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득템 (1). >
1.
파바밧!
사자 털옷을 입은 히르칸이 머리에 쓰고 있는 사자 털모자의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질주하는 히르칸의 시선 끝에는.
끼이끼이!
다급한 울음을 토해내는 아머 몽키 한 마리가 있었다. 자신의 동족을 재료로 삼아 완성된 해골 전사와의 전투에서 밀린 아머 몽키는 이미 오른팔을 잃은 상황.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전투 의지를 잃은 녀석은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이 몸을 돌리는 순간, 놈은 가장 마주쳐서는 안 되는 상대를 마주치게 됐다.
히르칸, 그가 단숨에 아머 몽키와의 거리를 지척으로 좁혔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히르칸의 롱소드가 아머 몽키의 투구 사이 구멍, T자 모양의 구멍 사이에 박혔다.
푸욱!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깊었다. 예상보다 더 깊숙하게 상대의 피륙을 뚫고 들어갔다는 의미. 살아가면서 사람이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섬뜩한 감촉이었지만 히르칸은 그 감촉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군.’
깔끔하다…… 히르칸이 품은 감상은 섬뜩했지만 정확했다.
히르칸의 일격이 아머 몽키의 모든 것을 끝냈다. 아머 몽키는 마치 못에 걸린 장난감처럼 히르칸이 내찌른 검에 꽂힌 채 축 늘어졌다.
푸홧!
히르칸이 날렵하게 검을 뽑아내자.
털썩!
아머 몽키의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타이틀 ‘반백 달성’을 획득하셨습니다.]
하지만 히르칸에게 쓰러진 아머 몽키에게 시선을 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르칸 허리춤에 찬 칼집에 잽싸게 검을 넣고, 곧바로 왼손 손목에 찬 시계를 조작했다.
[히르칸]
- 레벨 : 50
- 직업 : 마법사
- 타이틀 : 20개
- 능력치 : 근력(349)/체력(119)/지력(239)/마력(301)
‘50레벨 달성.’
드디어 50레벨이 됐다. 히르칸이 미친 듯이 게임을 한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상이자, 기록이었다.
하지만 히르칸은 예전과는 다르게 레벨업이란 결과물에 과할 정도의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마치 의미 없는 책 한 페이지를 읽듯 잽싸게 근력에 모든 능력치를 투자한 후에 곧바로 스킬 목록으로 넘어갔다.
히르칸이 보유한 스킬 목록들이 간편하게 정리된 홀로그램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 소환
[해골 조각(C)], [매드니스 헬름(E)], [본 아머(E)], [해골 마법사(E)], [해골학(E)], [골렘 소환(F)]
- 저주
[마귀 저주(D)], [나태 저주(E)]
- 신체 강화 스킬
[피부 재봉(E)]
‘50레벨 찍었는데 스킬 랭크는 오른 게 없네.’
스킬 랭크만 확인한 히르칸은 시계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분명 기뻐서 춤을 춰야 하는 상황에서 히르칸은 오히려 담담, 아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시에 히르칸의 몸 어디에도 여유는 없었다. 히르칸은 오히려 조금은 다급한 듯 시간을 확인했다.
‘빠듯하긴 하지만, 레인저 빌리지까지 이동한 후에 게임 종료는 할 수 있겠어.’
시간 확인을 마친 히르칸이 그 어느 때보다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2.
좁은 원룸 벽에 걸린 얇은 50인치 모니터는 주변 분위기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낡고, 닳아버린 세계에서 모니터만이 새것이란 게 이질적이었고, 좁은 공간에서 자기 혼자만 50인치라는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것 역시 이질적이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다면, 이와 비슷한 느낌일 듯했다.
모니터에서는 영상 한 편이 재생되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리 없는 우거진 숲에서 갑옷을 입은 원숭이와 해골만 남은 전사 그리고 흙으로 된 골렘이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펼치는 영상이었다.
영화보다 더 사실감과 생동감 그리고 치열함이 넘치는 영상이었다. 돈 주고 봐도 아까울 게 없을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상을 보는 유일한 관객인 안재현은 그 영상에 관심이 없었다.
너무 오래 사용한 탓에 치즈처럼 곳곳에 구멍도 뚫릴 정도로 닳아버린 침대 매트리스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러닝셔츠와 사각 팬티 차림의 안재현은 화질이 끝내주는 50인치 모니터 영상 대신, 태블릿PC 액정만 보고 있었다. 더불어 태블릿PC에서 재생되는 영상
은 모니터에서 출력되는 영상과 똑같았다. 심지어 안재현은 영상을 두 개나 켜놓고, 막상 보는 것은 축소된 영상 아래 달린 댓글이었다.
- 하회탈 히르칸답네요. 이번 영상도 최고였습니다.
- 히르칸의 해골은 세계제이이이일!
- 이거 보고 네크로맨서 키우는 중입니다. 해골 전사 육성법 좀 공개 부탁합니다.
- 해골 분양 가능한가요?
댓글 내용은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안재현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말을 해주는데 인상을 찌푸릴 이유는 없다.
그런 안재현의 눈에.
‘응?’
생선 가시 같은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이 새끼가 뭐가 대단하다고 이렇게 추앙하는지 모르겠네. 현질로 스펙업해서 사냥하는 주제에 이런 영상 올리는 놈들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재미있나? 내가 네크로맨서를 해도 이거보단 잘하겠는데?
나름 장문의 댓글이었다. 영상 속 주인공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의 댓글. 하지만 안재현은 오히려 히죽, 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워로드에서 내 얼굴 보고 이런 말 지껄였으면 그 자리에서 시계 하나 버는 건데, 새끼.”
이 정도 악플에 멘탈이 무너진다면, 이제까지 안재현이 살아온 나날들이 아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조금은 쓰려진 안재현의 속을 달래준 건, 후원금 내역이었다. 이미 3분 전에 확인했던 후원금 내역을 안재현이 다시금 확인했다. 실시간으로 계속 쌓이는 1달러, 1유로 등의 금액들. 히르칸이 쌓인 돈을 원화로 환산했다. 3분 전보다 더 늘어난 액수에 히
르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으하하하!”
‘이제 좀 워로드 게이머가 된 것 같네!’
아머 몽키 공략 영상은 안재현의 기대 이상이었다.
‘아머 몽키가 효자가 됐어.’
확실히 신 몬스터에 대한 호응도는 어떤 소재보다 광고 효과가 좋았다. 신 몬스터 공략 영상을 통해 유입된 시청자들 덕분에 스컬 클라운 영상은 일찌감치 100만 조회수를 돌파했고, 150만 조회수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더블 베어 영상도 80만 조회수를 돌파하
며 100만 조회수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고, 나머지 영상들도 가파르게 조회수가 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수입도 증가했다. 후원금도 후원금이지만, 스폰서 계약이 왔다. 간곡한 부탁은 아니고, 사무적인 제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계약을 하면 1주일 기준으로 건당 50만 원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꽤 괜찮은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매일 식사를 소고기로 해도 되겠어!’
안재현의 생각대로 매일 삼시세끼를 소고기로 먹고, 후식으로 값비싼 원두커피를 먹어도 무방할 정도다.
‘오랜만에 소고기로 뱃속에 기름 좀 칠할까?’
그때 안재현의 시계가 진동을 토해냈다. 안재현이 시계를 확인했다.
- 요청하신 환전이 끝났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 아래 번호로…….
“드디어…….”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안재현의 머릿속에 있던 소고기란 단어는 소멸되어 버렸다.
‘드디어 총알이 모였군.’
소고기를 사 먹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50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안재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새로운 아이템을 맞추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아이템을 맞추기 위한 군자금을 확보했다.
‘1만 6천 골드, 이걸 전부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아이템을 구해봐야지.’
1만 6천 골드, 현금으로 바꾸면 1천6백만 원이나 되는 돈이다. 안재현이 사채 빚을 갚은 이후 지금까지 모은 돈의 거의 전부를 골드로 환전했다. 비상금을 남겨두긴 했지만, 당장 원룸 월세와 관리비를 포함한 생활비 그리고 4월부터 지불해야하는 워로드 월 이용
요금을 지불하면 V기어 할부금은 그냥 연체를 해야 하는 수준만 남겨두었다.
꾸준히 수익이 생기니,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돈이 쌓이겠지만, 적어도 정상적인 인간이 보이는 소비 형태는 결코 아니었다. 게임으로 돈 천만 원을 벌었으면 그걸 저금하고, 더 벌어서 번듯한 전셋집이라도 구할 생각을 해야지, 그 돈을 다시 게임에 전부 때려
박는 건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냥 미친 짓이니까.
그야말로 올인이다.
그러나 안재현은 이런 소비 형태에 대해서 조금의 거부감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워로드를 할 때 언제나 그랬으니까.
게임으로 번 돈을 다시 게임에 투자했다. 저금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회탈 길드에게 배신당하고, 우레사냥꾼 길드 때문에 게임을 강제로 접는 순간 안재현의 인생도 접혔다.
하지만 안재현은 이제 와서 다시 착실하게 저금하는 인생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재현의 인생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에 있으니까. 현실에서는 추레하고, 유행 지난 옷을 입고 맛도 없는 단백질 파우더를 먹어도, 게임 캐릭터는 예쁜 거 입고, 맛있는 거 먹이는 게 게임에 일생을 건 자들의 일상이니까.
‘오!’
그런 안재현의 눈에 제대로 심장을 찌를 법한 아이템이 검색됐다.
‘이게 이 가격에?’
3.
“후후.”
히르칸이 영상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분 나쁠 정도로 히죽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흘리는 히르칸의 모습은 예전과 전혀 달랐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자 털옷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매니악하지만, 꽤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해골 갑옷
이 히르칸의 몸을 따스하게 보호해주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인 해골뱀의 뼈를 이용해 만든 50레벨 제한 아이템, 해골뱀 세트였다.
‘디자인 잘 뽑았네. 디자이너 누구지? 처음 보는 스타일인데?’
가격은 투구, 상의, 하의, 장갑, 부츠 이렇게 5파츠를 포함해서 1만 5천 골드!
비싸다.
하지만 비쌀 가치가 있는 놈이었다.
‘일단 마력만 벌써 75포인트가 더 상승했군.’
그냥 디자인만 괜찮은 옷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아이템 자체 옵션도 대단했다. 아이템만 바꿨을 뿐인데, 마력이 75포인트가 더 상승했다. 유치하긴 하지만, 히르칸이 그동안 입고 다닌 사자 털옷이 마력 스위칭 세트였던 걸 고려하면, 거기서 75포인트나 마력이 더 증가한 건 대단한 일이다.
‘체력은 50포인트 정도 더 오른 건가?’
체력 스탯도 50포인트가 더 올랐다.
마법사 직업에게 체력 스탯은 당연히 중요하다. 체력 스탯을 너무 등한시할 경우에는 일명 개복치 법사가 된다. 보스 몬스터가 건드리기만 해도 죽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이것만으로 아이템 값이 자동차 값이 될 리는 없다.
기본적으로 5개 파츠 중 투구와 장갑은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다. 유니크 아이템의 값은 레어 등급과 전혀 다르다. 작심하고 스탯을 1이라도 더 올리려는 돈 많은 부자들이 서로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아이템이다. 즉, 효율을 떠나 명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5개 파츠 전부를 착용했을 경우 얻는 보너스 옵션이었다.
히르칸이 그 보너스 옵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소환 관련 스킬 사용 시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10퍼센트 감소합니다.
히르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사실 이 옵션이 히르칸이 1만 5천 골드라는 저렴한 가격에 해골뱀 세트를 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만약 그 옵션 대상이 저주 관련 스킬이었다면, 1만 5천 골드의 곱절, 3만 골드는 됐을 것이다. 실제로도 해골뱀 마법사 세트, 사제 세트, 저주 법사 세트는 3만 골
드 선에서 거래가 된다.
반대로 말하면 네크로맨서란 직업이 그 정도로 인기가 없다는 의미다.
어쨌거나 이번 아이템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디자인도 네크로맨서 직업에 어울렸고, 옵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문제는 오직 하나.
‘이제 무기가 문제인데…….’
방어구 사느라 무기를 못 샀다. 레어 등급 무기가 아니라, 그 아래 등급의 무기를 구해두기는 했지만, 최고를 노리는 히르칸 입장에서는 무기 만큼은 못해도 레어 등급 무기는 필요하다. 무엇보다 50레벨 때부터는 한 달에 오르는 레벨 구간이 10레벨을 넘기 힘들
다. 연비 효율 1등급인 차랑 2등급인 차를 하루 정도 끌고 다니면 큰 차이를 느끼긴 힘들지만, 30일 끌고 다니면 지갑만 보더라도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좋은 아이템이란 그런 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이유가 결과로 드러난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살 수는 없는 노릇.
'사자 셋만 팔리면 괜찮은 걸 구할 수 있겠는데, 당장 이게 팔릴 리 없지. 그렇다고 헐값에 파는 건 너무 아깝고.'
제법 값이 비싼 사자 셋도 파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다. 뭐든 해야 한다.
그럼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없으면 만들어야지 뭐.”
게이머라면 모두가 좋아 자지러지는 단어, 득템을 노릴 때다.
< 18화. 득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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