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61화 (61/192)

< 21화. 던전 지도 (2). >

4.

히르칸의 계획은 간단했다. 보잘것없는 복장으로 불카스 레인저 빌리지를 방문한 뒤에 마웅을 만나 퀘스트를 완료하고, 퀘스트 보상과 새로운 퀘스트를 받고 불카스 산맥을 떠나는 것. 굳이 자신의 존재감을 방방곡곡에 드러내서 귀찮은 일을 겪고 싶은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히르칸을,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는 히르칸을 아폴로 길드원이 잡았다.

히르칸인 걸 알고 잡은 건 아니었다. 히르칸이 봐도 자신을 잡은 아폴로 길드원들은 그냥 호구 한 놈 잡고, 엿 먹이는 것으로 이 귀찮은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런 그들이 잡은 호구가 히르칸이란 것이 히르칸에게는 정말 기분 더러운 일이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운명의 장난이라고 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왜 우레사냥꾼 새끼들이 여기에 있는 거야?’

발리스타 해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히르칸은 굳었다. 그와의 인연은…… 아니, 악연이 매우 깊었으니까. 히르칸은 그에게 세 번이나 살해당했다. 1대1로 당한 건 절대 아니었다. 우레사냥꾼 길드 소속 탱커들이 히르칸을 상대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시간을 버는

사이, 발리스타 해치가 날린 마법이 히르칸을 넝마로 만들었을 뿐.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히르칸이 도망칠 코스까지 예측해서 마법을 난사하는 그의 실력은 적임에도 히르칸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가 그냥 눈앞에 등장하는 것도 식겁할 일인데, 갑자기 자신한테 볼일이 있다고 접근한다?

‘뭐야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느낌이 안 좋다.

여기까지도 기분이 싱숭생숭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라고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나오더라도 발리스타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혼자서 잘 싸우는 타입이 아니니까.

하지만.

“단체행동 안 해? 뒈질래?”

우레공주 하희.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히르칸은 더 이상 이걸 운명의 장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하희를 보는 순간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 미친년이 왜?’

하희, 그녀는 우레여왕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 전투력은 시르보다 약하다. 문제는 그녀가 우레여왕 시르를 신처럼 떠받드는 광신도란 점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우레공주일까?

과거로 돌아오기 전, 히르칸을 가장 짜증 나게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희에게 있어서 신이나 다름없는 채설연의 배려 넘치는 제안을 거절하고,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는 히르칸은 사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실력은 히르칸에 비할 바 못했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드는 그녀는 히르칸에게 신발 속 작은 돌멩이처럼 아주 제대로 성격을 긁었다.

좀 더 들어가면 발리스타 해치는 솔직히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싸운 적은 없다. 하지만 하희하고는 얼굴을 맞댄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히르칸이 당한 박치기만 수십 번! 히르칸을 볼 때마다 미친개, 그곳도 대형견이 아니라 치와와 같은 예쁘장한 소형견이 거품

물고 달려드는 광경이 오히려 히르칸의 신경을 더 긁었다.

‘괜히 엮이지 말자.’

그런 그녀의 등장에 짜증이 솟구치고, 긴장감이 등줄기를 파고드는 건 당연한 일.

물론 지금 펼쳐진 이 상황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건 아폴로 길드원들이었다.

“야, 뭐야 이거?”

“나도 몰라.”

“우레사냥꾼 길드가 왜…….”

“쟤 설마 우레사냥꾼 소속이야?”

“그럼 좃됐네…….”

호구 하나 희생양 삼아 지금 그들에게 닥친 귀찮은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려고 모였는데, 그 호구 뒤로 진짜 호랑이가 등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수준을 넘어서 당혹감이 들고, 더 나아가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러는 사이 해치와 하희는 그들을 보고 놀라는 이들을 배경 삼은 채 저들만의 대화를 나눴다.

“해치, 너 이 새끼 뒈질래?”

“뒈질래를 몇 번이나 말하는 거냐? 입 좀 곱게 써라. 혓바닥에 걸레를 물었냐?”

“걸레? 너 뒈질래?”

“……젠장,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너 자꾸 길드 규칙 무시하는데 그러다 뒈지는 수가 있어?”

해치는 거듭된 하희의 걸걸하기 그지없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기엔 귀여운 외모에 아담한 체격을 가졌지만, 하는 말이나 행동의 걸걸함은 남자보다 더 심했다.

또한 그녀는 우레사냥꾼 길드의 규율을 그 누구보다 중시하는 여인이었다. 길드의 제일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활동에 영향을 주는 자를 굉장히 증오했다. 수틀리면 무력행사도 마다치 않았다. 그런 그녀는 우레사냥꾼의 규율 대장이자 돌격 대장이었다. 무섭

지만, 동시에 아군이 되어 전투를 치를 때 그녀의 가치는 솔직히 해치보다 높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해치는 짧게 이를 갈며 입을 다물었다. 실력이나, 역할 등에서 하희의 노고는 인정하지만, 그런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급격하게 다른 길드로 이적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으니까. 그리고 그런 기분이 솟구칠 때마다 2050년까지 남은 계약 기간이 해치의 심기

를 건드렸다.

해치가 그렇게 본인 사정으로 가슴 아파할 때, 하희가 해치로부터 고개를 돌려 히르칸을 바라봤다.

“얘가 하회탈 히르칸이야?”

“난 그런 사람 아닙니다.”

히르칸이 곧장 대답했다.

‘이 새끼들 농간에 넘어갈 이유는 없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하회탈 히르칸 대접을 받아서 좋을 건 없는 상황에서 히르칸이 자기 정체를 밝힐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히르칸을 바라보던 하희는 해치를 살짝 바라봤다. 얘가 걔가 맞냐? 그런 눈빛. 해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상대하기 싫다는 의미. 하희가 사냥감을 앞에 둔 늑대처럼 이를 드러냈다. 으르릉, 그런 소리가 나올 법한 분위기.

그런 그녀의 주먹이 갑자기 히르칸을 향해 움직였다.

순식간이었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건 둘뿐이었다. 행동에 나선 하희.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당연히.

‘이럴 줄 알았다. 빌어먹을 년.’

히르칸이었다.

우레공주의 성깔과 행동패턴을 그녀보다 잘 알고 있는 게 히르칸이다. 여기서 히르칸이 하희, 그녀의 주먹을 피하면 최소한 그가 복장과는 다르게 범상치 않은 놈이란 걸 눈치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히르칸은 알면서도, 피하는 건 물론 반격마저 날릴 수 있으면서도.

뻐억!

그냥 주먹을 맞았다.

‘쳇!’

기둥이 되어, 나무토막이 되어, 이렇다 할 회피까지 보이지 않은 채 하희의 주먹을 맞고, 그 힘에 그대로 실려 뒤로 날아갔다. 히르칸의 맞아 날아가는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로, 정말 제대로 맞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철퍼덕!

심지어 바닥에 대자로 자빠진 모습까지! 완벽했다. 영화 연출을 해도 이 정도로 맛깔나는 맞는 장면은 나오지 않을 터.

주먹을 내지른 하희마저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닌 모양인데?”

해치는 자신을 보고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패놓고 왜 날 봐?’

그러는 사이 히르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실이라면 그대로 기절 혹은 심하면 즉사를 해도 이상할 게 없겠지만, 여긴 가상현실게임 속이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유명 길드면 지나가는 사람 이렇게 패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하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 성격에 여기서 융통성 있는 해결은 절대 불가능하다.

결국 해치가 나섰다.

“아, 죄송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해치는 곧장 깊게 목을 숙였다. 나름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었다. 물론 맞은 입장에서는 고작 고개 숙인 거만 보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히르칸이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 숙이면 다입니까?”

“죄송합니다. 사례하겠습니다.”

“사례?”

해치는 곧바로 품에 있는 금빛 동전을 꺼냈다. 1000, 아주 깔끔한 숫자가 적혀 있는 동전이었다. 1천 골드, 현금 시세로 따지면 백만 원이다. 맞아도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은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한 대 맞고 받는 돈, 소위 깽값치고는 확실히 괜찮은 값이다.

해치 입장에서는 그 정도 돈을 지불해서라도 이 소란을 끝내고 싶은 심정일 터.

물론 그가 내는 돈은 아니다. 돈을 내는 건 우레사냥꾼 길드다. 애초에 지금 내민 돈 자체가 활동 지원금이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히르칸은 뚱한 표정으로 동전을 받았다.

히르칸은 고개를 돌려 아폴로 길드원을 바라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한 그들을 보며 히르칸이 말했다.

“다시 말하는데 난 그쪽하고 처음 본다고. 그러니까 이제 가도 되는 거지? 응?”

그 말에 아폴로 길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잡은 호구가 우레사냥꾼과 긴밀한 관계 같지는 않았지만, 우레사냥꾼 길드 앞에서 자기주장을 펼칠 정도로 미치지도 않았으니까.

히르칸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작은 소란이 그렇게 끝이 났다.

5.

소란이 정리되는 순간 해치와 하희는 나란히 섰다. 해치는 하희를 보며 말했다.

“벌금 1천 골드, 준비해라.”

그 말에 하희는 대답 대신 자신의 오른 주먹을 지그시, 말없이 바라만 봤다.

해치가 그런 그녀를 뚱한 표정으로 봤다.

‘이제는 무시인가?’

그 순간.

휙!

하희의 오른 주먹이 해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헉!”

해치가 기겁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주먹은 해치의 눈앞에서 곧바로 멈췄다.

그냥 위협.

해치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위협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이게 정상이지?”

“뭐?”

“아니, 누구든 주먹이 갑자기 날아오면 보통 이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이잖아? 피하고 자시고.”

“그게 무슨…….”

그제야 해치가 기억을 돌려, 하희의 손에 유저가 맞아 날아가는 장면을 재생했다. 그때 하희에게 맞은 유저는 정말 그림처럼 날아갔다. 움찔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그냥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달리 말하면 이미 주먹이 날아올 걸 알

고, 각오하고, 맞아준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 해치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게 갑자기 주먹을 내지르는데 누가 그걸 피해? 반응하는 게 이상한 일이지.”

정황을 보면, 하희의 기습 자체가 워낙 빨랐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해치는 하희를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움찔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 당시 하희는 그런 기색도 없었다. 날아간 사내 같은 반응이 당연한 반응이다. 무엇보다 겉으로 보이는 사내는 숨겨진 고수 같은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냥 보통 유저가 운 좋게 불카스 산맥에 도달한 느낌. 최근 불카스 산맥으로 유저들이 많이 오면서, 오는 길목의 몬스터 개체 수도 줄어들고, 길도 이미 온라인상에 공개됐으니, 운만 좋으면 누구든 불카스 레인저 빌리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런가?”

“됐고, 벌금이나 준비해.”

“흥.”

하희가 콧방귀를 뀌며 대화를 잘랐다.

‘빌어먹을 년. 이 년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길드를 어떻게든 이적해야 하는데…….’

해치 역시 여기서 하희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삐지는 건 다른 사람 앞에서 하고, 이제 우리 정체가 드러났으니 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네 말대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하회탈 히르칸이니 뭐니, 그런 놈 신경 쓸 때가 아니라.”

이제까지는 나름 상황에 맞추어 움직였지만, 이제 곧 우레사냥꾼 길드가 불카스 산맥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퍼질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 상황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레사냥꾼 정도 되는 길드가 움직이는데 소식이 퍼지지 않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한없이 정체를 감추고 움직이다가는 시간만 허비하게 된다.

때문에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목적 수행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유일한 답이다.

“알았어.”

하희 역시 해치의 말에 대답을 했다.

6.

‘빌어먹을 연놈.’

히르칸은 터져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꾹 참았다.

‘진짜 내가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이 새끼들을 도무지 날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우레사냥꾼과의 악연을 잊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삶에서 굳이 우레사냥꾼하고 다시 티격태격, 목숨 걸고 억지라도 싸우기 위해 히르칸이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니, 히르칸 입장에서는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짜 다시 새로운 인생에서도 좋아할 수가 없는 새끼들이야.’

물론 덕분에 히르칸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해치와 하희, 둘이 아니었다면 아폴로 길드 때문에 꽤 귀찮은 일에 엮였을 것이다.

‘흥.’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우레사냥꾼 덕분이다, 그런 생각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보면, 역시 30대 길드 답네.’

우레사냥꾼 길드가 불카스 산맥에 왔다는 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정상적으로 진행한다는 의미다.

히르칸의 경우에는 핵심을 알기에 곧장 불카스 산맥에서 모든 걸 치를 수 있었지만, 보통은 이런 식으로 오는 경우는 없다. 돌고 돈다. 다른 곳에서 시작된 단서를 시작으로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불카스 산맥을 비롯해 몇몇 메인 시나리오와 관련된 주요 지역에

도달하게 되는 식이다. 우레사냥꾼의 경우에도 다양한 루트의 퀘스트를 진행하다가 불카스 산맥에 있는 마웅에게 다다르게 됐을 터.

‘내가 늦게 움직였으면, 생각보다 골치 아팠겠어.’

퀘스트 전담팀을 운영하는 30대 길드의 퀘스트 진행 속도는 매우 빠르다. 심지어 그들은 가치 있는 정보 구매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더 나아가 30대 길드 중 몇 곳은 협력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만약 히르칸이 열흘에서 보름 정도 더 늦게 움직였다면, 본래 계획대로 레벨을 더 올린 후에 움직였다면, 우레사냥꾼 길드와 동선이 제법 겹쳤을 것이다. 만약 베어 워리어 사냥에 실패했다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일이 꼬였을 것이다.

‘한 번에 끝내서 다행이야.’

히르칸이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반대로 히르칸은 30대 길드가 가진 저력을 다시 한 번 인지해야 했으며, 그들을 홀로, 단신으로 상대해야 하는 이가 품어야 하는 각오의 크기를 다시 한 번 인지했다.

한숨을 다 뱉은 히르칸이 이를 꽉 물었다.

‘더 빨리. 빨리 마웅부터 만나자.’

히르칸에게 여유를 가질 여유는 없었다.

< 21화. 던전 지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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