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아힘브리 (2). >
4.
[본 아머]
- 숙련도 : F랭크
- 현재 소환 가능한 파츠 : 흉갑
- 사용 방법 : 자신만의 신호를 등록한 후 신호를 실행하면 마법이 발동합니다.
[매드니스 헬름]
- 숙련도 : F랭크
- 현재 소환 가능한 투구 개수 : 1개
- 사용 방법 : 대상의 머리에 각인을 그리십시오. 주문을 외우면 마법이 발동합니다.
토벌협회 방츠성 지부의 건물 계단, 그 계단에 걸터앉은 채 스킬 내용을 살펴보던 히르칸의 모습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집에서 쫓겨난 세입자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런 초라한 모습과 달리 히르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한 흥분으로 차있었다.
‘매드니스 헬름, 이거…….’
본 아머 마법 스킬은 이미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놀랄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히르칸을 흥분하게 만든 건 아힘브리를 통해 얻은 마법 스킬, 매드니스 헬름이었다.
‘F랭크 스킬인데 능력치 증가율이 1.2배나 돼?’
매드니스 헬름.
직역하면 광기의 투구다.
히르칸은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이런 스킬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일단 네크로맨서 소환 스킬트리에 속하는 스킬이다. 비주류 스킬이라는 의미. 여기에 아힘브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이며, 스킬북을 받으면 귀속된다. 거래가 되
는 스킬이 아니다. 여러모로 인지도가 낮은 스킬일 수밖에 없다.
‘리치리치 전투 영상을 보면 몇 놈이 독특한 헬멧을 쓰고 있긴 했는데, 그건가?’
물론 영상을 통해서는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단지 스킬의 정체를 구분하지 못할 뿐.
어쨌거나 효용성은 대단했다.
매드니스 헬름을 착용한 소환물의 전투 능력은 1.2배가 된다. F랭크 수준의 숙련도임에도 이 정도 증가폭을 보여주는 버프 스킬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A랭크면 효과가 얼마나 나오려나?’
특히 네크로맨서의 소환물들은 사제의 스킬을 받을 수 없다. 네크로맨서의 자체적인 버프 스킬과 저주를 이용한 디버프로 전투를 치러야 한다. 버프 스킬 하나의 가치는 아이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
‘문제는 실전이네.’
분명 좋은 스킬을 얻었다.
단지 우려되는 부분은 이 매드니스 헬름 버프를 받은 해골 전사가 설정 그대로 미쳐버려서 제멋대로 전투에 나서는 경우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 계륵 같은 스킬이 될 것이다. 그래도 좋은 스킬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스킬 파악은 이걸로 끝.’
히르칸은 스킬 안내창을 껐다. 그리고는 곧바로 시계를 조작해 퀘스트를 확인했다.
[둥지의 알]
- 퀘스트 등급 : 유니크
- 퀘스트 수행 가능 레벨 : 없음
- 퀘스트 내용 : 둥지의 알을 찾아올 것.
- 퀘스트 보상 : 없음
‘아이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퀘스트 내용이었다. 너무 담백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히르칸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변했다. 입술을 새 부리처럼 내밀었다.
‘진짜 밑도 끝도 없네.’
워로드에는 이런 퀘스트가 많다. 퀘스트 보상이나, 중요도가 높은 퀘스트일수록 불친절한 수준을 넘어 유저를 미치게 만든다.
사실 밸런스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워로드의 유저들은 적잖게 많고, 그들이 온라인을 통해 정보를 공유할 경우 생기는 정보력의 힘은 솔직히 너무 대단해서 말이 안 나온다. 그 정보력이 제구실을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퀘스트도 무용지물이 된다. 이 정도로 밑
도 끝도 없어야지 퀘스트를 수행하는 사람 입에서 어렵다! 말이 나온다.
히르칸이 두어 번 더 혀를 찼다. 퀘스트 내용에 대한 불만은 그것으로 마쳤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니고, 굳이 여기서 더 많은 불만을 토로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 히르칸이 당장 직면하게 되는 문제점은 매드니스 헬름 스킬도, 둥지의 알 퀘스트도 아니다.
‘이제 문제는 밖에서 기다리는 호랑이들인가?’
아힘브리는 워로드의 핵심 NPC 중 한 명이다.
심지어 현재 30대 길드를 비롯해 나름 인생을 걸고 워로드를 하는 유저들의 핫이슈, 타락 백작 시나리오 퀘스트와 관련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NPC 주변에 감시자를 배치해두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보통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지만, 어마어마한 돈이 오고 가는 워로드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결정적으로 워로드에서는 감시, 스토커, 협박은 죄도 아니다. 해서 리스크를 짊어지거나, 손해를 보는 일은 없다.
‘통로는 하나뿐이니 도망치긴 힘들고.’
잠시 고민하던 히르칸이 결정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후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언제까지 버텨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무엇보다 내가 아힘브리와 만났다는 걸 상대가 알 리가 없잖아?’
엉덩이를 턴 히르칸이 계단을 내려왔다.
5.
히르칸이 유저들로 득실거리는 1층으로 내려오는 순간, 계단을 주시하고 있던 소수의 유저들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앞서서 히르칸의 뒤를 따라가던 하이에나들이었다.
히르칸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날로 먹으려는 새끼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에게 날로 정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토벌협회 내에서는 PK가 불가능하다. 유저끼리 전투가 시작되면 곳곳에 배치된 토벌협회 NPC들이 움직인다. 현시점에서 그들보다 강한 유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문제가 되는 건 마을 밖으로 나간 이후이지만, 오히려 어중간한 실력자라면 히르칸의 제물이 될 것이다.
20레벨인 히르칸의 지금 PK 전투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니까. 상대가 성 밖에서 시비를 걸어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비켜.”
그때 하이에나 사이로 사자 한 마리가 등장했다.
“뭐?”
거친 등장이었다. 히르칸을 향하던 유저의 어깨를 뒤로 휙, 잡아당겼으니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리 없는 짓이었다. 물론 현명한 유저라면, 자신의 어깨를 가뿐하게 잡아당길 정도로 근력 스탯이 높다는 걸 먼저 파악했을 터.
그러나 그 정도로 현명하고, 능력 넘치는 유저라면 토벌협회에서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남이 먹다 남긴 찌거기를 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진 않을 것이다.
어깨가 잡혔던 유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어깨를 잡아당긴 유저를 바라봤다.
교차하는 시선.
그 사이로.
“꺼져.”
담백한 말이 흘러나왔다.
담백한 말을 뱉은 건 작은 신장의 사내였다. 신장은 160센티미터 정도. 그러나 입고 있는 갑옷은 어마어마했다. 하얀 뱀비늘로 만든 듯한 갑옷이었다. 투구부터 부츠까지, 똑같은 재료로 만든 풀세트 갑옷이었다. 무엇보다 어깨 장식이 꽤 인상적이었다. 뱀머리 어
깨 장식이었다. 마치 갑옷 착용자의 팔이 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확실히 인상적인 디자인이었다. 한 번 보면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아이템.
그렇기에 그 유저의 아이템을 확인한 몇몇 이들은 그 아이템의 정체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화이트맘바 세트!’
화이트맘바.
4주 전쯤에 잡힌 80레벨의 보스 몬스터다. 몸길이 40미터의 거대한 백색 비늘의 뱀으로, 녀석을 잡기 위해 길드 3곳이 협력을 했다. 참고로 당시 레이드 라이브 티켓 판매량은 30만 장. 티켓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판매량이었다.
더불어 거대한 몸 크기를 가진 보스 몬스터답게 화이트맘바는 죽으면서 꽤 많은 양의 재료 코인을 남겼고, 이후 워로드에서 유명한 아이템 디자이너가 나서서 22개의 방어구 풀세트를 제작했다.
투구에서 부츠까지, 풀세트의 가격은 무려 5천만 원! 더불어 착용 조건은 70레벨 이상!
솔직히 그건 일반 유저들에게 판매 목적으로 팔기 위해 만든 제품이 아니었다.
소수만이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일종의 명품인 셈. 야생의 세계로 따지면 호랑이의 줄무늬, 사자의 갈기 같은 역할을 한다. 하이에나는 보자마자 꼬리를 말아야 하는 상징이란 의미다.
“아, 죄송합니다.”
당장 한판 붙으려고 했던 하이에나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이후 주변의 시선이 그곳이 몰렸다.
“화이트맘바 세트 아니야?”
“70레벨 넘는 유저? 와!”
고레벨 유저, 그것도 랭커에 버금가는 유저가 등장했는데 관심이 몰리지 않을 리 만무. 그렇게 모두가 주목하는 상황 속에서 화이트맘바 세트를 입은 유저가 히르칸에게 다가왔다.
“잠깐 시간 좀 빌립시다.”
히르칸 입장에서는 거부하기 힘든 요청이었다.
6.
대화는 짧았다.
“혹시 몇 층에서 퀘스트를 받았습니까?”
“3층에서 받았는데요?”
“무슨 퀘스트를 받았습니까?”
“내가 귀하게 얻은 퀘스트 정보를 왜 그 쪽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넘겨야 합니까?”
“길드 소속이십니까?”
“말해줄 의무가 있습니까?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죠? 다른 길드 소속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히르칸은 이미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설마 이 시점에서 70레벨 넘는 유저가 자신에게 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히르칸이 아니었다.
일단 히르칸은 컨셉을 확실하게 잡았다.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아힘브리를 만난 적도 없고, 우연히 퀘스트를 접한 일반 유저야.’
두 가지 컨셉이 있었다.
길드에 소속된 척 연기를 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거나. 원래는 전자를 써먹으려고 했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은 길드를 팔아먹으면 알아서 꼬랑지를 마는 법이니까.
그런데 상대가 70레벨이 넘는 유저라는 걸 파악하는 순간 컨셉을 수정했다. 만약 길드를 팔아먹었는데, 상대방이 그 길드와 접점이 있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중요한 건, 히르칸이 아힘브리와 접점이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었다.
‘아힘브리는 지금 타락 백작 시나리오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지. 내가 그하고 관계된 걸 알면, 협박이든 회유든 어떻게든 내 꼬리를 잡으려고 하겠지.’
아힘브리의 중요성은 길드 단위의 권력이 일반 유저 한 명을 엿 먹이기 위해 작심하고 나서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그런 의심받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귀찮아진다.
‘그보다 누구지?’
한편으로 히르칸은 상대방의 정체가 궁금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시점에서 70레벨이 넘고, 화이트맘바 세트같이 돈이나 인맥이 없으면 구하기도 힘든 아이템을 입는 유저라면 랭커급이라는 의미인데, 히르칸의 기억 어디
에도 눈앞의 사내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때 상대방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시간을 끌어서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악수를 제안하며 상대방이 내민 손은 다름 아니라 왼손이었다. 왼손이 나오는 순간 히르칸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왼손을 잡았다.
“고작 이런 악수 하나 하자고 사람 귀찮게 한 겁니까? 젠장, 레벨 높으면 이래도 되는 건가? 다음부터 이러면 무조건 영상 찍어서 올릴 겁니다. 내가 이번만 봐 드립니다.”
몇 번 더 손을 흔든 후에 히르칸이 손을 놓았다.
“그럼 저는 갑니다. 더 할 말 없죠?”
그 모습을 사내가 말없이 바라봤다.
7.
히르칸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화이트맘바 세트를 입고 있는 유저 근처로 다른 유저가 접근했다.
남자 같은 느낌이 드는 여성이었다.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 여성은 히르칸이 지나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힘브리와 관계는 없는 듯하네.”
“워로드를 오래, 제대로 한 타입은 절대 아닙니다. 워로드를 오래 했다면 왼손 악수를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요.”
말과 함께 갑옷을 입은 사내가 왼손을 털었다. 마치 더러운 걸 잡아서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괜히 시간을 허비했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갑자기 호출받아서 왔는데, 허탕만 쳤으니.”
“흠.”
“솔직히 이제는 의미가 없지 않나? 조만간 타락 백작 퀘스트는 완료될 테고. 무엇보다 유망주 타이틀과 연계되어서 아힘브리 테스트까지 통과한 유저는 석 달째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야. 나온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는…… 대세
에 영향을 미칠 순 없겠지.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영입할 필요도 없고.”
“예, 그렇지요.”
“좋아, 그럼 보고는 내가 할 테니까 다시 각자 위치로 이동하자고.”
“알겠습니다.”
“나중에 봐.”
그 대화를 마친 그들이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들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는 눈이 하나 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몰래 건물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히르칸, 그는 자리를 떠난 척 연기를 하고 곧바로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로 돌아왔고, 하나가 둘이 되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왼손으로 간을 보는 걸 보면 보통 새끼들은 아닌데.’
화이트맘바 세트를 입은 유저가 왼손 악수를 제안했을 때, 히르칸은 직감했다.
보통 놈들이 아니라고.
워로드를 오래, 제대로 한 유저들은 왼손 악수를 하지 않는다. 왼손에 찬 시계에 다른 무언가가 접근한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한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더라도 뜸을 들인다. 상대방을 향해 게슴츠레 눈을 한 번 뜨며 의중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게 아니더라
도 왼손 악수 자체가 일반적이지 못하다. 보통 악수를 하면 오른손으로 한다. 물론 지미 헨드릭스 팬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뭐하는 놈들이지?’
어쨌거나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왼손을 건네줬다. 히르칸이 이 바닥에서 더 굴러봤기에 나올 수 있었던 멋진 판단이었다.
문제는 이게 시작이란 점이다.
‘아힘브리 퀘스트를 앞으로 계속 진행하면 저놈들하고 다시 충돌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당장은 상황을 넘겼지만, 다음에 다시 마주칠 경우에 지금처럼 상황을 모면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아힘브리 테스트를 포기하는 게 정답일까?
‘흥.’
물론 아니다.
‘그래, 어차피 나중에 가면 저 새끼나, 다른 새끼나 다 한판 붙어야 하는데, 뭐.’
이런 걸 무서워서 피할 생각이면, 솔플의 길을 걷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힘브리 테스트는 통과해야 한다. 메리트가 큰데, 이걸 겁 먹고 포기하긴 너무 아쉽다.
'어차피 이제 고 밖에 없다. 못 먹어도 고야.'
< 10화. 아힘브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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