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위기와 기회 (1). >
1.
[레벨이 올랐습니다.]
히르칸은 레벨업을 알리는 안내음이 들리는 순간 곧바로 양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오예!”
진심 어린 환호성도 내질렀다. 히르칸의 외침이 적막한 숲속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하회탈을 뒤집어 쓴 인간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세레모니를 하는 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상적인 인간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히르칸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춤도 추기 시작했다. 그 광경의 유일한 관객이 된 해골 전사는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해골 전사의 표정에서 왠지 어처구니가 없다…… 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쯤 되면 본인이 낯이 뜨거워서라도 행동을 그만둬야 할 때.
“흐으응, 흐응∼ 15레벨이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분명 레벨업을 알리는 안내음이 워로드의 모든 유저가 택배 왔습니다! 만큼 좋아하는 소리인 건 맞지만 히르칸의 지금 모습은 평소 모습보다 아주 많이 과했다. 히르칸이 갑자기 미치지 않은 이상, 분명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드디어 마력 부족에서 잠시 동안 해방이다!’
그 이유는 바로 랄프 패밀리를 털어 얻은 아이템들이다. 드디어 그때 얻은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했다. 귀한 재료인 블랙 고블린의 눈알을 이용해 아이템도 이미 만들어두었다.
더군다나 그 아이템들은 히르칸이 이제까지 치른 곤욕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기뻐할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입어볼까?’
히르칸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은 후 시계의 다이얼을 돌리며 2번 슬롯을 선택했다.
“슬롯온.”
그리고 히르칸이 명령어를 내뱉는 순간, 히르칸이 입고 있던 바지와 신발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도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녹아내린 바지와 신발 그리고 칼집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피부를 빨아들일 기세로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 바지와 검은 가죽 부츠 그리고 히르칸이 쓰고 다니는 독특한 디자인의 검이 아닌, 평범한 롱소드가 등장했다.
이게 바로 워로드가 자랑하는 슬롯 체인지 시스템이다. 워로드의 유저들은 1번부터 3번까지, 3개의 슬롯에 원하는 아이템을 집어넣고 시계를 조작하는 것으로 세팅을 바꿀 수 있다.
더불어 스타일도 다양하다. 마블 코믹스 히어로인 아이언맨 스타일을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법 소녀 변신 스타일까지. 물론 이렇게 특이한 스타일은 유료다. 가장 판매량이 많았던 아이언맨 스타일은 매월 100달러나 되는 라이센스 이용료를 지불해
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릴 뿐더러, 워로드에서 아이언맨 슈트와 비슷한 디자인의 아이템을 가지고 하루 종일 슬롯 체인지만 하는 인간도 있다. 물론 당장 돈 만 원이 아까운 히르칸의 스타일은 기본 스타일이었다.
“음.”
어쨌거나 처음으로 아이템을 바꿔 착용해본 히르칸은 자신의 바지와 가죽 부츠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아주 기분 좋았던 히르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히르칸이 자신의 엉덩이를 가볍게 만졌다. 광이 번쩍이는 블랙 고블린 가죽 바지의 질감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기름으로 칠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 느낌.
여기에 타이트한 가죽 바지는 히르칸의 별 볼일 없는 하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죽 부츠와는 그나마 잘 어울렸지만, 히르칸이 입고 있는 평범한 회색빛 상의와 조합은 최악이었다.
패션 테러리스트.
히르칸이 반사적으로 얼굴에 쓰고 있는 하회탈을 만졌다. 화회탈의 존재를 확인한 히르칸이 짧게 혀를 찼다.
“젠장.”
‘블랙 고블린 가죽 바지, 이거 백퍼센트 여자가 쓰던 아이템이다.’
아이템을 제작할 때 유저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디자인을 하면, 이후 착용자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자동으로 치수가 조절된다. 보통은 그냥 평범하게 간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 같은 건 제아무리 좋은 아이템도 외면 받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는 대체적으로 여성 유저의 아이템인 경우가 많다. 아이템의 남녀 구분이 없고, 자동으로 치수 조절이 되니 여성 유저가 쓰던 아이템을 남성 유저가 쓰는 데에는 무리가 없지만 그걸 장려하는 사람은 절대 없다.
“……빌어먹을.”
더불어 히르칸에게 여성용 디자인의 아이템을 쓰는 취향 같은 건 조금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움직임은 편해서 다행이네. 아주 다행이야!”
히르칸이 멋대로 아이템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여유 넘치는 처지도 아닌데?
더군다나 이 아이템의 가치는 볼썽사나운 외형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했다.
히르칸이 달아오른 속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능력치창을 확인했다.
[히르칸]
- 레벨 : 15
- 직업 : 마법사
- 타이틀 개수 : 2개
- 능력치 : 근력(72)/체력(7)/지력(43)/마력(43)
이거다.
풍요롭기 그지없는 능력치창을 보는 순간 히르칸은 뒤숭숭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블랙 고블린 세트가 나쁘진 않지.’
일단 모든 스탯이 4포인트씩 올랐다. 블랙 고블린 관련 아이템을 2개 착용한 효과였다. 여기에 블랙 고블린 가죽 바지와 가죽 신발을 통해 얻은 마력과 지력이 각각 10포인트. 마지막으로 고목의 정수가 깃든 검 덕분에 마력이 다시 10포인트가 올랐다.
갑자기 마력이 2배 이상이 된 셈이다.
‘해골 소환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겠어.’
이 정도 마력이면 해골을 2마리 소환해도 무리가 없다. 조만간 해골 조각 스킬 랭크가 오르면 해골 전사 2마리 소환이 가능해지니 금상첨화다.
‘이제 저주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고.’
여기에 남발할 순 없지만, 히르칸이 습득한 [마귀 저주] 마법을 이제는 필요할 때 언제든 써먹을 수 있다. 능력치창이 상전벽해가 됐다. 히르칸은 이 넘치는 스탯 덕분에 자신이 입은 볼썽사나운 가죽 바지를 나름 받아드릴 수 있었다.
‘알몸으로 다니는 놈들도 있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말과 함께 히르칸이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매끈거림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양호하다고 치자.’
히르칸이 재차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잡념과 푸념은 여기까지였다.
히르칸은 능력치창을 종료하고 곧바로 퀘스트창을 활성화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이제까지는 레벨업이 지상과제였지만, 이제부터는 레벨업을 오히려 피해야 한다. 유망주 타이틀은 15레벨 이하로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경우에만 받을 수 있다. 16레벨이 되면, 유망주 타이틀을 얻을 기회는 영영 사라지는 셈이다.
더불어 최대한 빨리 비마 산의 동굴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 비마 산의 동굴 퀘스트에 투자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레벨업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셈이니까.
‘이틀 안에 결과를 본다.’
히르칸이 다시금 영웅도살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2.
히르칸이 눈에 보이는 동굴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 후 곧바로 시계를 통해 퀘스트를 확인했다.
[비마 산의 동굴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 알림이 떴다.
‘드디어 발견했군.’
히르칸은 곧바로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당장 동굴 안에 들어가지 않은 채 동굴 입구를 유심히 바라봤다.
하루 내내 퀘스트 목적지인 동굴을 찾기 위해, 비마 산을 헤집듯 다녔다. 지금 찾은 동굴은 일곱 번째였다. 힘들진 않았다. 일부러 레벨업을 피하기 위해 몬스터와 전투도 치르지 않았으니 힘들 리가 없다. 단지 짜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
하루 종일 동굴만 찾기 위해 산을 탄다는 건, 말은 쉽지만 해보면 미치는 짓이다.
솔직히 지금 심정도 기쁨보다는 짜증이 더 컸다. 당장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 지경이다.
하지만.
‘릴렉스.’
히르칸은 여기서 강행을 선택하진 않았다. 성격대로라면 발견한 쇠뿔을 단숨에 뽑아야겠지만, 오랜 게임 경력이 폼은 아니다. 히르칸은 여기서 자신이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하는지 넘치는 경험을 통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히르칸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는 적당한 지역을 보는 순간 히르칸이 그 지역에 섰다.
해골 전사가 히르칸을 쫓아왔고, 히르칸은 그런 해골 전사를 조각 형태로 바꾸었다. 작은 조각이 된 해골 전사를 곧바로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비전투 모드에 돌입했다.
그런 히르칸의 다음 선택은.
‘로그아웃.’
로그아웃이었다.
3.
양치를 마친 안재현은 이것저것 성분이 가득 든 보충제를 벌컥벌컥 마셨다.
“끄윽.”
어떻게든 식비를 줄이기 위해 구매한 보충제의 맛은 악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예전에는 소고기로 단백질 보충하고, 프랑스 빵으로 탄수화물을 보충했는데…….’
잘나갔을 때가 떠올랐다. 나름 돈도 좀 벌고, 명성도 얻었을 때, 대단한 사치는 아니더라도 소고기 정도는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정말 배부르게 게임을 했다.
그 날을 떠올리던 히르칸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덩그러니 놓인 매트릭스 위에 누웠다. 그런 안재현의 머리 근처에는 헬멧 대신에 베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재현이 베개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다른 베개는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집어 넣었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그토록 찾던 비마 산의 동굴을 발견했다. 보통 유저라면 거기서 곧바로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동굴 진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보통 유저 수준을 넘지 못한 채 평생 보통 유저로 남는 것이다.
‘최상의 몸 상태로 들어가야지.’
워로드의 팁 중 하나다.
산 지형에서 동굴을 발견하는 경우, 그 동굴 안의 몬스터 레벨은 밖의 몬스터들보다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굴이란 장소는 탁 트인 필드보다 사냥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탁 트인 무대에서는 몬스터의 뒤를 점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동
굴은 그게 힘들다. 몬스터와 마주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몬스터의 뒤통수를 보는 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워로드를 하다보면 페이스 조절이 무조건 필요하다. 하루 종일 가상현실게임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저의 건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몸 상태에 따라 언제든 게임은 강제 종료될 수 있다.
만약 강제 종료 때문에 게임오버라도 당한다면? 최악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안재현의 경우에는 피거스 성에서 부활한 다음에 다시 비마 산으로 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기 투자하는 시간이 수면 시간보다 짧을 리 없다.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다.
‘자, 이제 고민은 끝내고 자자. 푹 자자.’
워로드에서 치르는 중요한 레이드, 탐험, 전투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컨디션 조절에 가장 좋은 건 수면이다. 수면보다 좋은 컨디션 조절은 없다.
‘푸욱…….’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잠을 언제든 잘 잘 수 있는 능력이 랭커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푸흐르…….”
그런 의미에서 안재현은 정말 워로드를, 게임을 위해 신이 내린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으음…… 가죽 바지 입기 싫어…….”
안재현에게는 베개에 머리가 닿는 순간 꿈나라로 직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 8화. 위기와 기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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