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86화 (86/192)

< 30화. 레드불스와의 거래 (2). >

4.

넓은 숲을 채우고 있는 나무들, 그사이에 너부러진 작은 신장의 고블린 한 마리를 세 유저가 포위하듯 둘러싸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그들은 승리자였지만, 표정은 그다지 승리자에 가깝지 못했다.

개중 한 명이 기어코 패배자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아, 진짜 못 해먹겠네. 무슨 게임이 이렇게 어려워?”

“영상에서는 몬스터 서너 마리도 혼자서 해치우던데, 역시 아이템을 구해야 하나? 진짜 너무 힘들다. 이러다가 언제 레벨업을 하냐? 난 빨리 승급을 하고 싶다고!”

“아이템 같은 소리 하네, 요즘 아이템 시세가 장난이 아니야. 오히려 낮은 레벨 아이템이 더 비싸다니까. 진짜 내가 그동안 게임에 돈을 엄청 썼지만, 이렇게 비싼 게임은 처음이야.”

투정을 부리는 세 명의 유저들이 있는 곳은 10레벨에서 20레벨 사이의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사냥터, 팅크 숲이었다.

현재 워로드의 인기를 가장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몬스터 우리가 먼저 봤어!”

“공격은 우리가 먼저 했거든?”

“야! PK로 붙어!”

“저 새끼 죽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워로드의 인기는 곧 신규 유저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그렇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신규 유저들 때문에 30레벨 이하 사냥터의 몬스터들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덕분에 낮은 레벨의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사냥터는 몬스터보다는 유저들이 만들어낸 어수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두 유저가 쓰러진 나무기둥을 의자 삼은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건 10레벨 유저들이 가장 애용하는 토벌협회 보급품이었다. 워로드 유저들의 기준으로는 걸레로도 쓰지 않는 아이템들, 그런 아이템을 입은 유저들을 신경 쓰는 건 시간 낭비였다.

개중 한 명이 하회탈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이 역시 유저의 눈길을 끌긴 부족했다. 하회탈을 뒤집어쓴 유저를 초보자 사냥터에서 보는 건, 때때로 몬스터 보는 것보다 쉬웠으니까.

당연히 아무도 몰랐다.

“하회탈…… 굉장히 보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말이야.”

이 두 명 중 하회탈을 쓰지 않은 이가 워로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 중 한 명인 레드불스의 길드 마스터, 마타도르 체브이며.

“나 역시. 그다지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그쪽하고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하회탈을 쓰고 있는 다른 한 명이 하회탈 유행을 불러온 장본인인 하회탈 히르칸이란 사실을, 그들을 곁눈질로 바라본 이들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니, 그들이 여기서 제 입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해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삼았다.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무대였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 둘이 이곳에서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남을 제안한 건 그쪽 아니었나?”

“설마 레드불스가 거래 상대일 줄은 몰랐지.”

“그럼 만남을 요청한 이유는?”

“우리가 진행하는 퀘스트 루트와 그쪽이 진행하는 퀘스트 루트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까. 경쟁자이지만, 다른 길을 달리는 만큼 골라인에 닿기 전에는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단지 이런 거물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

손을 잡기 위해서.

제안은 레드불스가 먼저 받았다. 브로커가 레드불스에게 ‘정보 제공자가 그쪽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한다’ 라는 말을 전달했다. 당연히 레드불스는 고민했다. 그런 고민에 마침표를 찍은 건, ‘하회탈이 대표자 자격으로 자리에 나온다’ 라는 말이었다.

그때 체브가 직접 나오기로 결심을 했다.

‘설마 체브가 나올 줄이야.’

‘하회탈과 그를 손에 쥐고 있는 배후와 만나는 자리, 격을 높여서 손해 볼 건 없다.’

그게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였다.

“이유가 비슷한 만큼, 거래는 무난하겠군.”

체브의 대답에 히르칸은 대답 대신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옆에 앉은 체브에게 건네줬다.

“일단 하던 거래부터 마무리하자고.”

체브 역시 쪽지를 꺼내 히르칸에게 건네줬다. 서로가 서로의 쪽지를 주고받고, 그 자리에서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장소가 적혀 있는 쪽지였다. 히르칸이 받은 쪽지에는 두 곳, 체브가 받은 쪽지에는 세 곳.

추가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답이 아니니까. 답을 가리키는 방향 정도면 충분하다. 수백 개가 넘는 선택지가 세 개로, 두 개로 좁혀진 것만으로도 이미 큰 수익이었다.

이내 그 둘이 손에 쥔 쪽지를 찢었다.

이것으로 그들이 진행하던 거래가 끝이 났다.

“혹시 우리 길드에 가입할 생각 없나?”

이제는 다른 거래를 할 때.

“우리 길드가 스폰서 힘이 그리 크진 않은 편이라서 최고 대우를 보장해주긴 힘들지만, 어디 가서 직업이 워로드 게이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대우는 해주지.”

체브가 고개를 돌려 히르칸을 바라봤다. 히르칸은 그 제안에 곧바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계약이 있어서.”

“역시. 배후가 있었군.”

체브의 말에 히르칸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만약 내가 무소속이었으면 어느 정도 제안을 해줄 생각이었지? 그건 듣고 싶은데.”

“방송 프로그램 3개 편성, 방송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수익의 2할 지급. 출연료는 이 바닥에서 최고 수준의 대우.”

그 말을 듣는 순간 히르칸은 저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켰다.

‘어? 진짜 그렇게 주려고 한 건가?’

체브의 제안은 단단히 각오를 마친 히르칸 역시 혹할 정도로 꽤 대단한 대우였다.

보통 워로드 관련 방송은 1개 방송에 평균적으로 10개 안팎의 광고가 붙는다. 물론 더 붙일 수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기 방송 같은 경우는 광고 단가가 상당하다.

그런 광고 수익의 2할을 떼어주는 건, 특급 대우가 맞다. 보통은 1할 미만 혹은 아예 안 주는 경우도 있다.

‘내 몸값이 오르긴 올랐네.’

히르칸은 혹하는 마음과 살짝 입가에 지어지려는 미소를 꾹 참았다.

“아쉽군. 먼저 그쪽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꾹 참으면서,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체브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저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 제안을 했는데도 못 나온다는 건, 그 어떤 길드도 기본적인 제안으로 데려올 수 없다는 의미.’

하회탈이 탐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데려오기 위해서 체브와 레드불스가 할 수 있는 제안에는 한계가 있다. 이 이상은 체브가 자기 깜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안 될 때는 빨리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영입은 힘들지만, 손을 잡는 건 가능하겠지.”

이것으로 영입 제안도 끝이다.

히르칸은 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 루트가 다른 만큼,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손을 잡아도 무방하다. 이미 그럴 마음이 있기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추가로 합의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럼 연락 방식은 어떻게 할까?”

연락 방법만 결정하면 된다.

“거래는 지금처럼.”

“브로커를 통해서?”

히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브가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이런 거래는 브로커를 통해서 하는 것보다는 핫라인을 만들어주는 게 좋다. 하지만 반대로 브로커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만큼, 이 자리를 마련해준 브로커에 대한 대접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당장 핫라인을 만들 만큼의 관계는 아니다. 레드불스 입장에서 하회탈을 무조건 신용할 근거가 없다.

“좋아.”

자리에서 이미 일어나 있던 체브가 등을 돌렸다.

“그럼 다음에…….”

그 순간.

‘지금이다.’

히르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빅스마일을 조심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체브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체브의 눈에 보인 건, 자리를 잽싸게 벗어나는 히르칸의 등뿐이었다.

5.

‘후우, 간이 떨리네.’

전력으로 질주하던 히르칸이 제 손으로 자신의 가슴 아래를 쓰다듬었다.

‘일단 성공인가?’

오늘을 위해서 히르칸은 많은 준비를 했다. 표정 연기를 위해서, 거울을 보고 ‘빅스마일을 조심해!’ 그 대사를 백 번은 외쳤다.

‘이걸로 최소한 레드불스가 빅스마일과 손을 잡을 일은 없겠지.’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히르칸이 굳이 레드불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거래를 요청한 건, 빅스마일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히르칸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없으니까.

사실 레드불스가 빅스마일을 조심해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다.

때문에 레드불스가 이유 없이, 근거 없이 던진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어.’

자신이 만든 결과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한 히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30대 길드 사이에 벽을 만들어두어야 해.’

이번 일을 기획하면서 히르칸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30대 길드는 히르칸이 밟아야 하는 상대다. 그런 히르칸이 조심해야 하는 건, 하나의 길드에게 찍히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30대 길드들이 손을 잡고 히르칸을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30대 길드를 밟고 싶다면, 그들을 뛰어넘고 싶다면, 그들 관계를 망가뜨릴 필요가 있었다.

이간질.

히르칸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그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지. 어떻게든 놈들 사이가 좋아지는 건 막아야 해.’

히르칸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그보다…….’

이제는 머릿속 그림을 바꿀 때다.

체브가 준 쪽지에는 장소 두 곳이 적혀 있었다. 더불어 그 장소 중 한 곳을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사견도 달아줬다.

‘붉은 호수에 타락한 엘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니.’

그 장소는 바로 붉은 호수라는 무대였다.

12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사냥터로, 드넓은 숲에 작은 크기의 붉은 호수가 곳곳에 위치해 있다.

특이사항은 소형 몬스터가 다수 나오는 일반 사냥터와 달리 중대형 몬스터들이 등장한다는 점. 대형 몬스터 하나를 두고 다수의 유저가 달라붙는 레이드 타입의 사냥이 주류를 이루는 사냥터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레이드 훈련소!

“하하.”

‘아주 좋아.’

더불어 히르칸, 그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중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법을 제대로 훈련한 무대이기도 했다.

달리는 히르칸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향으로 가는 기분이군.’

6.

- 제 감이긴 한데, 아마 소금산에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두 곳은 근거가 빈약하고, 거의 끼어 맞춘 듯한 느낌이 들지만 소금산은 확실히 설정 등을 보면 확률이 높아요.

“소금산에 있으면 그쪽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도록.”

- 당연하죠.

하회탈과 거래가 끝나는 순간, 체브는 곧바로 자신이 가장 믿는 부하 동료와 통화로 정보를 전달했다. 하회탈이 알려준 세 곳 장소를 말해줬고, 곧바로 정보를 검색한 부하 동료는 자기 의견을 말해줬다.

보통은 여기서 통화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체브는 짧은 고민 후에 새로운 질문을 했다.

“빅스마일 길드가 위험한가?”

그 질문에 부하 동료는 곧장 대답했다.

- 빅스마일이요? 위험하죠.

“이유는?”

- 마스터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트리플윙하고 빅스마일이 싸우는 중이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빅스마일이 밀리고 있어요. 뭔가 반등할 여지는 없고요. 더욱이 빅스마일이 흔들리니까 언더풋 애들이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언더풋이?”

언더풋.

30대 길드에 포함되진 못했지만, 그 자리를 노릴 만큼 영향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는 길드들을 의미한다.

발아래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붙은 명칭이다.

언더풋 길드들이 노리는 건 라이브 채널이다. 라이브 채널만 확보하면 바로 30대 길드가 되는 셈이니까.

30대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 입장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체브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자세히 말하도록.”

- 언더풋 길드 몇 곳이 이번 기회에 합병을 해서 새로운 길드를 만들고, 빅스마일 길드의 라이브 채널을 먹어치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 소문이 돕니다.

“소문 수준인가?”

- 트리플윙에 언더풋 길드 몇 곳이 로비를 하는 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체브는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복잡하군.”

부하 동료가 실소 섞인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 바닥에서 오고 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잖습니까? 이미 게임이 게임이 아니게 됐는데, 이건 애들 장난이죠. 적어도 현실에서 아직 사고는 터지지 않았으니까.

부하 동료의 말에 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빅스마일이 위험하다는 이유는?”

- 라이브 채널 빼앗기는 순간 빅스마일은 개박살 납니다. 애초에 30대 길드 대부분이 순수한 방송 수익보다는 이 바닥에 뭐 좀 먹을 거 없나, 하고 투자한 투자자들 돈을 믿고 돈을 막 쓰는데, 여기서 라이브 채널 빼앗기면…… 상상도 하기 싫네요.

“정말 끔찍한 상상이지.”

- 아마 그런 상황이 오면 빅스마일은 게임 내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난리를 칠 겁니다. 터지기 직전 폭탄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빅스마일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

이제야 나오는 반문에 체브는 짧게 대답했다.

“빅스마일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누가? 라는 질문은 없었다.

체브가 이 정도까지 경계한 채 질문을 한다는 건, 그 이야기를 해준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니까.

- ……경계를 하라고 알려두겠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조언도 첨부했다.

- 빅스마일하고 적당한 거리도 두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게 좋겠어.”

빅스마일에 대한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부하 동료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 그보다 언제 오실 겁니까? 레이드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길드 마스터만 오시면 됩니다.

레이드!

그 단어가 체브의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체브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6시간 후, 바로 레이드에 돌입한다.”

이제는 다시 전장의 영웅으로 활약할 때다.

< 30화. 레드불스와의 거래 (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