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바헤임 부족 (3). >
8.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걸린 얄팍한 나무줄기를 엘프들이 총총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외줄 타기 같은 위험한 느낌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고무줄놀이를 하는 듯한 그 광경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런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내던 엘프들의 귀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쫑긋거렸다.
엘프들의 에메랄드색 눈빛들이 화살처럼, 한 곳을 향해 쏘아졌다.
그 눈빛이 닿은 곳에 히르칸과 그의 안내인 겸 감시자인 엘프 한 명이 있었다.
처벅처벅, 나무 사이의 외줄을 타고 다니는 엘프들과 다르게 땅을 밟고 다니는 히르칸과 엘프의 발소리는 유독 컸다. 그런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건 어느 나무 한 그루 아래였다.
“받아라.”
히르칸을 데려온 엘프는 히르칸에게 갑작스레 질기고 두꺼운 나무줄기 하나를 건네줬다. 나무줄기를 받은 히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나무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 끝에 나무로 만들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알아서 부러
진 나무들을 모아 만든 집이었다.
반듯함은 없었으나, 누추함도 없었고, 대신에 신비함만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이는 필시 넋을 잃을 정도의 신비함이었다.
‘지랄을 한다.’
하지만 히르칸은 넋을 잃지 않았다. 신비함은 처음 보는 자의 몫이었으니까.
“올라가라.”
엘프의 말에 히르칸은 이렇다 할 제스처 없이 곧장 나무줄기를 잡고 빠르게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발을 사용할 필요 없이, 팔만으로도 단거리 질주를 하는 듯한 속도로 올라갔다.
엘프는 그런 히르칸을 아래에서 노려봤다. 경계심에 적의를 진하게 섞은 그 눈빛은 히르칸의 발바닥을 차갑게 만들었다. 히르칸이 발아래를 살짝 바라본 후에 조소를 머금었다.
‘역시 난 잘생기거나, 예쁜 애들하고는 안 맞아.’
유쾌하지 못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은 히르칸이 나무집 바닥에 닿았다. 그 나무집은 문이 바닥에 있었다. 동그란 문, 지름은 약 1미터 남짓했다. 길가에 놓인 맨홀보다 좀 더 큰 크기였다.
똑똑!
히르칸이 줄에 매달린 채 머리 위에 달린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세상 너머로 얼굴 하나가 보였다.
젊은 외모, 나이를 짐작하라고 하면 사람 기준으로는 결코 30대를 줄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엘프는 히르칸이 본 엘프 중에 가장 인상적인 외모였다. 콧잔등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칼자국과 그 흉터 끝에 화살촉이 박힌 듯한 상처는 멀리서 보면 얼굴에
상처로 느낌표를 그린 듯했다. 그 상처는 흉측하기보다는 오히려 멋진 개성처럼 보였다.
‘느낌표 상처, 이 녀석이 드라네.’
NPC드라.
바헤임 부족의 부족장이며, 워로드의 엘프를 좋아하는 엘프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워로드 엘프 인기투표 남자부분에서 언제나 5위 내 순위를 차지하는 자다. 히르칸이 그 투표 결과를 보고 미친 새끼들, 할 게 그렇게 없나? 그렇게 외쳤던 적이 있었다.
히르칸은 그런 드라 부족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당겨 달라는 의미.
하지만 드라 부족장은 히르칸이 내민 손을 지그시 바라봤다. 1초, 2초, 3초…… 시간이 10초 정도 흐른 후에 드라 부족장은 손을 잡기 전에 말을 꺼냈다.
“올프님께서 보낸 사람이군.”
히르칸이 찬 결사대의 반지, 그게 아니었다면 드라 부족장은 그 말 대신 히르칸을 발로 차서 아래로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 말이 나온 후에야 드라 부족장이 히르칸의 손을 잡아 당겨줬고, 그제야 히르칸이 드라 부족장의 집안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엘프 집에 들어오긴 처음이네. 그동안 영상으로만 봤지.’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감상하기 위해서, 동시에 조금 전부터 계속되던 동영상 촬영을 위해서. 히르칸이 곳곳을 바라봤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천장이었다. 얇은 구멍, 물은 통과하지 못하고 빛과 바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천장 아래로 녹음이 흘러내렸다.
‘엘프 실크.’
방어구로 만들면 꽤 괜찮은 방어력과 가벼움 그리고 속성 저항력을 자랑하는 엘프 실크였다.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작은 방 안을 채우는 건,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 아니라 부러지고, 상한 나무들을 못 없이, 적당히 맞추어서 만든 듯한 가구들이 전부였다.
“앉게.”
언제 망가져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조촐한 의자에 히르칸이 앉았다.
이야기는 곧바로 시작됐다.
“그것을 가지고 왔나?”
“예.”
히르칸은 곧바로 품에 잘 보관하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 드라 부족장에게 건네줬다.
[퀘스트 ‘올프의 심부름’이 완료되었습니다.]
“음!”
주머니를 받은 드라 부족장은 곧바로 주머니를 연 후에 그 안에 든 것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스르르!
수은처럼 생긴 은빛 액체가 드라 부족장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곧바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곧바로 머리에 쓰는 은색 서클렛 모양을 갖추었다.
히르칸의 눈빛이 빛났다.
‘정화의 서클렛이구나.’
정화의 서클렛.
모든 것을 정화하는 신비의 연못, 순결의 연못 아래에서 캐낸 은을 이용해 만든 서클렛이다.
옵션은 착용 시 모든 부정한 효과로부터의 면역이다. 저주 스킬과 같은 디버프 스킬은 물론 무제한 해독 능력도 있다.
굉장한 아이템이다.
‘저거 하나면 소고기가 아니라 소를 살 수 있는데.’
직접 순결의 연못에서 은을 구하면 제작할 수 있지만, 순결의 연못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특정 보스 몬스터와 함께 등장하는 무대다. 굉장히 발견하기 힘들고, 그 안에서 캐낼 수 있는 은의 양은 랜덤이라서 정말 운이 좋아야 순결의 연못 한 곳에서 정화의 서클
렛 한 개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부르는 게 값. 같은 무게의 금보다 곱절 이상은 비쌀 것이다.
‘분명 배덕의 왕자 편 퀘스트 중에 정화의 서클렛을 주는 퀘스트가 있긴 하지.’
더불어 지금 히르칸이 진행하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들 중에는 정화의 서클렛을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가 있다. 지금 히르칸이 진행하는 퀘스트가 그 퀘스트일 수도 있다.
히르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 정화의 서클렛을 확인한 드라 부족장은 다시금 서클렛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딱딱하게 굳은 서클렛이 주머니에 닿자, 서클렛은 물이 되어 스르르, 주머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맙군.”
드라 부족장이 처음으로 히르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군.”
“올프님의 심부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과 함께 히르칸이 드라 부족장의 표정을 살폈다.
‘이게 끝?’
드라 부족장은 말없이 히르칸을 보고 있었다. 무심한 그 눈빛은 마치 ‘할 일이 다 끝났으면 그냥 가지 왜 거기 그렇게 있느냐?’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이게 아닌데.’
히르칸이 잠시 멈칫했다.
‘여기서 당연히 타락 엘프 퀘스트를 줘야 하는데?’
대장장이 올프가 정화의 서클렛을 바헤임 엘프 부족에게 준 이유, 바헤임 엘프 부족 출신으로 타락의 힘에 취해, 바헤임 엘프 부족을 배신한 타락 엘프를 잡아 그를 타락의 힘으로부터 정화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여기서 드라 부족장은 히르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타락 엘프를 잡으라는 퀘스트를 줘야 한다. 하지만 그는 히르칸을 그저 지그시, 세상에서 가장 무안한 인간을 만들고자 작정을 한 듯이 바라봤다.
결국 히르칸이 입을 열었다.
“혹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올프님께서는 제가 바헤임 부족을 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도우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올프가 그런 말은 한 적은 결단코 없다. 히르칸이 그런 그를 팔아먹을 만큼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의미.
드라 부족장은 그런 히르칸의 말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여기까지 심부름을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네. 그런 자네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 대답.
‘젠장!’
히르칸에게 최악의 경우가 생겼다.
‘레벨 제한 걸렸군.’
퀘스트 수행 가능 레벨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대개 레벨 제한이 거의 없다. 모든 이들이 자격 없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커트라인은 있다.
첫 번째였던 타락 백작 편은 1레벨에서 100레벨대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퀘스트다. 두 번째인 배덕의 왕자는 100레벨에서 200레벨 사이, 세 번째 퀘스트는 당연히 200레벨에서 300레벨 사이의 유저들을 대상으로 난이도가 설정되어 있다.
즉, 지금 히르칸이 진행 중인 배덕의 왕자 편은 기본적으로 100레벨이 넘는 유저들이 대상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히르칸의 레벨은 96레벨.
‘이런 날이 기어코 오는구나.’
우려는 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 우려가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히르칸이 대단해서 생긴 일이다. 게임이 제공하는 기준을 훌쩍 넘었다는 의미이니까.
‘역시 100레벨을 찍었어야 하나?’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레벨업.
‘4레벨. 지금 어느 정도 경험치는 채웠으니까 3.5레벨 정도만 올리면 되겠지. 그럼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리겠지?’
다른 건 없다.
퀘스트를 빨리 진행하고 싶으면 레벨을 올리면 된다. 그 외의 답은 하나도 없다.
답이 명쾌하니, 짜증은 나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충분히 100레벨을 찍을 수 있고, 지금 소모품도 충분하니까 레벨을 올린 후에 퀘스트를 받고, 클래스 타워가 있는 성으로 가서 승급을 하면 되겠지. 그 후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100레벨 아이템 하나 맞추고.’
생각을 마친 히르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9.
씽은 히르칸을 보는 순간 먼저 그를 불렀다.
“일은 잘됐나?”
히르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문제가 생겼나 보군. 그보다 엘프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니, 역시 대단하군. 하회탈의 퀘스트 진행 속도가 이 정도일 줄이야. 난 이곳에서 죽자 살자 지냈지만, 그런 퀘스트는 받은 적이 없는데.”
히르칸이 슬그머니 씽을 바라봤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괜히 떠벌리진 말아 달라고. 이런 사실 알려지면 주변에서 날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까.”
씽이 미소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딴에는 자신을 믿으라고, 그런 의미에서 지은 미소였겠지만 히르칸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히르칸이 반문했다.
“그러는 그쪽은? 평생소원을 풀었으니, 다음에는 뭘 할 생각이지?”
“바헤임 엘프 부족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이야.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퀘스트를 하면서 호감도를 높이고, 더 다음 퀘스트를 발견해서 퀘스트 지도를 만드는 게 일단 내 당장의 목적이다.”
말을 하는 씽은 히르칸이 이제까지 본 그의 표정 중에 가장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그게 하고 싶은 모양.
‘이게 이유였군.’
한편으로 히르칸은 왜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 씽이 구식이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뒤로 밀린 이유.’
그는 정말 제대로 게임을 즐겼다. 그에게 랭킹 같은 것보다는 워로드란 게임이 주는 판타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래, 잘해.”
이 근처에서 몬스터 수백, 수천 마리를 잡아봤자 당분간 레벨업은 턱도 없겠지만! ……이라는 현실적이고, 틀에 박히고, 꽉 막힌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건 충고가 아니다. 조언도 아니다. 씽은 틀린 선택을 한 게 아니다.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러는 그쪽은? 앞으로 일정은 말해줄 수 없나?”
“100레벨부터 찍으려고.”
“그래?”
그 순간 씽이 주머니에서 골드 코인을 꺼내 히르칸에게 건넸다. 히르칸의 표정이 바뀌었다.
‘오예!’
당연히 여기서 주는 돈은 내기에 건 돈이다. 히르칸이 잽싸게 받은 후에 숫자를 확인했다.
‘응?’
히르칸의 표정이 구겨졌다.
“야, 이건 10골드잖아? 약속이 다르네. 백 골드 주기로 했잖아?”
그 말에 씽이 피식 웃었다.
“고맙게도 천 골드란 말은 하지 않는군.”
“그 말을 기억하는 걸 보니, 천 골드 받아내도 될 것 같네. 남은 990골드는 언제 줄 거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히르칸의 표정이 굳었다.
‘장난하나?’
이런 계산은 철저히 해야 하는 법. 90골드란 돈은 무시할 수 없는 돈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이 결코 아니다. 그 돈이면 현실에서 라면을 한 달 내내 먹을 수 있다.
“지금 그쪽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칼을 팔면, 이런 거 수천 개는 줄 수 있을 텐데?”
“내 수중에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아니, 그럼…….”
“남은 돈은 아르바이트로 채워주지. 90골드짜리 일을 해주면 될 문제 아닌가? 레벨업을 도와주면 되겠지.”
그 말.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라서, 히르칸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라서, 히르칸은 씽의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어?”
결국은 이해했을 때.
“그러니까 버스를 태워준다는 말인가?”
히르칸이 기겁을 했다.
워로드에서 산전수전 모든 전쟁을 다 겪은 히르칸, 그가 워로드를 하면서 가장 크게 놀라는 순간이었다.
10.
[레벨이 올랐습니다.]
[타이틀 ‘숙련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네크로맨서’를 획득하셨습니다.]
[몸속에서 강력한 힘이 요동칩니다.]
레벨업이 끝나는 순간, 히르칸의 근처에 있던 씽은 히르칸과 기쁨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섬뜩한 표정으로 히르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이제 됐지? 난 나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그때는…… 내가 뭔가를 받아야겠어.”
그 말을 남기고 로그아웃을 준비했다. 히르칸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와, 8일 만에 100레벨을 찍다니.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씽의 도움을 받아 히르칸은 정말 본격적으로, 작심하고 레벨업을 위한 사냥을 했다.
그런 와중에 130레벨이 넘어가는 실력자가 본인의 레벨업을 전부 포기한 채 전폭적으로 도우미 역할을 해주자, 그 결과물은 히르칸의 상상을 초월했다.
열흘을 잡았던 걸, 8일로 단축했다. 100미터를 10초에 뛰던 걸 8초로 줄인 격이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이 엄청난 결과물에는 씽의 희생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시간을 히르칸을 위해 포기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로그아웃을 하며 점차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씽을 바라보며 히르칸은 묘한 감정을 품어야 했다.
멋지다, 미련하다, 대단하다, 나도 과연 저렇게 게임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여러 감정들이 가슴 속을 얽혔다.
그런 감정을.
쿵쿵!
히르칸은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깨부수었다.
‘내게 저런 낭만은 사치지.’
씽 그리고 돈키요테.
때때로 게임을 한다면 그들처럼 게임을 하고 싶다. 그 어떤 고민 없이, 걱정 없이, 그저 게임을 게임처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히르칸은 그게 아닌 다른 걸 선택했다.
‘내게 필요한 건 저런 게 아니야.’
히르칸이 발걸음을 옮겼다.
11.
“타락의 힘에 취한 그 아이에게 남은 건 분노와 맹신뿐일세. 그런 그 아이는 지금 우리 종족을 타락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아이를 잡는 것은 지금 우리 부족의 사명일세.”
드라 부족장의 말에 히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리 부족은 쉽사리 우리 영역을 벗어날 수 없네. 본래는 우리 부족이 회수해야 하는 업보. 그러나 자네를, 자네를 믿은 올프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렇게 자네에게 우리의 업보를 넘기게 됐네.”
[타이틀 ‘엘프의 친구’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바헤임 부족의 일원’을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두 개가 생겼다.
히르칸은 그 타이틀 알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드라 부족장의 입을 주목했다.
“그 아이를 추적하고, 그 아이를 통해 진실을 확보하게. 부족을 위해서 그리고 타락의 힘에 맞서 싸우는 결사대를 위해서.”
[퀘스트 ‘타락한 엘프’가 시작됩니다.]
말과 함께 드라 부족장은 주머니를 건네줬다. 히르칸이 처음 그에게 건네줬던 주머니였다.
“그 안에 든 서클렛은 정화의 서클릿이네. 모든 부정한 것을 정화해주는 신비한 관이지. 그것이 그 아이를 옭아매고 있는 부정을 씻어줄 것이네. 부정을 씻는다면, 그 아이가 진실을 말해줄 터.”
이 대목에서 히르칸의 표정이 환해졌다.
‘설마 정화의 서클렛을 주는 건가? 퀘스트 보상으로? 진짜?’
아주 어렴풋하게 했던 기대가 갑자기 실현이 될 것 같은 느낌. 우연히 푼돈을 주고 구매한 로또가 고액 당첨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안에 든 서클렛을 절대 잃어버리지 말게. 만약 잃어버린다면, 자네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걸세.”
너한테 준 거 아니니까 팔아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의미와 다를 바 없는 경고를 들은 히르칸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럼 그렇지. 이걸 여기서 퀘스트 보상으로 줄 리가 없지. 착용 불가 옵션 걸렸겠지.’
말을 마친 드라 부족장이 히르칸을 지그시 바라봤다. 히르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드라 부족장을 바라봤다. 1초, 2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히르칸이 입을 열었다.
“끝입니까?”
“끝이네.”
“더 이상 제게 해줄 말씀이 없으십니까?”
“없네.”
“정말 한 마디도 없습니까?”
“없네. 이제 할 일이 없으면 나가게.”
그 순간 히르칸의 표정이 구겨졌다.
‘진짜 이게 전부야? 타락 엘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동서남북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외의 상황.
‘미친, 무슨 게임 퀘스트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어?’
역시 히르칸과 미남미녀 궁합은 매우 안 좋은 모양이다.
< 29화. 바헤임 부족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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