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56화 (56/192)

< 19화. 마웅의 시험 (2). >

4.

워로드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징검다리와 같다. 일단 다리 하나를 밟으면, 그다음 다리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단지 그 다리와 다리 사이를 건너는 게 힘들 뿐.

그렇기에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이게 늦으면, 퀘스트 진행 전체가 늦어진다. 스타트가 늦어지는데, 목적지에 빨리 다다르는 게 쉬울 리 없다.

“히르칸, 자네가 최근 동안 불카스 산맥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우리 불카스 레인저를 위해 보여준 호의와 노력에 감사하네. 그런 자네이기에 이번 임무를 부탁하게 됐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히르칸이 그 내디딘 첫발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터.

“내가 불카스 산맥의 레인저를 맡기 시작한 이후로 이곳, 불카스 산맥에서 많은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며 레인저의 임무를 수행했지. 그런데 최근 들어 잘 벼려진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몬스터들이 늘어나고 있네.”

마웅.

잘 다듬어진 턱수염을 가진 건장한 체격과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의 모습이 히르칸에게는 산타클로스처럼 보였다.

그걸 알 리 없는 마웅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대화를 이어갔다.

“그 몬스터들이 무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분명 그 몬스터들에게 무기가 닿게 된 과정이 있을 터. 이와 관련되어서 최근까지 조사를 하던 중에 의심스러운 장소를 발견했네. 자네가 그곳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해줬으면 하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일은 저보다 불카스 레인저들이 훨씬 잘할 텐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 물론 자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자네는 어디까지나 우리, 불카스 레인저의 친우이지 내 부하가 아니니. 선택은 자네 몫이네. 해줄 수 있겠나?”

그런 마웅의 입에서 히르칸이 원하던 제안이 나오는 순간, 히르칸은 더 이상 마다치 않았다.

“이제까지 불카스 레인저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믿고, 그런 중요한 임무를 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퀘스트 ‘마웅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떴다.’

히르칸이 쾌재를 불렀다. 물론 속으로만 불렀다. 예전에 아힘브리 앞에서 보였던 추태를 이 자리에서 보일 정도로 히르칸의 학습능력이 저질은 아니었으니까.

마웅은 그런 히르칸에게 자신의 품 안에서 꺼낸 것을 히르칸에게 건네줬다. 히르칸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고, 곧바로 마웅이 꺼낸 것의 정체를 알려줬다.

“위치를 표시한 지도일세.”

마웅이 꺼낸 건 불카스 산맥이 가죽에 그려진 가죽 지도였다.

‘오예!’

히르칸에게 있어서는 보물지도였다.

5.

[마웅의 시험]

- 퀘스트 등급 : 유니크

- 퀘스트 수행 가능 레벨 : 없음

- 퀘스트 내용 : 불카스 레인저의 대장, 마웅이 당신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이 임무는 당신을 시험하는 임무입니다.

- 퀘스트 보상 : 마웅의 수집품

유니크 등급의 퀘스트.

‘이 정도면 백퍼센트지.’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히르칸은 등급을 보는 순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퀘스트가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란 확신은 있었지만, 유니크 등급의 퀘스트를 확인하는 순간 99퍼센트짜리 확신이 100퍼센트짜리가

됐다.

이후 히르칸의 눈이 자연스럽게 마웅의 수집품이란 단어로 향했다.

‘수집품이라…… 대체 뭘 줄까?’

배덕의 왕자 편의 시나리오 흐름은 전부 알고 있다. 그러나 디테일한 부분은 알 도리가 없다. 굵직한 보상은 알아도, 그 과정에서 있는 무수히 많은 퀘스트의 보상을 일일이 기억하기에는 히르칸의 두뇌 역량은 한없이 부족했으니까.

물론 저렴한 건 아닐 것이다. 유니크 등급의 퀘스트인데 보상으로 100골드, 이런 걸 줄 리는 없지 않은가?

‘크로니클 유니크 나오면 진짜 일본 가서 고베 소고기 먹는다.’

크로니클 유니크가 나오면 대박이다.

하지만 굳이 어마어마한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히르칸이 실망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뭐, 이게 아니더라도 문제는 없지. 베어 워리어만 잡으면 못해도 천만은 나올 테니까.’

베어 워리어.

지금 히르칸이 마웅으로 받은 퀘스트 내용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히르칸이 잡게 될 몬스터다.

몬스터 레벨은 80레벨.

곰치고는 아담한 4미터 신장을 가진 녀석으로, 특이하게 네 발로 기어 다니지 않고 두 발로 서서 다닌다. 두 발로 서는 주제에 갑옷도 입고 있고, 투구도 쓰고 있고, 양손에는 각각 검과 방패를 들고 있다.

심지어 검사 클래스 스킬의 질주, 기합과 같은 굉장히 전투적인 특수 능력도 가지고 있다.

‘어디 보자. 일단 못해도 베어 워리어 세트 아이템 두 개는 얻을 수 있을 테고…….’

어려운 만큼 보상은 확실하다. 보스 몬스터인 만큼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아이템은 준다. 그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건 70레벨짜리 레어 등급 아이템인 베어 워리어 세트다. 옵션이 꽤 괜찮다. 더불어 베어 워리어를 한 마리 잡으면 못해도 1개 이상의 레어

아이템을 만들 보석 재료가 나온다. 운이 정말 좋으면 3개 파츠를 만들 만큼의 양도 나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여기서 보석 하나도 안 나오면 내가 토봇 소프트를 테러한다.’

더불어 기본적으로 무조건 나오는 뼈와 가죽 그리고 베어 워리어 무기 조각은 70레벨짜리 노멀 등급 아이템 제작 재료에 쓰인다. 이 역시 값이 쏠쏠하다. 지금 시점에서 70레벨짜리 노멀 아이템도 100골드 이상은 받을 수 있다. 베어 워리어는 중소형 몬스터로 분

류되어 그 재료 코인의 양이 많진 않지만, 최소 10개 분량은 나온다.

물론 진짜배기는 레이드 영상이다.

이제까지 베어 워리어 공략 영상은 어디에도 올라온 적 없다. 필드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불카스 레인저 관련 퀘스트 진행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몬스터였으니까. 최초의 보스 몬스터 레이드 영상이라면 아무리 무명이라고 해도 1

백만 조회수는 예약이다. 히르칸처럼 이미 인지도가 있는 경우라면 본인의 최고 조회수를 기록할 수도 있다.

히르칸이 베어 워리어 사냥 때문에 손해 볼 걱정은 할 이유가 없다.

잡을 수만 있다면, 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잡지 못한다면, 히르칸에게는 적지 않은 타격이 될 것이다.

‘내가 실수만 안 하면 못 잡을 이유는 없어.’

히르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아슬아슬한 게 사람을 말려 죽인단 말이야.’

6.

히르칸이 그들의 낌새를 느낀 건, 불카스 레인저 빌리지를 떠나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재수 옴 붙었군.’

히르칸의 꽁무니에 하이에나가 붙었다. 마을에서부터 붙은 건 아니었다. 그냥 가던 도중이었다. 히르칸을 발견한 그들은 히르칸 몰래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회탈도 안 썼는데 쫓아온다…… 내 정체를 아는 놈은 아닌데.’

하지만 그들이 히르칸의 정체를 알고 접근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히르칸은 지금 해골뱀 세트와 하회탈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마법사처럼 보이는 마법사 로브를 쓰고 있었다.

위장이었다.

현재 불카스 산맥에서 하회탈 히르칸이 활동한다는 건, 구글에 히르칸과 불카스란 단어를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심지어 불카스 산맥에서 등장한 신 몬스터 칼원숭이 공략을 올려서 대박을 친 게 히르칸 아닌가?

히르칸이 바보도 아니고, 전투나 특별한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는 위장을 했다. 덕분에 호구 취급을 몇 번 당하긴 했지만, 히르칸으로 알려져서 표적이 되는 것보단 호구 취급이 나았다.

어쨌거나 위장을 하고 있는 히르칸을 쫓는다는 건, 하회탈 히르칸이 아니라 그냥 불카스 산맥에서 혼자 지나가는 유저를 쫓는다는 의미. 이런 경우가 앞서서 히르칸에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평소라면 상황이 터진 후에 나서겠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퀘스트를 진행 중인 상황이다.

평소와 다른 상황.

그럼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일 때다.

‘어떻게든 처리한다.’

분명한 건 무슨 방법이 됐건, 히르칸은 그 꼬리를 단 채로 베어 워리어를 잡는 장소에 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히르칸은 목적지로부터 방향을 틀었다. 추격자들이 추격하기 힘들게 이동하기 시작했고, 간간이 몬스터들도 일부러 지나치면서 상대방의 은밀한 추격을 불가능케 만들었다. 그런 히르칸의 수작에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예 정체를 드러낸 채 히르칸을 쫓았

다.

그리고 그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히르칸의 걸음이 멈췄다. 그들의 걸음도 멈췄다.

“초면인 거 같은데 나한테 볼일이 있나?”

첫 마디는 히르칸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히르칸을 바라보는 세 명 모두가 입을 꽉 다물었다. 히르칸이 그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검사 세 명. 세팅은 보통 수준 같고. 무기는 클래식 스타일. 그냥 정석대로 게임을 하는 놈들이네.’

기본적인 견적을 살피면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갈 길이 겹치면 먼저 가. 괜히 의심받을 짓 하지 말고.”

히르칸의 말에 그들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저들끼리만 속닥속닥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야, 어떻게 해? 짙게 깔린 적막감 덕분에 그들의 속닥거림은 히르칸의 귀에 속속 들어왔다. 히르칸이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게임에 인생 걸고, 본격적으로 하는 놈들은 아니군.’

여기서 히르칸이 승부수를 던졌다.

“여하튼 워로드는 쓰레기 새끼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비싼 돈 내고 게임하면서 할 게 그렇게 없나? 나 같으면 비싼 돈 내고 남자 똥구멍이나 쫓을 바에는 그 돈 모아서 정치인 선거자금으로 기부할 텐데. 아니면 그 돈으로 당장 똥 싸고 엉덩이를 닦거나.”

혼잣말이지만, 혼잣말치고 내뱉는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기 그지없었다.

들으라고 한 말, 도발이었다.

그 도발에 상대의 반응은.

“뭐? 지금 뭐라고 했냐?”

“그냥 가만히 두고 보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지금 우리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껄여?”

“허허,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우리들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멋대로 지껄이는데, 입을 찢어버려줄까?”

히르칸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 만큼 환영할 만한 반응이었다.

‘우와, 이런 반응 간만에 받아서 그런지 신선하네.’

히르칸은 그 반응을 보는 순간 백퍼센트짜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길드나 파티 소속은 아니다. 제대로 된 길드…… 30대 길드도 사람 꽁무니 쫓은 후에 정보를 빼앗아가는 더러운 짓을 한다. 아니, 아주 잘한다. 아주 잘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빠지면 괜히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그냥 도망치거나 혹은 아예 교섭

을 제안하거나. 그게 아니면 살인멸구를 시도해서 상황을 정리하거나.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매뉴얼이 있다.

지금 히르칸의 우습지도 않은 수준 낮은 도발에 넘어와서 저렇게…… ‘너 우리 아부지가 누군지 알아?’ 이렇게 유치한 반응은 절대 안 한다. 그런 거 하면 길드에서 잘린다.

그렇다는 건 어중이떠중이 길드 소속이란 의미.

‘그래도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어중이떠중이라도 실력은 아주 쓰레기는 아닐 테고, 워로드 좀 제법 오래 한 놈들일 터.’

히르칸 입장에서는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중이떠중이 길드 소속일 테니, 아주 작살을 내고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도발에도 쉽게 넘어올 것 같다.

“네놈들이 누군지는 딱히 알고 싶진 않지만, 셋이서 나 하나 두고 쫄아서 그런 소리 지껄이는 걸 보면, 쫄보 새끼들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 것 같군. 아, 하나만 물어보자. 게임하기 전에 성인용 기저귀 차는 건 잊지 않고 접속했지?”

“뭐?”

“뭐긴 뭐야, 나랑 붙으면 네놈 새끼들 죄다 무서워서 겁 먹고 현실에서 똥오줌 지릴 거란 소리지. 양 많은 날도 든든한 놈이길 기도해라. 오늘 좀 많이 지릴 거야.”

그럼 좀 더 도발해서 확실하게 끝장을 내면 될 터.

‘도발이 너무 유치했나?’

히르칸이 우습지도 않은 도발과 함께 슬그머니 시계를 조작했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아이템을 스위칭하기 위한 준비를 일순간에 마쳤다.

‘……확실히 기저귀 드립은 괜히 한 거 같아. 이 도발에도 넘어오면 진짜 쟤들 수준이 밑바닥이라는 거긴 한데…….’

그런 히르칸의 전투 개시를 알린 건.

“시팔, 저 새끼 그냥 잡자.”

“뭔가 있는 놈인지도 모르잖아?”

“알게 뭐야. 어차피 저 새끼도 눈치 까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데. 그냥 잡자.”

숙덕거림 뒤에 나온 그들의 자기 소개였다.

“이 새끼, 아폴로 길드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아폴로 길드!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히르칸은 출발 소리를 들은 100미터 선수처럼, 반사적으로 그들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며 소리쳤다.

“슬롯온!”

히르칸이 아폴로 길드란 이름을 추억한 건, 그로부터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 19화. 마웅의 시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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