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미기를 찾아서 (1). >
1.
“원금 1천만 원과 이자, 납부 확인했습니다.”
사채업자 박우영의 대답에 안재현은 대답 대신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묘한 눈빛이었지만, 박우영은 그런 안재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금방 눈치챈 듯, 옅게 웃었다.
“너무 거래가 깔끔하게 끝난 게 의심이 되십니까?”
“아니, 뭐…….”
안재현이 슬쩍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마음을 읽힌 듯해서 기분이 썩 좋진 못했지만, 박우영의 말 그대로였다. 안재현은 마치 은행거래를 하듯 너무나도 쉽게 사채 계약이 끝났다는 게 솔직히 실감이 나진 않았다. 일반인에게 사채란 그런 존재이니까.
뭔가 수작을 부리거나, 장난을 치거나, 추가로 돈을 요구하거나,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었고, 나름 각오도 했다. 장난질을 하면 절대 그 장난질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박우영 입장에서도 안재현과 같은 반응은 수도 없이 경험했던 반응이었다.
“착한 짓을 해서 살아남을 만큼 이 바닥이 만만한 바닥은 아니지만, 제 기간 내에 원금과 이자를 성실히 갚아주시는 분들을 상대로 머리에 핏대를 세울 만큼 할 일 없는 바닥도 아닙니다.”
‘그쪽이 정말로 기한 내에 갚을 줄은 몰랐지만.’
박우영은 오히려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안재현이 처음 돈을 빌리러 왔을 때, 박우영은 그가 참담한 실패를 맛본 뒤 원금을 상환해야 하는 날 울고불고 매달리며 봐달라고 할 줄 알았다. 물론 그 경우 봐줄 생각은 없었다. 업자에게 넘기든, 아니면 담보로 잡은 원룸 보증금을 뺏든, 악착같이 뜯어낼 생각
이었다.
하지만 안재현은 제 기한보다 더 일찍 돈을 갚았다.
그게 박우영의 관심을 샀다. 박우영이 슬그머니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보다 워로드가 아무리 돈이 되는 게임이라지만 이렇게 단시간 내에 목돈을 마련하시는 걸 보면, 실력이 보통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그 질문에 안재현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도 됩니까?”
박우영도 대답 대신 자기 말만 했다. 그는 지갑을 꺼낸 후에 지갑 안쪽에 있는 명함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낀 채로 안재현에게 건네줬다. 안재현이 명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길게 말 안 하겠습니다. 환전 수수료나 세금 등과 관련해서 처분이 골치 아픈 물건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주십시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안재현이 명함을 받았다.
‘이 인간 날 호구로 아나?’
명함을 받으면서 안재현이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안재현이 밑도 끝도 없이 박우영을 찾아온 게 아니다. V기어 담보 대출이 사채업자들 사이에서 용돈을 챙기는 방법이라고는 해도 모든 사채업자가 이런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는 건 아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안재현은 워로드 작업장에서 일했고 그 당시 작업장 주인과 박우영이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여러 차례 봤다. 박우영, 그는 사채업과 동시에 가상현실게임 불법환전이나 다운 거래를 통해 수수료를 챙기고는 했다.
특별히 대단한 사업은 아니었다.
게임 내 화폐를 현금으로 바꿀 때는 환전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며, 게임을 통해 얻은 소득도 소득세를 내야 하는 시대에서 이 수수료와 소득세를 줄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안재현인 박우영과 이 이상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다.
뻔하니까.
사채업자가 착한 인간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박우영은 아니다.
이건 올가미다. 나중에 박우영을 통해서 불법 환전이나, 소득세를 줄이기 위해 그를 통해 거래를 하는 순간 박우영은 안재현의 약점을 쥐게 되는 셈이다. 사채업자에게 약점을 잡힌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그게 안재현이 박우영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다.
2.
빠악!
수박이 깨지는 듯한 강렬한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의 머리통이 히르칸을 향해 강속구처럼 날아왔다.
“어이쿠.”
간신히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잡아낸 히르칸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야야, 살살해. 머리통 튀기지 말고.”
말과 함께 히르칸이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운 채 본인의 해머로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해골 전사들이 해머를 높게 들고 자빠진 스켈레톤의 몸뚱이를 가차 없이 내리쳤다.
가까이서 보면 섬뜩하고,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 하지만 히르칸에게는 그저 평소와 똑같은 광경이었기에, 히르칸의 표정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진짜 이 짓도 이제 더 이상 못 해먹겠다.’
현재 히르칸의 레벨은 39레벨. 더불어 40레벨 달성까지 약 11퍼센트의 경험치가 남은 상황이었다.
30레벨부터 40레벨까지, 거의 모든 경험치를 스켈레톤과 스켈레톤 워리어만 잡아 올렸다. 이제까지 잡은 스켈레톤의 숫자는 이미 천 단위를 가뿐하게 넘어갔다. 스켈레톤 관련 타이틀은 예전에 확보한 상황. 지금의 히르칸은 사실상 스켈레톤 사냥이 아니라, 스켈
레톤 분쇄 기계가 되어 분쇄 작업을 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만큼 효과는 좋았다. 레벨업 페이스는 히르칸 스스로가 봐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수입도 나름 짭짤했다. 스켈레톤이 짭짤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어마어마하게 많이 잡다 보니 모이는 푼돈이 목돈이 되었다.
‘지금 시세로 다 처분하면 3천 골드 정도는 확보할 수 있겠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금과 사냥을 통해 얻은 자금을 합치면 무려 3천 골드!
일단 돈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옆구리에 낀 해골을 두드리는 히르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박자감도 섞였다.
하지만 그 기쁨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렇게 돈을 모으면 뭐해? 40레벨 아이템은 언감생심인데.’
마음 같아서는 3천 골드에 기존에 있는 아이템을 처분하고, 후원금을 받은 돈으로 추가 골드를 구매해서 40레벨에 맞는 최상위 수준의 레어 아이템을 맞추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모은 3천 골드와 후원금은 쓸 곳이 정해져 있었다.
후원금은 다다음달부터 내야 하는 V기어 할부금과 워로드 월 이용요금을 위해 써야 했고, 3천 골드로는 30레벨대의 마법사들이 맞추는 속칭 교복, 마력 스위칭 세트 구매에 써야 했다.
그 정도로 지금 히르칸의 마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40레벨이 되는 순간 골렘 소환 마법을 배운다면, 마력 부족은 더 심각해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골렘을 버릴 수는 없다. 골렘은 네크로맨서의 전투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주는 요소이니까. 연약했던 해골 대신 확
실하게 탱커 역할을 해줄 골렘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이건 대단한 일이다. 게임 플레이로 번 돈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아이템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일반 유저들은 현금을 써서 구매를 한다.
하지만 히르칸은 자신이 기계처럼 사냥을 하며 간신히 모은 돈이 단번에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피 같은 돈이 사라지니, 속이 쓰릴 수밖에.
“쯧!”
짧게 혀를 찬 히르칸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켈레톤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그러자 해골 전사들이 장난감 공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스켈레톤 머리에 달려들어 해머로 스켈레톤 머리를 열심히 내리치기 시작했다. 히르칸이 그 광경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당분간은 소고기는커녕 삼겹살 한 번 제대로 못 먹겠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배고픔.
그런 히르칸의 배고픔을 제대로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방츠 성에서 히르칸이 40레벨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힘브리, 그밖에 없었다.
3.
아힘브리는 히르칸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이런저런 군말 대신 손가락으로 허공에 문양 하나를 그렸다. 그런 그의 손가락 놀림이 끝나기 무섭게 쓰레기더미처럼 너부러진 책더미 속에서 책 한 권이 나비처럼 책장을 펄럭이며 히르칸의 코앞까지 다가
왔다.
보상이었다.
아힘브리의 가르침(2)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히르칸이 40레벨이 되면 두 가지 보상이 주어진다.
스킬북 그리고 타락 추적자의 반지.
당연히 스킬북일 게 뻔한 눈앞의 책을 히르칸이 그냥 놔둘 리 만무했다. 히르칸이 잽싸게 스킬북을 낚아챘고, 곧바로 스킬북의 겉표지 제목을 마음속으로 읽었다.
‘해골학.’
히르칸은 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히르칸이 다시 한 번 스킬북의 제목을 읽었다. 히르칸이 읽은 그대로, 해골학이 맞았다.
히르칸 표정이 굳었다.
‘진짜?’
해골학.
해골을 소환하는 네크로맨서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스킬 중 하나다. 등급은 레어 등급이지만, 효용성은 유니크 급의 스킬이기도 하다.
스킬 능력은 간단하다.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해골 전사와 해골 마법사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해골 부하들의 능력치를 올려주고 동시에 마력 소모량을 줄여주는 패시브 스킬이다.
‘입수가 아주 힘든 편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런 게 나올 줄이야.’
히르칸이 이 스킬에 대해서 알게 된 건 헬겐을 통해서였다. 헬겐은 네크로맨서가 얻으면 좋은 스킬들을 설명해주면서 해골학에 별 다섯 만점에 별 네 개를 줬다. 동시에 헬겐은 자신이 다른 네크로맨서들보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해골학 스킬을 운 좋게 습
득한 덕분이라고 했다. 그 말 마지막에 해골학 스킬을 얻기 위한 정보를 알고 싶으면 추가 요금을 지불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매드니스 헬름도 그렇고, 확실히 대마법사의 일곱 제자라는 이름값을 하네. 일단 주면 대박이야.’
기대 이상의 성과다.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구해야 하는 스킬이고, 구하고자 한다면…… 정확히는 돈만 있다면 구할 수 있는 스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퀘스트 보상으로 얻게 될 줄 몰랐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리 오게.”
놀라는 히르칸을 아힘브리가 제 책상 앞으로 불렀다. 히르칸이 잽싸게 책상 앞에 섰다. 히르칸이 앞에 서자 아힘브리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반지.
거무칙칙한 돌멩이를 보석처럼 박아 넣은 볼품 없는 반지였다.
‘타락 추적자의 반지구나.’
타락 추적자의 반지.
자세한 옵션은 모르지만, 히르칸이 운 좋게 습득한 타락 추적자의 목걸이와 비슷한 옵션일 것이다. 대개 반지 옵션이 목걸이 옵션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굉장히 훌륭한 크로니클 유니크 아이템일 터.
결정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액세서리 아이템을 확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네가 가지고 온 타락의 돌을 이용해 만든 반지일세. 타락한 자의 힘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반지이지. 자네가 가져온 돌로 만들었으니, 자네에게는 이 반지를 소유할 자격은 있네.”
그 말에 히르칸이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무렴. 내가 그 고생을 해서 얻어왔는데, 당연히 내가 가져야지.’
히르칸이 자연스럽게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장 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스윽!
아힘브리가 제 손으로 반지를 향하던 히르칸의 손을 막았다. 히르칸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무슨 짓?
히르칸은 표정으로 그런 질문을 했고, 아힘브리는 그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대답했다.
“이 반지를 가질 자격은 충분하지만, 이 반지를 가지는 순간 의무 역시 생기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히르칸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기분이라면 아힘브리가 당장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가 줄 의향이 있었다. 그 정도로 히르칸의 기분은 좋았다.
“타락한 자의 힘을 쫓던 미기라는 요원과의 연락이 갑자기 두절됐다. 츠류 성에서 보내온 연락이 마지막이었지. 자네는 그 미기 요원의 흔적을 찾고, 그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해야 하네.”
[퀘스트 ‘미기를 찾아서’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힘브리의 이 퀘스트를 마다할 이유가 히르칸에게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렴요.”
‘필요하면 타락 백작이 누구인지도 말해줄 수 있는데, 사람 하나 찾는 것 정도야!’
히르칸이 대답을 하는 순간, 아힘브리가 제 손을 치웠다. 히르칸이 잽싸게 반지를 쥐었다.
‘It’s my precious.’
반지를 손가락에 곧바로 끼는 히르칸의 표정은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골룸의 모습, 그 자체였다.
< 15화. 미기를 찾아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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