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8화 (8/192)

< 3화. 고수의 비결 (2). >

3.

안재현의 카드가 긁힐 때마다, 안재현이 찬 구식 스마트워치가 진동을 했다.

‘나름 인생 걸고 구한 돈이 카드 두 번 긁으니 날아가네.’

안재현은 그 진동이 마치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그래, 무조건 번다. 내가 개처럼 벌어서, 개처럼 쓰는 게 뭔지 보여준다.’

안재현이 그런 스마트워치의 몸부림에 새로운 각오를 다질 무렵, 계약서를 확인한 직원이 마지막 절차로 넘어갔다.

“물건 배송은 원하시는 시간대에 자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세부 세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세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택에서 세팅하시겠습니까?”

세부 세팅.

V기어의 여러 옵션들과 기타 사항들을 개인사용자에 맞게 조절하는 작업이다.

굉장히 중요하다. 악기로 따지면 조율이다. 하고 안 하고 차이는 매우 크다. 특히 1퍼센트, 2퍼센트 효율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랭커들은 이 세팅에 목숨을 건다. 때문에 진짜 게임 좀 제대로 한다는 인간은 본인이 직접 세팅을 한다. 안재현의 경우에는 이 부분

에 고수였다.

“여기서 하죠.”

하지만 반대로 전체적인 세팅까지 일일히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대충 세팅하고, 나머지는 직접 플레이를 하면서 조절하는 게 최선일 터.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프로그래머를 불러드리겠습니다.”

4.

에메랄드빛 V기어를 앞에 두고, V기어와 연결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던 프로그래머가 자판에서 손을 땠다.

“젠장, 뭐가 문제지?”

“왜 또?”

“아무리 체크를 해도 오류는 없어.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뭐?”

“뭐긴, 결국 테스터 문제인데, 테스터 불러다가 해야지.”

테스터를 부른다는 말에 다른 프로그래머는 실소를 머금었다.

“VVIP께서 퍽이나 오시겠다. 우리가 테스터 부르면 미친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욕이나 먹을 걸? 아니다. 아마, 테스터랑 직접 통화도 안 되겠지.”

“그러니까 젠장이라고 한 거잖아.”

그 두 프로그래머는 사실 기기 결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단순 프로그래머가 아니었다. 일본에 위치한 피치 사 아시아지부 소속으로, 심지어 아시아지부 휘하 연구개발팀 소속 프로그래머였다. V기어 차기 모델인 6레벨 제작에 참가한 가상현실분야의 최고 수준

의 전문가였다. 연봉도 억소리가 가뿐하게 나오는 고급 인력이었다.

그런 그들이 하루아침에 한국까지 와서 A/S 기사가 된 건, 지금 그들이 만지고 있는 6S레벨 모델의 테스터가 어마어마한 VVIP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분야의 고급 인력도 A/S기사로 부릴 만큼의 대단하신 분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정말 짜증이 났다.

나름 최고의 명문대에서 나와, 분야 최고의 기업에서, 나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 그들이 일생에 이런 취급을 받는 날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주는 월급 받아먹는 입장에서 높으신 분이 까라면, 까야지.

“다시 처음부터 보자. 불만사항이 뭐였지?”

“클라이밍 테스트 기준으로 몸이 둔하게 느껴지고, 반응 속도 박자가 틀리다고 했어.”

“반응 속도 박자가 틀린 건, 가상현실상의 신체 능력 인식이 느리다는 거고, 몸이 무거운 건…… 이게 문제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개인의 부적응 문제 아니야?”

그때 그들 옆으로 안재현과 그의 세팅을 도울 프로그래머가 왔다. 안재현이 의도한 바였다. 조금이라도 더 6S모델을 보기 위해, 그 근처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안재현은 그들의 대화내용 대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거 6S제품 맞죠?”

곧바로 안재현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안재현이 온지도 모르던 두 프로그래머가 놀라며 반문했다.

“예?”

“어떻게 그걸?”

놀랄 수밖에 없었다. 6S레벨 모델은 아직 테스트 모델, 6레벨 모델이 있다는 것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분야 전문가들이라면 다르지만, 안재현은 어디를 봐도 전문가와 거리가 멀었다.

“맞죠?”

“예, 맞습니다.”

“그럼 테스트 모델일 테고, 왜 테스트 모델이 여기 있는 겁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테스터가 몸이 무겁다고 해서…….”

그 순간 대답을 하지 않던 다른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안재현의 질문에 대답해준 동료를 째려봤다.

‘야! 왜 그런 것까지 말하고 지랄이야!’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받은 다른 한 명이 입을 꽉 다물었다. 본인도 본인의 실수를 안 모양. 반면 안재현은 그들의 눈빛 교환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조금 전 몸이 무겁다는 말만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몸이 무겁다면, 확장 감각 시스템일 때문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확장 감각 시스템.

6레벨에 추가되는 새로운 시스템이다.

인간이 가상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스템으로, 워로드 유저들 사이에서는 육감이라고도 부른다. 좋은 시스템이지만, 반대로 양날의 검이다. 감각이 발달한다는 건, 받아들이는 정보가 더 많아진다는 거고, 갑자기 많은 데이터의 양을 처리

하려면, 그 과정 자체가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핵심은 적응을 하는 거다. 적응을 못하면, 그냥 확장감각 시스템을 쓸 재능이 없는 거고, 그 경우에는 그냥 안 쓰는 게 낫다.

“테스트 방법은 클라이밍일 테고, 확장 감각 시스템을 50퍼센트에 맞추고, 클라이밍 기록 측정해보세요. 그 후 확장감각을 5퍼센트 단위로 올리면, 대충 조절이 될 겁니다.”

더불어 클라이밍 테스트는 가상현실 세팅을 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테스트 방법이었다.

말 그대로 가상의 공간에서 암벽 등반을 함으로써, 유저가 주어진 가상의 육체 능력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얼마나 잘 쓸 수 있는지, 균형감각 등을 체크할 수 있다.

한편 그런 안재현의 설명을 들은 두 프로그래머는 놀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아무리 봐도 전문가가 아닌데, 확신에 찬 대답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확장 감각 시스템도 알고 있다. 이건 이쪽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는 최신 기술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껄일 만한 기술이 아니다.

“제가 알면 뭐 문제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테스터 경력 있으십니까?”

안재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안재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경력은 있지만, 이 세계 기준으로는 없는 셈이니까.

그때.

“그럼 저희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 명이 안재현에게 부탁을 했다.

“야! 무슨 소리야?”

다른 한 명이 곧바로 반발했다. 사실 문제 될 건 없다. 애초에 테스트 기계 아닌가? 다양한 테스터의 데이터를 모으는 건 상식이다. 오히려 이걸 개인이 테스트란 명분하에 멋대로 쓰는 게 비상식이고, 부도적한 일이다.

“아니, 왜? 어차피 우리끼리 아무리 테스트해봤자, 결국 도돌이표라고! 도움 받는 게 낫지!”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 둘이 이내 안재현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안재현이 그들의 부탁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좀.”

‘저게 그년 거면,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지.’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만약 저게 안재현의 예상대로 채설연 제품이라면 안재현이 도와주는 건 원수를 도와주는 꼴이다. 침을 뱉으면 뱉었지, 그런 짓은 못한다.

두 프로그래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재현은 무시했다. 어차피 저들은 안재현이 동정할 필요는 없다. 6S레벨 모델을 다루는 걸 보면, 본사 직원일 터. 안재현이 동정하기에는 지금 안재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연봉을 받는 엘리트들이다.

안재현이 곧장 프로그래머를 바라봤다.

“자, 세팅합시다.”

그제야 낙동갈 오리알 신세였던 프로그래머가 정신을 차렸다.

“아, 예.”

5.

모델처럼 훤칠한 신장에 글래머러스한 몸매, 긴 생머리를 가진 여인이 위엄 넘치는 여인이 쓰고 있던 에메랄드 빛 V기어를 벗었다. 벗는 그녀가 옆에서 도와준 프로그래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언해준대로 확장 감각 시스템을 낮춘 후에 차츰 올리니까 괜찮네요. 충분한 것 같아요.”

말과 함께 여성, 채설연이 눈빛으로 옆에 있던 여성 보디가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성 보디가드가 곧바로 능숙한 솜씨로 설치된 V기어 6S레벨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곧장 가져가려는 모양. 두 프로그래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푸념을 뱉었다.

‘진짜 완전 우린 종부리듯 부리네.’

‘더러워서 진짜, 돈 많으면 다인가?’

그런 그 둘에게 채설연이 곧바로 자신이 벗어두었던 외투를 집어 든 후,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꺼낸 그녀는 곧바로 지갑에 있던 하얀 수표 두 장을 꺼냈다.

“수고하셨어요.”

그 말에 수표를 받아든 그 둘은 놀랐다.

‘헉.’

백만 원 정도라고 예상했던 수표에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숫자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돈 많으면 다냐고? 응!

그 말이 그 둘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한편 채설연은 돈을 건네는 순간 두 프로그래머를 무시했다. 돈을 준 이상, 그들과의 거래는 끝난 셈이니까. 거래가 끝났는데 더 인연을 둘 만한 가치가 그 둘에겐 없었다.

그때 그녀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질문을 했다.

“그보다 클라이밍 테스트 도중에 제 기록이 2위로 남던데, 1위 기록은 뭐지요?”

“예?”

그 질문에 수표를 모시듯 손에 쥐고 있던 그 둘은 머리를 갸웃했다.

‘2위? 무슨 소리야?’

‘그 기록이 2위라니, 말도 안 돼. 세계랭킹 수준이라고.’

이곳, 피치 스토어에 있는 V기어는 모두 하나의 서버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공유한다. 라이센스와 용량 문제로 기기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클라이밍 테스트도 마찬가지다. 기록은 당연히 오늘 이곳에서 클라이밍 테스트를 시도한 모든

유저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조금 전 채설연은 A난이도 테스트에서 2분 51초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보통 사람은 A난이도 등반 자체를 못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등반만 하면 가상현실에서 좀 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물며 이걸 2분대에 끊는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야말로 천재, 괴물이라 불리는 분류들이다.

2분 51초라면, 엄청난 기록이다. 더불어 채설연은 자신의 본래 기록인 2분 58초에서 7초나 단축한 것에 정말 만족했다. 무리를 해서, 권력을 이용해서 6S모델을 얻어낸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기록은 2위였다.

채설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록이 대체 왜 2위란 말인가?

그 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채설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클라이밍 테스트 기록 순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 둘이 곧바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이윽고 나온 기록을 본 그들의 얼굴 표정이 굳었다.

“2분 33초…….”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록이 1위 자리에 있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기록이다.

그 순간 그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거 봇이 돌린 결과물 같습니다.”

“이 제품 테스트를 위해서 봇 프로그램을 계속 돌렸는데, 도중에 저희 실수로 기록이 등록된 모양입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낼 수 없는 기록. 그럼 다른 문제로 생긴 기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둘의 대답에 채설연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렸다.

6.

집으로 돌아온 안재현은 자신의 원룸에 설치된 V기어를 바라보며 몸을 풀었다.

몸을 푸는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젠장.”

‘1레벨 모델이라서 그런가? 클라이밍에서 2분 30초대에 걸릴 줄이야. 전성기 시절에는 2분 20초대도 찍었는데. 젠장, 역시 한동안 게임을 안한 부작용이야.’

오늘 클라이밍 테스트 기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컨디션이 최고 컨디션이 아니라는 것.

‘네크로맨서고 나발이고, 몸상태부터 전성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지.’

그렇게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푼 안재현이 곧바로 구매한 포도당 사탕을 입 안에 잔뜩 넣은 후에 아삭아삭, 포도당 사탕을 씹으며, V기어 글러브를 착용했다. 글러브를 착용하자, 젤리 같은 장갑 안의 재질이 부풀어오르며 안재현의 지문 사이사이마저 파고 들었

다. 안재현이 곧바로 잘게 부순 포도당 사탕을 꿀꺽, 삼켰다.

이후 덩그러니 놓인 매트리스 위에 누운 안재현이 묵직한 V기어를 착용했다.

[사용자 안재현, 홍채 인식했습니다. V기어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채 인식이 완료됐고, 안재현은 곧바로 V기어 헬멧 안에 있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그 마우스피스를 꽉 물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 3화. 고수의 비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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