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19화 (19/192)

< 7화. 낭중지추(2). >

2.

워로드를 즐기는 유저들의 목표 중 하나는 별명을 가지는 것이다. 워로드에서 별명을 가진다는 건, 인기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동시에 좋은 별명, 멋진 별명을 가지고 싶어 한다. 적어도 영웅도살자 같이 듣기만 해도 썩 느낌이 안 좋은 별명을 처음부

터 가지고 싶어하는 유저는 없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히르칸에게 붙은 영웅도살자란 별명은 순순히 좋은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다.

잔인함!

히르칸의 전투는 잔혹했다.

물론 워로드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들은 원래 잔혹하다. 피가 튀기는 전투가 잔혹하지 않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유저 간의 전투에는 나름의 화려함이 있다. 단순한 육탄전이 아니라 다양한 마법과 스킬이 충돌하면서 보여주는 화려함이 있다.

그러나 히르칸의 전투는 그런 스킬과 마법의 향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에 가깝다. 효율적이고 압도적이라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속절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치고받는 건 스포츠가 될 수 있지만, 실력 차가 압도적

인 사람들끼리 싸우면 그건 그냥 일방적인 폭력이다.

그게 히르칸의 매력이긴 하다. 히르칸이란 후발주자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근거이기도 하다. 동시에 히르칸이 후발주자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길이기도 하다. 아이템, 능력치, 레벨, 보유 스킬 및 타이틀에서 밀리는 히르칸은 모든 전투에

서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해야 했다. 멋 같은 게 알아서 나오면 상관없지만, 일부러 멋있는 전투를 치를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런 히르칸의 전투 스타일이 더 잔혹하게, 필사적으로 바뀐 건 하회탈 길드에게 배신을 당하고, 우레사냥꾼 길드와의 전면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혼자서 세상을 상대하게 된 히르칸은 더더욱 흉포한 짐승이 되어야 했다.

그 후에 모든 걸 잃고 악만 남은 히르칸의 첫 희생양이 된 랄프 패밀리는 워로드에서 가장 재수가 없는 날을 맞이한 셈이다.

그리고 이 재수 없는 나날은 현재진행중이었다.

푹… 푹…!

히르칸은 헤이볼라를 향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칼질이 멈추는 건, 상대의 숨이 멈췄을 때뿐이다. 결국 헤이볼라가 히르칸에게 잡힌 지 1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칼질이 멈췄다.

헤이볼라, 그가 게임 오버를 당했다. 그 사실을 헤이볼라는 현실에서 파악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 어떤 몸부림도, 도움도, 발악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즐기는 변태적인 취향이 없다면, 그냥 강제로 로그아웃을 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런 걸 체

험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 워로드를 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동료가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지?’

랄프 패밀리의 남은 둘은 여전히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사제는 어쩔 수 없었다. 전투 요원이 아니니까. 결국 나서야 하는 건 검사 유저인 자이유였다.

그러나 자이유는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해골 전사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번의 공방은 있었지만, 해골 전사는 자이유의 모든 공격을 아주 쉽게 피해냈다. 이제까지 상대한 몬스터와 전혀 다른 몸놀림을 보여주는 해골 전사 앞에서 자이유가 강

공을 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과감성이 있었다면 진작에 나섰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히르칸의 잔혹함이었다. 그저 손맛 좋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놈이 알고 보니 백상아리였다. 심지어 바닷속에 빠진 채, 백상아리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 이런 종류의 공포를 마주해봤을 리 없는 랄프 패밀리 입장에서는 다리가 굳을 수밖

에.

그런 그들의 낌새를 히르칸이 실시간으로 살폈다.

‘전력은 여전히 내가 열세.’

히르칸은 의도적으로 공포를 줬다. 그래야만 상대의 머릿속에 합리라는 이름의 계산기가 오작동을 할 테니까.

‘힘 대 힘으로 붙으면 조금 힘들지.’

현실적인 전력을 보면 히르칸의 생각대로 그가 열세였다. 사제와 검사라는 조합은 확실히 궁합이 좋다. 여기에 기본 전력이 너무 크다. 히르칸은 어쨌거나 토벌협회 보급품으로 무장한 11레벨 유저고, 랄프 패밀리는 번듯한 아이템…… 어쩌면 레어 아이템도 착용

했을지 모르는 20레벨 유저다.

‘체력이 문제야.’

결정적인 문제는 히르칸의 체력이다. 올힘 네크로맨서가 가지는 약점을 그가 모를 리 없다.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억! 소리가 나올 것이다. 심지어 히르칸을 치료해줄 사제는 없다. 포션도 없다.

그렇다고 저들을 이대로 보내주는 것도 탐탁지 않다. 이 멋진 먹잇감들, 어지간한 몬스터 수십 마리보다 더 돈이 되는 놈들을 뒤탈 없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건 히르칸의 신조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선수필승.’

수작이다.

히르칸이 시선을 돌렸다. 해골 전사와 대치하고 있는 검사, 자이유를 바라봤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자이유는 흠칫했고, 히르칸은 그럴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입니다. 저는 결코 먼저 싸움을 건 게 아닙니다.”

또박또박 그리고 정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랄하지 마!”

물론 듣는 입장에서는 개소리다. 자이유가 곧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자격은 없었다. 먼저 수작을 부리고, 맞아 죽어 마땅한 비매너 행위를 저지른 건 그들이니까. 오늘 이 사건이 공개될 경우, 워로드 유저들은 히르칸에게 박수를 치

고, 랄프 패밀리에 침을 뱉을 것이다. 랄프 패밀리에게 당한 몇몇 이들은 히르칸에게 밥이라도 먹으라고 후원금을 보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자이유는 히르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머릿속이 흔들렸다.

‘저 새끼가…….’

겁이 나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걱정도 피어오른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지만, 반대로 도망치기 싫은 감정도 있었다. 자이유가 곁눈질로 자신의 동료, 드랄을 바라봤다.

드랄의 표정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나름 이제까지 유저들을 가지고 놀고, 그걸 즐기는 악독한 취미를 즐겼고, 언젠가 보복을 당할 날이 오리란 생각도 했지만 그 방식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결정적으로 사제인 드랄은 스스로 전투를 지휘할 수 없다. 그는 어

디까지나 지원 역할이다. 명령을 내리면 자이유가 내려야 한다.

결국 자이유와 드랄, 그 둘은 서로에게 명령을 떠넘겼다. 서로를 향한 무언의 시위를 시작했다.

히르칸이 그 둘의 낌새를 보며 속으로 방긋, 미소를 지었다.

‘병신들.’

이런 종류의 유저는 많이 봤다.

처음에는 자신이 왕인 줄 알고 기세등등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엄마 잃은 5살 꼬맹이가 되는 부류들.

‘도망치려면 치고 싸우려면 싸워야지.’

만약 히르칸이 저들 처지였다면 진작에 답을 내렸을 것이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원래 워로드에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대화를 통해 보다 나은 관계를 도모하는 경우는 그냥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에.

“저는 더 이상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히르칸이 대화를 시도하는 건, 수작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전투를 그만두면, 그만두겠습니다.”

히르칸이 말과 함께 두 팔을 양손 머리 위로 들었다. 그 어느 것보다 호소력 짙은 제스처였다. 히르칸의 말투 역시 정중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 아이템에 관심은 없습니다. 여기서 끝내길 원한다면 끝냅시다.”

그런 히르칸의 말에 자이유와 드랄은 귀가 기울여지고, 혹할 수밖에 없었다.

자이유가 슬쩍 긴장을 풀었다. 긴장을 푼 자이유가 드랄을 바라봤다. 그 둘이 간만에 눈이 마주쳤다. 눈을 마주친 그 둘은 이 순간 처음으로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냥 끝내자.’

여기서 드잡이질을 한다고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진 않다. 하물며 상대가 알아서 휴전 협상을 하자는데, 그 협상을 박찰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이유가 긴장을 푸는 순간, 검을 들고 있던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히르칸이 그 낌새를 파악했고, 곧바로.

딱딱!

손가락 두 번을 튕겼다.

공격 모드!

주인의 그 명령에 해골 전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이유를 향해 질주했다.

딸각딸각!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해골 전사는 순식간에 자이유와의 거리를 좁혔다

“헉!”

자이유가 기겁하면서, 긴장이 살짝 풀린 몸뚱이로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른 검은 야구선수의 스윙처럼 수평으로 움직였다. 붕! 소리가 났다. 날카로움은 없고, 그저 힘만 잔뜩 있는 그 검격에 해골 전사가 당할 리는 만무할 터.

해골 전사는 허리를 숙이며 가뿐하게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자이유의 발목을 향해 몸을 스프링처럼 날리며, 자이유의 발목을 제 이빨로 콱! 물었다.

허벅지에는 방어구가 있다. 하지만 발목에 있는 방어구는 가죽 신발과 양말 정도가 전부다. 몬스터의 가죽도 물어뜯는 해골 전사의 송곳니라면 충분히 유효한 데미지를 줄 수 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 발목을 물리면,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시야도 좁아진다. 당혹감으로 눈앞이 흐려진다. 그래도 자이유는 나름의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발목을 물고 있는 해골 전사의 몸뚱이를 향해 쥐고 있던 검을 내리꽂았다.

퍼벅!

검이 해골 전사의 뼈밖에 없는 갈비뼈 사이를 헤집고 바닥에 꽂혔다.

동시에.

푹!

어느새 자이유와 거리를 좁힌 히르칸의 검이 자이유의 두 눈을 순차적으로 파괴했다.

“으악!”

데자뷰.

히르칸이 곧장 자이유의 뒤로 이동한 후에 그의 목에 칼질을 시작했다. 그 섬뜩한 푹푹,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히르칸은 히죽, 웃었다. 수작이 잘 먹히니, 기분이 나쁠 리 없다.

사실 이건 정석이 아니다. 유저, 그것도 다수의 유저를 상대할 때는 사제를 먼저 처치하는 게 핵심이다.사제가 굳건하게 버티면, 송장으로 만든 유저도 금방 살아날 수 있는 게 게임이다. 고레벨 사제만 살아남으면, 그 사제의 마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검사나 마법

사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20레벨 대 사제가 할 수 있는 건 상태 이상 및 상처를 치료해주는 큐어와 체력을 채워주는 힐링이 전부다. 그마저도 용량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제의 역량이 아직은 본 모습을 드러내기 부족하다.

결정적으로 어수룩했다. 앞에서 신나게 검사들이 싸워주는 걸 지원해주는 건 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전 헤이볼라가 당할 때 드랄의 반응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없다는 의미. 이런 경우에는 검사를 처치하는 게 더 낫다. 물

론 이 모든 걸 히르칸이 이론적으로 알고 판단한 건 아니다.

히르칸의 머릿속 계산은 간단했다.

‘저 사제 놈은 쫄보 새끼. 신경 쓸 가치도 없어. 도망이나 치겠지.’

사제는 정말 보잘것없으니 볼 필요도 없다!

그런 히르칸의 예상 그대로.

“으아아아!”

남은 한 명, 드랄은 자이유가 당하는 순간 그냥 도망쳤다.

히르칸이 비웃음을 흠뻑 머금었다. 승리의 세레모니였다.

3.

“시계 열 개.”

전투가 끝이 났다.

히르칸은 자이유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남은 드랄을 쫓지는 않았다. 잡고자 하면 못 잡을 건 없지만 쉽진 않을 것이다. 십여 분 이상의 시간이 걸릴 테고, 드랄을 잡은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데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높았다.

히르칸은 전리품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전리품은 상당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시계 열 개였다. 헤이볼라와 자이유가 각각 4개의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잡은 유저들의 시계다. 여기에 그들이 가진 시계 2개를 합쳐서 총 10개.

‘아이템 슬롯에 있는 아이템 전부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걸로 일단 아이템 10개를 확보했다. 랄프 패밀리의 표적이 대개 약한 유저들인 걸 고려하면 아마 10개 중 5개 이상은 꽝! 토벌협회 보급품일 가능성이 높다. 팔아봤자 푼돈도 나오지 않는 아이템들이다. 그래도 랄프 패밀리들이 가진 아이템은 제법 쓸만할 것이

다.

‘15레벨에서 20레벨 사이의 아이템 중에 쓸만한 건 30만 원 정도 받을 수 있지.’

더불어 현재 15레벨에서 20레벨 사이의 유저들이 사용하는 아이템 중 쓸모 있는 아이템, 특히 무기 같은 건 10만 원 이상에 거래 된다. 게임을 하는데 2천만 원이 넘는 돈을 넘게 쓰는 유저들이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쓰게 될 무기를 구매하는데 돈

10만 원을 아까워할 리가 없으니까.

이 외의 수입은 재료 코인이었다. 둘이 가진 주머니를 터니 몬스터를 잡으면 나오는 재료 코인과 보석이 가득했다. 사실 이게 어떤 의미에서 더 큰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히르칸이 코인들을 하나하나, 시계에 설치된 앱을 통해 코인에 있는 재료를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엑기스들이군.’

PK를 즐기는 유저들은 일단 시계부터 챙긴다. 그 후에는 재료 코인이나 재료 보석 중에 비싼 것만 따로 챙긴다. 모든 걸 가지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니까.

“어쭈?”

확실히 엑기스답게 괜찮은 것도 있었다.

“블랙 고블린의 눈알이잖아?”

블랙 고블린의 눈알.

히르칸도 잘 아는 놈이다. 아이템 재료 보석 중 하나로 분명 레어 등급 아이템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더불어 마법사 전용 방어구 아이템 제작에 쓰이는 재료다.

마력과 지력을 올릴 수 있는 아이템 제작 재료다.

당연히 비싸다.

‘이거 꽤 나올 텐데?’

히르칸도 이걸 직접 구해서, 팔아본 기억이 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히르칸이 20레벨 근처일 때 구했었다. 그때 약 30만 원 정도 돈을 받고 팔았다.

‘나머지 것들도 쏠쏠하네. 다 팔면 꽤 나오겠어.’

대략 10분 정도 수고한 것치고 상상 이상의 수입을 거뒀다.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릴 정도.

물론 가장 큰 소득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영상은 어떻게 할까? 전문가한테 맡겨서 편집으로 올릴까? 꽤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은데?’

PK영상은 언제나 괜찮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더군다나 히르칸의 전투는 잔혹하고, 그래서 이질적이다.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온갖 괴상망측한 컨셉마저 추구하는 워로드에서 이질적이란 건 단점이 아니라 특징이다. 히르칸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랬다. 그 스타일로 차별화를 이루었고, 그래서 성공

할 수 있었다.

‘간단한 영상 하나 만드는데 20만 정도 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투는 하회탈 히르칸의 존재감과 실력, 가능성을 알려주는 좋은 프로필 영상이 되어줄 것이다.

히르칸의 입에 걸린 미소가 비틀어졌다.

< 7화. 낭중지추(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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