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54화 (54/192)

< 18화. 득템 (4). >

8.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키요테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시체처럼 누웠다.

“괜찮아?”

“정신이 나간 모양이네. 야, 키요테! 키요테! 정신 차려! 설마 로그아웃 한 거 아니지?”

키요테의 동료들이 그런 키요테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하고 동시에 살짝 놀렸다.

그 모습을 히르칸은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봤다.

‘……홧김에 덤벼들 것 같진 않네.’

볼 게 없어서 키요테와 그 동료를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정당당하게 붙자며 덤벼들지만, 패배하는 순간 얼굴색이 바뀌는 인간들은 부지기수다.

더욱이 히르칸은 유독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가 쌓은 명성은 좋은 의미보다는 악명에 가까웠으니까.

또한 히르칸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기분 나쁜 스타일이기도 했다. 야비한 것도 이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압도적인 결과물 때문이다. 치고받고 싸우다가 한쪽이 팔이 날아가면, 다른 한쪽은 못해도 손목 정도는 날아가야 뭔가 그림이 나오지

만 히르칸은 아니다. 이런 압도적인 결과물은 싸울 줄 모르는 이들에게는 허탈감을, 싸움 좀 한다고 나대는 이들에게는 자격지심을 느끼게 해준다.

어쨌거나 상황을 보면 키요테와 그 동료들이 파투를 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남은 건 하나.

‘그럼 정산만 남았군.’

대전료 5천 골드와 승자의 권리인 손목시계.

이것만 받는다면 히르칸은 뒤탈 없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뒤탈을 만들 만한 액수가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히르칸은 지금 키요테의 시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저기서 무기 나오면, 진짜 사흘 밤낮으로 소고기만 먹을 수 있겠지?’

키요테의 방어구는 화이트맘바 세트다. 예전에 히르칸이 만났던 그 유저가 입었던 것과는 디자인이 다르다. 아마 다른 이가 만든 아이템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래도 비싼 놈이다. 화이트맘바 세트는 각각의 아이템 옵션도 옵션이지만, 세트 효과가 굉장하다. 유니

크 아이템을 파츠별로 입는 것보다 나을 정도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가장 아이템이 비싼 구간은 70레벨에서 90레벨 사이다. 이 레벨대의 유저들은 워로드 초창기부터 게임을 하는 건 물론, 게임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부류들이다. 그게 아니면 히르칸 수준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이 레벨대에 진

입할 수가 없다. 또한 아이템을 되팔아도 사줄 사람 천지이기 때문에 아이템 가격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편이다. 구하는 입장에서는 쓰고 팔아도 본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거금을 지불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화이트맘바 세트로 무장한 채 대전료로 5천 골드를 운운하는 자가 무기 사는데 돈을 아꼈을 리 만무하다.

무기가 나오면 대박!

아니, 화이트맘바 세트 중 파츠 하나만 나와도 대박이다. 뭐든 간에 나오면 대박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히르칸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무렵, 그동안 말없이 누워있던 키요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일어났네. 멍청한 놈, 무슨 대전료로 5천 골드나 부르고 그래?”

“공돈 날렸네. 그 돈으로 그냥 클럽을 가지.”

동료들이 키요테에게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키요테는 그런 동료들의 말을 무시한 채 히르칸을 향해 처벅처벅, 걸음을 내디뎠다. 히르칸이 자세를 풀고, 하회탈 너머로 키요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키요테가 그런 히르칸을 바라보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푸른

눈의 스포츠스타일로 짧게 자른 금발이 인상적인 미남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 미남이 히르칸을 보며 말했다.

“와우!”

9.

‘끝내준다.’

키요테에게 히르칸과의 전투는 악몽이었다. 전투에 앞서서 예상했던 상황, 그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은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고, 상상 밖이었다. 그야말로 가차 없이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키요테는 그런 히르칸과의 전투가 그 어떤 전투보다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신선한 수준을 넘어 감동적이었다.

‘그래, 이게 진짜 싸움이지!’

그동안 키요테가 해온 유저와의 싸움은 스킬을 주고받으며, 누가 먼저 더 많은 데미지를 주느냐, 그것이었다. 굳이 가상현실게임이 아니라 콘솔게임, PC게임으로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였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게 아니었다. 보다 현실에 가깝게 만든 가상현실게임이기에 생기는 틈, 그 틈을 귀신같이 찔렀다.

이게 진짜 싸움이다! 히르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비하다? 목숨을 건 전쟁에서 야비하다는 건 적에 대한 극찬이다. 스포츠가 아니니까. 점수를 더 내는 게 아니니까.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히르칸의 전투는 키요테,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향점이 되어줬다. 키요테는 개안을 한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히르칸의 밑에서 본격적으로 싸움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키요테의 자존심이 당장 고개를 숙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많이 배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도전하겠습니다.”

키요테는 자신이 조금 전 사용했던 무기를 아이템 슬롯에서 제거한 후에 히르칸에게 건네줬다.

“이번 대전료 그리고 다음 대전료 대신입니다.”

그 검은 지금 키요테가 가진 아이템 중 단일 파츠로는 가장 비싼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히르칸이 그 무기를 지그시 바라봤다.

히르칸의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흠.’

무기를 원하긴 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계산을 하면 5천 골드와 시계를 받는 게 더 이익일 가능성이 높았다. 시계에서 무기가 나올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러면 무기와 5천 골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합리적으로, 계산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다음을 기약하는 도전자는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경험 자체가 히르칸에게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에게 패배한 자들은 언제나 약속한 대가가 아닌, 악에 받친 저주와 폭력을 꺼내 들었으니까.

‘재미있는 놈일세.’

히르칸이 무기를 받으며 되물었다.

“이름이?”

“키요테, 아니, 돈키요테입니다.”

돈키요테.

키요테의 진짜 게임 이름이었다. 돈키호테(Quixote)를 잘못 이해하고, 캐릭터네임을 생성할 때 키요테(Quiyote)라고 쓰는 바람에 생긴 이름이었다. 그 실수를 숨기기 위해, 돈키요테가 아니라, 키요테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는 했다.

그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히르칸은 기억해냈다.

‘도전자 돈키요테, 얘가 걔였어?’

도전자 돈키요테.

히르칸이 영웅도살자로 명성을 떨칠 당시, PVP고수로 히르칸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유명세를 떨친 실력자. 히르칸과 인연은 없었다. 히르칸은 PVP를 귀신같이 잘했지만, 그걸 작심하고 업으로 삼고자 했던 적은 없었다. 워낙 많은 유저들이 먼저 시비를 걸고, 그

렇게 시비를 거는 놈들을 박살 내다 보니 PVP로 명성을 떨쳤을 뿐이다.

‘실력이 너무 허접해서 몰라봤네.’

그래서 히르칸은 살짝 놀랐다. 그가 아는 도전자 돈키요테는 고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고수였다. 그러나 지금 히르칸이 상대한 키요테의 실력은 그냥 평범했다. 아이템의 덕, 소위 템빨로 자신과 비슷한 레벨의 상대를 이기는 수준이다.

물론 나중에는 더 나아질 것이다. 어떠한 계기를 통해 큰 발전을 이룩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가 아니니까. 어쩌면 오늘 이 경험이 키요테의 큰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히르칸이 옅게 웃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인연조차 없었던 자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돈키요테, 꼭 기억해두지.”

‘인생 참 재미있군.’

이 순간, 정말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히르칸은 오랜만에 게임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9.

[오크 히어로의 검]

*주요 속성

- 레어 등급의 아이템

- 근력 +66

- 체력 +66

- 요구 레벨 : 60

- 요구 조건 : 350포인트 이상의 근력

*보조 속성

- 착용자의 레벨에 비례하여 근력 상승

- 착용 시 모든 몬스터의 방어력 9퍼센트를 무시

- 착용 시 동물형 몬스터의 방어력 9퍼센트를 무시

*기타

- 블루 오크의 변종, 오크 히어로가 사용하던 무기다. 무수히 많은 살육을 거치면서 대상의 약점을 스스로 파악하게 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우와.’

키요테 일행이 떠나는 순간, 히르칸은 곧바로 가면과 투구를 벗고 키요테에게 받은 검에 대한 옵션을 확인했다. 옵션을 확인하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히검이라니? 이거 유니크급이잖아?’

오크 히어로의 검.

검사, 특히 스트라이커 계열의 유저들에게는 옵션이 어중간한 유니크 아이템보다 좋다고 평가받는 검이었다.

‘이거 최근 시세가…… 1만 5천 골드였나? 급처분을 해도 1만 3천 골드 이상은 받을 수 있는 아이템이잖아?’

시세는 1만 5천 골드.

매물이 적은 건 아니지만, 60레벨 검사 유저들 사이에서 워낙 인기가 좋은 탓에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 더욱이 인기가 많은 만큼, 팔고자 하면 매물을 내놓는 순간 하루 이틀 안에 팔 수 있었다. 히르칸이 지금도 판매 중인 사자 털옷 세트와는 비교할 수

도 없는 인기품이다.

아니, 솔직히 히르칸에게는 팔 이유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이 정도면 마력이고 나발이고 의미 없지.’

히르칸에게는 아무래도 마력이 붙은 무기가 좋겠지만, 오크 히어로의 검 정도면 마력이 안 붙는 게 고마운 무기다. 마력이 붙어서 해골 한 마리를 더 소환하는 것보다, 이 검을 들고 히르칸이 직접 칼질을 하는 게 훨씬 더 위력적일 테니까.

‘진짜 돈 많나 보네. 이런 걸 그냥 줘?’

키요테의 배포가 새삼스러웠다.

물론 게임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웠는데, 상대방이 마음에 든다고, 다음에 만나서 한 번 더 싸우자고 차고 있던 시가 1천 5백만 원짜리 롤렉스 시계를 벗어 주는 경우는 결단코 없을 테니까.

아마 히르칸이 키요테의 처지였다면, 이런 식으로 절대 아이템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낭만적으로 게임하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돈이 많다는 것도 부러웠지만, 게임 속에서 이렇게 낭만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게임 자체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히르칸에게 게임은 삶이고, 수단이며, 방법이다. 즐길 때도 있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써야 하는 도구이다. 모든 것은 효율과 결과만을 위해 존재할 뿐, 즐거움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히르칸이 입을 다물었다.

‘괜히 감상적으로 변하는군.’

정신 차려 안재현, 이런 말도 안 되는 병신 같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매몰찬 충고를 스스로에게 내뱉은 히르칸은 곧바로 히르칸다운 생각을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런 득템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번 득템은 히르칸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 아이템이면, 60레벨이 되는 순간 불카스 산맥의 주인인 베어 워리어를 잡을 수 있겠어.’

불카스 산맥의 주인, 80레벨 보스 몬스터 베어 워리어.

두 발로 걸어 다니며, 보기에도 섬뜩한 태도(太刀)를 휘두르는 그 무시무시한 괴물곰.

본래 계획은 60레벨 후반 혹은 여의치 않을 경우 70레벨 때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크 히어로의 검이라면 60레벨이 되는 순간, 한 번 레이드를 시도해볼 만했다.

‘좋아.’

그리고 그 베어 워리어를 잡는 것이 시발점이다.

‘녀석을 잡고, 배덕의 왕자 편을 시작하는 거야. 본격적으로 혼자서 해먹어야지.’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인 배덕의 왕자 편의 시발점!

히르칸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60레벨 되기 전까지 쓸 무기만 구하면 되겠어.’

그 웃음과 함께 히르칸이 고개를 돌렸다.

“칼원숭이 한 무리만 더 잡아볼까?”

< 18화. 득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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