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리자드 늪 (3). >
8.
유인은 기술이다.
원하는 표적을 원하는 위치에 데려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특히 워로드의 몬스터들은 각자의 특성이 있다. 개중에는 주변 동료에게 신호를 보내는 놈들도 있고, 무리에서 멀리 이탈하면 돌아가도록 설정이 잡힌 놈도 있다.
자세한 몬스터 데이터가 있어도 불상사는 일어난다. 30대 길드도 마찬가지이다. 레이드 생방송을 보다 보면 유인 실패로 전투를 치르는 장면은 일상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 계획대로 가지 않고 사고가 터지니까 긴장감이 유지되는 것이다.
하물며 리자드 늪은 유인 난이도가 매우 높다. 리자드맨은 어그로가 정말 잘 끌린다. 즉, 한 마리를 포인트 지점으로 유인하다가 다른 놈과 조우하게 되면 두 마리를 동시에 끌고 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쫓기는 거다.
지금 상황이 그랬다.
아홉 마리.
히르칸은 미녀 세 명과 파티 플레이를 통해 아홉 마리의 리자드맨을 잡았다. 아홉 마리를 잡는 동안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탱커의 부재로 사냥이 힘들었던 그녀들에게 그 무엇보다 훌륭한 탱커가 되어줄 히르칸과 해골 전사의 참전은 엄청난 지원이었다.
아니, 애초에 히르칸 혼자서 잘 잡고 있었다. 그 셋은 목적대로 그냥 모기처럼 히르칸의 습득하는 경험치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와주세요!”
일리아가 혼자서 두 마리의 리자드맨을 꼬리에 달고 등장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그녀는 히르칸에게 거듭 도움을 요청했다. 히르칸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대기 중인 해골 전사들이 리자드맨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빛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달려들었다.
일리아가 그런 해골 전사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카앙, 캉!
긴박한 전투를 알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쇳소리 사이로 히르칸이 질문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무, 문제가 생겼어요.”
일리아는 당혹감과 미안함, 불쌍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도중에 리자드맨 무리를 만났어요. 그래서 결국 세 명이 뿔뿔이 흩어져서…….”
히르칸이 그런 그녀에게 보다 자세한 상황 설명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히르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일리아는 거듭 용서를 구하며 히르칸의 말문을 막았다. 그냥 용서를 구하지 않고, 울먹이는 표정마저 지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런 그녀에게 히르칸은 더 이상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합시다. 나 혼자서 둘은 버겁습니다. 서포트 부탁합니다.”
“예!”
그제야 일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울먹이던 표정 사이로 지어지는 미소는 가련하면서도 화사했다. 거친 빗줄기 속에 조심스레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느낌이었다.
히르칸은 그런 그녀의 면전에 대고 더 이상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히르칸만이 아니라 남성 유저라면 모드가 히르칸과 똑같은 반응과 행동을 보여줬을 것이다. 히르칸은 그저 말없이 검을 쥔 채 그녀를 지나갔다. 리자드맨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 히르칸
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훗, 완전히 넘어왔네.’
회심의 미소였다.
‘그래, 우리 정도 되는 미녀들이 이렇게 살갑게 연기를 해줬으면 넘어올 수밖에 없지.’
대어와의 사투 끝에 대어를 이제 뜰채로 뜨는 일만 남은 낚시꾼이나 지을 법한 미소.
고민은 있었다. 히르칸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보기에 히르칸은 대단할 게 없지만 그가 부리는 세 마리의 해골 전사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히르칸을 몬스터와 미인계를 이용해 잡는 게 쉬우리란 느낌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일리아, 그녀는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유저를 속이는 게 더 재미 있었으니까. 자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사내들이 만든 벽을 허물고, 그 이후 몬스터를 이용해 아무런 뒤끝 없이 먹잇감을 먹어치우는 게 재미가 있었다. 현실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놀이였고 동
시에 여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놀이였다.
처음 시작은 장난이었다. 내기였다. 저기 있는 남성 유저를 누가 먼저 꼬득일 수 있을까? 그런 종류의 내기. 그런 내기가 계속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워로드를 하는 이유가 됐다. 더불어 두꺼운 벽을 앞세운 히르칸은 함락시키는 재미가 훨씬 더 높았다.
그의 퉁명스럽고 쌀쌀맞은 반응이 오히려 도전의식에 불을 지폈다. 그가 내놓을 아이템보다 그가 당하는 꼴을 보는 게 더 기대가 됐다.
얼마 안 남았다. 조만간 히르칸은 무너질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두 마리가 더 오지.’
남은 두 명이 각각 리자드맨 한 마리씩을 데리고 오고 있다. 히르칸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리자드맨 네 마리를 상대로 혼자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여기서 사냥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실수를 가장해서 강력한 마법 한 방을 히르칸이 부리는 해골이나, 히르칸에게 제대로 날린다면?
히르칸의 등을 바라 보던 일리아가 혀를 한 번 날름거렸다. 마치 뱀, 꽃뱀 같았다.
‘아!’
조만간의 광경을 떠올린 일리아는 마치 자신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워로드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느낌이지만, 그녀는 분명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마 현실에서 V기어를 쓰고 있는 그녀의 두 팔에는 닭살이 잔뜩 돋아있을 것이다.
‘이거 너무 좋아.’
이 느낌이다. 이 느낌 때문에 비싼 돈을 내면서 워로드를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쾌감 그리고 법적으로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는 완벽한 범죄! 세상이 용인한 합법적인 일탈이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다. 낚시는 잡은 대어의 배를 가를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녀가 히르칸이 소환한 해골 전사들을, 리자드맨과 격전을 치르는 해골 전사들을 바라봤다.
콰직!
그런 그녀의 귓속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박살이 나는 소리가,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어?’
그녀의 눈에 리자드맨을 상대로 속절없이 밀리는 해골 전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이제까지 그녀가 본 해골 전사는 리자드맨과 1대1로 붙어도 밀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위용을 보여줬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돈을 부어서 아이템을 세팅해야 저런 강력한 해골 전사를 얻을 수 있는 거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돈만 있으면 한 번 네크로맨서를
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해골 전사가 밀렸다.
그냥 밀리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렸다.
쾅! 쾅!
리자드맨이 휘두른 칼이 해골 전사가 앞세운 뼈 방패를 박살을 내고 있었다.
콰직!
거듭된 데미지 속에서 방패는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할 엉망이였다. 더군다나 해골 전사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반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이건 아니다.
히르칸이 리자드맨에 당해야 하는 건 원하는 바이지만, 이런 식의 장면은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
그때.
“마력이 없습니다!”
히르칸이 다급하게 일리라에게 소리쳤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히르칸이 곧바로 일리아에게 다가와서 재차 말했다.
“마력이 없습니다. 마력 채울 동안만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그게 무슨…….”
“시간만 벌면 됩니다. 상황이 긴급하니까 탱커 역할 좀 맡아주십시오.”
히르칸의 거듭된 재촉에 일리아는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가 아무것도 못하는 건 워로드만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 아닌가?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검을 들고, 리자드맨을 향해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가 리자드맨에 접근하는 순간, 그녀의 뒤를 바라보고 있던 히르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감히 누구 뒤통수를 치려고.’
이 모든 상황을 히르칸은 예상했다. 상대방이 히르칸에게 부탁한 대로 리자드맨 열 마리만 잡고 떠날 가능성도 있었지만, 히르칸은 그녀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수작을 부릴 가능성에 걸라면 전재산을 걸 수도 있을 정도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워로드는 그런 게임이었다. 개과천선은 없다. 한 번 도둑놈은 워로드에서 평생 도둑놈이다. PK에 맛을 들인 놈은 평생 PK만하고, 남 속이는 것에 재미 들린 놈은 평생 그 짓만 한다. 워로드에서 변하는 건 없다. 변할 이유가 없으니까.
특히 두 마리를 데리고 오는 순간 작업이 시작됐음을 느꼈다. 남은 두 명은 추가적으로 리자드맨을 이끌고 오는 중일 터.
안 봐도 뻔하다. 그녀들은 히르칸의 전투에 리자드맨이라는 폭탄을 투하할 생각이며, 이후 히르칸이 분전으로 어느 정도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 히르칸의 등에 실수인 척 마법을 날릴 것이다. 혹은 해골에게 도와준답시고 힐링 마법을 걸어줄 수도 있다. 그러다가
히르칸이 죽으면, 그녀들은 그 장면을 보고 깔깔 웃으면서 오늘 게임 참 재미있었다고 수다를 떨 것이다. 오늘 하루를 평생 가지고 갈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
그걸 히르칸이 용납할 리 없다.
그러니까 그 폭탄을.
‘오는군.’
떠넘기는 거다.
방법은 간단했다. 애초에 주는 폭탄을 받지 않으면 되는 거다.
히르칸,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탁, 탁!
한 번, 두 번.
탁!
그리고 세 번!
세 번을 튕겼다.
그러자 긴박한 전투 속에서 해골들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이 내놓은 세기의 명곡 스릴러 나오는 좀비 춤이 전장을 수놓았다.
9.
That it’s a thriller∽ thriller night!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그 명곡의 박자가 히르칸의 가슴과 고막을 두드렸다. 히르칸의 귀에만 들리는 노래였다.
때문에 일리아에게는 그저 자신과 함께 싸우던 해골들이 갑자기 두 팔을 두 다리로 일어선 사자처럼 앞세운 채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는 것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더불어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를 본 적이 없었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상황 판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는 사이 동료 두 명이 등장했다.
“도와주세요!”
이미 약속한 대로, 애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각각 리자드맨을 한 마리씩 데리고 등장했다. 그런 그녀들은 정면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일리아와 비슷하게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리자드맨이 춤을 추는 해골 전사 둘을 가차 없이 해치웠다. 칼을 휘둘러 그들의 목을 자르며 머리를 날리고, 갈비뼈를 내리쳤다. 해골 전사들의 몸뚱이가 넝마가 됐고, 결국에는 쓰러져 버렸다.
츄릅, 츄릅!
리자드맨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고작 이것으로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순 없다. 그들은 더 많은 제물이 필요했다. 당연히 바로 타깃을 일리아로 바꾸었다. 아니, 이미 일리아는 리자드맨 한 마리와 접전 중이었다.
카앙!
일리아는 검을 목적 없이, 그저 리자드맨의 칼을 막아내기 위해 무작정 휘둘렀다.
그 광경을 멀찌감치에서 보던 두 동료은 여전히 당황했다.
‘무슨 일이지?’
‘왜 언니가?’
그녀들의 리더가 위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반면 일리아 대신 봉변을 당했어야 하는 히르칸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가볍게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까지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속았다.’
‘우리 의도를 알고 있었어?’
히르칸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네크로맨서 끝내주네.’
일부러 앞서서 해골 전사들을 방어 모드로 전환했다. 피하지 말고 방패만 앞세운 채 막으라고 했다. 리자드맨의 샌드백이 되도록 유도했다.
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 춤을 추게 했다.
‘이걸 영상으로 남겨야 하는데.’
사실 춤을 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해골 전사들을 조각 형태로 되돌리는 회수 명령만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히르칸의 기분이 매우 좋지 못했다.
차라리 대놓고 시비를 걸거나, 몬스터를 스틸했다면 히르칸은 그에 맞는 대응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히르칸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동료인 척 접근해서 히르칸을 엿 먹이려고 했다.
히르칸의 역린을 건드린 셈.
여기서 히르칸은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전장의 미녀들을 향해 말했다.
“이 근처는 늪지대가 많으니까 도망칠 생각보다는 맞서 싸울 생각을 하는 게 나을 거다.”
그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완벽한 설계가 단숨에 물거품이 되는데 말이 나올 리 없다.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하다.
카앙!
일리아의 경우에는 히르칸의 말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함정처럼 곳곳에 발이 빠지는 늪이 있는 땅에서 리자드맨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이미 집중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늪이 도처에 있는 만큼 몸을 놀려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
도 힘들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전투 도중에 전투를 그만두고 도망치는 건, 등을 내주는 꼴이다.
무엇보다 한 마리도 간신히 맞상대하는데 다른 한 놈이, 두 마리가 일리아를 노리고 칼을 놀리고 있었다. 정신머리가 있을 리 만무.
남은 마법사와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를 투척하고 지나갔어야 하는 그녀들의 상황도 골치 아파졌다. 그녀들이 1대1로 리자드맨을 잡을 수 있을까? 마법사는 가능할지 몰라도 사제는 불가능이다.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녀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있다면 히르칸 뿐.
물론 히르칸은 그녀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조언은 해줬다.
“대한민국에 타짜라고 30년 전에 나온 영화가 있는데, 구라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영화에 잘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라고.”
천금 같은 조언이었다.
“자, 잠깐만요!”
누군가 히르칸을 불렀지만, 히르칸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이 동시에 외쳤다.
“젠장!”
단말마였다.
< 11화. 리자드 늪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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