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비마 산의 동굴 (3). >
4.
해골 전사가 고목 곰의 등줄기에 착지하며, 뼈칼을 푹! 꽂아 넣었다. 동시에 해골 전사가 폴짝! 스프링처럼 튕겨 오르며 고목 곰의 등을 밟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도약했다.
크어어!
고목 곰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본래는 제 등에 올라탄 해골 전사를 뿌리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해골 전사의 잽싼 행동 때문에 한 박자 늦어버린 움직임이 되어버렸다.
살포시 바닥에 착지한 해골 전사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나무 기둥 사이에 쏙!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해골 전사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친 고목 곰은 화가 잔뜩 난 듯 괴성을 토해내며 두 팔로 허공을 저었다. 자신의 성난 기색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런 고목 곰의 성난 기세를 죽인 건.
빠악!
어디선가 날아온 짱돌 하나였다. 짱돌은 고목 곰의 코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이 갑작스러운 짱돌 공격에 고목 곰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크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고목 곰이 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는 히르칸이 투수처럼 와인드업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히르칸은 고목 곰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고목 곰의 오른쪽 눈알을 향해 다시 한 번 짱돌을 던졌다.
빠악!
돌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목표 지점을 타격했다.
크오오!
화가 난 고목 곰이 일으켜 세웠던 몸뚱이를 내려놓았다. 다시 네 발로 땅에 섰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입을 벌린 채 히르칸을 향해 달렸다. 뒤는 물론 주변도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히 해골 전사가 움직였다. 늑대처럼 네 다리를 이용해 달리며, 등장한 해골 전사가 무작정 돌진하는 고목 곰의 옆구리를 덥석 물었다. 살점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살점을 물어 뜯을 정도로 웨어울프를 베이스로 삼은 해골 전사의 턱 힘은 강했다. 더군다나 이
미 수십 번, 이런 행동을 반복한 듯, 고목 곰의 몸뚱이 곳곳에는 해골 전사가 물어 뜯은 자국이 선명했다.
크오오!
고목 곰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히르칸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히르칸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갑자기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목 곰이 무너졌다.
누적된 데미지가 절정에 다다르면서, 결국 HP가 0이 된 것이다.
그 순간.
[레벨이 올랐습니다.]
히르칸이 11레벨을 달성했다.
‘페이스는 훌륭하군.’
1레벨부터 10레벨을 찍는데 대략 5일 정도 걸렸다. 그런데 필드에 나오고부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1레벨을 찍었다.
놀라운 레벨업 속도였고, 동시에 이게 히르칸이 가진 진짜 실력이자, 그가 게임을 하는 자신감의 근원이기도 했다.
‘레벨업 속도는 검사 때만큼은 나오는군.’
해골 전사와의 호흡은 전투를 거듭할수록 나아졌다.
특히 블루 웨어울프를 재료로 해골 전사를 업그레이드한 게 아주 주효했다.
히르칸이 늑대 두개골을 가진 해골 전사를 바라봤다. 저 늑대 두개골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해골 전사의 물어뜯기 공격은 생각 이상으로 위력적이었다.
여기에 움직임도 그냥 해골 전사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훌륭했다.
‘베이스가 되는 몬스터의 특성 중 일부를 가진다는 건 알았지만…… 기대 이상으로 좋아.’
히르칸의 심정처럼 기대 이상이었다.
‘용의 뼈를 재료로 삼으면 드래곤 브레스도 뱉어주려나?’
해골 전사가 가질 가능성은 어쩌면 히르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할지도 몰랐다.
‘스킬 숙련도도 잘 오르고 있고.’
여기에 해골 전사와 거의 모든 전투를 같이 치르다 보니, 해골 조각 스킬의 숙련도가 빠르게 올랐다.
‘이 페이스면 20레벨이 되기 전에 해골 조각 스킬은 무조건 E랭크를 찍을 수 있어.’
물론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저주 마법을 쓸 마력이 없다는 점이야.’
10레벨이 되면서, 히르칸은 흑마법 중 하나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때 습득한 마법이 저주 마법, [마귀 저주]였다.
대상의 스탯을 10퍼센트 감소시켜주는 매우 유용한 디버프 마법이었다. 그러나 이 마귀 저주 마법을 쓴 건 수십 번이 넘는 전투 속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저주 마법도 중요한데…….’
저주 마법이 가지는 효용성은 실상 워로드 내에서 소환 마법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오죽하면 저주법사라는 분류가 따로 존재할까? 또한 저주 마법 스킬트리에는 대상의 능력 수치만이 아니라, 상처를 악화하고 회복을 더디게 하고, 환상을 보게 하는 부수적인 효
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마법도 있었다. 잘 키운 저주법사는 30대 길드조차 모셔갈 정도다. 때문에 진짜 잘나가는 저주법사들은 길드에 소속되기보다는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속성 페널티 및 메리트를 받지 않는 만큼, 어떤 타입의 몬스터를 상대로도 평균 이상은 해낼
수 있으니까.
‘육체 개조는…… 손도 못 댔고.’
여기에 부족한 체력 수치를 커버하기 위한 신의 한수, 라이프 베슬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육체 개조 스킬트리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 육체 개조 스킬 트리의 시작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피부 재봉 마법 스킬북은 구하지도 못했다.
‘결국 돈이 문제야.’
몬스터의 피부를 자기에게 이식하는 피부 재봉 마법은 스킬북은 돈을 주고 구해야 한다.
여기에 부족한 마력량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을 갖춰야 하는데, 이 역시 돈이다.
결국 돈이 없으니까 곤란해지는 거다.
‘그냥 PK로 털어?’
오죽하면 PK로 유저를 털어먹을까? 하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선택지까지 떠올렸을 정도다.
물론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다. 히르칸이 회귀 전에 영웅도살자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PK와 PVP를 질리도록 한 건 맞지만, 히르칸은 단 한 번도 아이템을 얻기 위해, 심심하단 이유로 멀쩡한 사람 뒤통수를 치는 경우는 없었다.
랭커들에게는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걸었다. PK의 경우에도 먼저 당했을 경우, 보복을 위해 했을 뿐, 먼저 나서서 당할 짓을 했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히르칸이 PK를 치른 경험 대부분이 자신보다 더 많은 머릿수를 상대하는 경험이었다. 히르칸은 당하는 입장이
었다. 오는 싸움 마다하진 않았고, 당한 건 두 배로 갚아줘야 속이 풀렸지만,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때리는 걸 즐긴 적은 없었다.
그런 히르칸이 PK로 돈을 벌 생각마저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금 사정이 열악하다는 의미인 셈. 실제로도 당장 석 달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야 한다.
‘쳇.’
히르칸이 혀를 찼다.
‘차라리 누가 시비를 걸어줬으면 좋겠군.’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 별생각이 다 든다는 걸 새삼스레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히르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진짜 실력은 쥐뿔도 없는 비매너 새끼들이 시비를 걸어주면 좋겠다. 세 놈 정도만 걸려서, 놈들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면 최소 아이템 세 개는 확보할 수 있잖아?’
푸념은 거기까지였다.
“어휴.”
히르칸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5.
[비마 산에 진입했습니다.]
히르칸은 눈앞에 보이는 산, 그 산의 정상을 바라봤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 산봉우리는 마치 거대한 기둥이 솟아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특이한 산봉우리였다.
비마 산.
해발 1800미터짜리 산으로, 워로드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담한 사이즈의 산이었다.
‘하루 넘게 걸렸군.’
피거스 성을 출발한 지 26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히르칸은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다.
사실 정말 작심하고, 비마 산에 도착할 각오로 이동했다면 4시간 안팎이면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퀘스트는 시간제한이 없었고, 쉬엄쉬엄 레벨도 올리고, 나름 조회수가 나올 만한 영상도 촬영했다.
무엇보다 비마 산에 도착한다고 퀘스트가 클리어 되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동굴을 찾아라…… 워로드 퀘스트가 밑도 끝도 없는 건 유명하지.’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비마 산에 과연 동굴이 몇 개 있을까? 한두 개는 아닐 것이다. 혹여 하나라고 해도, 이 드넓은 산에서 동굴 하나를 찾는 일이 쉬울 리 만무하지 않은가?
여기에 비마 산에서는 최고 30레벨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보스 타이틀을 달고 있는 몬스터는 아니지만, 지금 히르칸이 혼자서 30레벨 몬스터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 유니크 아이템 세팅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마지막으로 히르칸은 퀘스트 진행 과정을 나름 멋지게 연출할 필요성이 있었다.
유망주 타이틀을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 클리어 과정은 나름 조회수가 나온다. 이 정보를 이용해 히르칸 이후 같은 퀘스트로 유망주 타이틀을 얻는 유저의 숫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겠지만, 원래 사람 심리란 게 이미 지나간 로또 당첨 번호라도 한 번쯤 보고 싶
어지는 법 아닌가?
더군다나 무료로 풀 생각이고, 유망주 타이틀은 떡밥이다. 히르칸은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통해 자신의 팬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팬이 늘어나면, 곧바로 수입이 된다.
‘일단 고정 시청자 천 명이 목표!’
히르칸이 비마 산을 올랐다.
6.
온라인게임은 무법지대다. 법이란 게 없다. 유저는 게임 내에 제공되는 시스템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PK도 게임이 제공하는 시스템이고, 몬스터 스틸, 아이템 스틸도 게임이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쇠고랑을 차는 일은 없다.
하지만 보통은 그런 짓을 안 한다. 속칭 비매너 행위가 되니까. 정상적인 유저들, 대부분의 유저들은 굳이 최대한 매너를 지키고자 한다. 문제는 하지 말라면 꼭 더 하려고 하는 청개구리 같은 족속들이다.
랄프 패밀리.
세 명이 바로 그 청개구리였다.
검사 두 명과 사제 한 명으로 구성된 그들의 레벨 총합은 62레벨. 높은 건 아니었다. 평균 레벨이 21정도 되는 셈이니까.
현실에서도 친구 사이인 그들은 현실에서 소위 돈이 좀 있는 족속들이었고, 그들은 정말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워로드를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문제 될 게 없다. 문제는 그들이 워로드를 순수하게 즐기는 방법이란 게, 만만한 유저를 상대로 시비를 건 다
음, PK를 유도해서 상대를 가차 없이 살해하는 짓이라는 점이었다.
시비를 거는 방법 자체도 그냥 다짜고짜 PK를 거는 게 아니라, 일단 표적이 있으면 표적의 사냥을 방해하거나, 몬스터를 스틸하는 식이다. 워로드에서 몬스터 스틸을 당하는 것만큼 빡치는 일은 없다. 몬스터를 잡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집중력, 정신력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참아도, 몬스터 스틸을 두 번이나 참는 경우는 없다.
물론 랄프 패밀리의 악명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일단 그들이 이런 짓을 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그들도 나름 비매너 행위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수칙을 정해뒀다.
“아까 지나갔던 애들은 어때?”
“저기 3인 팟?”
“아이템이 보급품이 아니라, 번듯한 걸 보니, PK로 털면 좀 나올 것 같은데?”
“괜히 길드 소속이면 골치 아파져.”
수칙 하나, 길드 소속으로 의심되는 파티는 건드리지 말 것. 길드 소속을 건드리면, 나중에 보복 행위가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쳇. 오늘은 맛있는 애들이 없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그냥 몬스터 반, 고기 반이었는데.”
“그때는 이쪽에 몬스터가 많아서 사람도 몰렸으니까. 최근 보니까 대부분 퀘스트가 피거스 성 서부지역에서 생성되는데, 그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해.”
“그럼 가는 김에 그냥 몇 놈 PK로 처리하고 갈까?”
“택도 없는 소리.”
수칙 둘, 다짜고짜 PK를 하지 않을 것.
“그러다가 한 번에 훅 가는 거야.”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다짜고짜 일방적으로 PK를 저지르는 것과, 시비가 붙은 후에 결국 무력충돌로 번지는 건 분명 다르다. 똑같이 지저분한 짓이지만, 전자는 제삼자가 개입해도 될 만한 사건이라면, 후자는 제삼자가 개입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일이다.
“자이유 말이 맞아. 솔직히 레벨 낮은 애 그냥 잡는 게 무슨 재미야? 발끈하는 놈을 밟아 죽이는 게 재미이지.”
결정적으로 랄프 패밀리는 그저 PK를 즐기는 게 아니라, 몬스터를 빼앗기면서 바짝 약이 오른 상대를 괴롭히다 잡는 걸 즐기는 아주 변태 같은 족속들이었다.
“야, 야.”
그런 그들의 눈에 오랜만에.
“쟤 어때?”
“누구?”
“혼자서 움직이는 쟤.”
먹잇감이 등장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길조차 없는 산등성이를 천천히 올라가는 유저 한 명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보자, 아이템은 토벌협회 보급품. 대충 보면 검사 같은데? 혼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검사겠지?”
“혼자 비마 산까지 온 걸 보면 초보는 아닌 것 같은데…… 초보자 코스프레 한 건 아니겠지?”
워로드에서 혼자 움직이는 유저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 3인 파티로 움직인다.
때문에 혼자서 움직이는 유저는 둘 중 하나다.
출몰하는 몬스터들보다 레벨이 훨씬 높거나 혹은 정말 운이 좋아 아직 죽지 않았거나.
랄프 패밀리는 다시 한 번 등장한 먹잇감을 바라봤다.
무언가 탈을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거리도 멀었기에, 체격 등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체격이 의미 없는 게임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순간 나름 며칠 동안 만만한 유저들만을 사냥해본 그들의 촉이 말해줬다.
“느낌이 딱 봐도 호구 느낌이 나는게 고수 같진 않은데?”
“내 생각도 그래.”
“확실히 호구 느낌이 물씬 풍기긴 한다.”
저놈은 호구다!
이제까지 이런 촉을 느낄 때마다 훌륭한 낚시에 성공했던 그들이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자, 그럼 비마 산에서 마지막 낚시를 해보자고. 이거 하고 다른 곳으로 튀자.”
< 6화. 비마 산의 동굴 (3).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