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헬름 오우거 (2). >
4.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이게 우리들 보이스톡 검색어하고 비밀번호인데, 들어오십시오. 서로 돕고 삽시다.”
알투 패밀리의 리더, 네알이란 유저의 말을 떠올린 히르칸은 그가 가르쳐준 주소를 떠올려봤다. 히르칸의 기억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주소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색어는 파릉 숲, 비밀번호는 9991이었으니까. 이 정도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더 나아가 히르칸은 당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의 자기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다.
히르칸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내가 좀 매몰차긴 했지.’
매몰차게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자신의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모습이 떠올랐다.
하물며 지금 와서 그들의 도움이 아쉬워지니, 히르칸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지금이라도 커뮤니티 가입을 해야 하나?’
당연한 말이지만, 히르칸이 커뮤니티의 역할과 특징을 모를 리 없다. 커뮤니티는 워로드를 하면서 윤활유 같은 존재다.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때때로 길드보다 도움이 된다. 길드는 도와주러 오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커뮤니티는 그 구역 내
에서 같이 움직이니까 금방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커뮤니티가 발전해서 길드가 되거나, 길드에 준하는 세력이 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게 히르칸이 커뮤니티 가입 제안을 거절한 이유였다.
커뮤니티의 존재는 생각보다 질기고, 진하다. 한 번 발을 담그면 어떤 식으로든 족적이 남길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나중에 친해지면? 친해지는 건 괜찮다. 히르칸이 두려워하는 건, 친해진 다음이다.
“끄응.”
히르칸이 신음을 흘렸다.
콰앙!
그런 히르칸의 고민은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사그라졌다.
휙!
히르칸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시작된 듯한 폭발음의 위력은 상당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히르칸이 귀만이 아니라, 몸으로 폭발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오!”
히르칸이 반사적으로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실에서 이런 폭발음이 터진다면, 기겁할 만한 일이겠지만 워로드에서 이런 폭발음은 신기한 구경거리의 등장을 알리는 알림, 그런 존재였다.
“위력이 상당한데?”
실제로 높은 레벨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강력한 마법은 정말 끝내주는 볼거리다. 오죽하면, 30대 길드의 방송 중에서는 고레벨 마법사들이 나와 쉴 새 없이 마법만 쓰는 걸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진짜 마법만 쓰는데, 의외로 시청률이 좋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마법은 마법사들이 잘 안 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이런 마법을 쓰지?’
특히 지금처럼 필드 타입의 사냥터에서 보스 몬스터도 아닌 일반 몬스터를 잡을 때는 거의 안 쓴다.
일단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의 마력 스탯은 낮은 편이다. 레벨업으로 얻는 보너스 포인트는 대부분 지력에 투자한다. 자금력이 넉넉한 경우에는 부족한 마력은 회복 아이템으로 커버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능력치를 지력에만 투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력한 마법은 어마어마한 마력을 요구하는 만큼, 쉽사리 쓸 수 없다. 마법사에게 최악의 상황은 마력이 없는 상황이다. 정말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또한 정말 강력한 마법은 전장의 상황을 바꾼다. 그게 긍정적일 때도 있고, 부정적일 때도 있다. 마법에 적아의 구분은 없다. 파티를 맺었다고 해도, 아군이 휘두른 칼에 그리고 아군이 던진 마법에 데미지를 입는다. 그게 워로드란 게임이다. 만약 강력한 범위 마법
을 썼는데 아군이 휘말린다면? 나중에 밥 한 끼 사주는 거로 끝날 수준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 등장했다.
‘음…….’
이 사실을 히르칸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내가 처음 왔을 때 한 번 그리고…….’
보통 경우라면, 보통 유저라면 그냥 넘어간다. 센 마법이 터졌구나! 그 정도 의미만 부여할 뿐이다.
하지만 히르칸은 다르다. 현실에서는 비루하고, 보잘것없지만 게임 속, 워로드에서 히르칸의 경험과 지식은 그 누구보다 깊고, 감은 야성의 맹수보다 뛰어나다.
지금도 그랬다.
히르칸의 머리가 본능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4일 전.’
히르칸, 그가 처음 이곳 파릉 숲에 왔을 때 거대한 폭발이 그를 반겼었다. 그때 그 폭발 역시 강력한 마법이 사용된 결과물이었고, 알아본 결과 이곳의 보스 몬스터인 붉은눈과 조우한 파티가 시간을 벌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결과물이었다.
그 날 붉은눈은 잡혔다.
그리고 4일 전, 다시 한 번 이런 굉음이 터졌었다. 새롭게 리젠된 붉은눈을 잡는 소리였다.
중요한 건, 레드아이 오우거의 리젠 주기는 일주일이라는 것. 4일 전 붉은눈이 잡혔는데 지금 이런 굉음이 터진다?
‘붉은눈은 없는데.’
분명한 건, 붉은눈은 지금 이 전장에, 파릉 숲 어디에도 없다. 현재 히르칸이 커뮤니티 가입을 놓고 고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붉은눈이 다시 리젠되면 파릉 숲에서의 사냥과 탐사 및 조사가 더더욱 어려워질 테니까. 그 전에 답을 내려야 했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이런 강력한 마법이 사용됐을까?
물론 그냥 썼을 수도 있고, 다수의 몬스터를 잡기 위해 거하게 한 방 날렸을 수도 있다.
‘아니야. 여기서 몰이 사냥 하는 애들은 없어. 몰이 사냥을 할 만큼 몰상식한 애들도 없고.’
그러나 히르칸이 이제까지 이곳에서 사냥하는 파티들, 길드들의 면면을 봤을 때 몰이 사냥을 하는 파티는 없었다. 몰이 사냥을 할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몬스터가 넘쳐나는데 몰이 사냥을 한다? 열 번 중 한두 번은 실패한다. 그리고 그 한두 번의 실패
가 게임오버로 이어진다.
‘그럼 뭔가 강한 게 나왔다는 건데?’
판단은 여기까지.
히르칸이 그림자 사냥개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림자 사냥개 세트의 특수 효과 ‘그림자 사냥개’가 발동합니다.]
희미해진 존재감, 가벼워진 몸.
히르칸이 그림자 사냥개처럼 날렵하게 되어 움직였다.
5.
튠 파티가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가장 먼저 달려온 건 가까운 곳에 있던 알투 패밀리였다.
하지만 알투 패밀리는 몬스터 무리 사이에 갇혀 있는 튠 파티를 보는 순간 그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검은 나무 사이에 모습을 감춘 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보면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으아, 이거 힘들겠는데?’
‘들어가면 우리들까지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뭐야, 저놈들은?’
상황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지 못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블랙 트롤의 숫자만 하더라도 여덟 마리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블랙 오크를 비롯해 잔챙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가 스무 마리 넘게 있었다.
“야, 쟤들이 왜 갑자기 갑옷을 입는 거냐?”
“불카스 산맥 애들하고 사업 제휴라도 했나 보지.”
“여기서 농담이 나와?”
“미안…….”
그리고 그 몬스터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제대로 된 방어구…… 유저들이 입은 것보다 좋아 보일 정도로 깔끔하고, 번듯하고, 전투의 상흔조차 없는 방어구는 물론 블랙 트롤들은 평소 들고 다니는 투박한 나무 몽둥이 대신 날이 벼려진 도검을 들
고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 블랙 트롤 무리들보다 시선을 더 확 끄는 존재가 있었다.
“쟤가 걔군.”
“투구 쓴 오우거.”
5미터 신장, 본래는 터질 듯한 근육을 노골적으로 뽐내고 다니지만, 지금은 은빛 갑옷을 두르고 있는 오우거 한 마리. 가장 인상적인 건 쓰고 있는 뿔 달린 투구 아래로 보이는 뻐드렁니와 투구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눈동자였다.
이렇게 합이 서른이었다.
이 서른의 몬스터 무리 사이에 튠 파티원들 다섯 명이 포위된 채 버티고 있었다. 쉴드 마법 안에 마법사와 사제가 있었고, 풀버프를 받은 탱커가 그들 앞에서 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모습은 시간 벌이를 위해 배수의 진을 친 모습, 그 자체였다.
오래 갈 수 없는 포메이션이기도 했다.
도와주려면 당장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본 것과 전혀 다른 타입의 몬스터들, 그것도 서른이나 되는 몬스터를 고작 알투 패밀리 5인이 나선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이런 와중에도 알투 패밀리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누구 한 명이 발견했다.
“오우거 눈깔이 붉은색이 아니라 붉은색하고 검은색하고 섞여 있는데?”
“검은색?”
“타락의 힘에 노출된 건가?”
“타락 백작은 죽었잖아?”
“타락 백작이 죽었다고 타락의 힘이 사라진 건 아니지. 딱 봐도 메인 시나리오 때문에 등장한 퀘스트 몬스터로군.”
이런 와중에도 나름의 단서를 파악하는 알투 패밀리는 확실히 100레벨을 찍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들이 튠 파티를 돕기 위해 나선다면, 100레벨 달성은 조금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길을 뚫으면…….”
“길은 마법으로 뚫는다 치고, 어그로 집중되면 누가 저 많은 놈들 어그로를 상대하지?”
“탱커가 나서야지.”
“……진짜 다음에 새로 게임하면 무조건 마법사 아니면 사제한다.”
튠 파티는 몬스터 무리 속에 갇혀 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알투 패밀리도 나름 게임오버를 각오해야 했다. 일단 길을 뚫어야하는데, 그럼 몬스터들의 어그로가 알투 패밀리를 향할 테고, 그 후에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게임오버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이다.
가볍지 않다.
하물며 그들은 100레벨을 앞두고 있다. 48시간이, 48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알투 패밀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 진짜 죽기 싫은데…….’
‘그냥 모른 척 돌아갈까?’
‘그래도 튠 파티하고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저번에 아이템 없다고 하니까, 회복템도 나눠줬지.’
‘쟤들 괜찮은 애들인데…….’
나서기 싫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는 것도 싫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 튠 파티와 계속 보이스톡을 나누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튠 애들이 우리 봤어.”
봤다?
모두의 인상이 굳었다. 그냥 냅다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게 됐다.
“뭐래?”
“자기들이 봐도 여기서 벗어나긴 힘드니까 괜히 죽지 말고 튀라고 하네. 게임오버 당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알투 패밀리는 오히려 쉽게 답을 내렸다.
“새끼들, 사람 구슬릴 줄 아네.”
“이렇게 말했는데 도망치는 건 폼이 안 나지.”
“무리하지 말고 마법 좀 난사해서 길만 하나 만들어주자. 딱 거기까지만 하는 거다.”
알투 패밀리, 낭만을 아는 게이머들이었다.
6.
히르칸이 도착했을 때 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열 명의 유저들이 무장을 마친 몬스터 무리들과 대치국면을 갖추고 있었다. 히르칸의 눈길을 끈 건, 열 명의 유저들이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뉜 채 각개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상적인 포메이션이 아니었다.
그건 곧.
‘구해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휘말렸군.’
의도하지 않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의미였다.
‘마법을 쓰고 길을 뚫어주려는 와중에 몬스터에게 아군이 당하면서 고립됐겠고, 걔만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포위되고…….’
히르칸이 금방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상황을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히르칸에게 중요한 건, 상황이 어떠한가, 이게 아니라 자신이 어떤 결정을 하는가, 그 부분이었다.
히르칸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림자 사냥개 세트 효과 덕분에 히르칸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희미했었다.
때문에.
‘그냥 이대로 있는 건…….’
히르칸은 정말 영악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 여기 유저들이 전부 죽은 후에 시계를 챙기는 상상.
매너 없는 짓이지만, 그렇다고 불법이나, 편법은 아니다. 죽은 이의 시계를 누가 가져가든, 그건 가져가는 사람 마음이다. 더욱이 열 명이 죽으면 열 개의 시계, 모두가 100레벨에 근접한 자들이다. 아이템 레벨이 못해도 80레벨 이상일 터. 레어 아이템이라도 나오
면, 개당 1천 골드는 훌쩍 넘긴다. 지금 어지간한 대기업 부장 월급을 주울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과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만약 저기 있는 유저들이 히르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 이들이었다면 히르칸은 그들이 죽기 전까지 노래 감상을 하면서 유유자적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좀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일단 저기 있는 유저들은 히르칸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확실해.’
동시에 저들이 마주하고 있는 몬스터 무리들이 마웅이 말한 그 무리들이었다.
‘배덕의 왕자가 만들고자 하는 타락한 몬스터 군단이 확실해’
히르칸에게는 나름 익숙한 족속들이었다.
배덕의 왕자가 부리는 배덕의 군단과의 대전은 워로드의 역사적인 대규모 전투였고, 그 전투에서 히르칸은 주역은 아니더라도 나름 하회탈 길드와 함께 싸웠으니까. 저런 잔챙이들과 다수 싸워봤다.
히르칸은 고민했다.
‘저걸 잡아야 하는데.’
분명한 건 지금 등장한 투구 쓴 오우거, 헬름 오우거를 여기서 못 잡으면 다음은 없다. 오늘 저기 있는 유저들이 당하면, 그 후 곧바로 헬름 오우거에 대한 소식이 퍼질 것이다.
하물며 여기까지 온 유저들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진행 상황, 특징 등을 모를 리 없다. 헬름 오우거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타락의 힘을 떠올릴 테고, 곧바로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단서임을 파악할 터.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곳도 아니고, 30대 길드 차원에서 움직일 것이다.
움직이고자 하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 무엇보다 저기 있는 열 명은 위기에 빠져 있지만, 결코 약한 유저들이 아니다. 모두 100레벨을 보고 있는 유저들이다. 충분히 강하고, 그 누구보다 생존 의지가 넘치는 자들이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일 준비
가 된 자들이다.
결정적으로 낭만과 매너를 아는 자들이다.
‘내가 합류하면…… 잡을 수 있다.’
히르칸이 후드를 벗었다. 어둠이 사라지고, 하회탈을 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림자 사냥개의 힘이 물러났다. 발이 무거워지고, 존재감이 강렬해졌다.
‘그래도 나름 낭만을 아는 유저들이군. 누가 봐도 힘든데, 커뮤니티라고 도와주는 걸 보면.’
그런 히르칸의 하회탈 아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저렇게 인성 바른 유저들이 죽을 위기에서 구해줬는데 맨입으로 인사를 하진 않겠지?’
< 24화. 헬름 오우거 (2).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