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74화 (74/192)

< 26화. 격전지 (1). >

1.

[격전지]

- 퀘스트 등급 : 레어

- 퀘스트 수행 가능 레벨 : 80레벨 이상, 100레벨 미만.

- 퀘스트 내용 : 격전지, 테르베 성벽 너머의 몬스터들을 처치하십시오.

- 퀘스트 보상 : 사냥한 몬스터의 숫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퀘스트 내용을 본 히르칸은 묘한 느낌의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격전지를 뛸 기회가 올 줄이야.’

격전지.

보스 몬스터 레이드 다음으로 워로드를 대표하는 사냥 콘텐츠다.

격전지란 몬스터들이 우글우글하는 무대를 의미한다. 대개는 거대한 성벽을 기준으로 그 성벽 너머가 격전지 무대로 설정된다. 이런 격전지 무대는 토벌협회에서 인증을 받은 실력자들만이 조건부로 들어갈 수 있다. 히르칸이 아힘브리로부터 받은 격전지 출입증

은 일종의 티켓이다.

‘돈 넘치는 지옥.’

격전지 무대는 기본적으로 몬스터 리젠 시스템이 일반 던전이나, 필드 사냥터보다 훨씬 높게 설정되어 있다. 몬스터가 더 많이, 더 빨리 등장한다. 몬스터를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반면 조건을 충족한 유저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야말로 몬스터가 넘치는 땅.

당연히 위험하지만, 위험한 만큼 경험치는 짭짤하고, 보상도 굉장히 좋다.

여기에 격전지에서의 활약은 토벌협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토벌협회 내에서 습득 가능한 퀘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적을 인정받는다. 토벌협회에서의 공적이 쌓이면, 차후 작위 획득을 비롯해 워로드 내 권력을 쥘 수 있는 걸 고려

하면,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보상이다.

하지만 고작 몬스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레이드 다음가는 사냥 콘텐츠가 될 수 있을 리 만무. 격전지 퀘스트에는 거의 무조건 이벤트 퀘스트가 붙는다. 이벤트 퀘스트의 내용은 대개 특정 몬스터를 잡는 것인데, 이 특정 몬스터를 잡을 경우 보상이 상당하다.

‘200레벨 넘은 격전지 무대에서 대박 터진 게…… 100만 골드부터 유니크 아이템까지. 의외로 어마어마하다니까.’

더불어 이런 이벤트 퀘스트는 격전지 퀘스트를 받은 여러 파티에게 동시에 발생한다.

자연스럽게 보스 몬스터를 놓고 경쟁이 붙는다.

그래서 재미있는 거다. 보통 필드나 던전에 등장한 보스 몬스터는 순번을 정한다. 그게 매너다. 하지만 격전지에서는 그런 게 무의미하다. 격전지에는 목표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굳이 말하면 그게 규칙이다.

워로드에서 허락된 개판이다.

일부 유저들은 보스 몬스터 레이드보다 격전지 전투를 즐겨 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히르칸 같은 스타일에게 어울리는 무대이지만, 의외로 이런 격전지 무대는 히르칸과 인연이 많지 않았다. 토벌협회에서 공적이나 업적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아야 격전지 출입증을 받을 수 있으니까.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주력으로 삼던 하회탈 길드와는 인연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재미있겠네.’

그게 히르칸이 묘한 표정을 지은 이유다.

흥미는 있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못했던 걸 하게 됐다.

물론 솔플을 하는 유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무대일 수도 있다. 격전지는 기본적으로 5인에서 7인 사이의 인원이 파티를 구성해서 진행한다. 아주 거대한 격전지 무대의 경우에는 30인까지 파티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이례적인 경우다.

즉, 7인 파티들을 히르칸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게 쉬울 리 없다.

앞서 말했듯이 격전지에서는 무규칙이다. PK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전 히르칸이라면 냉철하게 판단을 하고, 격전지 출입증을 그냥 찢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히르칸은 달랐다.

‘100레벨 미만.’

히르칸이 투입될 격전지 무대는 80레벨 이상, 100레벨 미만의 유저들이 모이는 곳이다.

‘1차 승급자는 없고.’

100레벨 이상이라면 승급을 마친 유저들이 필시 있을 테니 쉽지 않겠지만, 그 아래는 솔직히 어려울 게 없다. 더욱이 비밀 결사대의 증표마저 얻은 히르칸의 전투력은 대단하다.

‘쉽진 않겠지만, 못할 건 없지.’

또한 워로드 유저들에게 로망이 있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솔플로 하는 것만큼, 격전지를 솔플로 뛰는 것 역시 나름의 로망이다.

당연히 결과가 괜찮게 나온다면, 그 영상도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터.

‘어차피 당장 우르갈 산맥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돈은 돈대로 필요하고.’

히르칸이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2.

“하회탈을 처리해달라고?”

헤비빈의 반문에 그의 귓속으로 기름기가 잔뜩 낀 듯한 어눌하고, 착잡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예, 부탁합니다.

듣기 거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폴로 길드의 마스터, 아폴로였다.

“하회탈이라…… 이유는?”

- 우리 길드를 욕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헤비빈은 그 순간 노골적일 정도로 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욕보였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아폴로 길드를 욕보이는 건 아폴로 길드, 자신들이다. 힘을 앞세워서 비매너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 길드가 더 볼 욕이 있을지, 그게 오히려 의문이다.

하지만 헤비빈은 자신의 심중을 표정으로만 드러냈다. 굳이 말로 내뱉진 않았다.

‘나도 갈 데까지 갔군.’

사실 보통 때라면 아폴로의 이런 제안은 여러 이유를 내세워서 혹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빅스마일 길드는 30대 길드이고, 헤비빈은 그런 길드의 간부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아폴로 길드를 개인적으로 돕는다는 건 구설수가 나오기 좋은 사건 아닌가?

문제는 작금의 상황이었다.

‘여기서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빅스마일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헤비빈 입장에서는 아폴로가 주는 돈은 무시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 인생을 걸 정도는 아니다. 중요한 건 아폴로의 아버지다. 그의 아버지와의 돈독한 관계가 필요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스폰서 계약으로 100만 달러 정도는 가뿐

하게 지불할 수 있을 만한 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또한 그만큼 중국 내에서 인지도 있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돈보단 그런 인지도 있는 기업이 스폰서를 해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스폰서를 해준다는 건, 그 기업의 인지도와 신용도 받을 수 있는 거니까.

‘하회탈이라…….’

어지간한 부탁이라면 들어줬을 것이다.

그 표적이 하회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려워.’

하회탈은 지금 30대 길드의 관계자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뜨거운 인물이다. 그를 방송에 출연 시킬 수만 있다면, 100만 시청자는 깔고 갈 수 있다. 당연히 그 이상도 가능하다. 30대 길드는 물론 30대 길드가 아닌 길드들도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

고 있다.

그런 그를 빅스마일 길드가 아폴로 길드의 청부를 받아 처치한다는 것, 성공해도 좋은 소리 듣기는 힘들다. 빅스마일이 지금 여론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굳이 기름을 더 부을 필요는 없다.

헤비빈은 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답을 내렸다.

‘하회탈을 잡기 위해 부을 여력은 없어.’

하회탈을 추적해서, 처치하는 작업에는 적지 않은 인력과 노력 그리고 실력자가 필요하다. 빅스마일이란 이름을 내걸면 가소로운 수준이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 헤비빈이 운영하는 개인 조직을, 친위대를 움직여야 하는데 그들로는 부족하다. 죽이는 건 쉬워

도 찾는 게 어렵다.

헤비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길드 사정상 힘들겠군. 하회탈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정확히 안다면 모를까.”

거절.

- 꼭 부탁합니다. 빅스마일 이름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 새끼를 잡아만 주신다면 보상하겠습니다.

그러나 아폴로는 멈추지 않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부탁에 헤비빈이 결국 타협을 했다.

“하회탈을 잡기 위해 빅스마일이 움직일 순 없지만, 만약 개인적으로 하회탈을 찾게 된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하지.”

말을 하면서도 헤비빈은 자신이 하회탈을 만나게 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회탈을 만나는 게 그리 쉬웠다면, 30대 길드가 그를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

빌딩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드높은 성벽이 그 끝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그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테르베 성벽은 처음이네.’

히르칸이 바라보는 성벽의 이름은 테르베. 히르칸이 방문한 방츠 성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성벽으로 몬스터 무리의 남하를 막는 마지노선 같은 존재였다.

더불어 이 성벽 위로는 아직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블럭 필드로 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블럭 필드를 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블럭 필드를 깨고,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이 너머에 얼어붙은 왕국이 있었지?’

물론 히르칸은 안다.

이 성벽 너머로 계속 가다 보면 얼어붙은 왕국이 나온다. 200레벨이 넘는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무대였고, 히르칸과 인연은 없는 무대였다.

‘우레사냥꾼 애들이 다 해먹은 얼어붙은 왕국…… 젠장.’

얼어붙은 왕국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히르칸이 쓴웃음과 함께 씁쓸한 기억을 삼키며, 성벽을 넘기 위해 꼭 방문해야 하는 테르베 성벽 관리소를 향했다.

성벽 관리소에는 이미 방문자들이, 적지 않은 유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부분 80레벨이 넘어가는 유저들이었다.

당연히.

“음?”

“어?”

그들은 히르칸의 옷차림을, 그림자 사냥개 가죽 세트에 하회탈을 쓴 히르칸의 존재를 바로 눈치챘다.

“하회탈인가?”

“진짜?”

“하회탈은 파릉 숲에 있지 않았나? 왜 파릉 숲에 있던 사람이 북쪽인 테르베 성벽에 와? 오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수군수군,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왜 오긴, 격전지 뛰려고 온 거겠지.”

그러나 그 어수선한 분위기는 곧바로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여기 유저들이 오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격전지!

다른 이유는 없다. 애초에 이 성벽 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건 격전지 출입증을 받은 이들만이 가능하다. 보통 유저들은 와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상인들도 안 온다.

그런 곳에 히르칸이 온 이유가 이미 이곳에 온 이들이 가진 이유와 다를 리 없다.

격전지를 뛰기 위해 온 것이고, 그건 곧.

“대단한 경쟁자가 등장했군.”

“혼자 뛰려는 걸까?”

“혼자 베어 워리어도 잡는데, 격전지도 뛰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황금 해골 잡는 영상을 떠올려보라고. 하회탈은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될 거야.”

아주 대단한 경쟁자가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게 긴장감의 이유였다.

유저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경쟁자를 바라보는 표정, 그것도 아주 어려운 경쟁자를 바라보는 표정이 좋을 리 없다. 눈살을 찌푸렸고, 인상을 찌푸리고, 찌푸려진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히르칸은 그들의 표정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겠군.’

이런 경계심, 히르칸에게는 일상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 수준의 경계는 가소로웠다. 우레사냥꾼을 비롯해 30대 길드에 맞서 싸웠던 히르칸이다. 자기와 비슷한 레벨을 가진 유저들의 경계 어린 표정에 겁을 먹을 정도였다면, 애초에 그런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

물론 모두가 히르칸에게 그런 시선을 보낸 건 아니었다. 몇몇 유저들은 워로드에서 나름 핫한 히르칸을 보며 인사를 했다.

“하회탈 맞죠?”

“예.”

“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격전지 뛰러 오신 겁니까?”

“예.”

“혹시 사진, 같이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히르칸에게 달라붙어 인증샷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이들이 게임에 목숨을 거는 건 아니니까. 워로드란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오히려 게임에 목숨 거는 이들보다 많았고, 그들에게 히르칸과 같은 유명인을 만나는 건 재미난 일이었다.

그런 히르칸을 보는 세 번째 종류의 시선이 있었다.

‘헤비빈 형님이 말한 녀석이 왜 여기에?’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팍에 그려진 동그라미 속 미소 짓는 스마일 마크를 가리는 유저.

그가 앞선 두 부류와 다른 세 번째 부류였다.

4.

히르칸이 다섯 번째 인증샷을 찍을 무렵이었다. 작은 키에 거대한 갑옷을 입은 사내가 등장했다.

“주목!”

갑옷이 버거워 보이는 그 사내의 정체는 테르베 성벽 관리소장 바이글이었다.

큰 목소리를 내뱉으며 등장한 그는 좌중의 분위기는 살피지도 않은 채 자기 말을 뱉었다.

“긴말 하지 않겠다.”

뱉는 말에 섞인 단어들은 딱딱했으나, 목소리는 여리고 아름다웠다. 미성의 소년이 진지하게 연기를 하는 듯한 그 모습에 몇몇 여성 유저들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바이글 같은 타입이 취향인 모양.

물론 바이글의 말에 딴지를 걸거나, 그 앞에서 대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유저는 없었다. 워로드에서 NPC를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80레벨 이상 찍은 유저라면 마땅히 알고 있다.

바이글은 어떤 어려움 없이 제 말을 이어갔다.

“제군들은 모두가 각자의 토벌협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그대들은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 이곳에 자원해서 왔다. 그런 제군들을 위해 성문을 열어주겠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바이글이 설명을 이어갔다.

“한 번 열린 성문이 다시 열리는 건 144시간 후. 그 시간 동안 그대들이 해야 하는 건 전투다. 몬스터를 처치해라. 다른 건 없다. 보다 많이 처치한 자들에게 걸맞은 보상을 주겠다.”

보상!

달콤한 단어였지만, 그 단어에 반응하는 유저는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바이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거 말고 다른 거.’

‘이벤트를 말해줘.’

여기 모인 이들이 원하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보상이 아니었으니까.

“또한 현재 우리 성벽 관리인들을 괴롭히는 몬스터 한 마리가 저 너머에 있다. 그놈을 처치하는 자에게 내가 직접, 개인적인 보상을 주도록 하겠다.”

바이글이 말을 내뱉는 순간.

[이벤트 퀘스트 ‘블루 자이언트’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됐다.

유저들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오히려 이 퀘스트를 받기 위해, 이것을 위해서 이곳 격전지에 왔다.

“목숨은 알아서 챙기도록.”

바이글은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고, 그가 등을 돌리는 순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왼손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동시에 반응했다.

“어?”

“헉!”

“와!”

히르칸 역시 소리쳤다.

“우와.”

그 반응의 이유.

‘퀘스트 보상이 유니크 스킬북? 미친!’

이번 격전지에 대박이 걸렸다.

< 26화. 격전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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