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낭중지추(3). >
4.
히르칸은 전리품을 챙기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피거스 성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많은 아이템을 가지고 다닌다는 건, 선한 마음을 가진 유저들에게 날 잡아주세요! 하고 애원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비마 산에 힘들게 도착했지만, 가진 모든
걸 잃는 것보다는 몇 시간을 잃는 게 나았다.
피거스 성으로 돌아온 히르칸은 곧바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걸 구분했다.
일단 재료 아이템 목록 중에서 블랙 고블린의 눈알은 제외했다. 히르칸이 직접 아이템을 만들어 착용할 예정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 재료들은 전부 팔았다. 급처분을 했다. 덕분에 시세보다 싸게 팔게 됐지만 당장 골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확보한 골드가
현금으로 따지면 15만 원 안팎으로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소득이었다.
그런데 10개의 시계를 아이템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상상도 못한 대박이 터졌다.
‘맙소사.’
히르칸은 자신의 것이 된 10개의 아이템 목록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블랙 고블린 가죽 바지]
*주요 속성
- 레어 등급의 아이템
- 지력 +5
- 마력 +5
- 요구 레벨 : 15
*보조 속성
- ‘블랙 고블린’ 관련 아이템을 추가로 착용할 때마다 모든 능력치 +2
*기타
- 블랙 고블린의 가죽으로 만든 바지다. 착용감은 우수하지 못하나, 블랙 고블린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고목의 정수가 깃든 검]
*주요 속성
- 레어 등급의 아이템
- 마력 +10
- 요구 레벨 : 15
*기타
- 고목 몬스터들 중에 극히 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희귀한 정수가 깃든 검이다. 검 자체의 위력은 보통 검과 다를 바 없으나, 고목의 정수가 주인의 마력을 강화시켜준다.
‘레어 아이템이 2개나?’
히르칸은 솔직히 보급품이 아닌 제작품만 나와도 쌍수를 들고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다. 그런데 레어 아이템이 2개나 나오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심지어 전부 마력을 올려주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런데 고목의 정수를 왜 검 만드는데 쓰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목의 정수가 깃든 검은 잘못 만들어진 아이템이었다. 고목의 정수는 마력을 크게 올려주는 재료로 보통은 마법사들의 무기인 완드나 스태프 계열을 제작할 때 써먹는다. 아마 아이템을 제작하던 유저가 잠시 정신줄을 놓고 아이템 설정을
잘못한 채로 큐브를 흔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등급만 레어 등급일 뿐, 레어 등급의 아이템 취급을 받는 건 불가능한 무기다.
그런 무기를 그나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올힘 네크로맨서 히르칸의 손에 들어왔으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인 셈. 아더 왕이 엑스칼리버를 뽑은 격이다.
‘여기에 지금 확보한 블랙 고블린의 눈알로 블랙 고블린 옷이든, 신발이든 뭐든 만들면…….’
더불어 블랙 고블린 눈알을 재료로 해서 새로운 방어구 아이템을 제작한다면, 블랙 고블린 세트 효과에 따라서 최소 20포인트에 가까운 마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력 스탯 20포인트는 15레벨에 도달한 히르칸의 마력 수치의 곱절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 외에도 10개의 아이템 중 5개가 토벌협회의 보급품이 아닌 유저가 제작한 아이템이었다. 10레벨대 유저들의 경우는 절반 이상이 토벌협회 보급품을 쓰고, 심지어 그들이 아이템 슬롯에 집어넣은 모든 아이템 중 1개의 아이템이 무작위로 나온다는 걸 고려하면
반타작은 엄청난 성과다. 이 정도면 정말 진지하게 로또라도 한 번 사봐야 할 정도로 운이 따른 거다.
‘당장 착용할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귀한 아이템들을 히르칸이 당장 착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15레벨 제한이 걸린 아이템이다.
‘15레벨 이상.’
여기서 히르칸은 금방 견적을 냈다.
‘유망주 타이틀은 15레벨 이하인 채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확보 가능.’
15레벨이다.
15레벨이 되어서 아이템을 착용한 채로 비마 산의 동굴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게임 초보도 낼 수 있는 아주 쉬운 견적이다. 당연히 히르칸이 해야 하는 일도 간단하다.
그가 가장 잘하는 걸 하면 된다.
‘자, 한 번 신기록 세워보자고.’
사냥.
그것만 하면 된다.
5.
태블릿PC를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하던 재현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하게 변했다.
‘개인 영상 편집에 30만 원…… 로매니 실력을 고려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긴 하지만…….’
게임 접속을 마친 안재현은 자신이 촬영한 영상 파일을 정리했다. 동시에 자신을 대신해 영상을 멋지게 편집해줄 전문가를 찾았다. 전문가를 찾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찾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로매니 필름.
안재현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깊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하회탈 길드의 초기 영상은 대부분 로매니 필름이 만들어줬을 정도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시간이 흘러 하회탈 길드가 나름 인기와 인지도를 얻고, 여러 메이저 영상 제작팀과 손을 잡으면서 로매니 필름과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히르칸의 개인 영상만큼은 무조건 로매니 필름에게 맡겼었다.
‘그러고 보니 로매니하고는 만나서 대화를 한 적이 한 번 밖에 없네. 정말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가장 잘 만들었으니까.
로매니 필름의 주인인 로매니가 영웅도살자 히르칸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 누구보다 히르칸이란 캐릭터의 매력을 영상에 담아줬다. 안재현이 영상을 주면 하던 작업도 멈추고 안재현의 영상부터 작업해줄 정도였다. 그 좋은 관계를 안재현은 이번에도 이어갈 속
셈이었다.
문제는 결국 돈이다.
아무리 찍어둔 영상이 있다고 해도, 그 영상을 편집하고 수정하고 작업하는 과정에 드는 노력과 시간이 적을 리 없다. 전문가의 노력과 시간은 곧 돈이다.
로매니의 경우에는 현재 그 값이 30만 원이었다.
사실 이 금액은 비싼 건 아니다. 이름난 실력자들에게 의뢰를 하려면 기본 백만 단위 금액을 잡아야 한다. 로매니의 경우에도 하회탈 길드를 통해 명성을 떨치면서, 나중에는 영상 제작 비용이 백만이 넘어갔다. 하물며 라이브 방송 채널을 확보한 30대 길드의 경
우에는 방송 및 영상 제작에 드는 비용이 전체 길드 운영비의 3할 가까이 차지할 정도다.
그러니 안재현이 이 돈을 지불하는 걸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인정하는 실력자를 오히려 싼맛에 쓸 수 있는 기회다.
무엇보다 이번에 로매니 필름에게 맡길 영상은 안재현의 오프닝 영상이 되어줄 것이다. 성형수술을 하는데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을 쓰는 시대에, 얼굴이 될 오프닝 영상 제작에 30만 원을 아끼는 건 미련한 짓이다.
‘한동안 입에 풀칠도 못하겠군.’
안재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꼬르륵!
그런 그의 배가 위기감을 느낀 듯, 비명을 내질렀다.
6.
로매니, 그의 꿈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와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미국 땅에만 수십만 명이 넘어갔고, 그들과의 경쟁 속에서 로매니가 할 수 있는 건, 경험과 인맥을 쌓는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헐값에 판매하는 일이었다.
꿈을 품고, 정말 평생을 배고프게 지냈다. 그런 로매니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건, V기어였다.
가상현실의 등장은 영화 산업에 있어서도 혁명이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가상현실의 시대에 써먹을 기술을 얻기 위해 이 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로매니도 그랬다. 그 과정에서 가상현실게임 관련 영상을 제작하고, 개중 몇 개가 백만 단위의 조회수를 기록하면
서 로매니는 그토록 바라던 인지도를 얻게 됐다. 아르바이트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살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즐거운 나날이었고 동시에 지루한 나날이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영상을 제작하는 건 신났지만,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의 영상을 가져다가 끝내주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은 고문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제작 의뢰가 들어올 때면 기도를 했다.
“제발 이번에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일을 가려 받을 순 없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의뢰가 왔다. 로매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뢰인의 신상 정보부터 확인했다.
“한국, 오프닝 영상, PK…….”
간략한 정보들 중에 마음에 드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레벨이 11레벨이란 내용은 로매니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다. 10레벨대의 유저들이 영상 제작 의뢰를 맡기는 경우는 대부분 비슷했다. 돈이 넘쳐나는 경우. 돈 많은 이들이 SNS에 자랑을 하려고, 보
잘것없는 플레이 영상을 잔뜩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매니는 다시 한 번 지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직감은 대개 잘 맞았다.
하지만 대개 잘 맞던 그 직감이 처음으로 빗나갔다.
“……와우.”
영상을 보는 순간 스위치가 켜졌다.
워로드의 PK영상은 질리도록 봤다. 그리고 그 영상들 대부분은 화려했다.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스킬과 마법들이 충돌하는 장면은 영화 속 하이라이트 장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영상 속 PK는 화려하지 않았다. 스킬과 마법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괴한 탈을 쓴 유저가 세 명의 유저를 상대했을 뿐이다. 그 모든 과정은 단출했다. 어디에도 화려함이란 요소는 없었다.
대신 섬뜩함이 있었고, 과정이 있었고, 수작이 있었다. 마치 훌륭한 배우들이 실감나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중 백미는.
- 나는…….
가면을 쓴 유저가 대화를 통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장면이었다. 그저 힘 대 힘만 싸우는 것과 다르게, 보는 이의 침을 꼴깍 넘어가게 만드는 긴장감이 생겼다.
로매니는 이 순간 매료됐다.
‘이게 인기 끌긴 힘들겠지.’
냉정하게 봐서 이 영상이 워로드 PK영상들 중 대박을 친 영상들에 들어가긴 힘들 것이다. 너무 잔혹하다. 잔혹함을 살리면 무조건 성인만 관람 가능한 등급을 받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워로드가 성인만 이용 가능한 게임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부분은 로매니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돈을 받고 하는 작업이니 해주면 된다.
중요한 건.
“하지만 재미는 있겠어.”
로매니, 그가 간만에 재미를 느낄 만한 일감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7.
워로드가 가상현실게임시장을 평정하는 순간, 가상현실게임을 중심으로 펼쳐진 다양한 사업과 어마어마한 자금이 워로드로 몰렸다.
그러자 누가 보더라도 거품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워로드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이 본래의 가치 이상의 가치를 받기 시작했다. 개중에서 가장 많이 오른 건 사람의 몸값이었다. 워로드를 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포츠스타 수준의 인지도를 가질 수 있는 상
황에서, 모두가 유명하고 실력 좋은 유저를 확보하기 위해 몸값 경쟁을 했다. 특히 몇몇 대부호들이 과거 축구 구단을 매수하고 선수들을 무작정 영입하던 것과 비슷한 짓을 했다.
어마어마한 돈이 오고 가기 시작했고, 모두가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영상을 투고했다. 물론 개중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극히 드물었다. 천 명의 유저가 있으면 개중 구백구십구 명은 달걀조차 낳지 못한 채 똥만 싸는 닭에 불과했다. 한 명 정도만이 황금알을
낳을 가능성을 가진 거위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실력을 떠나 운이 필요했다. 황금알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이의 안목에 들어오는 운 말이다. 하물며 현재 워로드를 주도하는 30대 길드 중 한 곳인 우레사냥꾼의 주인이자, 워로드를 대표하는 실력자 중 한 명인 채설연의 눈에 드는 건 천운이 따라
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금 그 행운자가 등장했다.
‘나쁘지 않네.’
본인이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인 채설연이다. 그런 그녀의 안목은 굉장히 높다. 남들에게 실력을 인정 받은 이들도 그녀의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보는 영상 속 주인공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엄청난 운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이렇게 직접 영상을 찾아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금도 일부러 찾아본 게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보게 됐을 뿐.
‘레벨은 기껏해야 10레벨 안팎일 텐데, 전투 경험은 베테랑 이상이야. 설마 현직 킬러는 아닐 테고, 다른 게임을 하다 왔겠지?’
대단한 전투를 보여준 건 아니었다. 대단하다기보다는 특색이 넘치는 전투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한 건 그 특색이 채설연의 관심을 끈 게 아니었다.
채설연이 그 영상 속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육감.
채설연의 육감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 사람 가지고 싶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손에 꼬옥 쥐고 싶은 사람이라고.
당연히 채설연은 이 순간 영상 속 주인공의 이름을 머릿속에 확실하게 입력했다.
‘하회탈 히르칸.’
< 7화. 낭중지추(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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