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해골과 함께 춤을 (1). >
1.
가상현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건,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공간에서는 누구나 헐크가 될 수도 있고, 아이언맨이 될 수 있고, 마릴린 먼로가 될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행기보다 더 빠른 레이싱차를 타고 도
로를 질주할 수도 있고, 절벽에서 아무런 도구 없이 뛰어낼 수도 있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잘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어렵다.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잘하는 건 정말 어렵다.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떨어지는 순간 고통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은 뛰어내리지 못한다. 그게 가능했다면, 극기훈련을 할 때 10미터 높이에서 안전 장비를 착용한 채 떨어지는 훈련을
받으면서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상현실의 특징이 가상현실게임들, 특히 RPG장르의 가상현실게임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가상현실게임에서는 유저들에게 얼마든지 맨몸으로 불곰도 때려잡을 수 있는 능력치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치를 가지고 불곰을 때려잡으라고 할 경우,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중 두세 명밖에 없다. 나머지 일곱, 여덟은 불곰 사냥에 실패한
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주어진 힘을, 불곰도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최대시속 600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 차가 있어도 일반인은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 밟지 못한다. 무서운 것도 그렇고, 그런 속도로 코너 구간을 무리 없이 지나갈 수준의 운전
능력은 타고난 재능과 경력이 없으면 가질 수 없다.
두 번째는 가상현실이라고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분명 살아있는 대상을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북함이다.
첫 번째 문제점은 유저가 품고 가야 할 문제점이지만, 두 번째 문제점은 콘텐츠 생산자가 풀어야 하는 문제점이었다. 가상현실게임을 제작하는 개발사는 유저가 게임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그를 통해 게임에 몰입할 수 있도록 게임을 디자인
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현실처럼 몬스터에게 칼을 휘두르면 피가 펑펑! 튀기거나, 몬스터의 뱃속에 칼이나 창을 찔러 넣으면 죽어가는 생명체의 심장 고동소리가 창칼을 통해 느껴지거나, 배를 가르니 짜잔! 내장이 쏟아져 나오거나, 머리통을 부수면 얍! 하고 뇌수와 뇌 파편들이 터
져 나오거나, 그렇게 게임을 디자인한다면, 게임 제작자는 쇠고랑을 찰 테니까.
이 때문에 초창기 RPG장르의 가상현실게임은 속된 말로 유치했다. 몬스터가 젤리 형태나, 아예 폴리곤 형태로 존재했고, 마치 아동용 게임처럼 최대한 게임의 잔혹성을 순화하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몬스터 몸을 찌르면 사탕이 줄줄 흘러나오는 게임도 있었다.
하지만 워로드는 달랐다.
워로드는 몬스터와의 전투가 메인 콘텐츠로 삼았고, 그것을 최대한 갈고 닦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워로드는 강행 돌파를 선택했다.
그 어떤 게임보다 전투가 실감 나는 게임을 만들었다.
실감이 난다는 건, 달리 말하면 잔혹하다는 의미다. 피가 튀긴다. 물론 여기까지다. 상처의 절단면이 생생하게 보이고, 내장이 바닥에 너부러지고, 뇌수가 터지진 않지만, 피가 튀기는 과정은 굉장히 사실적이었다. 유저는 얼마든지 이 설정을 끌 수 있지만, 그런 설
정 자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름 파격이었다.
여기에 워로드의 몬스터들은 상처를 입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괴성과 울분을 토해냈다. 그들은 상처를 감추기 위해 노력했고, 상처를 입힌 대상에게 복수하기 위해 날뛰었다.
이게 워로드가 보는 맛이 있는 게임이 된 비결이다. 워로드의 전투는 그 어떤 게임의 전투보다 섬뜩하고, 소름 끼치며 그렇기에 숨이 막히는 박진감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처음 가상현실게임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곤란한 문제였다. 비싼 돈을 주고 게임을 시작했는데, 막상 게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긴다.
이에 대한 워로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튜토리얼을 아주 제대로 빡세게 만들었다. 실제로 튜토리얼 디자이너는 튜토리얼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조언입니다. 게임을 스트레스 받으면서 할 이유는 없습니다. 워로드 아니더라도 할 게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뭐하러 비싼 돈 들여서 억지로 게임을 합니까?”
나중에 그 인터뷰를 한 직원이 시말서를 썼다는 소문이 있지만…… 어쨌거나 신규 유저는 워로드를 즐기기 위해 무려 280분 동안 워로드가 제공하는 튜토리얼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이 튜토리얼 과정에는 전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몬스터를 잡는 건 물론, 압도적으로 강한 몬스터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것 역시 경험해 봐야 한다.
이런 튜토리얼을 어떻게든 통과한 유저들은 그야말로 혼이 반쯤 나가 버린다.
지금도 그랬다.
피거스 캐슬!
워로드 유저들 사이에서는 멜론 맥주로 유명한 피거스 캐슬에 위치한 시작의 여관.
튜토리얼을 통과한 유저들이 처음 시작하는 그곳에는 당연히 막 튜토리얼을 끝낸 유저들이, 파릇파릇한 신입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은 튜토리얼 통과 보상으로 받은 멜론 맥주를 앞에 둔 채, 혼이 반쯤 빠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치겠다.’
‘이게 게임이야, 고문이야…….’
‘젠장, 그냥 기어를 팔아버릴까? 앞으로도 이러면 절대 게임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찌어찌 통과는 했지만 충격은 강렬했다. 이미 악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백문불여일견! 직접 해보니 느낌이 달랐다.
때문에 대부분 유저들은 진지하게 앞으로 워로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때! 그런 그들과는 전혀 다른 표정과 기색을 품은 유저가 등장했다.
“으랴아아!”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사내는 기지개를 쭉 켜며, 성큼성큼 힘 넘치는 걸음걸이를 자랑하며, 아주 몸이 제대로 풀리는 나른한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사내의 표정은 밝았다.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빼고, 샤워를 마친 듯한 표정, 아주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제야 좀 몸이 풀리네.’
사내의 정체는 안재현, 아니 히르칸이었다.
‘간만에 피 튀기게 싸워보니까, 아주 좋아. 그래, 인간이 가끔은 피를 봐야지.’
그에게 튜토리얼은 감을 찾기 위한 좋은 계기였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 히르칸은 어느 정도 전투 감각을 되찾았다. 동시에 히르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부풀어 올랐다.
‘이제야 진짜 돌아온 느낌이 드네.’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드디어 몸에 맞는 옷을 다시 찾아 입은 느낌이다. 때문에 기분에 취한 히르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콧노래 박자에 맞추듯, 타닥, 타닥! 경쾌한 스텝도 밟았다.
넋을 잃은 채 게임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유저들은 그런 히르칸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얼굴 표정 위에 추가했다.
‘저 인간은 뭐야?’
‘미친놈인가?’
‘콧노래? 입은 옷을 보면 신규유저인데, 지금 콧노래가 나와?’
어지간하면 남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는데, 거의 5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고문이나 다름없는 전투를 치른 이들의 눈에 비친 히르칸의 모습은…… 그냥 미친놈, 그 자체였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히르칸은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알 바 없으니까.
그때 시작의 여관 주인 NPC가 히르칸을 향해 말했다.
“고생했네. 작은 보답이지만, 맥주 한 잔을 주겠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힘겨운 고생을 풀게.”
[튜토리얼을 훌륭하게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멜론 맥주 1천cc가 제공됩니다.]
귓가로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 알림과 함께 NPC가 능숙한 솜씨로 히르칸에게 맥주 한 컵을 줬다. 큼지막한 컵이었고, 히르칸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캬!”
‘간만에 먹는 멜론 맥주, 살아있네!’
마시는 순간 시원한 목 넘김과 함께 올라오는 고급스러운 멜론의 향과 멜론 특유의 단맛이 속은 시원하게, 목은 개운하게, 입안은 상쾌하게 만들어줬다.
‘그러고 보니, 멜론 맥주를 마지막으로 마셔본 게…… 우레사냥꾼 새끼들하고 붙기 전이니까, 벌써 수년 전이네.’
멜론 맥주, 가상현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다. 이 맛을 위해 워로드는 거금을 들여 최고의 미식 가상현실콘텐츠 제작 업체인 미미(
없는 맛도 창조할 수 있으니까.
“크!”
5시간 가까운 튜토리얼로 지친 몸을 1천cc의 맥주를 이용해 단숨에 해결한 히르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작의 여관을 나섰다. 나서는 순간 밝은 햇살이 그를 반겼다.
‘내가 돌아왔다!’
영웅도살자 히르칸, 그가 드디어 워로드로 돌아왔다.
2.
[히르칸]
- 레벨 : 1
- 직업 : 자유인
- 타이틀 개수 : 1개
- 능력치 : 근력(3)/체력(3)/지력(3)/마력(3)
히르칸은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 위로 뜬 노트 크기의 홀로그램 창을 바라봤다.
콤팩트한 자신의 능력치 창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물론 이게 능력치 창의 전부는 아니다.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보는 순간 짜증이 날 정도로 많은 세부 능력치 항목이 나온다. 종류만 10개가 넘는 속성 저항력에 물리, 마법 방어력에 추가 이동속도 등…… 당연한 말이지만 워로드 유저는, 특히 랭커들은 그 숫자
가 많은 걸 좋아한다. 아주 숫자로 도배가 되면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히르칸도 그랬다.
그런데 정말로 단출하기 그지없는 숫자를 보니, 뱃속이 공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늘려야지.’
이 능력치 창을 숫자로 가득 채우는 게 우선 과제다.
물론 지금 최우선 과제는.
‘자, 그럼 이제 직업부터 얻어야지.’
베이직 클래스를 확보하는 것이다.
어려울 건 없었다.
워로드는 게임 자체가 어렵다. 메인 콘텐츠가 전투인데, 이 전투는 보통 유저들에게 그 자체만으로도 어렵다. 그런 게임이 전투 준비마저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면, 아무도 그 게임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워로드는 전투 자체는 어려워도,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 자체는 굉장히 쉬웠다.
대표적인 게 직업 선택이었다.
보통 게임들은 직업을 얻으려면 복잡한 과정을 집어넣는다. 일정 레벨에 도달하는 조건을 걸거나, 전직 퀘스트라고 귀찮은 퀘스트를 하게 만들거나, 혹은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먼 거리에 잡아두거나.
하지만 워로드는 어느 마을이든, 유저가 처음 시작하는 시작의 여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내에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클래스 타워가 존재한다. 더불어 워로드에는 직업이 많지 않다. 워로드를 하는 유저들의 90퍼센트는 마법사, 검사, 사제 중 하나다. 어차피 어떤
스킬 트리를 구축하고, 능력치를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직업이라도 스타일은 천차만별로 변한다.
히르칸이 원하는 네크로맨서는 마법사다.
‘마법사로 전직한 다음에, 최초의 마법을 흑마법으로 배우면 완료.’
일단 마법사로 전직을 하면, 선택권이 주어진다.
흑마법 그리고 백마법.
흑마법을 고르면 흑마법사가 된다. 이후 흑마법사가 네크로맨서 관련 스킬 트리를 구축하면, 네크로맨서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워로드는 1레벨 유저가 직업을 얻는 순간 곧바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마법 또는 스킬을 고를 기회를 준다. 1레벨에 곧바로 마법을 쓸 수 있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이리저리 뺑뺑이를 돌려서 유저를 짜증 나게 만들지 않는다. 어차피 전투에 돌입하면, 유저 본인이 알아서 미치고 팔짝 뛰게 될 테니까.
‘뭐로 고를까?’
흑마법을 고를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마법은 여러 가지다.
보통은 공격 마법을 고른다. 마법사를 고르는 가장 큰 이유고, 공격 마법은 1레벨 때 습득하는 마법이라도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문제는 스킬 트리 구축을 위해서는 일찌감치 상위 스킬 습득에 필요한 하위 스킬의 스킬 랭크를 올릴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가서, 다시 스킬 랭크를 올리는 노가다 작업을 하는 건 정말 짜증 나고, 귀찮은 작업이다. 시간도 많이 든다. 스킬 랭크를
올리는데 가장 좋은 건, 자기와 비슷한 레벨 이상의 몬스터를 상대로 스킬을 많이 사용하는 거니까.
동고동락.
스킬 랭크업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해골 소환.’
그리고 네크로맨서의 스킬 트리 중, 소환 스킬 트리의 가장 기본은 해골 소환이다.
해골 소환 스킬 랭크가 낮으면, 그 어떤 상위 스킬도 배울 수 없다.
그럼 답은 나왔다.
‘해골이 얼마나 날 만족시켜줄지 기대되는군.’
< 4화. 해골과 함께 춤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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