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33화 (33/192)

< 12화. 타락의 돌 (1). >

1.

리자드 늪.

그곳에서 두 명의 유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의 처지는 굉장히 달랐다.

한 명은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있는 유저의 양팔은 해골 전사들에게 제압되어 있었고, 유저의 두 눈과 눈두덩이 주변은 참혹할 정도의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너, 이 자식 내가 어떻게든 복수를…….”

그 순간 무릎 꿇은 유저가, 번듯한 갑옷을 입고 있는 유저가 이를 갈며, 뱃속에 있는 증오심을 가득 담은 말을 토해냈다. 그런 유저의 저주 어린 말이 들은 히르칸은 피식, 웃었다.

“응, 그래. 기왕 오는 거 다음에는 좀 더 비싼 템 들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48시간 후에 보자. 잘 자. 내 꿈 꿔.”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히르칸이 무릎 꿇은 유저를 둘러싼 세 명의 해골 전사들을 바라봤다.

딱딱!

히르칸이 그 해골 전사들에게 손가락 두 번을 튕기자, 해골 전사 둘이 유저의 양팔을 잡아당겼고, 남은 해골 전사가 칼로 투구를 쓴 유저의 투구와 흉갑, 그 사이의 틈을 내리찍었다.

콱, 콱!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연거푸 칼을 내리쳤다. 그 광경을 하회탈을 쓴 히르칸은 별 감흥 없이 바라봤다. 아니, 감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 순간 히르칸에게 조금 전 치렀던 전투의 기억은 그냥 머릿속에서 삭제됐다. 히르칸의 머릿속에는 그저 숫자만 기록됐

다.

‘이걸로 열다섯 명.’

히르칸이 리자드 늪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히르칸은 첫날에 소란을 겪은 이후 레벨업에 집중했다. 성과는 좋았다. 보름 동안 무려 7레벨이나 올릴 수 있었다. 평균적으로 20레벨 유저가 30레벨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염

두에 두면, 보름 동안 히르칸이 거둔 성과는 지금 최상위 랭커들의 레벨업 속도와 비슷…… 아니, 그들보다 더 빠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냥만 했던 건 아니었다.

‘거의 하루에 한 명씩 덤벼드네.’

습격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보름 동안 아홉 번의 습격, 총 열다섯 명이 히르칸의 노리고 접근했다.

‘아니, 현실도 아니고 고작 게임에서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짓을 왜 하는 거지? 그렇게 여자가 좋으면 그냥 연애 게임이나 미팅 게임을 하지 대체 왜…….’

“어휴, 여하튼 워로드 하는 놈치고 정상인 새끼를 찾아보는 게 힘들다니까.”

그들의 행동동기는 복수였다.

히르칸을 노리고 접근했으나, 오히려 히르칸에게 역으로 당한 세 미녀, 그들이 반성은커녕 앙심을 품고 히르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다른 남성 유저들을 꼬드겼다.

‘진짜 뱀보다 더 뱀 같은 년들이야. 사람 낚는 솜씨는 아주 대단한 년들일세.’

물론 히르칸은 그녀들을 엿 먹였을지언정 히르칸이 잘못한 건 조금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히르칸은 그녀들의 몸뚱이에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사냥 도중에 실수, 심지어 히르칸의 실수가 아닌 그녀들의 실수로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심지어

히르칸은 그녀들을 도우려고 했었다. 리자드맨을 아홉 마리나 잡아줬다. 원래 약속대로라면 히르칸이 보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워로드는 이런 진실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미녀 삼총사가 울먹이면서 리자드 늪에 하회탈을 쓴 이상한 가죽 옷을 입은 유저가 자신들을 추행했다고 날조를 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놈은 그 말을 믿는다.

심지어 평소 현실에서는 발휘하지도 않는 정의심이 발동해서 자신이 그 질 나쁜 성추행범을 심판하겠다고 앞장선다.

‘정말 연기력이 대단한 년들이야. 조만간 연기자로 데뷔하는 거 아닌지 몰라.’

사실 이 부분은 히르칸이 얼마든지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러지 않았다.

‘뭐, 내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지.’

히르칸이 이미 게임오버가 된 유저를, 그 유저의 손목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이게 이유다.

히르칸, 그에게 굳이 자기변호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이번에 온 놈들은 실력은 개뿔도 없지만 아이템 세팅이나 능력을 보면 대충 30레벨 중후반대. 가진 아이템도 30레벨 초반에서 중반대는 나오겠지. 검 디자인도 무난했으니, 만약 30레벨짜리 레어 아이템이면…… 오늘 저녁은 소고기도 먹을 수 있겠군.’

완제품을 드랍하는 인간형 몬스터가 알아서 찾아와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무엇보다 히르칸은 몬스터를 상대로도 무지막지하게 강하지만 유저 상대로는 무지막지함을 넘어서 소름 끼치게 강하다. 더군다나 게임에서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전후 사정은 무시한 채 없던 정의심을 발휘하는 족속 중에 실력 좋은 놈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여기서 히르칸은 분명히 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복수하려고 보름 가까이 지랄하는 걸 보면, 그 값을 치르게 해줘야지. 나중에 걸리면 세 년 전부 머리를 잘라서 사커킥을 날려줘야지.’

세 명에게는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 번 더 확실한 응징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 멋모르고 덤벼들 테니까.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남들에게는 지옥으로 분류되던 리자드 늪이 히르칸에게는 낙원, 그 자체였다.

레벨업도 빨랐고, 알아서 아이템을 기부하러 오는 기부자들도 넘쳐나니, 이보다 더 좋은 사냥터가 있을 리 없다.

“쩝.”

그래서일까?

히르칸은 곧바로 아쉬움을 느꼈다. 조만간 리자드 늪도 떠나야 할 테니까. 언제까지 리자드 늪에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진짜 아깝네.”

시계를 챙긴 히르칸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는 주변 지형이 눈에 익숙해졌다. 그만큼 오래 있었다는 의미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는 슬슬 떠날 때가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으로 남은 건 3레벨…… 그전까지 시계를 다섯 개 정도만 더 챙기면 좋겠군.’

30레벨.

현재 히르칸의 목표치다. 30레벨을 달성하면, 그다음에는 둥지의 알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리자드 늪을 제대로 뒤져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뒤졌는데도 성과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다음 테스트 예상 지역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한곳에 집착할 수는 없다. 이곳이 퀘스트 장소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소득이 없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여기에 둥지의 알 퀘스트가 없다면…… 그동안 모은 영상을 터뜨려야겠군.’

이곳이 아힘브리가 말하는 테스트 장소가 아니라는 건, 그때 히르칸에게 접근한 무리들이 의심하는 의심 지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 이곳에서 얻은 영상은 공개해도 무방하다.

무엇이 됐건 히르칸은 득을 보는 상황.

히르칸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금 입가에 짙은 미소를 걸었다. 미소와 함께 히르칸이 시계 가득한 주머니를 흔들었다.

‘간만에 정산 좀 해볼까?’

2.

치지직!

달구어진 팬 위로 묵직한 고깃덩이가 떨어지며 기분 좋은 탄내를 내뿜기 시작했다. 스테이크의 감칠맛이 머릿속으로 저절로 상상될 정도로 정말 끝내주는 냄새였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냐?’

안재현은 그 끝내주는 고기 냄새 앞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히죽히죽, 거듭해서 미소를 지었다.

‘크! 맥주를 못 마시는 게 한이다, 한.’

253만 원.

오늘 안재현의 통장에 들어온 금액이었다.

그동안 얻은 금액을 입금받았다. 유튜브 후원금과 리자드맨을 잡고 얻은 재료 수익. 물론 이 두 가지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고액의 비결은 얻은 시계. 그 시계 속에 대박이 있었다.

‘그래도 설마 30레벨짜리도 아니고 35레벨짜리 레어 무기가 있을 줄이야.’

35레벨짜리 레어 무기, 그것도 검이 하나 있었다. 그거 하나가 80만 원이 넘어갔다.

‘그런 주제에 그것밖에 못하다니…… 돼지 목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따로 없군.’

이게 오늘 안재현의 저녁 메뉴가 포도당 사탕으로 맛을 낸 싸구려 커피를 곁들인 누린내 나는 단백질 대신 소고기 안심으로 바뀐 배경이었다. 간만에 고급 단백질을 섭취하게 된 안재현은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지. 고마우신 분들이지. 아무렴. 자기 돈 털어서 게임에 돈 써주신 덕분에 이렇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잖아? 나중에 만나면 다시 인사라도 해야지. 반갑게. 아주 반갑게. 포옹이라도 할까?’

히죽히죽, 안재현의 입에 걸린 미소는 도무지 지워질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안재현은 기분이 좋았다. 당장에라도 날아갈 것 같을 정도로. 잘 구워진 소고기를 접시에 담고, 마트에서 사 온 마카로니 샐러드와 감자 샐러드를 옆에 둘 때까지도 기분이 좋았다.

꿀꺽!

아마 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이다. 절정에 다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히르칸의 기분은.

“응? 메일이 왔네?”

메일 한 통을 보는 순간 착잡하게 망가졌다.

3.

- 우레사냥꾼 길드 스카우트 담당자입니다. 하회탈 히르칸, 당신의 유튜브 영상을 봤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실력과 재능에 놀랐습니다. 때문에 우레사냥꾼 길드는 당신과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시각으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사이, 점심시

간인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대에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튜브에 개인 자격으로 워로드 관련 영상을 올리는 이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은 당연히 많은 단체의 관심을 받는다. 영상 콘텐츠 제작 업체, 매니지먼트 회사, 워로드 길드 등…… 그리고 워로드에 영상을 올리는 유튜버들에게는 이런 스카우트 제안은 훈장

과 비슷하다.

보기만 해도 뿌듯해지고, 모일수록 뿌듯함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안재현은 이 훈장을 보는 순간, 뿌듯함은커녕 들뜬 기분이 바닥에 내리꽂히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레사냥꾼…… 씹어 먹을 이름.’

스카우트 제안 자체는 안재현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예전부터 매니지먼트와 길드 등으로부터 영입 제안은 받았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받았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안재현의 전투가 일반 유저들과는 비교를 거부한다는 걸 알 수밖에 없

을 테니까. 물론 그 제안을 하는 곳 대부분이 무명 길드였지만, 개중에는 나름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춘 중형 규모의 길드도 있었다. 심지어 안재현의 올힘 네크로맨서의 육성법을 돈을 줄 테니 판매하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안재현의 유튜브 페이지가 인기를 끌고 있긴 하지만, 30대 길드가 나서서 영입 제안을 할 정도는 아니다. 30대 길드는 막말로 오는 사람들 중에서 필요한 사람을 골라내기도 바쁜 자들이다. 일일이 사람을

나서서 찾아다닐 여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있다고 해도 자존심이 있고, 체면이 있어서 결코 먼저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그런 30대 길드에서 처음으로 제안이 왔으니…… 보통 워로드 유튜버들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락부터 했을 것이다. 들뜬 기분에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재현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년하고는 절대 손 못 잡지.’

왜 자신이 지금 이 꼴이 됐는가?

우레사냥꾼 길드 그리고 채설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린다. 그때 그녀 그리고 그들 때문에 느낀 증오심과 고통과 절망감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재현은 이 영입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 이미 칼은 여러 번 들어왔었지.’

그렇기에 이 영입 제안은 안재현에게 있어 기분을 시궁창으로 만드는 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년. 보는 눈만 높아가지고.’

안재현은 곧장 메일을 삭제했다. 그리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안재현에게 고기의 맛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안재현이 고무를 씹듯, 표정을 찌푸린 채 고기를 씹었다.

그런 안재현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레사냥꾼 길드의 영입 제안이 안재현의 역린을 건드렸다. 안재현이 다시금 초심을 되찾았다.

‘그래, 이렇게 고기나 씹을 때가 아니야. 안재현, 지금 네가 돈 좀 만졌다고 고기를 먹을 처지가 아니라고.’

안재현이 포크로 스테이크를 내리찍었다. 지금 고기나 먹을 여유를 가질 시간인가?

‘여기서 만족해봤자 결국 이 바닥, 이 수준일 뿐이야. 안재현, 정신 차려 등신 새끼야.’

아니다.

안재현, 그의 목표는 모든 것을 홀로 상대하는 것이다. 워로드에서 최고가 되는 거다.

그리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현실에서의 부귀영화는 최고가 된 이후에나 누릴 수 있다. 그전까지는…… 배고픈 맹수가 되어야 한다.

안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그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전기포트로 물을 끓이고, 포도당사탕을 컵에 잔뜩 집어넣었다.

푸후후!

전기포트가 수증기 내뱉는 소리만이 적막감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12화. 타락의 돌 (1).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