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22화 (22/192)

< 8화. 위기와 기회 (2). >

4.

워로드에서 게임 좀 한다는 유저들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이 방법을 통틀어서 도핑 레시피라고 표현한다.

랭커들의 도핑 레시피 같은 경우에는 돈을 주고 사는 경우도 있다. 게임 내에서 습득할 수 있는 특수한 도핑 포션 제조법과 재료들은 당연히 고가에 거래된다. 레이드를 할 때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재현에게도 나름의 도핑 레시피가 있다. 하지만 그의 도핑 레시피가 팔린 적은 없었다.

첨벙… 첨벙….

커피잔이라기보다는 맥주잔에 가까울 정도로 큼지막한 잔. 그 잔의 2/3를 차지한 뜨거운 커피 위로 각설탕하고는 여러모로 모양이 다른 하얀 것들이 커피를 튕길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얀 것들의 정체는 안재현이 자주 먹는 포도당 사탕이었다.

안재현은 포도당 사탕을 계속 넣었다. 그 정도가 커피에 사탕을 타는 게 아니라, 사탕을 커피에 적셔 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안재현은 개의치 않고 계속 넣었다. 커피가 넘쳐 흐르기 직전에야 안재현의 행동이 멈췄다. 안재현은 그런 커피잔을 가볍게 홀짝였다.

싸구려 쓴맛과 싸구려 단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맛. 안재현이 살짝 혀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남들이 안재현의 도핑 레시피를 따라 하지 않는 이유다. 카페인과 포도당, 합법적인 제품 중 뇌를 활성화하기에 가장 알맞은 조합이지만 안재현의 방법은 너무 무식했으니까.

‘어우, 써.’

안재현 본인도 자신의 방법이 무식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돈이 없는 그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고작 한 모금 머금었을 뿐인데 꿀맛 같은 잠에 취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자,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소식이 또 터졌으려나?’

안재현은 또렷해진 정신으로 태블릿PC를 통해 워로드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히드라 길드, 최초로 100레벨 몬스터 포착. 사냥 브리핑 준비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는 히드라 길드 관련 기사였다.

기사를 본 안재현이 커피와 포도당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두뇌를 회전시켰다.

‘최초의 100레벨 몬스터라면 블랙 메탈 워리어였지? 그때 다섯 번인가, 여섯 번 정도 실패하고 잡았다고 했지?’

안재현은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굳이 말하면 굵직한 물줄기를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만큼 이런 식으로 수시로 기사를 찾아보며 디테일한 부분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기왕 실패하는 거 더 실패하면 좋을 텐데.’

안재현 입장에서는 30대 길드도 적이다. 그들에게 당한 것에 대한 복수 같은 것을 떠나서 워로드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30대 길드를 넘어야 한다.

‘그보다 블랙 메탈 워리어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인 타락 백작 퀘스트랑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거 잡으면 타락 백작 퀘스트가 진행되겠군. 쳇. 이 퀘스트에 승선을 해야 타이틀 사냥이 가능한데. 지금 내 레벨로는 어림도 없군. 어휴, 내가 과거 회귀를 10개월만 더

일찍 했으면 블랙 메탈 워리어를 잡는 건 히드라 길드가 아니라 나였을 텐데. 아깝다. 그럼 타이틀도 독식할 테고…….’

“쩝.”

어쨌거나 안재현은 이렇게 기사를 읽고,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억에 디테일을 심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타락 백작 다음 메인 시나리오인 배덕의 왕자에서 만회하는 수밖에.”

스스로가 굉장히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배덕의 왕자……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손가락이나 빨면서 쓰레기 퀘스트만 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그러고 보니 배덕의 왕자 메인 퀘스트 진행했던 아레스 길드가 어마어마하게 벌었었지?’

안재현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히드라 길드든, 아레스 길드든 최후의 승자는 나일 테니까. 으하하하!’

그런 안재현의 옅은 미소는.

[우레여왕, 헤드 헌터를 무너뜨리다!]

다음 이어진 기사를 보는 순간 일그러졌다.

“에라이.”

우레여왕 채설연.

안재현에게는 최악의 인연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재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쯧!”

짧게 혀도 찼다.

당연히 안재현은 이 꼴도 보기 싫은 이름을 계속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채설연, 너 때문이라도 무조건 해내고 만다.'

태블릿PC를 끈 안재현이 커피를 꿀꺽꿀꺽, 맥주처럼 마셨다. 잔에 남은 덜 녹은 포도당 사탕도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입에 넣은 포도당 사탕을.

아드득!

모든 분노를 담아 씹었다.

5.

동굴 앞에 선 히르칸이 자신의 시계에 설치된 라이트 앱을 실행했다.

팟!

히르칸의 시계에서 주먹 크기의 빛 구체가 등장했다. 히르칸은 그 빛의 구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얌전하게 대기 중인 해골 전사의 두개골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듯 빛의 구체를 설치했다. 설치를 마친 히르칸이 해골 전사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앞으로 가!”

해골 전사가 손으로 히르칸이 때린 부위를 한 번 쓰다듬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히르칸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 번으로 끝낸다.’

유망주 타이틀은 쉽게 습득할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어지간한 유저들은 타이틀 획득 기회를 줘도 실패한다.

이유?

보통은 20레벨이 넘어야 클리어 가능한 퀘스트를 15레벨 이하로 클리어해야 하니까. 퀘스트 난이도 자체가 더 올라가 버린다. 그래서 유망주 타이틀인 것이다. 남들이 20레벨에 하는 걸 15레벨에 하니까. 남들 다 하는 걸 할 줄 안다고 유망주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더불어 워로드는 3인 파티 사냥 플레이가 기본이다. 난이도 자체가 3인 파티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즉, 3인 파티에게도 버거운 퀘스트를 히르칸은 혼자 해내야 한다.

쉬울 리 없다.

‘15레벨에도 안 되면, 이 퀘스트는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야.’

그래서 15레벨을 찍었다. 퀘스트 진행 도중에 레벨이 오를 경우 말짱도루묵이 되겠지만, 그 부분은 나름 감수해야 했다. 히르칸이 유니크 아이템으로 도배할 수 있는 재력이 없는 이상, 이게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꾀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히르칸은 일찌감치 검을 뽑았고, 자세도 낮췄다. 그리고 해골 전사의 주변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해골 전사의 뒤를 따랐다. 히르칸의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뭐든 잘게 썰어 먹어주마.’

하회탈 아래로 보이는 히르칸의 미소는 영화 속에 나오는 살인마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섬뜩했다. 히르칸의 자신대로 무엇이든 썰어 먹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동굴 입장 10분째에 산산조각이 났다.

히르칸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며, 크게 소리쳤다.

“촬영 종료!”

말을 내뱉은 히르칸이 가장 먼저 한 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었다.

“으으으!”

‘아니, 대체 왜 몬스터 한 마리도 없는 거야?’

동굴 입장 10분째, 마치 지뢰밭을 지나가듯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히르칸을 반긴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전투는커녕 보통 이런 동굴형 던전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갈림길도 없었다. 긴 터널을 지나가듯 똑같은 길만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

다.

‘온몸이 근질근질하네.’

몸이 아니라 정신이 지쳤다. 히르칸은 그냥 전진한 게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을 유지한 채 움직였으니까. 더군다나 어둠으로 제한된 시야, 일방 통행, 바뀌지 않는 풍경, 밀폐된 공간이란 요소는 사람을 더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마치 하얀 방에서 벽에 걸

린 시계를 10분 동안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다.

히르칸은 일단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허공에 대고 롱소드를 휙휙 휘두르기도 했다. 몸이 아니라 머릿속을 풀기 위한 나름의 작업이었다. 그제야 머릿속 실타래가 풀렸다. 히르칸이 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놈이 있는 모양이군.’

사냥터에는 나름의 스타일이 있다.

똑같은 난이도라고 해도 어떤 사냥터는 몬스터가의 개체 수가 많아서 어려운 경우가 있고, 어떤 사냥터는 몬스터의 개체 수는 적은 대신 개체가 강해서 어려운 경우가 있다.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후자다.

‘내 입장에서 나쁘진 않은데…….’

히르칸 입장에서는 다수보다는 소수를 상대하는 게 좀 더 낫다. 또한 이렇게 되면 이곳에서 레벨이 오를 고민은 한없이 줄어든다.

‘마냥 좋은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에 위안을 가지긴 힘들었다. 어쨌거나 예상보다 더 강한 몬스터와 조우하게 될 테니까.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된 듯 히르칸이 시계에 대고 입을 열었다.

“촬영 시작.”

다시 전진이 시작됐다.

6.

주인의 명을 따라 열심히 전진하던 해골 전사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어? 전진! 앞으로 가! 왜 멈춰?”

히르칸의 외침에도 해골 전사는 전진하지 않은 채 멀뚱히 어둠 앞에 서 있었다.

얘가 지금 날 상대로 시위를 하나? 그런 생각이 히르칸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히르칸이 반색했다.

‘설마?’

히르칸이 해골 지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해골 전사가 바라보는 광경을 해골 전사의 등 너머에서 바라봤다. 보이는 건 없었다. 시커먼 어둠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어둠은 해골 전사의 머리에 위에 있는 빛으로도 밝히지 못했다. 어둠이라기보다는 어둠

으로 만든 장막에 가까운 게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히르칸이 그 어둠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무대로 입장하시겠습니까?]

곧바로 안내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역시 인던이었어.’

어둠의 정체는 인스턴스 던전이었다.

워로드에서 인스턴스 던전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더불어 대개 인스턴스 던전은 퀘스트와 연관된 던전이 많다. 퀘스트가 클리어되면 이후 던전은 소멸하는 경우가 잦기에 더더욱 인스턴스 던전 비중이 낮다. 재활용되지 않은 채 한 번 쓰면 버려지는 셈이니까.

“흠.”

이런 인스턴스 던전에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외부 요소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는 거다. 누군가 몰래 들어와서 판을 망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길드는 인스턴스 던전을 환영한다. 모든 걸 계획대로 진행시킬 수 있으니까. 동시에 대부분의 인스턴스 던전은 한 번의 성공만을 허락하기 때문에 업

적으로 삼기에 좋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이러면 못 튀는데…….’

일단 들어갈 땐 유저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그게 아니라는 점.

필드에서는 아니다 싶으면 튀면 된다. 더불어 올힘 네크로맨서인 히르칸의 경우에는 도주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차하면 해골 전사를 미끼로 주고 튀면 되니까. 그런데 인던에서는 그게 안 먹힌다. 안에 있는 몬스터를 제거하기 전까지 히르칸

은 나올 수 없다. 더불어 외부 지원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데스매치인 셈.

히르칸이 짧게 신음을 흘린 이유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런 요소들을 정리하면 이 어둠 너머에는 악재만이 가득하다.

위기.

보통 유저들은 여기서 물러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위험하긴 하지.’

히르칸도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리스크는 분명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졌다.

‘위험한 만큼 얻을 것도 많아졌어.’

대신에 메리트도 커졌다. 히르칸이 머릿속으로 이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정리했다.

‘인스턴스 던전에 있는 몬스터를 혼자서 해치우고, 유망주 타이틀도 확보하고…… 여기에 퀘스트 관련 인스턴스 던전은 클리어할 경우에 관련 타이틀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외부 개입이 없는 만큼 안에 있는 놈만 처리하면 돼. 다른 몬스터를 염두에 둘 필요도 없

고. 이제까지 여기 오는데 전력 누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컨디션은 여전히 최고다.’

걸린 게 많다.

무엇보다 지금 히르칸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거 잘 찍으면 조회수 생각보다 잘 나올 거야.’

이번 전투 영상이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란 직감! 아니, 직감 정도가 아니라 확신이다.

‘떡밥들이 괜찮게 섞였어. 못해도 보름 안에 1만 찍을 것 같아.’

유망주 타이틀이란 떡밥에 인스턴스 던전을 혼자 클리어하는 떡밥의 시너지 효과가 아주 좋을 것이다. 더불어 이건 누가 보더라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짓이다.

‘하긴,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하겠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그걸 해야지 워로드에서 돈을 벌 수 있다.

워로드를 직접 즐기는 숫자보다 워로드 관련 영상 등의 콘텐츠를 보고 즐기는 숫자가 수십 배나 더 많다. 그 시청자들 보고 싶은 건 불가능해 보이는 걸 해내는 모습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는 없다.

그 시청자를 잡아야 돈을 벌 수 있다. 사냥을 통해 얻는 골드, 아이템으로 벌 수 있는 돈과 유료 영상 수입은 비교를 거부한다. 길드들이, 랭커들이 무모할 정도로 강한 몬스터에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는 곧 시청자를 모을 기회!

‘해골 조각 스킬 쿨타임이 끝나면, 그때 입장한다.’

히르칸이 결단을 내렸다.

< 8화. 위기와 기회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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