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마웅의 시험 (3). >
7.
돌진하는 히르칸의 온몸이 검은 액체로 뒤덮였다. 뒤덮인 검은 액체는 히르칸의 가속력을 버티지 못한 듯 히르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검은 액체가 사라지자 해골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르칸은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던진 후에 왼쪽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에서 단숨에 검을 뽑았다.
츠응!
청아한 쇳소리를 내며 등장한 무난한 디자인의 롱소드. 어디를 보더라도 값비싼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그 검을 히르칸은 한손이 아닌 양손으로 굳게 쥐었다.
‘맨 왼쪽.’
이미 공격 태세를 갖춘 히르칸이 노리는 표적은 등장한 삼인방 중 가장 왼편에 위치한 자였다.
이름은 왕장.
물론 히르칸이 기억할 필요는 없는 이름이다. 히르칸에게 중요한 건 그가 가진 틈이었다. 투구와 갑옷, 그 사이의 틈. 히르칸은 그 틈을 향해 양손으로 쥔 검을 야구선수처럼 수평으로 휘둘렀다.
쉬익!
검이 바람을 갈랐고.
콰직!
틈을 파고들며 거친 소리를 토해냈다. 검의 굵기보다 작은 틈 사이를 정확하게 찌르는 히르칸의 솜씨는 기술을 넘어, 예술이라 부를 정도로 담백하고 완벽했다.
‘크헉!’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재앙, 천재(天災)다.
하물며 갑작스러운 공격을 목에 맞았으니, 숨넘어가는 소리조차 나올 리 만무.
히르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밀고 나갔다. 불도저처럼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어?”
“어!”
갑자기 옆에 있던 동료가 사라지는 광경을 남은 두 명은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자신의 동료를 바닥에 자빠트리는 히르칸을 바라봤다.
그들이 그렇게 한눈을 파는 사이.
떨그럭 떨그럭!
히르칸이 돌진하면서 흩뿌려둔 해골 조각 네 마리가 빠른 속도로 위풍당당한 본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2미터 신장과 듬직한 어깨 골격을 가진 검은색 해골 전사들.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 아래쪽 송곳니는 그들이 블랙 오크를 제물 삼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투를 위한 모든 모습을 갖춘 블랙 오크 해골 전사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히르칸에게 눈이 팔린 둘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
뒤통수 너머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고개를 돌린 둘은 달려오는 네 마리의 해골 전사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하얗게 변한 머릿속으로 판단 같은 건 불가능했다.
콰앙!
한 명은 머리를.
콰직!
다른 한 명은 골반을 가격당하며 휘청거렸다.
카앙, 캉!
휘청거리는 그들의 몸뚱이는 이어서 날아오는 묵직한 칼 앞에서 더 거세게 요동쳤다.
“젠장! 반격해!”
“알아!”
휘청거리는 그들이 나름 반격을 위해 잽싸게 검을 뽑고 휘둘렀지만,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반격은 반격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런 몸부림에 맞아주기엔 해골 전사들의 선생이 너무 뛰어났다. 히르칸의 공격도 곧잘 피해내는 해골 전
사들은 가뿐하게 공격을 피해내며, 카운터로 공격을 날렸다.
“으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결국 한 명이 자빠졌다. 자빠진 유저가 곧바로 마주하게 된 현실은 참혹했다. 해골 전사들이 장작을 패듯, 사정없이 제 칼로 갑옷 위주를 두드렸다.
“괜찮아?”
그나마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는 유저 한 명이 동료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의 꼴도 쓰러진 동료와 다를 건 없었다.
그런 그들의 소란을 뒤통수로 파악하던 히르칸은 골렘을 소환했다.
쿠쿠쿠!
땅에서 솟아오른 골렘이 전장을 가르는 벽이 되었다.
“씨발!”
그러는 사이 히르칸의 공격에 맞고 뒤로 자빠진 왕장이 욕설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그를 반긴 건 히르칸의 칼끝이었다.
푹!
“억!”
상대의 투구 사이 구멍을 정확히 파고든 히르칸의 검은 상대의 세상을 단숨에 앗아갔다.
“뭐야?”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세상의 불이 꺼진 느낌이 들 뿐. 히르칸은 당황하는 왕장을 발로 차서 다시금 자빠뜨렸다.
“어이쿠!”
히르칸은 자빠진 왕장의 가슴팍을 제 발바닥으로 꽉 누르면서, 여전히 그의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아 다시 꽂았다. 푹푹,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왕장이 몸부림을 쳤지만, 안타깝게도 근력 스탯은 히르칸이 훨씬 더 높았기에, 왕장은 히르칸의 발을 뿌리치고 일어나지 못했다.
“젠장! 우리가 누군지 알고! 너 이 새끼 가만 안 둬!”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격렬하게 혓바닥을 놀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유치하기까지 한 협박에 히르칸은 담담한 표정을 고수한 채 계속해서 칼끝으로 그의 눈두덩이를 찔렀다.
“그만해! 이 새끼야 그만하라고!”
왕장이 재차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모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게 된다면, 바지에 실례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오금은 저렸을 것이다.
그야말로 모르는 게 약.
“나 아폴로 길드 소속이야!”
그런 그의 거듭된 유치한 협박에 히르칸의 검이 처음으로 멈췄다.
“아폴로 길드라고?”
“그래, 이 새끼야! 넌 뒈졌어! 게임 접을 때까지 보이는 족족 잡아 죽여주마!”
그 말에 히르칸이 피식, 웃으며 다시 칼을 찌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야 그만하라고!”
왕장이 다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왕장의 외침은 더 이상 히르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히르칸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인연이란 게 참 대단하네.’
작은 눈을 가진 살집 두둑한 청년 한 명의 얼굴이 히르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굳이 머릿속에 저장해둘 만큼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었다. 입에 칼에 들어와도 잘 생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추남.
‘이런 식으로 또 그 인간하고 엮일 줄이야.’
기억하는 그 얼굴의 주인이 아폴로 길드의 길드 마스터, 아폴로였다.
아폴로, 중국인인 그는 부자인 아버지 덕분에 평생을 호의호식하던 인간이었다. 그런 그는 워로드에서도 호의호식을 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워로드에 때려 박았고, 그런 그가 주는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그의 주변으로 사람이 모이면서 아폴로 길드가 만들어
졌다.
30대 길드와 같이 큰 세력을 가지고, 수익 창출을 위해 운영되는 본격적인 길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친목 목적이나 어중이떠중이들이 만든 길드보다는 조직력과 짜임새를 갖춘 길드였다. 게임 스타일은 깨끗하다기보다는 더러운 편으로 머릿수와 템빨과 레벨빨을
앞세워서 자기보다 약한 유저들은 가뿐하게 무시한다. 작정하고 PK나 몬스터 스틸 같은 비매너 행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들이 힘으로 누를 수 있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짓누른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타입이다.
‘참 재미있는 놈이었지.’
그런 아폴로와 히르칸이 인연을 가진 건,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히르칸과 하회탈 길드가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위해 순번을 기다리고, 오랜 기다린 끝에 차례가 왔을 때, 아폴로 길드가 다짜고짜 자기들이 순번이랍시고 끼어들기를 시도했다. 하회탈 길드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아폴로 길드는 대표전
으로 상황을 정리하자고 제안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하회탈 길드를 짓누르고 본인들이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히르칸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났다.
대표로 나온 히르칸은 아폴로의 손모가지를 단숨에 잘랐다. 여기서 끝나면 그냥 작은 헤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폴로 길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머릿수를 믿고 덤볐다. 30대18, 2배 가까운 머릿수 차이가 났었지만, 히르칸이 혼자서 열 명을 해치우
면서 하회탈 길드가 압승을 거뒀다. 여기서 끝났다면 조금 큰 헤프닝으로 끝났을 텐데, 아폴로가 용병을 고용해서 다시 한 번 보복을 시도했다. 물론 그 용병은 히르칸 손에 박살이 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후 우연히 히르칸이 혼자 목적지로 이동 중에 아폴로
와 마주쳤다. 당시 네 명의 부하와 함께 있던 아폴로는 예고도 없이 부하들과 함께 히르칸을 공격했다. 물론 결과는 히르칸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후 하회탈 길드는 아폴로 길드의 거듭된 비매너 행위를 공론화하며, 그들로부터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받았다.
‘그때 그 보상금 받아서 김동수, 그 인간하고 한 끼에 20만 원짜리 양식 코스에 로칠드인가 뭐시기 하는 와인을 먹었었지. 그때 나온 푸아그라가 참 맛있었는데…….’
그 후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우연히도 아폴로 길드가 일반 유저들을 상대로 성추행을 하는 걸 히르칸이 발견하고는 히르칸이 그들을 박살냈다. 더불어 그 성추행 사건이 크게 번지면서, 아폴로 길드는 유명무실한 길드가 됐다. 더불어 그때 이후로 아
폴로 길드와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하회탈 길드는 성장을 거듭했고, 나중에는 아폴로 길드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길드가 됐으니까.
‘가만 생각하니, 아폴로한테만 뺏은 아이템이…… 어휴. 진짜 제대로 털었네.’
어쨌거나 아폴로 길드로부터 받아낸 수입은 짭짤한 수준 정도가 아니라, 하회탈 길드의 성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특히 아폴로는 아이템 슬롯 전부를 비싼 아이템으로 채워 넣고 다니는 타입이었고, 그를 잡을 때마다 그의 손목시계에서는 만 골드가 넘는 아
이템이 나왔다. 그 아이템은 전부 히르칸이 잘 써먹고 되팔았다.
사람이란 게 아무리 빌어먹을 인간이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천사처럼 보이는 법. 그 기준에서 본다면 히르칸에게 아폴로는 게임 잘하라고 하늘이 보내준 천사, 그것도 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각오해라.”
히르칸의 회상은 거기까지였다.
“지금은 이렇게 당했지만, 아폴로 길드의 모든 길드원들이 널 쫓을 것이다. 게임을 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왕장은 여전히 히르칸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히르칸은 그런 왕장을 보며 살짝 감탄했다.
‘아직도 로그아웃 안 하다니, 아주 질긴 놈인데?’
보통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고 로그아웃을 하기 마련이다. 본인이 무기력하게 게임오버 당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장은 여전히 입을 나불거렸다.
‘이제 몇 번 더 찌르면 죽을 텐데?’
물론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왕장의 HP는 히르칸의 거듭된 치명적인 공격에 10퍼센트조차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여기서 좀 더 찌르면 게임오버다.
“야.”
히르칸이 공격을 멈췄다.
“아폴로 길드라고 했지?”
“넌 사람 잘못 건드렸어.”
“아폴로 길드라면 아폴로가 길드 마스터로 있는 길드 맞지?”
“네가 30대 길드 소속이 아닌 이상, 새로 캐릭터 파서 하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히르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왕장의 가슴을 누르던 발을 치웠다. 그리고는 왕장의 골반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의 자유를 되찾은 왕장이 몸을 들썩였다. 히르칸은 그런 왕장의 아랫도리를 자신의 검으로 탕탕, 두어 번 내리쳤다.
“어?”
몸을 일으키고, 최후의 발악을, 반격을 하려던 왕장의 몸이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너 지금 뭐하는 짓…….”
왕장이 기겁하는 순간.
콰직!
히르칸이 전력을 다해 검으로 상대의 낭심을 내리쳤다. 낭심 부위의 갑옷은 멀쩡했다. 당연히 찌그러질지언성 왕장이 입는 데미지는 없었다.
“으헉!”
하지만 그 공격은 이제까지 왕장이 받은 공격 중 가장 섬뜩하고,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8.
왕장을 처치한 후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를 반긴 건 모든 작업을 마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네 마리의 해골 전사였다. 히르칸은 그들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새끼들.’
자기 몫을 120퍼센트 이상 해낸 해골 전사들을 바라보는 히르칸은 절로 배가 불러왔다.
‘그보다 얘네들 수준이 내 예상보다 낮군. 끽해야 60레벨 중반 수준 같네.’
물론 해골 전사들이 아주 잘 싸워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다. 일단 히르칸을 쫓아온 세 명의 수준이 낮았다. 레벨은 60레벨 중반, 아이템 역시 레어 아이템은 무기와 상의 정도고, 나머지는 노멀 등급의 아이템으로 무장한 듯싶었다.
반면 히르칸에게는 유저를 상대로 아주 치명적인 위력을 가진 무기가 있었다.
오크 히어로의 검.
워로드에 설정상 유저도 동물형으로 분류된다. 오크 히어로의 검이 그래서 인기가 높다. PVP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니까. 그런 오크 히어로 검의 옵션이 해골 전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니, 이런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상대는 사제나,
마법사도 없었고, 자체적인 버프 스킬을 사용할 여유도 없었다. 하다못해 사제라도 한 명 있었으면 상황은 이렇게까지 쉽게 풀리진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벨이나 아이템, 실력을 보면, 얘네들 힘만으로 불카스 산맥에 오는 건 절대 불가능. 나머지 본대도 불카스 산맥에 같이 왔겠군. 얘네들은 수색대 정도겠지. 아폴로 길드 수준이면 지금 불카스 산맥은 괜찮은 사냥터일 테니까.’
아폴로 길드의 본대가 불카스 산맥이 있을 것이다. 사제와 마법사, 검사로 구성된 적지 않은 숫자의 일원이 불카스 산맥에 상주하면서 상황에 따라 파티 구성원을 바꾸며 효율적인 사냥을 진행 중일 것이다. 불카스 산맥은 꽤 좋은 사냥터이니까, 백 명 남짓한 인
원을 가진 길드가 아예 자리를 잡을 만하다.
‘어차피 베어 워리어만 잡으면 불카스 산맥 졸업이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 당장 붙으면 귀찮아질 테니까.’
아폴로 길드가 무섭진 않지만, 당장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을 만큼 히르칸은 무모한 사내가 아니었다.
물론 당장 신경 쓸 건 그들이 아니었다.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시 본래 목적을 수행할 때다. 히르칸이 해골 전사들과 골렘을 회수하고는 본래 목적지로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아, 시계!”
다시 발걸음을 되돌린 히르칸이 잽싸게 시계를 챙겼다.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을 사 먹듯, 가는 길에 짭짤한 식사를 마친 히르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9.
불카스 레인저의 마을에 위치한 주점. 맛있는 몬스터 고기와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그곳은 불카스 산맥을 찾은 유저들이 한 번 이상은 방문하는 곳으로, 지금은 꽤 북적거리는 장소가 됐다. 최근 불카스 산맥에 유입 유저가 많다는 증거였다.
그것에 한 무리의 일원들이 전세를 낸 듯, 공간 하나를 차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신기한 건, 테이블과 의자가 많이 있음에도 앉아 있는 단 한 명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아폴로 길드라는 걸 알고도 건드렸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꽤 인상적인 아이템 착용자였다. 검붉은색 비늘로 잘 만들어진 갑옷은 워로드에서도 꽤 비싸다고 소문난 핏빛 악어 세트로, 풀세트의 가격은 사실상 유명무실할 정도로 비싼 놈이었다. 돈이 있어도 현재는 구하기 힘든 놈이었다. 자동차로 따
지면 최고급 스포츠카 같은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 그 비싼 핏빛 악어 세트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용자의 몸에 맞춰진 핏빛 악어 세트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는 주인의 몸은 그 정도로 비대했다. 세계적인 타이어 제조사, 미쉐린의 마스코
트가 떠오르는 몸매였다.
“예. 왕장이 몇 번이나 경고를 했음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비대한 몸을 가진 유저 주변에는 다섯 명의 유저들이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백 명이 넘는 길드원을 보유했으며, 길드원 평균 레벨이 60레벨에 다다르는 아폴로 길드의 주인인 아폴로와 간부들이었다.
“그 새끼 얼굴은?”
“영상은 찍었는데 얼굴 인식 방해 프로그램 때문에 제대로 나오진 않았습니다.”
아폴로 길드가 불카스 산맥에 들어온 건 하루 전. 일단 본격적인 사냥에 앞서서 가장 레벨이 낮은 이들에게 불카스 산맥 탐색을 맡겼다.
그런데 제대로 된 탐색을 하기도 전에 사고가 터졌다. 감히 아폴로 길드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아폴로 길드의 길드원들 건드리는 몹쓸 놈이 등장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아폴로는 간부를 모아두고, 놈을 응징하기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눈으로 봤을 거 아니야?”
“그게…… 너무 순식간에 당해서 제대로 못 봤다고 합니다.”
“복장은?”
“해골 갑옷이 얼핏 보였다는데, 자세히는 못 봤다고 합니다.”
“세 놈이 한 놈에게 당했는데, 뭘 입고,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워낙 순식간에 당하는 바람에…….”
물론 응징이 쉬울 것 같진 않았다.
간부들의 설명을 본 아폴로의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이 구겨지며, 더 못생기게 변했다.
“됐고, 무조건 잡아.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잡아. 방해하는 놈들도 전부 잡아. 불카스 산맥에서 사냥을 하는 동안 그 누구도 아폴로 길드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본보기를 만들어.”
아폴로의 경고에 간부들이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을 주변 유저들이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주 영화를 찍는다, 영화를 찍어.'
'어휴, 생긴 건 돼지보다 더 돼지 같은 놈이 폼 잡고 지랄이야.'
사람 많은 주점의 자리를 차지한 채 자기들만의 느와르 영화를 찍는 그 모습이 타인의 눈에 좋게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하물며 그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 장국영 같은 미남 배우도 아니니 불만은 더 클 수밖에.
물론 그런 아폴로 길드가 저지르는 소란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인간들도 있었다.
‘젠장!’
주점 한구석에서 멜론 맥주를 석 잔째 마시는 쥐색 로브를 뒤집어쓴 유저가 그랬다.
‘대체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신입을 스카우트해야 하는 거지?’
그의 이름은 해치.
우레사냥꾼 길드를 대표하는 마법사 중 한 명으로, 장거리 마법 적중률로는 워로드 마법사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나다고 해서 발리스타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여기 있는 이들의 명성과 유명세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유명한 자였다.
그런 그가 최근 임무 하나를 받았다.
‘하회탈 히르칸…… 그딴 놈을 영입해서 어디에 쓰게?’
하회탈 히르칸,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루키에 불과한 유저를 찾아 영입 제안을 하라는 것. 그게 해치가 받은 명령이었다.
‘아무리 겸사겸사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네.’
물론 오직 그 것만을 위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주목적은 불카스 레인저의 대장, 마웅을 만나는 일이었다.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진행을 위해서였다. 히르칸과의 만남은 문자 그대로 겸사겸사, 그가 불카스 산맥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퀘스트
진행 도중에 마주치면 영입 제안을 하라는 게 해치가 받은 지령의 정확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겸사겸사 처리하는 일이라고 해도, 해치 입장에서는 자기에 비하면 반딧불 수준에 불구한 명성을 가진 루키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1초라도 쓰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진짜 여왕님 성격 특이한 거 알아줘야한다니까. 그런 놈 아니더라도 우리 길드 가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간들이 몇 명인데…….’
사실 다른 이가 명령을 내렸다면 해치는 가뿐하게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명령은 그 누구도 아닌 길드 마스터의 명령이었다. 우레여왕 시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해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말씀하세요.”
그런 해치가 보이스톡을 통해 급하게 온 연락을 받았다.
“예, 지금 불카스 산맥입니다. 예.”
그렇게 통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치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해치는 곧바로 반쯤 남은 멜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공주님 수발까지 들어야 한다니. 진짜 더러워서 게임 못 해먹겠네.’
불카스 레인저의 마을에 폭탄이 쌓이기 시작했다.
10.
쿠오오오!
머나먼 곳에서 곰의 우렁찬 울음이 터졌다. 울음은 거센 바람처럼 숲을 흔들었다.
‘오오!’
그 울음이 히르칸의 몸에 닿는 순간, 히르칸은 정수리로부터 시작된 전율이 발바닥을 통해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왔구나.’
그 전율감 속에 히르칸이 하회탈 고쳐 썼다.
‘그래, 이거지.’
이제까지 보스 몬스터와 전투가 몇 번 있었지만, 대부분 우연히 그리고 운 좋게 치러진 전투에 불과했다. 사냥이라기보다는 헤프닝이다. 그렇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설계된 보스 몬스터 레이드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만이기도 했다. 우레사냥꾼과 전쟁을 치른 이후부터 제대로 된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했던 경험이 없으니까.
수년 간의 공백.
그 오랜 공백에 대해 우려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전투 아닌가? 실수에 따른 리스크가 큰 만큼, 걱정과 우려도 짙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만큼 몸이 따라주지 못하면 어떡할까? 그런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니, 간담이 서늘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거다.
이런 상황에서 히르칸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보잘것없는 히르칸이 이 순간만큼은 워로드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
‘안재현, 이제 진짜 시작이다.’
동시에 이건 시험이었다.
‘베어 워리어마저 혼자 못 잡으면, 결국 그냥 그저 그런 놈으로 남을 뿐이야. 솔플이고 나발이고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
히르칸,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시험.
“으럇차!”
히르칸이 크게 기합을 내질렀다.
“와라!”
전설이 시작됐다.
< 19화. 마웅의 시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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