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63화 (63/192)

< 22화. 깊은 협곡 옹달샘 (2). >

4.

스라 협곡.

악마산양이 뛰어노는 드넓은 협곡은 레드불스 길드에게 발견된 이후로 적지 않은 유저들이 찾은 장소였지만 여전히 유저들이 모르는 장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깊은 스라 협곡 속에 3평 남짓한 방보다 작은 크기의 옹달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저가 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도 그 옹달샘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저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 옹달샘의 깊이가 30미터쯤 되고, 그 30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동굴 하나를 볼

수 있으며, 무려 100미터에 이르는 그 수중동굴 너머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유저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

“푸후!”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생겼다.

긴 수영을 마치고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히르칸은 깊은 숨을 토해내며, 입안에서 열심히 굴리고 있던 사탕을 콰직콰직! 씹기 시작했다. 운디네의 눈물사탕은 히르칸의 입안에서 사정없이 부서졌다.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는 낭만적인 아이템 효과 덕분에 50골드라는 무시할 수 없는 가격에 거래되던 아이템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운디네 눈물사탕의 맛은 레모네이드 맛이었고, 부서지는 순간 히르칸의 입안은 레모네이드 향으로 만개했다.

‘드디어 도착했군.’

운디네 눈물사탕을 깔끔하게 씹어 삼킨 히르칸이 웅덩이에서 나와 땅을 밟았다.

땅을 밟은 히르칸이 자연스럽게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 히르칸의 귓속으로.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타이틀 ‘숨겨진 비밀을 발견한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타이틀 ‘던전 탐험가’를 획득하셨습니다.]

예상했던 알림이 들렸다. 히르칸이 만족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소리야.’

그렇게 좋은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워로드 유저치고 타이틀을 마다하는 인간은 없다.

또한 던전의 가치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운 좋으면 여기서 70레벨 찍을 수도 있겠지?’

던전은 필드 타입의 사냥터와 다르게 던전 진행 상황에 따라서 추가 경험치 및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던전 내 비밀 공간을 발견하거나, 던전의 정체를 파악하거나, 던전 전부를 탐사하는 등, 결과물에 따라서 경험치가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얻는 경험치 습득량은

레벨에 비례한다. 얻을 수 있는 경험치에는 한계치가 있지만, 그 한계치 아래에서는 퍼센티지로 경험치를 획득하는 셈이다.

히르칸이 69레벨이 된 후에야 던전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다.

‘자, 빨리 끝내자고.’

히르칸은 이렇다 할 감상에 빠지지 않은 채, 곧장 던전 탐사를 위한 준비를 했다. 일단 라이트 앱을 실행했다. 시계에서 튀어나온 빛이 칙칙한 어둠을 밝혔다.

‘어디 보자…….’

당장 보이는 건 토굴이었다. 거대한 개미가 만든 듯한 개미굴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의 토굴이었다. 히르칸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특별한 건 없었다.

‘다 뒤지는 데에 시간 좀 걸리겠는데?’

원타임의 게임 플레이만으로 완벽하게 클리어가 가능한 던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금이 되어버린 히르칸 입장에서는 빨리 클리어 가능한 던전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토굴 스타일이란 건 히르칸의 기준에서는 제법 괜찮은 요소였다.

‘그래도 70점 정도 줄 수 있겠군.’

좁은 지역의 전투에서 히르칸의 전투 능력은 꽤 괜찮다. 골렘으로 입구를 막을 수도 있고, 해골 조각을 던져서 단숨에 상대를 후방을 점할 수도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는 머릿수보다는 단일 전투 능력이 중요한데, 히르칸은 물론 히르칸이 부리는 해골 전사는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나다.

금방 머릿속으로 전투 시뮬레이션을 마친 히르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투 시뮬레이션 결과가 좋았던 모양. 그 미소를 머금은 채 히르칸이 해골 조각 하나를 땅바닥에 던졌다. 해골 조각은 곧장 해골 전사의 모습을 갖추었다.

블랙 오크를 재료 삼아 만든 해골 전사는 시미터와 흡사한 칼을 쥐고 있었으며, 검은 뼈는 어둠과 쉽게 동화되며 으스스한 아우라를 풍겼다. 히르칸은 그런 해골 전사의 머리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러자 블랙 오크의 두개골에 두 개의 뼈가 돋아났다.

매드니스 헬름.

여기에 히르칸은 곧바로 본 아머 마법도 걸어줬다. 해골 전사의 허전했던 가슴팍이 하얀 뼈로 뒤덮였고, 허술했던 골반 역시 하얀 뼈로 뒤덮였다. 여기에 앙상한 두 손 역시 뼈로 된 건틀렛으로 덮였다. D랭크가 된 본 아머는 이제 흉갑, 하갑 그리고 장갑까지 소환

이 가능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히르칸은 해골 전사가 쥐고 있는 칼에 저주 마법을 부여했다. 제 손바닥에 문자를 써 저주 마법을 발동시킨 후에 해골 전사의 칼을 쓰다듬었다. 마귀 저주, 나태 저주, 부식 귀신 그리고 최근 배운 블라인드까지!

그렇게 작업이 끝났을 때 모습을 드러낸 해골 전사는 전사라는 느낌조차 벗어던지고 있었다. 검은 해골 전사가 하얀색 본 아머를 두른 모습은 전사가 아닌 기사에 가까웠다. 여기에 여러 저주를 머금은 듯, 네 가지 다채로운 빛깔을 머금은 칼은 묘한 신비로움마

저 풍기고 있으니, 아예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히르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마력이 쪽쪽 빨리는구나.’

과하다.

보스 몬스터나 그에 준하는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스킬을 쓰는 건 마력 낭비다. 이제까지 마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던 히르칸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 달리 말하면 게임 초반과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의미다.

히르칸이 줄어든 마력을 채우기 위해 30골드짜리 마력 회복 껌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돈으로 숙련도를 올리는 셈이군.’

예전에는 돈이 없으니까 아낀 거지만, 이제는 아니다. 차고를 스포츠카와 최고급 세단으로 채울 만큼 돈이 넘치는 건 아니지만, 스킬북, 소모 아이템 정도는 마음껏 살 수 있는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히르칸에게 지상과제는 스킬 숙련도를 올리는 일이 됐다.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결국 그 스킬을 자주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족해진 마력은 소모 아이템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상황. 히르칸 말대로 돈으로 숙련도를 사는 셈이다.

질겅질겅.

그런 이유로 열심히 단물을 뽑아내기 위해 껌을 씹는 히르칸은 자신의 처지가 퍽 웃긴 듯 실소를 머금었다.

‘현실에서는 500그람에 3천 원도 안 하는 수입산 삼겹살도 사 먹지 못하는 주제에 게임에서는 3만 원짜리 껌을 씹다니. 진짜 나도 제대로 미친 놈이라니까.’

실소는 곧바로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5.

‘어쭈?’

던전에 입장한 히르칸은 해골 전사를 앞세운 채 던전 탐색을 시작했다.

탐색을 하는 히르칸의 표정은 하회탈 아래로 입만 드러났음에도 집중한 기색이 역력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런 히르칸의 표정이 바뀐 건 던전 입장 이후 첫 번째 전투대상이 등장했을 때였다.

‘슬라임?’

등장한 몬스터는 슬라임이었다.

슬라임 자체는 워로드에서 흔한 몬스터였다. 길가에 돌멩이처럼 너부러진 정도는 아니지만, 찾아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속에 빛을 품고 있는 슬라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 히르칸이 발견한 슬라임이 그랬다. 반투명한 슬라임의 몸뚱이 속에 있는 붉은 빛이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슬라임을 보는 순간 히르칸은 직감했다.

‘여기 정령 타입이 나오는 곳이네!’

정령형 몬스터.

워로드에서 굉장히 보기 힘든 몬스터 타입 중 하나다. 보기 힘든 주제에 몸값이 비싼 놈이기도 했다. 비싼 이유는 간단하다. 정령형 몬스터를 잡고 나온 아이템은 속성 아이템 제작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워로드에서 속성은 중요하다. 돈 좀 있는 유저나, 길드는 70레벨 세트 아이템을 구매하고자 할 때 한 세트를 구매하는 게 아니라, 속성별로 세트를 구매한다.

이런 이유로 속성 아이템은 언제나 수요가 넘친다. 70레벨대의 속성 레어 아이템이라면, 기본 3천 골드 수준에서 시세가 잡힌다. 정말 이상한 아이템일 경우가 3천 골드고 괜찮은 아이템이면 시세는 당연히 더 높다.

‘이거 너무 불길한데?’

그렇기에 히르칸은 이 순간 기쁨보다 먼저 불길함을 느꼈다.

우연히 얻은 던전 지도, 그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가 희귀종인 정령형 몬스터다?

엄청난 행운이다.

심지어 히르칸은 최근 연달아 운이 좋았다. 베어 워리어 사냥 동영상 조회수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르고 있는 중이고, 히르칸이 베어 워리어를 잡고 얻은 재료 아이템들은 전부 합쳐서 5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에 판매됐다. 잘 받으면 2만에서 3만 골드 정도

를 예상했는데 곱절의 가격에 팔린 건, 베어 워리어가 하회탈 히르칸이 잡은 최초의 몬스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워로드에서는 같은 아이템이라도 누가 만들었냐, 누가 얻은 거냐에 따라 시세가 달라지니까. 필시 히르칸의 팬이 된 어느 돈 많은 유저가 구매했을 터.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여기서 다시 한 번 운이 터졌다.

‘난 운이 좋으면 나중에 재수가 없어지는 케이스인데.’

히르칸의 인생은 새옹지마다. 운이 좋으면 꼭 나중에 운이 구려지는 시기가 온다.

자기 인생을 모를 리 없다.

때문에 히르칸은 이 엄청난 운이 과연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걱정부터 됐다.

물론 그런 근심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굳었던 히르칸의 표정은 시간이 흐르자, 금방 풀렸다.

‘뭐, 그래도 주는 걸 마다할 수는 없지.’

어차피 여기서 운이 너무 좋다고, 일부러 운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

‘재수가 없어 봐야 얼마나 없겠어? 설마 트럭이 우리 집까지 날아오기라도 하겠어?’

히르칸이 즐거운 마음으로 던전 탐사를 시작했다.

6.

거듭된 슬라임과의 전투 속에서 히르칸은 큼지막한 공동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막다른 길.

그 막다른 길에서 히르칸인 자신의 예상대로 정령형 몬스터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등장한 몬스터는 살라만다였다.

80레벨의 정령형 몬스터로, 몸길이가 최대 4미터에서 최소 50센티까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녀석이었다. 몸은 당연히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때문에 거듭된 공격으로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방법이 유일한 공략 방법이었다.

히르칸이 가진 전력을 봤을 때 그리 잡기 쉬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일단 어떤 식으로든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해골 전사들과 살라만다는 상성이 안 좋았다. 해골 전사의 회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살라만다가 온몸으로 뿜어대는 열기마저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해골 전사들이 살라만다의 열기에 뼈가 녹았고, 그 데미지

는 고스란히 히르칸의 마력을 갉아먹었다.

여기에 살라만다의 HP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마다 일시적으로 발동되는 ‘살라만다의 분노’ 효과에 의해 발생된 강력한 열기는 골렘마저 녹일 정도였다.

더불어 살라만다와의 전투에서 해골 마법사들의 활약은 극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D랭크의 해골 마법사 스킬로 소환한 해골 마법사가 쓸 수 있는 마법은 화염계 마법이 전부였다. 화염계 마법이 살라만다에 제대로 먹힐 리 만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살라만다는 그야말로 히르칸의 천적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셈.

하지만 히르칸은 이 힘든 적을 마주해, 그 어느 때보다 편한 전투를 치렀다.

“그렇지. 뒤에서 꼬리를 자르란 말이야! 잘했어!”

전투 자체는 접전이었다. 피가 튀기지 않으나 혈전이란 표현을 쓸 수 없겠지만, 확실히 격렬했다.

하지만 히르칸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후방에서 사탕을 쪽쪽 빨면서 전투를 바라봤다.

그런 그가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시간이 될 때마다 해골 전사의 칼에 저주를 걸어주며.

“야, 정면으로 접근하지 말고 측면으로 붙어. 그리고 찌르기는 잘 안 먹히니까 베기. 푹, 말고 스윽. 잘라내라고.”

통할 리가 없는 작전 명령을 내리거나.

혹은.

“아, 골렘 녀석, 해골이는 잘하는데 넌 왜 이러냐? 그만둬! 내가 할 테니까.”

필요할 때마다 카피 모드로 골렘을 조종하기 위해 골렘 뒤에서 열심히 섀도복싱을 하거나.

두 가지 경우가 전부였다.

물론 그 대가로 마력 회복 아이템을 다수 소모했지만, 소모하는 만큼 오히려 해골 조각과 골렘 소환, 해골 마법사 스킬 등 다수의 스킬 숙련도가 올라갔다.

그렇게 히르칸이 오크 히어로의 검을 단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채 살라만다를 잡는 순간, 히르칸은 녹아내리기 시작한 살라만다의 딸기맛 살점을 떠먹으며 생각했다.

‘리치리치…… 이 새끼 진짜 제대로 꿀 빨면서 게임했었네.’

히르칸이 네크로맨서의 참맛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 22화. 깊은 협곡 옹달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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