특히 최근 등장하는 놈들은 유독 더 세. 갑옷 입고 등장하잖아? 30대 길드 소속 1군 레이드 팀이 나서야 해. 여기서 파티 단위로 노는 애들이 급조한 공대로는 쉽지 않아.”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 그들 앞에.
“속보!”
새로운 속보가 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속보를 외친 이를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한 명이 말했다.
“여기로 하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벌협회의 문이 열리며, 한 유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어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볍기 그지없는 검은색 천옷, 도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등장한 유저는 얼굴을 한국이란 나라의 전통적인 하회탈이라는 독특한 탈로 가리고 있었다.
“……탈이 오는 중이래.”
“응, 저기 있네.”
그 대답을 들은 후에야 속보를 외친 이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등장한 유저, 히르칸을 향했다. 히르칸이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기보다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쏟아지는 눈빛 앞에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드디어 내 인기가 이 정도가 됐군. 캬, 게임 할 맛 나네.’
3.
붉은 호수는 120레벨이 넘는 유저들의 사냥터로, 여러 사냥터 중에서도 인기가 높다.
인기가 높은 이유는 세 가지다.
일단 120레벨대 중대형 몬스터가 나온다. 핵심은 보스 몬스터가 아닌 일반 등급의 중대형 몬스터가 나온다는 점. 워로드에서 필드에서 마주치는 중대형 몬스터는 대부분 보스 몬스터다. 보스 몬스터를 연습 상대로 삼는 건, 30대 길드 혹은 그에 준하는 언더풋 수
준의 길드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일반 파티나, 소규모 길드가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 대비해 연습을 하기에는 정말 좋은 무대다.
두 번째는 시간 대비 경험치다. 중대형 몬스터는 일단 한 마리만 잡아도 들어오는 경험치가 매우 쏠쏠하기 때문에 여러 마리 몬스터를 잡기 위해 머리 아플 이유가 없다. 구할 수 있는 재료 코인의 양도 많고, 보석 재료가 등장할 확률도 꽤 높다.
세 번째 이유는 룰이 있다. 최고 레벨의 유저들이 모여 있는 만큼, 비매너 행위를 하기가 힘들다. 그 어느 것보다 암묵적인 룰이 강한 무대인 만큼, 사냥에만 신경을 쓸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첫 번째 이유다. 중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줄 알아야, 워로드의 꽃인 레이드를 즐길 수 있다. 레이드를 할 줄 모르면, 평생 중소형 몬스터만 잡으며 레벨업을 해야 하는 지루한 나날들 보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사냥터에 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 자리가 없으면, 순번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자리? 자리라면 꽤 있지.”
그런데 히르칸이 왔을 때 운 좋게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히르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기로는 자리가 없어서 못해도 이틀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일단 지금 파티 하나가 전멸했고, 그 여파로 몇몇 파티가 일을 접고 다른 곳으로 갔거든.”
히르칸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누군가 히르칸의 뒤로 다가왔다. 히르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한 사내가 보였다. 그럴싸한 갑옷을 입고 있는 유저였다. 금발에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 사내가 히르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회탈인가?”
히르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워낙 적이 많은지라, 접근하는 이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보다는 의심이 먼저 들 수밖에.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일단은 하회탈이란 이름은 내걸고 활동은 하고 있지.”
말과 함께 히르칸이 상대의 아이템 세팅을 살폈다.
‘레벨은…… 뭐, 대충 120레벨 이상이겠지.’
솔직히 무슨 아이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히르칸이 모든 아이템을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또한 아이템 디자인은 전적으로 유저 마음이다. 특별한 재료가 아니면, 사실 아이템을 디자인만 보고 구분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는 그쪽은?”
“골든 브라더스 길드 소속 페라또다.”
골든 브라더스.
이 대목에서 히르칸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적은 아니네.’
잘 알고 있는 길드다. 하회탈 길드가 승승장구할 당시, 하회탈 길드와 함께 30대 길드의 아성을 나름 넘볼 수 있는, 언더풋 대표 길드로 유명한 길드였다. 지금도 30대 길드와 비슷한 세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페라또란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별 볼 일 없는 놈이란 거겠지.’
그럼 둘 중 하나다. 사정이 있어서 게임을 접었거나, 히르칸 생각대로 별 볼 일 없는 놈이거나.
“골든 브라더스. 대단한 길드하고 안 좋은 관계를 맺은 적은 없는데, 무슨 일이지?”
“싸움이나 시비를 걸려고 온 건 아니야. 단지 제안을 하려고 왔을 뿐.”
“길드 가입 제안이라면 사양하겠어.”
대답을 한 히르칸의 배가 살짝 아파왔다.
‘아, 레드불스 영입 제안이 끝내주긴 했는데.’
얼마 전 체브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대화 이후 레드불스가 라이브 채널로 방송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최근 광고 단가와 수익을 알아봤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속이 쓰릴 정도의 금액이 나왔다.
어쨌거나 그런 제안도 거절한 히르칸이 골든 브라더스 가입 제안을 받을 이유는 없다.
골든 브라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랑 같이 타락한 그레이 코카트리스를 잡을 생각 없나?”
그 제안이 히르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 온 이후 세 번째였다.
‘타락한?’
그러나 이내 상황을 이해한 히르칸의 눈빛이 달라졌다.
타락한 그레이 코카트리스.
‘가는 날이 장날이네?’
분명하다. 타락한 엘프가 이곳에 있다는 증거다. 히르칸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서. 이미 계획이 있어서, 다른 일을 하긴 좀 그렇군.”
여기서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는 건 하책이다. 히르칸의 진짜 목적은 타락한 몬스터가 아니라, 그 타락한 몬스터를 만들어낸 타락한 엘프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히르칸은 금방 견적을 냈다.
‘나한테 제안을 할 정도면 급조된 단체라는 의미. 이 바닥에서 급조된 무리는 한계가 명백하지.’
호흡은 중요하다. 아무리 실력 좋은 유저들이라고 해도 갑자기 호흡을 맞추라고 하면 못 맞춘다.
하물며 유명하다고 해도, 이곳 무대가 처음인 히르칸에게 다짜고짜 제안을 한다는 건, 희생양 혹은 히르칸의 이름값이 필요하다는 의미.
이런 제안을 덥석 받을 정도로 히르칸은 호구가 아니다. 생긴 것만 호구지.
페라또는 그런 히르칸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깝군. 그 유명한 하회탈과 한 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는데.”
페라또가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든 잡을 속셈인 거 같은데…… 골든 브라더스를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히르칸, 그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 31화. 타락한 엘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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