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깊은 협곡 옹달샘 (3). >
7.
게임을 하는 유저들은 자주 꿈꾼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게임 캐릭터가 알아서 레벨업도 하고, 아이템도 맞추는 꿈을. 그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오토 프로그램과 게임 캐릭터 대리 육성이란 신종 일거리마저 생기긴 했지만, 그것이 유저들의 그 숙원을 풀어주진 못했
다.
당연한 말이지만 히르칸도 그런 꿈을 꿨다. 게임을 위해서 억지로 커피에, 포도당 사탕을 타 먹고, 게임을 했을 뿐인데 피곤해 죽을 것 같을 때,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짓을 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을 때, 정말 누가 자기 대신 캐릭터 좀 키워줬으면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숙원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가 이루어졌다.
“폭탄 하나 추가!”
150평 남짓한 넓은 공동 안에서 살라만다와 해골 전사, 골렘들이 어우러진 그 공간 사이로 히르칸이 뼈폭탄을 던졌다.
콰앙!
뼈폭탄의 폭발과 함께 살라만다의 몸뚱이가 사분오열 찢어졌다. 찢어진 몸뚱이는 작은 살라만다가 된 후 서로 뭉쳐 다시 본래의 모습을 갖추었다. 본체를 되찾은 살라만다는 곧바로 히르칸을 정확히 노려보며, 입을 벌려 괴이한 울음과 함께 분노를 표출했다.
화르르!
살라만다의 온몸에서 강렬한 열기가 뿜어졌다. 열기만으로 히르칸을 녹여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열기는 히르칸에게 닿기도 전에 골렘에 가로막혔다. 골렘을 방패 삼은 히르칸은 긴장을 풀며 손가락을 두 번 튕겼고, 곧바로 해골 전사들이 움직였다.
본 아머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렬한 열기. 그러나 해골 전사에게 공포 따윈 없었다. 해골 전사는 열기를 뚫고 살라만다의 뒤로 접근해, 칼을 크게 내리쳤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살라만다의 꼬리가 잘려나갔다. 살라만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린 후 캬아! 울음을 토해냈다.
긴장을 푼 히르칸은 그 울음을 들으며, 웃음을 지으며, 미소가 그어진 입안에 사탕 하나를 넣었다. 고급 초콜릿의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히르칸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아, 진짜 좋다.’
던전 입장 3일 차가 됐다. 히르칸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던전을 탐사하고, 몬스터가 나오면 잡고, 정해진 플레이 타임을 채우면 로그아웃을 하고 현실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게임을 했다. 그 과정에서 본 몬스터는 슬라임과 살라만다, 두 종류가 전부였다.
어찌 보면 지루한 작업.
하지만 히르칸에게는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너무 편해서 불편하다니까.’
3일 동안 적지 않은 몬스터를 잡았지만, 개중에서 히르칸이 전면에 나설 정도의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후방에서 열심히 사탕을 까먹고, 껌을 씹고, 음료수를 마셨다. 더 놀라운 건, 아낌없이 아이템을 쓰면서도 적자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장부상에서는 흑자
가 난다는 점이었다. 살라만다로부터 얻은 살라만다의 결정 덕분이었다. 값비싼 살라만다의 결정이 제법 짭짤하게 나왔다.
기쁜 소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골 조각의 스킬 랭크가 B랭크로 상승했습니다.]
[본 아머의 스킬 랭크가 C랭크로 상승했습니다.]
[마귀 저주의 스킬 랭크가 C랭크로 상승했습니다.]
던전에서 무려 3개의 스킬이 랭크업에 성공했다.
물론 이번 던전 사냥만으로 나온 결과물은 아니었다. 숙련도가 쌓이는 속도가 필드에서보다는 빠르긴 했지만, 이미 랭크업을 앞두고 있던 스킬들이 우연히 던전에서 랭크업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히르칸의 입장에서는 던전이 준 선물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지사.
‘평생 이렇게 사냥했으면 좋겠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런 히르칸에게 던전이 마지막 선물을 줬다.
8.
던전 탐사에서는 때때로 숨겨진 장소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숨겨진 장소를 찾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던전 하나에 코가 잘못 꿰이면 필드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손해를 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때문에 던전에서 숨겨진 장소를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팁이 존재한다. 개중 대표적인 팁이 불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던전 내에서 공기가 움직인다면, 불꽃은 그 공기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일 테니까.
이 방법으로 히르칸은 곧바로 숨겨진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방에 끝나는군.”
살랑살랑, 보이지 않는 바람에 춤을 추는 불꽃을 본 히르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시간 낭비는 없겠군.’
이보다 더 쾌적할 순 없을 지경. 히르칸은 곧바로 바람의 흐름을 되짚었고,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히르칸은 그 막다른 길의 벽을 향해 오크 히어로의 검을 찔러 넣었다.
카앙!
검에 찔린 벽이 단단한 소음을 토해냈다. 히르칸은 볼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벽을 무너뜨렸다. 흙벽을 무너뜨리자,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 크기의 철문에는 몇 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히르칸은 그 문양 사이
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문고리는 가볍게 내려갔다.
그 순간.
[무대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알림이 떴다.
‘인던이네.’
인스턴스 던전임을 알려주는 알림이었다. 히르칸은 문을 열지 않은 채, 곧바로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인스턴스 던전이라는 건 이 너머에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의미일 테고.’
인스턴스 던전은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뭐가 있으려나?’
지금 상황에서 안에 있는 몬스터의 정체도 특정할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소모 아이템도 꽤 썼다. 아직 적잖게 남았지만, 적잖게 남았다는 사실에 히르칸의 금값 같은 48시간을 베팅할 수는 없다.
히르칸이 물러났다.
‘경험치를 보면…… 이 녀석이 70레벨 제물이 되겠군.’
히르칸, 그가 만전을 기하기 위해 스라 협곡 빌리지로 향했다.
9.
모든 사냥터에 유저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때문에 유저들은 때때로 게임 시스템이 아니라 자력으로 무언가를 만들고는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간을 빌리지라고 한다. 유저들 중 누군가가 NPC를 부릴 만큼의 권력을 쥐게 되면, 이런 빌
리지에 NPC를 배치해 좀 더 체계적인 운영이 가능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또한 이런 빌리지는 나무가 없는 곳, 평평한 땅에 만들어진다. 나무가 있는 장소는 나무를 밀어버려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맵이 리셋되기 때문이다.
스라 협곡 빌리지는 스라 협곡의 입구 근처에 마련된 황무지 같은 땅에 마련되어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저들은 대부분 조용했다. 그들이 소란스러워지는 건, 유저 몇 명이 몬스터로부터 도망치다가 몬스터를 끌고 오는 경우였다. 그런 경우 모든 유저들이
나서서 몬스터를 불쌍한 꼴로 만들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유저들이 하는 건, 아이템 거래 및 정보 교환, 파티원 또는 길드원 모집 정도였다.
더불어 이런 빌리지에서 이루어지는 아이템 거래는 팔 때는 시가보다 싸게, 살 때는 시가보다 비싸게! ……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시가보다 25퍼센트……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내가 레벨업만 아니면 이걸로 장사하는 건데.’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서 아이템을 팔고, 사는 입장에서는 현실처럼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
히르칸도 그랬다.
아이템 시세표를 살피던 히르칸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히르칸을 마주 보고 있는 유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유저가 보기에 히르칸은 꽤 값을 두둑하게 치러줄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아이템 많이 사면 할인됩니까?”
“당연하죠. 물론 얼마나 구매하시느냐, 그에 따라 할인폭은 달랍니다.”
“마력 회복 사탕 좀 사고 싶은데.”
“그건 할인을 크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회전율이 높은 놈이라서.”
“천 골드 단위로 구매하고 싶은데, 그냥 딱 10퍼센트 깎아주시죠?”
“에이, 10퍼센트 깎으면 남는 거 없습니다. 이것밖에 안 됩니다.”
말과 함께 오른손바닥을 활짝 펴는 상인을 보며 히르칸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히르칸이 돈이 아쉽진 않은 입장이다. 오히려 여기서 이렇게 흥정할 시간이 아까운 입장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부자라도 비싸게 사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쩝쩝, 입맛을 다신 히르칸이 다시금 물품을 봤다.
‘이 사람 가격이 그나마 상식적이네.’
더군다나 그가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은 단순한 소비품이 아니었다. 부피는 작으면서도 효과는 좋은 놈들이다. 물량이 없을 때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놈들이고, 그 경우에는 구매를 위해 성까지 나가야 했다. 만약 성까지 가야 한다면, 가는데 반나절, 오는
데 반나절씩, 하루는 걸린 것이다.
“이거, 이거.”
히르칸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했고, 자동으로 계산된 계산액수를 확인한 유저가 살짝 놀랐다.
“어우, 많이 사시네. 좀 더 깎아드리죠.”
“좀 많이 깎아주시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잠시만요. 일단 여기서 이만큼 빼고…….”
그렇게 그 둘이 거래를 하는 사이.
“생각보다 이곳, 빌리지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 좋군.”
“체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무슨 왕처럼 보인다는 거 알고 계세요.”
“그런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닌데.”
“저도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니에요. 칭찬이에요.”
“언제나 칭찬 고마워.”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80레벨대의 유저 복장을 하고 있는 두 남녀가 스라 협곡 빌리지를 둘러보듯, 천천히 걷고 있었다.
레드불스 길드의 마스터, 마타도르 체브와 그의 보좌관 옐이었다.
워로드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 중 한 명. 세계적으로 유명한 야구, 축구 선수만큼 유명한 체브였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체브 본인은 투구를 쓰고 있었고, 옐 역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현실에서 이렇게 다니면, 미친놈 취급과 함께 의심을 받
겠지만 워로드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본적인 패션이었다.
그 덕분에 체브는 마음껏, 자신의 두 눈으로 주변을 훑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유저들의 면면을 면밀하게 훑었다. 그런 체브의 행동을 눈치챈 옐이 한 마디 던졌다.
“누가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당신이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이미 사전에 정보가 왔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잖아요?”
“없진 않았지.”
“누구 있었나요?”
“하회탈 히르칸.”
하회탈 히르칸, 그가 언급되는 순간 후드 속 옐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그녀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결국 운 좋게 보스 몬스터를 처음 잡은 것뿐이잖아요?”
체브가 옐의 말을 고쳤다.
“처음 그리고 혼자 잡았지.”
체브의 말에 예브가 인상을 더 찌푸렸다.
“그 정도 몬스터는 지금 체브, 당신이 가도 혼자 잡을 수 있을 텐데요?”
“하회탈 히르칸의 레벨에는 못하지. 레벨보다 낮은 몬스터를 잡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흥. 그가 레벨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뭐,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지.”
거듭된 옐의 투정 섞인 반문에 체브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회탈 히르칸이란 이름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옐과 말싸움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머릿속 생각은 전혀 달랐다.
‘레벨을 속였다고 해도 절대 높은 레벨은 아니야. 무엇보다 그 전투 능력과 센스 그리고 심지어 영상을 연출하는 능력은 레벨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지. 그는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게 아니라, 매력적으로 잘해.’
하회탈 히르칸은 30대 길드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하회탈 히르칸의 상품 가치는 높았다. 그 정도 유저라면 방송 채널에 프로그램 하나를 정규 편성해줘도 꽤 괜찮을 수준이다. 실력을 떠나서,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게 핵심이다. 그냥 잘 싸우는
게 아니라, 유저들이 그 사람을 찾게 만드는 매력과 흥행 요소가 있어야 하고, 하회탈은 그 요소를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레드불스 길드가 관리 중인 스라 협곡에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라 협곡에서 유저들이 아이템을 거래하는 장소는 게임이 만들어준 공간이 아니라 레드불스가 관리하는 장소였으니까. 아무리 정체를 감춘다고 해도 충분
히 꼬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꼬리를 잡은 후에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잡을 순 없다고 해도, 파트너쉽 정도는 맺으면 좋겠는데.’
길드 가입은 바라지도 않는다. 이제까지 하회탈의 행동 패턴을 보면 길드 가입을 받아들일 만한 유저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이들은 이미 하회탈이 특정 집단 혹은 길드 소속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이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
다.
때문에 체브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수확이 되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적대관계를 맺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무엇보다 하회탈이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낼수록 30대 길드는 그를 더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충
돌도 있을 수 있다. 정말 사전 교감이 없으면 워로드에서 충돌은 금방 이루어진다. 반대로 사전 교감이 한 번만 있어도, 서로 손목을 자르기 위해 덤벼들 일이 대화로 끝나기도 한다.
물론 이곳에 온 이유는 하회탈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과정이다. 진짜 목적은 스라 협곡 너머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150레벨짜리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체격은 크지 않았는데. 저 정도 체격이었지?’
겸사겸사.
그런 체브의 사념 사이로 잡음이 꼈다.
“깔끔하게 3천 9백 골드 나왔습니다.”
“좀 더 깎아주시죠?”
“계산한 거 보여드렸지만 다 깎아드리고 나온 값입니다. 워낙 가격이 높아서 여기까지 깎아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이 아래를 원하시면 근처 리토 성에 가셔서 사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럼 1천 골드짜리 코인 4개 드릴 테니까, 기왕 주는 거 치료 점토 10킬로그램만 더 주시죠?”
“에이, 치료 점토가 여기 시세로 킬로당 20골드인데, 그걸 10킬로그램 얹혀주면…….”
“서비스로 해주세요. 어디 가서 4천 골드 한 번에 파는 거 솔직히 쉽진 않잖아요?”
“좋습니다. 치료 점토 10킬로그램 더해서 4천 골드.”
“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흥정. 그러나 흥정 금액을 들은 체브가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조금 전 들은 흥정에 의심이 가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하회탈이라면 사냥을 할 때 적지 않은 소모품을 살 터. 그럼 대량으로 구매하는 쪽으로 추적을 하면…….’
우연히 단서를 찾은 듯한 기분.
그 기분에 체브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체브는 몰랐다. 자신에게 단서를 준 그 인간이 자신이 그토록 찾던 사람이란 사실을.
10.
깊은 협곡 옹달샘을 지나, 구불구불 토굴을 넘어, 다시 철문 앞에 선 히르칸은 가지고 온 소모품을 정리하면서 혀를 짧게 내둘렀다.
‘성에서 3천 4백 골드 정도면 살 수 있는 걸 4천 골드를 주고 사다니, 돈 60만 원이 그냥 꽁으로 날아갔네.’
아무리 돈이 넘친다고 해도, 당장 현실에서의 삶은 궁핍한 히르칸은 자신의 처지가 퍽 웃겼다. 60만 원이면 히르칸의 경우 석 달 치 식비나 다름없었다. 그런 돈을 그냥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지불했다. 이 사실에 히르칸이 새로운 목표를 추가했다.
‘내가 워로드에서 최고가 되면…… 아침에는 소고기 육회, 점심에는 소불고기, 저녁에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겠어.’
그러는 사이 히르칸의 손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히르칸은 해골 갑옷 곳곳에 숨겨진 주머니 같은 공간에 회복 사탕과 껌, 치료 점토 따위를 집어넣었다.
전투 도중 신속한 순간, 잽싸게 빼먹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걸 숨기는 것도 전투에서 필요한 능력이다. 그냥 주머니 하나에 모든 걸 넣었다가 주머니를 잃고 아이템은 쓰지도 못한 채 당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목숨 걸고 몬스터 등에 달라붙었는데 회복 아이템
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게임오버를 당하는 경우는 레이드를 하다 보면 꼭 한 번 이상 치른다.
때문에 현명하고, 노련한 유저들은 필요에 따라서는 다람쥐처럼 곳곳에 회복 아이템을 숨겨두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히르칸은 아이템 슬롯도 체크했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해골뱀 갑옷 세트와 더불어 50레벨 세트 아이템이긴 하지만, 화속성 저항력을 아주 높게 올려주는 저항력 세트도 하나 구비해두었다.
‘이것도 눈탱이 맞았고.’
이곳 유적에서 살라만다만이 등장한 걸 염두에 두면, 보스 몬스터도 화속성 타입의 정령형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시세보다 비싼 값에 구매했다. 사실 구매한 게 다행이었다. 속성 아이템 세트를 빌리지에서 유저들이 직접 거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아이템 슬롯마저 체크를 마친 히르칸이 시계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철문의 문고리에 손을 댔다.
문고리를 내렸다.
[무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히르칸이 그 말에 대답했다.
“70렙 찍으러 간다!”
< 22화. 깊은 협곡 옹달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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