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운칠기삼 (2). >
5.
워로드에는 다양한 성(城)이 있다. 그중에서도 초보자들이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성은 대체적으로 크다. 많은 유저를 보유해야 하는 만큼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몰리는 곳은 그 넓은 성 안에 정해져 있었다. 토벌협회 지부, 클래스 타워 그리고 아이템 제작소.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 세 곳에 몰려 있다.
그 세 곳 중 가장 이질적인 장소가 바로 아이템 제작소다.
‘왜 이 인간들은 멀쩡한 카지노를 놔두고 여기 와서 지랄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다른 두 곳에 있는 유저들이 게임 유저로 보인다면, 아이템 제작소를 어슬렁거리는 유저들은 게임 폐인으로 보인다. 히르칸은 이런 아이템 제작소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임에 인생을 투자했다 실패한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처지가 그들과 다
를 바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까.
“쯧.”
히르칸이 쓴웃음마저 억지로 참으며 아이템 제작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템 제작소 안의 풍경은 슬롯머신이 놓인 카지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린 아이 몸통 크기의 큐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유저들은 그 앞에서 재료 코인 혹은 재료 보석을 넣고 열심히 큐브를 흔들고 있었다. 흔드는 이들 중 상당수 이들이 영혼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이들은 노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 낮은 확률로 나오는 레어 등급 또는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기대하면서 큐브를 흔드는 부류들이었다. 심지어 다른 곳에 큐브가 멀쩡히 있음에도 큐브 하나 앞에 여러 명이 줄을
서는 광경도 있었다.
‘유니크 좀 나왔나보지?’
혹시, 하는 마음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요소에 돈을 거는 부류들. 말 그대로 게임이 아니라 도박을 하는 자들이다.
히르칸은 그런 그들에게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런 종류의 도박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히르칸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리가 비어진 큐브를 찾고 그 앞에 섰다.
히르칸은 일단 큐브에 1골드를 넣었다. 그러자 검은색 큐브 한 면이 터치스크린으로 변했다. 히르칸은 터치스크린에 자신이 타락한 웨어울프를 잡고 확보한 재료 보석인 타락한 자의 힘이 깃든 정수와 타락한 웨어울프의 뼈와 가죽을 검색했다. 그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 목록이 떴다.
그 과정은 정말 불편하고 귀찮았다. 하지만 꼭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이템을 검색해서, 재료를 넣고, 큐브를 흔들어야 아이템이 제작되니까. 서너 개 정도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는 설렘을 가질 수 있지만 수백 개가 넘는 아이템을 제작하는 건 정신이
아득해지는 작업이다. 히르칸은 그 짓을 해봤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워로드 관련 작업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미친 짓이었지.’
정말 최악은 수백 개나 넘는 노멀 아이템을 제작하면서 레어 아이템이 떴을 때 이 기쁨을 타인에게 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엄청났다. 물론 그때의 아르바이트 덕분에 워로드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아르바이트가 아니었다면 히르칸이 워로드를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터.
히르칸이 아른거리는 과거를 뒤로 하며 눈앞의 터치스크린에 집중했다.
‘흠.’
아이템 목록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런 히르칸의 눈에.
‘어? 목걸이 제작이 가능하네?’
목걸이 아이템이었다. 레어 등급의 목걸이 제작이 가능했다. 그건 생각 외의 소득이었다.
‘운이 좋은데?’
착용 가능한 아이템은 세 종류다. 방어구, 무기, 악세사리. 이중에서 재료 습득이 가장 어려운 건 악세사리다. 이런 이유로 단순히 게임 플레이로만 획득한 재료로 악세사리를 맞추는 건 20레벨 후반대다. 재료가 그만큼 잘 안 나온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히르칸은 여기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곧바로 재료 코인을 넣었다. 타락한 웨어울프의 뼈 코인을 3개 넣고, 타락한 웨어울프의 가죽 코인을 2개 넣었다. 그 후에 상자를 열어 보석 재료도 집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터치스크린에서 목걸이를 선택한 후
에 큐브를 들고 열심히 흔들었다. 약 20초 남짓, 큐브를 흔들다가 짜증이 나기 시작할 무렵.
[아이템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안내음이 들렸다.
히르칸은 기쁨 대신 살짝 짜증을 냈다.
‘워로드는 다 좋은데, 이상한 부분에서 짜증나게 만든단 말이야.’
짜증 섞인 표정을 지은 히르칸이 큐브를 열었다. 그 순간 히르칸의 표정이 굳었다.
“헐.”
6.
[타락 추적자의 목걸이]
*주요 속성
-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
- 레벨에 비례하여 직업 관련 능력치 상승
- 모든 능력치 +18
- 요구 레벨 : 없음
- 요구 조건 : 타이틀 ‘타락 추적자’
*보조 속성
- 현재 스킬 옵션 보너스를 설정해두지 않았습니다.
- 이 아이템은 제작자에게 귀속됩니다.
*기타
- 타락한 자의 힘을 빌려 착용자의 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홀로그램창을 통해 아이템 옵션을 본 히르칸은 심호흡을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는 히르칸의 머릿속에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였다.
‘와.’
탄식이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고 했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히르칸임에도 지금은 정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놀란 게 아니라 감탄을 했다.
‘유니크, 그것도 크로니클 유니크다.’
크로니클 유니크.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진행 과정에서만 습득할 수 있는 유니크 아이템을 의미한다.
일반 유니크보다 더 나은 옵션을 가지고 있다. 대신에 크로니클 아이템은 완성품의 경우에는 거래가 불가능하다. 아이템 드롭도 되지 않는다. 보통은 재료 단계에서 거래가 되는데, 이 재료를 습득할 확률이 극히 낮다. 그래서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 크로니클 유니크가 제작 과정에서 뜬다?
‘살 떨려서 머리가 안 돌아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정말 오랜 기간 게임을 했지만 이 정도로 운이 좋았던 기억은 없었다.
물론 만약 이 아이템이 거래 가능한 아이템이었다면, 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 넘치는 대부호 게이머에게 빚을 대부분 청산할 만큼의 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 사실에 아쉬움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던 로또는 3등 당첨 한 번 안 되더니, 기어코 여기서 운수가 터졌구나!’
이미 이 자체만으로도 대박이다. 이 이상 운이 좋다면 오히려 불길한 징조일 터.
어느 정도 진정을 되찾은 히르칸은 곧바로 보너스 스킬 옵션 설정 항목으로 들어갔다. 보너스 스킬 옵션 대상은 20레벨 이하의 스킬이었다. 히르칸은 흑마법 항목을 선택했다. 10개 남짓한 마법 스킬이 떴다. 개중에 히르칸의 눈길을 확 잡은 건 해골 조각 관련 옵
션이었다.
히르칸이 홀로그램 창을 터치했다.
[해골 조각으로 소환 가능한 해골 전사의 숫자 +1]
이 순간 히르칸에게 고민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아무래도 신이 내가 워로드를 씹어먹는 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야.’
7.
“오빠템 뽑았다, 널 잡으러 가∽!”
워로드 마법사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잿빛 꼬깔모자. 초록색 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상의와 같은 재질로 만든 듯한 초록색 가죽 장갑. 하체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바지와 가죽 부츠. 그리고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보라색 보석이 덩그러니 박힌 목걸이.
해괴망측함을 넘어서 혐오스럽기까지 한 옷차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히르칸이었다.
보통 때라면 돈을 주고 입으라고 해도 입지 못할 패션.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수준의 패션이었다.
그런데 히르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다지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심지어 요즘은 찾기도 힘든 고전노래에 어깨춤마저 겻들인 채 방츠 성으로 향하는 산속의 숲을 거닐고 있었다.
“빨리 나와…….”
그런 못 볼 꼴을 한 히르칸을 몬스터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진짜 나왔네.”
몬스터 한 마리가 히르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접근했다. 나무의 갈색과 초록색 무늬를 가진 큼지막한 덩치의 곰, 포레스트 베어였다.
25레벨의 몬스터로 비슷한 레벨의 몬스터들 중에서도 높은 체력과 공격력으로 사냥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녀석이었다. 더불어 잡아서 나오는 아이템들 중에 돈이 될 만한 것도 없고, 경험치가 사냥 난이도에 비해서 짠 편이라, 워로드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잡
지 않는 몬스터이기도 했다.
평소 히르칸이라면 포레스트 베어를 보는 순간 짧게 혀를 찼을 것이다. 왜 이런 놈이 나오냐고, 푸념도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히르칸은 평소와 달랐다.
정상이 아니었다.
정신 상태는 물론.
‘드디어 개시하는구나!’
현재 히르칸이란 유저가 가진 전투 능력 역시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근질근질했다.’
정말 한순간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스펙업을 이룩했다. 레어 아이템을 제작했는데 운 좋게 유니크 아이템이 나온 건 물론, 꽤 괜찮은 옵션의 레어 아이템을 저렴한 값에 구매했다. 지금 입고 있는 초록색 가죽 상의와 장갑이 바로 저렴하게 구매한 아이템이었다.
저렴한 이유는 당연히 히르칸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돈 주고 입고 다닐 만한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미 가죽 바지에서 패션을 포기한 히르칸 입장에서는 고민 따윈 없었다.
스펙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히르칸이 자신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접근하는 포레스트 베어를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세 개의 해골 조각상이 잡혔다.
‘몸값 15만 원짜리들.’
재료 코인을 새로이 구매해서, 해골 조각상 3개를 조각했다. 재료 코인을 구매하는데 무려 50만 원 가까운 돈을 썼다. 솔직히 히르칸 본인이 이제는 궁금할 지경이었다.
해골 전사의 전투 인공지능은 공유된다. 새로운 훈련을 시킬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그 세 마리의 해골 전사가 보여줄 능력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여기에 히르칸의 실력이 더해진다면?
히르칸은 장담할 수 있었다.
역대 최고!
무수히 많은 고수와 랭커들을 상대하고,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워로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히르칸, 본인 조차 이제부터 자신이 보여줄 능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 힘이 지금 히르칸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전율이 돋을 수밖에 없다. 히르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웃을 수는 없다. 히르칸이 입가의 미소를 억지로 지우며, 주머니에서 꺼낸 해골 조각을 던졌다. 듬직한 체격에 악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큰 두개골을 가진 해골 전사들이 등장했다. 그 해골 전사들은 오른손에는 제법 날이 선 칼과 조잡하지만, 뼈
를 엮어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다.
리자드맨을 제물로 삼아 만든 전사들은 포레스트 베어를 보자마자 공격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포레스트 베어 역시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적의 숫자가 늘어나는 순간, 어슬렁거리던 태도를 바꾸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히르칸이 그 광경을 보며 하회탈 가면을 천천히 뒤집어 썼다.
그리고 손목에 찬 시계를 향해 말했다.
“촬영 시작.”
전투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 9화. 운칠기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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