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헬름 오우거 (3). >
7.
카앙, 카앙, 쾅!
‘어이구.’
동료 둘을 등지고 있는 탱커 네알은 자신의 몸을 가릴 정도로 널찍한 방패 위를 두드리는 쇳소리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이제 욕도 안 나오는군.’
계획은 간단했었다. 몬스터들에게 포위당한 튠 파티를 위해, 강력한 마법 한 방을 날려서 틈을 만들어주는 것. 튠 파티가 그 틈을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것. 상황의 여의치 않다 싶으면 그냥 물러나는 것. 정말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법을 썼다. 90레벨짜리 화염계 레어 등급의 마법, 불도저 베어를 사용했다. 불타오르는 몸길이 5미터짜리 곰이 미친 듯이 정면으로 질주하는 불도저 베어는 포위망을 부수기에 가장 좋은 마법이었다.
효과는 좋았다. 갑옷을 두른 블랙 트롤과 블랙 오크들이 불도저 베어에 밀리며 바닥에 너부러졌다. 문제는 그렇게 거침없이 질주하던 불도저 베어가 남기고 간 자국, 활활 타오르는 불판을 헬름 오우거가 밟는 순간이었다.
‘새끼는 눈이 없나, 그걸 왜 밟고 지랄이야?’
일부러 헬름 오우거의 어그로를 끌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설마 헬름 오우거가 불을 밟을 줄이야.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을 밟고, 데미지를 입는 순간 헬름 오우거의 어그로는 마법을 쓴 마법사를 향했고, 괴성을 내지르며 마법사를 향해 돌진하는 헬름 오우거는 정말 빨랐다.
빠르고, 날렵했다. 그 거대한 몸뚱이에서 그런 속도가 나오는 게 환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더 나아가 녀석은 거리를 좁히면서 칼을 높게 들었다. 적을 보다 신속하게 베기 위한 자세도 갖추고 있었다.
근력 스탯이 낮은 마법사는 도망쳐도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탱커 네알이 끼어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네알은 거기서 그냥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100레벨 근처까지 함께 했던 패밀리가, 가족이 그냥 도망칠 리 만무하다. 사제가 네알 뒤에 붙었다. 둘이
남았는데 셋이 도망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알투 패밀리도 포위를 당했다. 오히려 알투 패밀리가 만들어준 틈을 비집고 나오려다가, 튠 파티가 나누어진 채 포위를 당했다. 그나마 튠 파티가 탱커가 두 명이었고, 그 두 명을 중심으로 무리가 나뉜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탱커가 없었다면 한 무
리는 무조건 전멸했을 테니까.
여기까지가 조금 전까지 일어난 일.
‘그보다 이 새끼들 호흡 잘 맞네.’
이런 와중에도 네알은 나름 상황을 분석했다. 탱커의 역할이었다. 전장에 상황에 따라 가장 긴밀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는 게 탱커다. 탱커가 막지 못하면, 사제나 마법사는 죽는다. 사제와 마법사가 죽으면 탱커도 죽는다. 전멸을 하더라도 탱커부터 죽는 게 이상
적인 결과다.
그런 네알이 봤을 때 지금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서른 마리의 무장한 몬스터들은 지휘체계가 있었고,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포위망을 구성하는데 굉장히 긴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리가 나누어지는 순간, 그 무리를 순식간에 포위한 게 그 증
거다.
반대로 이게 틈이기도 했다.
‘포위망 형성이 우선으로 입력이 된 모양이군.’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의 최우선 조건은 포위망 형성이다. 전투는 그다음이다. 그 결과 막상 전투에 참가해서 유저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하는 숫자는 적었다. 남은 인원은 공격에 참가하기보다는 포위망 구성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설계된 몬스터란 의미이다. 그 점을 눈치채고 네알을 비롯해 다른 무리들은 방어만 하고 있었다. 마법을 써서 포위망만 구축하고 있는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지 않았다.
‘게임이라서 다행이야.’
게임이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현실이라면 포위망을 형성할 정도로 지휘체계가 잡힌 무리들은 그만큼 체계적인 공격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게임에서는 그렇게 되면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다.
때문에 이 틈을 노려야 했다.
이 포위망은 새로운 무리가 등장하면 다시 그 새로운 무리를 포위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문제는 그 새로운 무리가 아주 먼 곳에 있다는 의미. 그들에게 희망을 걸기는 힘들었다.
‘여기서 누가 그냥 짠, 하고 나왔으면…….’
결국 네알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기도하듯 떠올렸다.
그 순간.
콰앙!
정말 누가 짠하고 나타났다.
네알은 자신의 뒤쪽에서 폭음을 듣는 순간,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호기라고 생각했다.
폭음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포위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무리를 포위하기 위해 몬스터들이 움직였다. 촘촘했던 몬스터 포위망이 덜 촘촘하게 바뀌었다.
여기서 네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뭉쳐!”
틈을 통해 도망치는 것보단 뭉칠 때다. 여기서 뿔뿔이 흩어지면 결국 추격을 당하고, 각개격파를 당한다.
반대로 뭉치면, 그 숫자는 열 명! 여기에 탱커는 셋! 탱커 셋이면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금 그들을 도와주는 이들이 숫자가 다섯 이상이라면, 그때는 수세를 벗어나, 전쟁을 치를 수 있다.
뭉쳐야 살 때다.
“뭉쳐 뭉쳐!”
그런 네알이 한 생각을 다른 두 그룹도 당연히 하고 있었다. 1년 넘게 워로드를 하면서, 개중에서도 나름 게임 좀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들이다. 게임을 하면 밥이 나와?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워로드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겁쟁이같이 겁에 질려 꽁무니를 빼
는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다.
그들은 곧바로 뭉쳤다.
마법사 한 명과 사제 한 명이 뭉치는 과정에서 트롤과 오크들이 휘두른 칼에 맞았지만, 게임오버는 없었다. 이윽고 탱커들이 모여 삼각형 꼭짓점 형태로 포메이션을 잡았고, 그 안에 마법사와 사제들이 모였다.
치료가 시작됐고.
“우와, 반갑다.”
“진짜 반갑네. 이렇게 만난 게 반가울 줄이야.”
“그냥 가라니까 와서 무슨 고생이야?”
“공짜 아니야. 값은 톡톡이 받을 거야.”
“힐, 힐부터 해줘.”
“그보다 지금 누가 온 거야?”
대화가 시작됐다. 짧은 순간 동안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오고 갔다.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없는 소란이었다. 블랙 트롤과 블랙 오크의 칼을 쉴 새 없이 막아내기 바쁜 탱커들마저도 어떻게든 한 마디씩, 제 말을 던질 정도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때 누군가 말했다.
“하회탈이다!”
그 말이 난잡하게 늘어지던 분위기를, 감정들을, 말들을 하나로 뭉쳤다.
8.
개당 50골드짜리, 괜찮은 위력을 가진 뼈폭탄 열 개는 전장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장이 흔들리고, 새로운 적의 등장을 파악한 블랙 트롤 외 무장한 무리들이 새로운 적을 바라봤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히르칸이 있었고, 히르칸 너머로는 열한 마리의 해골 전사들과 5미터 신장의 골렘 하나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늘어선 해골 전사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매드니스 헬름을 뒤집어쓴 해골 전사는 일곱 마리. 본 아머를 두른 해골 전사는 네 마리. 스킬 랭크 그리고 히르칸이 가진 마력 때문에 모두가 같은 무장을 갖출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확
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주인 그리고 스승이 히르칸이라는 것.
딱딱!
히르칸이 손가락을 튕기자, 해골 전사들이 정면에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질주했다.
매드니스 헬름을 뒤집어쓴 녀석들이 가장 빨랐다.
공포가 없는 그들에게 적이 강하고 자시고, 자신들의 칼이 적에게 통하고 자시고, 그런 건 염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아오는 도검을 날렵하게 피해내며, 상대의 몸뚱이를 베고 지나갔다.
츠응!
갑옷과 칼이 연달아 부딪쳤다.
카앙!
쇳소리가 번져나갔다.
연주라고 할 수는 없는 소음. 그 소음 속에서 히르칸은 달렸다. 몬스터 무리를 뚫고 달리는 그는 트롤 한 마리의 몸뚱이를 밟고 하늘 높이 도약한 후에 바닥에 착지했다.
떨어진 곳은 세 명의 탱커가 만들어놓은 구멍.
흔들림 없이 착지한 히르칸은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시계값은 해야지. 헬름 오우거를 잡는 걸 도와줘.”
단도직입.
부탁이 아닌 분명한 명령에 가까운 그 말은 상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필요한 건?”
히르칸의 말이 맞다. 히르칸이 구해줬으니, 그들은 최소한 시계값은 해야 한다.
남은 건 히르칸에 대한 신뢰. 다행히도 그 부분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여기 있는 이들, 다 봤다.
“1대1 무대.”
히르칸, 그가 혼자서 베어 워리어를 잡는 영상을. 워로드에서 게임 좀 한다는 유저들 중에 그걸 안 본 인간은 없다. 그걸 보고 히르칸의 실력에 의심이 간다면, 그건 의심이 아니라 그냥 자격지심이다.
“데미지 딜링이 가능해?”
물론 베어 워리어보다 헬름 오우거가 곱절은 강하다. 헬름 오우거의 레벨은 못해도 100레벨 근처다. 적어도 여기 있는 모든 것들, 유저들을 포함해서 최고 레벨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네크로맨서인 히르칸이 데미지를 제대로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검사 특히 탱커가 아닌 스트라이커라면, 공격력을 극대화해주는 스킬을 통해 마법사 수준의 데미지 딜링이 가능하지만, 네크로맨서에게는 그걸 기대하기 힘들다.
1대1 무대를 만들어도, 히르칸이 데미지 딜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갑옷파괴부터 하고. 딜링은 그다음.”
히르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1대1 무대를 원하는 건, 헬름 오우거가 무장한 갑옷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갑옷만 부수면, 그 이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아니, 이미 히르칸이 이곳에 있는 열 명을 이용하고자 마음먹은 이상, 그들을 놔두고 굳이 데미지 딜링마저 신경 쓸 이유
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데미지를 많이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헬름 오우거는 HP상태에 따라 여러 종류의 특수 능력을, 페이즈를 보여줄 텐데, 그 사실을 여기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베어 워리어 때처럼, 새로운 페이즈에 돌입하기 전에 갑옷을 부수는 게
답이다. 공략 방법을 모르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기본을 100레벨을 앞둔 유저들이 모를 리 없다.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히르칸의 그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상황 정리.
히르칸이 곧바로 사제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버프.”
“응?”
사제가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히르칸이 그걸 보며 말했다.
“플리즈.”
“아.”
그제야 사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히르칸에게 버프를 걸어주기 시작했다.
9.
해골 전사들과 블랙 트롤, 블랙 오크들의 격전은 장관이었다. 해골 전사들은 1대1로 몬스터와 상대했다. 네크로맨서가 꿈꾸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함에 비해 결과물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갑옷을 두른 몬스터에게 해골 전사들의 무기는 흉터는 남길지언정 제대로 된 데미지는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갑옷 위로 맞는 공격이 아플 리 없지 않은가?
반면 해골 전사들은 일격에도 적잖게 피해를 입었다. 잘 피하다가 한 번 맞으면 몸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본 아머를 두른 경우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해골 전사들의 몸뚱이는 일격을 허용할 때마다 처참한 꼴이 됐다.
골렘 역시 다를 건 없었다. 이제는 스킬 랭크가 상승하며 5미터의 신장을 가진 골렘의 공격이 때때로 오크나, 트롤을 크게 날려버리고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은 보이는 것만큼 인상적이지 못했다. 반면 골렘의 몸뚱이는 거듭된 공격에 넝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해골 전사들은 하나둘 파괴되는데, 쓰러진 몬스터는 없다는 것이 결과물이었다.
시간 벌이 수준.
그러나 시간 벌이만으로도 충분했다. 해골 전사들과 골렘이 붙잡은 블랙 트롤과 블랙 오크는 합쳐서 열두 마리나 됐고, 시간을 굉장히 넉넉히 끌었다.
튠 파티와 알투 패밀리의 숨통이 트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자, 가자!”
“반격이다, 이 더러운 트롤 새끼들아!”
“해골 전사들도 저렇게 싸우는데, 우리도 싸워야지!”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탱커들이었다. 삼각형 꼭짓점 형태로 배치되어 있던 탱커들이 반원 모양으로 포메이션을 잡았다. 벽을 자처했고, 몬스터들이 그 벽을 두드렸다.
콰앙, 쾅!
그렇게 탱커들이 벽이 되는 순간, 그 안에서 마법사들이 준비한 마법을 벽 너머로 던졌다.
가장 먼저 등장한 마법은 버닝 필드였다.
“불판부터 깔고!”
마법사 한 명이 바닥에 손바닥을 대자, 그 손바닥에서 시작된 불길이 땅 위로 빠르게 번졌다.
화르르르!
버닝 필드는 이렇게 다수의 몬스터와 장시간 공방전을 펼칠 때 매우 유효한 마법이었다. 한 번에 데미지를 크게 주진 못하지만, 장시간 전투를 할 경우 누적 데미지는 엄청났으니까.
그 사이 하늘 위로 사람 몸통 크기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발사!”
떠오른 거대 물방울은 마법사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길쭉한 물화살을 잽싸게 뱉었다.
애로우 볼!
갑옷을 찌그러뜨리고, 갑옷의 약한 부위는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 심지어 하늘 위에서 공격을 하기에, 공격 범위가 상당히 넓은 마법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남은 한 명의 마법사, 전격계 마법사는 낮은 레벨의 전격계 마법, 스턴건을 이용해 탱커들과 근접한 몬스터들에게 스턴 효과를 꾸준히 부여했다. 탱커들을 쉴 새 없이 공격하던 블랙 트롤과 블랙 오크들은 스턴건에 맞는 순간 1초 남짓, 행동을 멈추었
다.
그러는 사이 사제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30초 후에 홀리 메탈 끝난다. 네알, 30초야!”
“끓는 피 마법 카운트다운 들어간다. 나 쿨타임이니까 다른 한 명이 넣어줘! 10, 9, 8…….”
“네알 80퍼, 퐁 79퍼, 튠더스 81퍼. 이상 보고 끝.”
사제라고 놀고먹는 직업은 아니다. 특히 탱커가 여럿일 경우에는 탱커에게 준 버프 시간을 전부 계산해야 한다. 버프가 빠지는 순간, 공격을 당하면 끝장이 난다. HP계산은 기본이다. 나중에 사제 한 명이 사용하는 버프 마법이 10개 이상이 되면, 그 사제의 눈에
펼쳐지는 광경은 게임이 아니라, 비행기 파일럿이 보는 광경처럼 변한다.
이런 분주함은 곧 활기였다.
튠 파티와 알투 패밀리는 오랜 세월같이 파티를 했던 것처럼, 금방 호흡을 맞추었고, 몬스터를 하나씩, 처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르칸이 움직였다.
10.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림자 사냥개 효과를 발동시킨 히르칸은 날렵하게 헬름 오우거에게 접근했다. 몬스터들의 어그로가 다른 곳에 집중된 상황, 여기에 그림자 사냥개 세트 옵션으로 존재감이 희미해진 히르칸을 눈치챌 수 있는 몬스터는 오직 하나였다.
유일하게 그 어떤 이들에게도 어그로를 끌지 않은 채 전장 무리의 중심에 있는 헬름 오우거.
녀석은 히르칸이 자신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히르칸의 존재를 알아보고 대기했다.
이윽고 히르칸이 녀석의 공격 범위 안에 접근하는 순간, 녀석이 먼저 선공을 날렸다.
콰앙!
헬름 오우거는 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바닥이 움푹 파이다 못해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자국, 크레이터가 생겼다.
소름 끼치는 위력.
하지만 그 크레이터 어디에도 히르칸의 흔적은 없었다.
잽싸게 칼을 피한 히르칸이 헬름 오우거를 스쳐 지나갔다. 헬름 오우거가 히르칸을 쫓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칼도 같이 수평으로 휘둘렀다.
후우웅!
묵직한 소리가 바람만, 허공만 갈랐고, 히르칸은 헬름 오우거가 헛손질을 하는 순간, 헬름 오우거의 오른쪽 무릎 뒤쪽, 오금을 검으로 찔렀다.
찌이잉!
검이 박히긴 했으나, 깊숙하게 박히지 못했다. 그저 흠집만 낸 정도.
‘두 번? 아니, 세 번은 찔러야…….’
찰나의 사고를 마친 히르칸이 몸을 날리며, 헬름 오우거와의 거리를 벌렸다. 헬름 오우거가 그런 히르칸을 노려봤다. 히르칸은 그런 헬름 오우거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한 채, 녀석의 갑옷 형태를 파악했다.
“흠.”
‘대충 견적은 나오는데, 뚫는 게 문제네.’
갑옷을 부수기 위해서는 포인트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헬름 오우거의 갑옷 파괴 관련 정보, 아머 브레이크 포인트를 히르칸이 알 리 없다.
그럼 결국 수고를 하는 수밖에!
“카운트다운!”
쩌렁쩌렁, 히르칸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 외침과 함께 전장에 펼쳐졌던 불길이 빠르게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버닝 필드에 공급되던 마력이 끊겼다.
“10, 9, 8!”
그리고 시작된 카운트다운.
몬스터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불도저 베어 한 마리가 헬름 오우거를 향해 돌진했다. 히르칸에게 모든 걸 집중한 헬름 오우거는 불도저 베어를 피하지 못했다.
콰앙!
거대한 괴물 둘이 부딪치는 소리는 강렬했다.
끄오오!
헬름 오우거의 비명은 더더욱 강렬했다. 헬름 오우거가 울음을 토해내며, 마법을 쓴 상대를 바라봤다. 제법 먼 거리, 그러나 마법사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만큼 헬름 오우거의 눈빛은 강렬했다. 헬름 오우거가 그런 마법사를 향해 돌진하려고 했다.
그때 히르칸이 아껴둔 뼈폭탄, 300골드짜리 뼈폭탄을 헬름 오우거를 향해 던졌다.
콰광!
뼈폭탄의 위력은 상당했고, 헬름 오우거는 곧바로 히르칸을 향해 곧장 공격을 날렸다. 준비 동작도 없이, 곧바로 들고 있는 칼을 히르칸을 향해 내리쳤다.
그 순간 히르칸은 오히려 헬름 오우거를 향해 파고 들어갔다. 녀석의 다리 아래로 지나갔고, 단숨에 등 뒤로 이동했다. 그런 히르칸의 눈이 조금 전에는 없던 것, 불도저 베어가 만들어준 선물을 포착했다.
조금 전 충격으로 생긴 갑옷 곳곳의 틈새. 히르칸이 그 틈새를 향해 검을 겨눈 채 도약했다.
콰직!
틈새 사이를 비집고 검이 들어갔다.
[헬름 오우거가 나태 저주에 걸립니다.]
[헬름 오우거가 부식 귀신에 걸립니다.]
[헬름 오우거가 마귀 저주에 걸립니다.]
저주가 시작됐다.
히르칸이 입을 꽉 다물었다.
11.
워로드에서 유저의 근력 수치가 일정 이상이 되면, 그 유저는 몸을 움직이는 게 매우 쉬워진다. 현실에서 벽에 박은 못을 잡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워로드에서는 근력 수치가 일정 이상 넘어가면, 그런 작업을 가뿐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그 수준에 도달한 유저에게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를 손가락 하나를 넣어서 버티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물론 버티는 것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들썩이는 몬스터의 몸뚱이는 용기 넘치는 카우보이들이 성난 소 위에서 버티는 로데오 정도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또한 언제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등에서 흘러나온 땀이나, 액체 따위가 독일 수도 있고, 온몸에서 엄청난 열 혹은 냉기를 뿜을 수도 있고, 등에서 에어리언 같은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인간만 해도 등에 벌레가 붙으면, 바닥을 굴러서라도 벌레
를 쫓으려고 하는데, 몬스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대응능력이다. 시시각각 변화는 상황에 절묘한 대응이 필요하다.
히르칸은 이 대응력에서 워로드 최고였다.
‘이걸 못하면 오늘 밥은 없다!’
8분 33초.
히르칸이 헬름 오우거의 흉갑을 벗겨냈다. 포인트는 없었다. 마치 우표에 찍힌 점선처럼, 구멍을 뚫어 점선을 만들어서 벗겼다. 무식하고, 무모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흉갑만 벗기는데 8분이 걸렸다. 어깨 갑옷과 건틀렛, 투구와 하갑은 여전했다. 그저 흉갑만 떨어져 나온 채, 근육질의 몸뚱이가 드러났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기대 이하.
하지만 워로드를 하는 유저라면, 감히 기대 이하라는 표현 따윈 뱉지 못할 것이다.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더 대단하군.”
“저게 네크로맨서라니, 누가 믿겠어?”
히르칸이 보여준 능력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물론 히르칸이 활약하는 사이, 나머지들도 충분히 활약을 했다. 전투를 통해 꾸준히 몬스터를 줄였다. 히르칸이 헬름 오우거의 흉갑을 벗기는 순간, 남은 블랙 트롤은 네 마리에 불과했고, 블랙 트롤을 제외한 몬스터들 수 역시 아홉에 불과했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숫자.
듄 파티와 알투 패밀리, 그들 역시 분명한 강자였다. 물론 해골 전사와 골렘의 활약도 빼놓을 순 없을 터.
무엇보다 아끼는 게 없었다.
히르칸도 아낌없이 아이템을 사용했고, 알투 패밀리와 튠 파티도 가진 모든 소모 아이템을 이 전투에서 쓴다는 생각으로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 전투에서 소모된 소모 아이템의 값은 못해도 소형차 한 대 값은 가뿐하게 나올 것이다.
그렇게 모든 헬름 오우거를 제외한 모든 몬스터를 해치웠을 때, 본격적인 데미지 딜링이 시작됐다.
“이야,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포장지는 다 벗겼으니, 먹기만 하면 돼!”
마법사들의 본격적인 데미지 딜링이 시작됐다. 아쿠아 볼이 내뱉는 물화살은 헬름 오우거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들어갔고, 수시로 날아오는 라이트닝 스피어는 헬름 오우거가 잠시 동안 분노를 잊어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불도저 갑니다!”
마력 회복 사탕을 쉴 새 없이 부셔 먹으며 나오는 강력한 마법은 헬름 오우거에게 확실한 데미지를 줬다.
물론 헬름 오우거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마법을 맞을 때마다 마법사를 쫓았고, 그러 헬름 오우거의 무시무시한 돌진을 탱커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막아냈다.
“아, 젠장!”
막지 못해 튕겨 나가는 경우도 있고.
“힐! 힐!”
“기다려!”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기도 했지만 탱커들은 거듭해서 자기 몸을 날려 헬름 오우거의 동선을 막았다.
그리고 탱커들이 시간을 끌면, 히르칸이 움직였다. 히르칸이 헬름 오우거의 등줄기에 검을 꽂아 마법사를 향한 헬름 오우거의 분노를 자신으로 돌렸다.
누적된 데미지는 헬름 오우거의 행동을 바꾸었다.
HP가 7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을 때 거대한 분노로 주변 이들의 모든 능력치를 30퍼센트 감소시키는 피어가 발동했다.
“피어 있구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칼던지기라는 위협적인 스킬로 마법사 두 명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했다.
“미친, 저걸 그냥 던져?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쿠르, 무사해?”
“어. 간신히 살았다. HP가 2퍼센트 남았어.”
“간신히 산 것 치고 담담하네.”
“어, 1퍼센트 됐다. 야, 빨리 힐.”
“잠깐, 나 힐 쿨타임…….”
“뭐? 야! 야!”
“장난이야.”
HP가 40퍼센트 이하가 되는 순간, 강철피부가 발동했다. 녀석의 피부가 갑옷보다 단단해졌다.
“마법 공격 중지! 지금은 어그로 관리가 안 돼!”
“자잘한 공격으로 피 깎아야 해!”
“오예! 이제 좀 쉬겠네!”
“어휴, 저 얄미운 마법사 새끼들.”
“꼬우면 새로 키우시든가.”
마지막으로 HP가 10퍼센트 이하가 되는 순간, 분노 모드에 돌입한 헬름 오우거는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어이쿠!”
“네알이 날았다! 진짜 날았어!”
“쟤 나는 거 처음 봐.”
“미친, 무슨 힘이…….”
“알아서 피해! 지금은 탱커도 못 막아!”
주먹 한 방으로 탱커를 그대로 날려버리는 힘은 고지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탱커조차 날려버리는 녀석에게 과연 그 누가 달려들 수 있을까?
딱 한 명뿐.
‘오늘 밥은 굶지 않아도 되겠군.’
하회탈 히르칸, 그가 헬름 오우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 24화. 헬름 오우거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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