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62화 (62/192)

< 21화. 던전 지도 (3). >

7.

“완벽하게 무장을 마친 채, 전사처럼 두 발로 서서 싸우는 곰이라니…… 이곳, 불카스 산맥에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확실하군.”

히르칸은 마웅에게 베어 워리어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해줬고, 이야기를 들은 마웅의 표정인 굳어 있었다. 말을 멈춘 마웅의 주변으로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히르칸 역시 그 분위기에 맞추듯, 굳은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물론 히르칸의 속마음은 표정과 달랐다.

‘빨리빨리 좀 진행하자.’

우레사냥꾼 길드가 이곳, 불카스 산맥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히르칸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웅이 뜸을 들이며 엄숙한 분위기를 흘리는 것조차도 이제는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마웅이 그런 히르칸의 마음을 알 리 만무.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고맙네.”

그는 일단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필시 희생자가 생겼을 터. 자네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네.”

“아닙니다. 미약하게나마 제가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도리어 기쁠 따름입니다.”

히르칸이 말을 속사포처럼 뱉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히르칸이 살짝 뚱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빨리…….’

그런 히르칸의 기도가 통했는지 마웅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집무실 벽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책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히르칸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마웅이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조심스레 꺼냈다. 겉표지는 다른 책과 똑같았

으나, 그 안에는 딱지처럼 접힌 종이뭉치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

그걸 본 히르칸의 머릿속에서 빨리빨리란 단어는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에 눈이 녹듯 순식간에 녹았다.

‘설마?’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하는 히르칸. 마웅은 그런 히르칸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책상 위에 접힌 종이뭉치들을 올려놓았다.

“이것들은 내가 불카스 산맥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방법을 통해 모으게 된 지도일세.”

지도!

그 단어에 히르칸은 속으로 소리쳤다.

‘오예! 던전 지도다!’

던전 지도.

던전이 위치한 지도를 말함이다. 워로드에서는 보물 지도라는 표현으로 대체 가능하다.

혹은…….

‘마웅, 이 녀석 좋은 거 수집하는구나!’

보증수표라는 표현도 종종 쓰인다.

그 정도로 던전 지도는 가치 있다. 일단 던전 지도에 나온 던전은 무조건적으로 1개 이상의 타이틀과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보장해준다. 여기에 필드 사냥터보다 훨씬 더 높은 경험치도 보장해준다. 더 나아가 던전 관련 영상은 언제나 높은 주목도를 받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숨겨진 퀘스트도 얻을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던전에서는 귀한 스킬북을 얻을 가능성이 그 어떤 경우보다 높다. 시중에 나오는 레어 등급 이상의 스킬북 중 상당수는 던전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봐도 된다.

‘새옹지마.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을 겪으니까, 곧바로 기분이 끝내주는 일이 생기네!’

히르칸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반길만한 보상!

‘진짜 소고기 먹을까?’

히르칸이 곧바로 저녁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마웅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가치가 있는 만큼 모아두긴 했지만, 불카스 레인저의 대장으로 불카스 산맥을 떠날 수 없는 내게는 그다지 소용없는 놈일세.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긴 아까울 터.”

“그렇지요.”

“자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기엔 미미하겠지만,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이 대목에서 히르칸은 괜히 빼지 않았다.

‘어차피 뭘 고르든 중박 이상.’

고민하지도 않았다. 놓인 다섯 개의 지도 중 한가운데 있는 것을 골랐다.

‘못해도 만 골드…….’

1천만 원짜리 수표를 쥐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히르칸은 절대 그럴 리가 없음에도 자신의 심박수가 빨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히르칸이 지도를 골랐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웅이 곧장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그 말에 히르칸이 마웅의 행동을 살폈다. 마웅은 꺼낸 던전 지도들을 그냥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오호라.’

마웅이 왜 던전 지도를 줬는지, 그리고 굳이 여러 개를 꺼냈는지 금방 이해가 됐다.

‘부탁 하나에 지도 하나를 주겠다?’

마웅은 히르칸과 거래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히르칸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마웅이 시키는 일은, 공짜로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값비싼 값을 치러주니, 히르칸에게 마웅은 천사처럼 보였다.

“예, 어떤 부탁이든 괜찮으니 개의치 마시고 말하십시오.”

“불카스 산맥 너머에 파릉 숲이란 곳이 있네. 알고 있나?”

파릉 숲.

그 단어에 히르칸이 표정이 살짝 굳었으나, 이내 풀렸다.

“모릅니다.”

“그곳에서 자네가 말한 베어 워리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무기로 무장한 몬스터가 등장했다는 보고를 받았었네. 그 몬스터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겠네. 그리고 만약 그곳에서 무언가 의심되는 흔적이 발견된다면 보다 면밀한 조사를 해줬으면 하네. 그에

대한 보상은…… 부족하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보상을 해주겠네.”

말을 마친 마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손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던전 지도들이 있었다.

히르칸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파릉 숲으로 가겠습니다.”

[퀘스트 ‘마웅의 부탁’이 시작됩니다.]

“고맙군.”

거절할 수가 없는 퀘스트다.

하지만 퀘스트 목적지를 들은 히르칸의 머릿속은 조금 복잡하게 변했다.

‘파릉 숲…… 골치 아픈 곳이 걸렸군.’

파릉 숲은 히르칸이 알기로는 90레벨이 넘는 몬스터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당장 히르칸의 능력으로는 사냥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더 나아가 히르칸은 파릉 숲에 대해서 단편적인 정보는 있을지언정, 그곳에서 사냥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히르칸의 머릿속에 담아

두기에는 워로드란 세계는 너무나도 넓었으니까.

‘후우.’

물론 예상은 했다. 애초에 60레벨대에 불과한 히르칸이 마웅의 시험을 통과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80레벨 이상의 유저들을 대상으로 만든 퀘스트 난이도를 60레벨에, 그것도 혼자 완료한 건 히르칸이 유일할 것이다. 당연히 앞으로 나오는 퀘스트들 역시 히르칸

의 레벨을 기준으로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필시 도중에 레벨업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리란 건, 예상했던 바였다.

단지 이 시점에서, 바로 뒤에 추격자가 오는 게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했던 바가 펼쳐졌다는 점이 히르칸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뿐.

‘당분간 레벨업에 집중해야겠군.’

8.

히르칸은 불카스 레인저 빌리지를 나온 이후 자신이 획득한 던전 지도를 살폈다. 지도 내용은 애들 장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일부 지역만이 그려져 있었기에, 모르는 사람은 지도만 보고 그곳이 어딘지 파악하는 건 절대 불

가능했다.

단서는 하나, 지도 후면에 쓰여 있는 스라, 그 두 글자였다.

다행히도 히르칸은 그 단서를 보는 순간 답을 내렸다.

‘스라 협곡인가?’

스라 협곡.

80레벨의 몬스터, 악마산양들의 터전이다. 구불구불, 크고 길게 형성된 협곡과 그 협곡을 가득 채운 숲과 수풀 사이에 숨어 사는 녀석들은 협곡의 날카로운 절벽을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녀석들이다.

‘나쁜 건 아니야.’

히르칸에게 그렇게까지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라 협곡은 괜찮은 사냥터였다. 악마산양은 단독생활을 하는 놈들이었고, 단일 개체의 전투 능력은 80레벨 몬스터 중에 낮은 편이었으며, 개체수도 꽤 많고, 경험치는 보통 수준이다. 사냥 난이도는 낮은데 경험치는 보통, 두 가지 결과물을 합치면 꽤 괜

찮은 사냥터다. 지금 히르칸에게는 나쁘지 않은 사냥터다. 70레벨까지 레벨업을 하기에 괜찮다.

그러나 문제는 히르칸에게 좋은 건, 남에게도 좋다는 거다.

‘최근 레드불스가 이곳을 선점했었지?’

일주일 전, 스라 협곡을 레드불스가 최초로 발견하고, 현재 그곳을 선점 포고했다.

워로드에는 독점 포고, 선점 포고라는 게 있다. 독점 포고는 이 지역은 우리 것이니, 우리 허락 없이 들어오면 뒈질 각오를 하라는 의미이고, 선점 포고는 이 지역은 우리가 선점했으니 이후 이용자들은 우리들의 규칙을 준수해라! 정도다.

보통은 그런 선점, 독점 포고를 일정 기간 인정해준다.

더불어 선점 포고인 만큼, 히르칸이 레드불스 길드의 규칙을 준수하는 이상 문제 될 소지는 없다.

‘레드불스 애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한데…… 얘들이 우레사냥꾼과 손을 잡은 게 조금 마음에 걸리네.’

단지 레드불스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

하지만 히르칸에게 고민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다른 사냥터에서 레벨업을 마친 후에 스라 협곡으로 이동해서 던전을 공략하는 것보단 당장 스라 협곡으로 이동해서 레벨업을 어느 정도 한 뒤, 던전에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더 이익이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하루를 더 투자하느냐, 줄이느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히르칸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곧장 스라 협곡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9.

“여기가 불카스 산맥이구나.”

“이곳에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단서가 있다, 이거지?”

우레사냥꾼 길드를 대표하는 두 실력자, 우레공주 하희와 발리스타 해치가 불카스 산맥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퍼진 지 열흘이 흘렀을 때, 불카스 산맥은 워로드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레벨의 고하를 떠나 무수히 많은 유저들 그리고 길드들이 불카스

산맥에 있을 것이 분명한 보물을 찾기 위해 달려들었다.

워로드를 즐겨보는 워로드 시청자들 역시 불카스 산맥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로매니, 그 역시 그랬다. 직업 때문에라도 워로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역시 불카스 산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지금 그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일주일 걸렸네.’

로매니, 그는 하나의 영상 제작을 위해 일주일이란 시간을 투자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영화 제작에서 일주일은 시간 취급도 못 받는다.

오히려 반대.

‘고작 일주일 만에 이런 걸 만들다니.’

지금 자신이 고작 일주일이란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전율케 했다.

‘어린 애들이 과학 좀 배우고 집에서 장난 삼아 폭탄을 만드는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됐군.’

더 나아가 로매니는 자신이 만든 영상이 지금 시점에서 보여줄 수 있는 파급력에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로매니가 전율을 가다듬기 위해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한 코코아가 그의 전율을 조금 가라앉혀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 폭탄이야. 이제까지 영상이 수류탄 수준이었다면, 이건 못해도 빌딩 서너 채는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폭탄. 더군다나 지금 이 시점에 이걸 터뜨리면…….’

덜덜.

곧바로 로매니의 손은 전율에 떨리기 시작했다. 그 전율에 로매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지.’

자신이 만든 작품이 세상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이 드는 경우가 과연 살아생전 얼마나 올까? 창작자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기쁨 앞에서 로매니가 기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난 이런 걸 만들고 싶었어!’

그렇게 로매니가 떨리는 심정을 추스르며, 자신이 만든 폭탄을 의뢰인에게 보냈다.

10.

“예, 운동 스케쥴은 취소입니다. 예. 갑작스럽게 취소됐습니다.”

채설연의 비서, 박수지.

그런 그녀가 알고 있는 채설연은 여자라면…… 아니,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요소로 가득 찬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120퍼센트로 활용하는 재주도 있었다.

‘아가씨가 이런 적은 처음인데?’

그런 그녀의 가장 큰 능력 중 하나는 계획을 잘 세우고, 세운 계획을 잘 지킨다는 점이었다. 특히 운동이나, 식사와 같은 기본적인 활동은 꼭 지킨다. 그녀는 자신의 식사시간과 운동시간과 수면시간, 이 세 가지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지켰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무시했다.

‘처음으로 자기 방에서 식사를 하시고, 미리 잡아두었던 운동 계획은 곧바로 캔슬.’

그건 박수지가 그녀를 모신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때문에 박수지는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박수지가 의문을 풀기 위해 곰곰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채설연은 동영상 한 편을 보고 있었다.

오늘 막 올라온 동영상은 영상이 등장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섯 개의 숫자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숫자는 6이었다. 아마 내일 이 무렵에는 다섯 개의 숫자가 여섯 개의 숫자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 영상을 보는 채설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입가에 묻는 샐러드 소스조차 닦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처음부터 끝까지, 11분 11초짜리 영상을 거듭 봤다. 다 본 영상을 다시 한 번 봤다. 채설연은 자신이 단 한 번 본 적 없는 보스 몬스터를, 워로드

에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보스 몬스터를 혼자 힘으로 처리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뇌리에 각인시켰다.

채설연이 그 영상으로부터 눈을 뗀 건, 그 영상을 여섯 번이나 재생을 한 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 다음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영상을 본 채설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사람으로 만들겠어.”

< 21화. 던전 지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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