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65화 (65/192)

< 23화. 스킬 '무장' (1). >

1.

깔끔하게 그리고 반듯하게 다듬어진 통로를 모든 무장을 마친 해골 전사가 빛덩어리를 머리 위에 단 채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그런 해골 전사 뒤로 투박한 검을 꼬나쥔 채 조심스럽게 따라 걷는 히르칸이 다시 한 번 주변을 훑었다.

‘정령형 몬스터가 나올 만한 디자인은 아닌데?’

문을 열고, 인스턴스 던전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히르칸은 나름 촉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마주하게 될 몬스터는 살라만다 같은 순수한 정령형 타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막연한 추측은 아니었다. 앞선 토굴은 일종의 방사장, 사육장 같은 개념이었다면, 지금 히르칸이 있는 장소는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핵심은 이 공간이 깨끗하다는 점이다. 만약 이 공간이 지저분한 공간이었다면, 반대로 정령형 몬스터의 등장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실험을 견디지 못한 정령형 몬스터가 야단법석을 피운 후에 모든 것을 해치우고, 던전의 지배자가 됐다는 흔적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 히르칸이 있는 공간은 깨끗하니, 어떤 몬스터가 난리를 떤 건 아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던전을 지키는 가디언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을 것이다.

워로드는 의외로 이런 요소가 충실하다. 디테일이 괜찮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물론 히르칸에게는 썩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괜히 화속성 저항세트를 구매했나?’

정령형 몬스터의 등장 가능성이 높아서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구한 화속성 저항력 세트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되팔면 큰 손해는 아니지만, 애초에 비싸게 산 만큼 어느 정도의 손해는 피할 수 없다.

‘돈만 나가는군.’

여러모로 돈 때문에 속만 쓰린 나날들이다.

그렇게 히르칸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느릿한 걸음으로 10분 정도를 걸었을 때, 통로가 끝나고 공간이 드러났다. 약 300평 남짓, 천장까지 높이는 대략 10미터쯤, 꽤 큰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 안에는 날카로운 자국들, 칼자국이 가득했다.

‘아.’

그 칼자국을 보는 순간 히르칸은 이곳의 수호자가 어떤 놈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짐작은 이 공간 중심에 가지런히 놓인 갑옷을 보는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2미터 신장의 듬직한 체격의 거구가 입을 법한 투박한 디자인의 갑옷은 중세시대의 기사들이 입었

을 법한 형태였다. 멋을 위주로 한 유저들의 세련된 갑옷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무언의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물론 히르칸에게는 그런 갑옷의 멋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안 좋은 기억은 잊을 법하면 떠오르는 법이지.’

일단 히르칸에게 희소식은 지금부터 싸우게 될 몬스터가 이미 여러 차례 싸워본 적 있는 몬스터라는 사실이며, 안 좋은 소식은 그 몬스터에게 한 번 게임오버를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령 기사를 제작하는 곳이었군.’

히르칸이 갑옷을 직시하는 순간, 히르칸의 존재를 파악한 갑옷 속 주인 역시 움직였다.

- 침입자를 제거한다.

딱딱한 기계 같은 어조와 함께 갑옷의 틈 사이로 불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꽃으로 가득 찬 갑옷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쇳소리와 함께 투구 사이, 갑옷 틈 사이로 불꽃을 토해내는 몬스터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정령기사였다. 정령의 힘을 이용해 갑옷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종의 인공 크리처다. 레벨은 재료가 되는 정령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 히르칸이 앞서서 80레벨짜리 살라만다

를 잡았으니, 지금 이곳의 정령기사는 90레벨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건 정령기사가 가지는 특성이다.

‘상성 안 좋은 놈이 나왔군.’

정령의 힘을 이용하는 탓에 모든 디버프 마법으로부터 면역을 가진다. 저주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동시에 치명상이란 개념이 없다. 정령을 잡을 때처럼 누적 데미지를 주는 식으로 잡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하다. 같은 레벨대 그리고 중소형 몬스터들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강하다. 강함의 비결은 매우 수준 높은 전투 인공지능이다. 보통 몬스터들이 짐승처럼 싸운다면, 정령기사는 이름 그대로 기사처럼 싸운다. 녀석과의 전투를 몇몇 유저들은 체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여기에 검사의 고레벨 스킬인 검기(劍氣) 스킬을 쓸 줄 안다. 쿨타임은 50초. 검기의 위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런 정령기사와의 전투는 때때로 유저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어지간한 유저들은 못 이긴다. 게임 좀 한다는 유저들에게도 정령기사와의 승부는 쉽지 않다. 특히 탱커들이 굉장히 상대하기 싫어한다. 보통 몬스터는 방패를 들면 그 방패 위로 공격

을 하는데, 정령기사는 그 방패를 피해, 우회해서 상대의 틈을 찌른다.

심지어 히르칸도 정령기사에게 게임오버를 당한 경험이 있다. 물론 그때는 히르칸의 실력 부족보다는 스펙 차이가 너무 컸었다. 100레벨 무렵에 히르칸이 처음 정령기사를 만났는데, 그때 히르칸이 상대한 정령기사의 레벨은 무려 160레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60레벨 차이를 커버하기란 쉽지 않다. 히르칸이 그런 정령기사를 상대로 승부를 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히르칸의 기준에서는 쉽지 않은 놈이다.

“흥.”

물론 그렇다고 전투를 피할 순 없다. 이곳 무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히르칸이나 정령기사, 둘 중 하나가 죽는 것밖에 없으니까. 상대를 죽일 수 없으면, 히르칸이 죽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히르칸은 죽을 생각이 없으니, 죽이는 수밖에.

‘어디 해보자고.’

딱딱!

히르칸이 손가락을 두 번 튕기는 순간, 명령만을 기다리던 해골 전사가 돌진했다.

본 아머 그리고 매드니스 헬름 효과를 받은 해골 전사는 거침없이, 저돌적인 자세로 정령기사를 향해 날려갔다. 정령기사는 그런 해골 전사의 돌진 앞에서 흔들림 없이.

츠릉!

검을 뽑은 후에 한 손으로 잡은 검을 적절한 타이밍에, 해골 전사가 자신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듯 휘두른 칼을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하면서 휘둘렀다.

빠각!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해골 전사가 입고 있는 본 아머의 어깨부분이 어깨와 함께 박살이 났다. 섬뜩한 위력이었다. 여기서 해골 전사는 곧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매드니스 헬름 효과로 패퇴를 모르는 해골 전사의 호전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 상대에게 그 호전성은 오히려 독이었다.

쉬익!

정령기사는 해골 전사의 칼을 피하면서, 역으로 공격을 날렸다. 그 역습을 해골 전사는 쉽사리 피하지 못했다. 두 번의 격전 속에서 해골 전사는 큼지막한 두 개의 상처만 입었다.

그 광경을 보던 히르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녀석에게는 안 먹혀.’

히르칸이 해골 전사에게 가르쳐준 전투 스타일은 회피 후 공격이었다. 대부분 호전적인 몬스터들은 먼저 공격을 하는 만큼, 이 방식은 아주 제대로 먹혔다.

하지만 정령기사는 회피와 반격을 동시에 하는 걸 기본으로 삼는 전투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는 건, 우세를 점했을 때뿐이다.

무엇보다 해골 전사의 회피 능력은 히르칸의 능력치에 맞춰져 있다. 히르칸보다 스탯이 우월한 정령 기사의 공격을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피하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골렘은…….’

그렇다면 골렘은?

‘의미 없겠지.’

더더욱 의미 없다. 해골 전사보다 느린 골렘은 정령기사에게 밥조차 못 되는 간식 같은 존재다.

히르칸이 짧게 상황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사이 해골 전사의 몸이 넝마가 됐다. 정령기사의 강력한 공격력 앞에서 본아머 역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히르칸은 이제 잡념 대신 판단을 내렸다.

‘그래, 이제까지 빨았던 꿀을 토해내야지.’

여기서 나서는 건 히르칸, 그밖에 없다. 그 외에 그 누구도 정면에서 정령기사를 상대하지 못한다.

히르칸이 해골 조각 두 개를 뿌린 후에 곧바로 정령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2.

양손으로 쥔 히르칸의 검이 정령기사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며 수평으로 날아왔고, 정령기사가 그 검을 제 검으로 막기 위해 사선으로 검을 내리 휘둘렀다.

두 검은 곧바로 한 점에서 맞닿으며.

카앙!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끼긱, 끼긱!

두 검이 서로의 날을 갉아먹기 위해 내뱉는 소리는 이를 가는 것보다 더 섬뜩하고, 듣기 힘들었다. 그 소음 속에서 히르칸의 검이 왔던 궤적으로 거꾸로 그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정령기사와 양손으로 검을 쥔 히르칸,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르칸이 밀린다는 건.

‘미치겠군.’

히르칸의 능력치가 정령기사에 미치지 못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런 증거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히르칸의 온몸, 방어구 곳곳에 가득한 상처들 역시 증거물이었다. 물론 히르칸만 초라한 궁색은 아니었다. 정령기사의 갑옷도 분전의 흔적이 역력했다.

분명한 건, 이제까지 히르칸이 치른 전투 속에서 가장 치열하고, 추레한 전투라는 점이었다.

‘간신히 버텼군. 스킬 안 배웠으면 끝장날 뻔했어.’

이마저도 얼마 전 습득한 육체 개조 스킬 중 하나인 ‘가짜 심장’ 스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가짜 심장 덕분에 히르칸의 HP는 능력치창의 수치보다 20퍼센트다 더 높아진 상황이니까. 여기에 피부 재봉과 본 아머까지. 이 세 가지 도움이 아니었다면, 히르칸은 추

레한 전투가 아니라 처절한 패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게 히르칸이 정령기사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해골 전사 세 마리가 동시에 정령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령기사가 그 낌새를 느끼자마자 히르칸과 맞대고 있는 검에 힘을 더 강하게 주며 히르칸을 검과 함께 밀어낸 후 몸을 돌렸다.

‘오케이.’

짧게 휘청거린 히르칸이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 히르칸의 눈에는 이미 반쯤 파괴된 정령기사의 왼쪽 어깨 갑옷이 보였다. 히르칸은 망설이지 않았다. 정령기사가 덤벼든 해골 전사 셋을 향해 검을 크게 수평으로 휘두르는 순간, 정령기사의 검에서 뿜어지는

검기가 넓게 퍼져나가며 해골 전사 셋의 몸을 동시에 가르는 순간.

콰직!

히르칸의 검이 정령기사의 왼팔을 잘라냈다.

푸홧!

잘려나간 팔의 단면으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히르칸은 곧장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반으로 토막이 났던 해골 전사들 중 두 마리가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포위당한 정령기사가 히르칸을 바라보고, 머리를 돌려 해골 전사들을 바라봤다.

‘승부수를 던질 때가 왔군.’

히르칸이 곧바로 견적을 냈다.

조금 전 사용한 검기 기술은 쿨타임이 시작됐다. 50초 동안은 쓰지 못한다.

더불어 남은 해골 전사는 두 마리. 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미끼 삼아 다시 한 번 일격을 날릴 것이다. 해골 전사 한 마리에 일격, 분명 손해 보는 장사이지만, 결판을 낼 수 있다면 아까울 건 없다.

히르칸이 곧바로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를 줬다. 히르칸의 마력을 머금고 재생을 마친 해골 전사들이 돌진했다. 정령기사는 곧바로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는 해골 전사를 바라봤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히르칸이 타이밍을 가늠했다.

‘지금 말고.’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시간을 보낸 후에.

‘지금!’

타이밍이 잡히는 순간 돌진했다. 높은 근력 스탯 그리고 패시브 스킬인 ‘각력 개조’에서 나오는 히르칸의 돌진력은 남달랐다. 히르칸이 빠르게 정령기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 사이 히르칸보다 더 먼저 정령기사와의 거리를 좁힌 해골 전사 둘이 동시에 칼을 든 팔을 들었다. 그 둘은 동시에 칼을 내리쳤다. 양방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공격을 전부 막아낼 도리는 없어 보였다.

동시에 정령기사는 두 공격을 막을 의도가 없었다.

정령기사는 해골 전사의 공격을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몸을 돌리며, 검도 같이 휘둘렀다.

쉬익!

그렇게 휘두른 정령기사의 검은, 자신의 갑옷을 관통하기 위해 검을 내찌를 준비를 한 채 달려오는 히르칸을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 하회탈 속 히르칸의 눈빛과 투구 속 정령기사의 불타오르는 눈빛이 교차했다. 둘의 눈빛은 달라진 바가 없지만, 히르칸의 눈빛은 탁하게, 반대로 정령기사의 눈빛은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새끼…….’

정령기사의 뛰어난 전투 인공지능은 이 순간, 위기의 순간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가장 최우선으로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수준 높은 전투 인공지능이 히르칸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히르칸에게 그것마저 대응할 능력은 없었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긴 했지만, 이런 긴박한 순간에서 의미를 가질 만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콰직!

정령기사의 검이 히르칸의 본 아머를 뭉개고, 해골뱀 갑옷을 뭉개고, 피부 재봉마저 뭉개고도 모자란 듯, 히르칸의 몸뚱이를 멀리 떨어진 벽 근처까지 날려버렸다.

히르칸이 바닥을 굴렀다.

여기서 정령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공격을 무시한 채, 히르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 기회에 히르칸을, 가장 무서운 적을 끝장을 낼 속셈이었다.

그 사이 히르칸이 골렘을 소환했다.

보통 유저라면 대처는커녕,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정령기사에게 당했을 터.

그러나 히르칸은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소환된 골렘이 차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며, 히르칸과 정령기사를 막는 벽이 되었다. 외팔이 된 정령기사는 그 골렘을 보는 순간 멈추지 않고 검을 들었다. 골렘이 완성되기 전에 골렘을 뭉갤 속셈이었다. 그렇게 골렘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분 단위도 아닌 초 단

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히르칸이 해내야 하는 건, 다시 한 번 회복 아이템을 섭취하고, 치료 점토를 이용해 옆구리에 만들어진 깊숙한 상처를 메우는 것이었다.

히르칸은 그 작업을 본능적으로 했다.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주먹으로 꽉 쥐어서 치료 점토를 터뜨린 후에 상처에 발랐다. 가슴팍에 숨겨둔 정말 값비싼 고급 HP 회복 사탕도 입에 넣자마자 깨물어 부수면서 꿀꺽, 삼켜버렸다.

동시에 히르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우.”

자리에서 일어난 히르칸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을 내뱉을 때마다 히르칸의 얼굴이 굳었다. 하회탈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 그 어떤 표정도 없이, 마네킹과 같은 입술만이 만들어졌다.

그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혼잣말이 나왔다.

“넌 뒈졌어.”

정령기사의 일격이 히르칸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영웅도살자를 깨웠다.

< 23화. 스킬 '무장'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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