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혼자서 잘하는 직업 (3). >
3.
워로드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유저는 똑같은 직업을 골라도, 자신이 습득한 스킬 트리와 투자한 능력치에 따라서 얼마든지 개성적인 직업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잘 나가는 직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직업이 있는 법이다. 모든 RPG장르의 게임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워로드에서 네크로맨서는 잘 나가지 못하는 직업이다.
직업 자체가 나쁜 직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네크로맨서는 대상에게 저주를 걸 수도 있고, 언데드 몬스터와 골렘과 같은 수하를 소환할 수도 있으며, 마법사들처럼 공격 마법을 쓸 수도 있다. 심지어 자신의 육체를 언데드처럼 개조를 해서, 직접 전투능력도 향상
시킬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이보다 더 만능인 직업도 없다.
문제는 이 다양한 능력을 동시에 수준급으로 확보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다.
워로드는 스킬 트리 시스템이 있다. 상위 스킬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스킬북과 레벨 그리고 하위 스킬이 일정 랭크에 도달해야 한다. 스킬 랭크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보통은 그 스킬을 얼마나 사용했는가, 그에 따라 달라진다.
다양한 스킬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스킬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취미 삼아서, 세월아 내월아, 나는 그냥 이 게임을 즐기겠다~ 하면 못할 건 없다.
그러나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결과를 만들어야 하며, 게임의 재미가 아닌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해야 하는 유저들에게 네크로맨서는 좋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스타터들이 네크로맨서에 눈길도 주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네크로맨서를 한다면, 게임을 즐길 순
있어도, 경쟁자를 앞지를 순 없다.
또한 워로드의 꽃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레이드에서 네크로맨서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못하다. 네크로맨서가 가진 대부분의 특징은 기존 마법사들이 커버할 수 있다. 공격 마법의 위력도 네크로맨서보다 보통의 마법사들이 더 강하다. 저주 마법도 결국 디
버프 마법이고, 이런 디버프 마법은 저주 마법이 아니더라도 많이 있다.
결정적으로 네크로맨서는 오직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 쓸 수 있다. 이 페널티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랭커들에게 꽤 크다. 마법은 상성에 따라서 최대 2배가 넘는 데미지를 줄 수 있는데, 그 메리트를 네크로맨서는 볼 수
가 없는 셈이니까.
소환 마법은 더 까다롭다. 일단 돈이 많이 든다. 네크로맨서는 몬스터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코어가 있어야 소환 마법을 쓸 수 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해야 보다 위력적인 소환물을 소환할 수 있다. 이 코어를 만드는 비용이 상당하다. 최상
위 레벨 유저들은 아이템 하나에 못해도 수백만 원이다. 코어는 그런 아이템 값과 비슷하다. 한두 마리 소환하면 모르겠는데, 몇몇 네크로맨서는 100마리에 가까운 소환물을 부릴 때도 있다.
이마저도 한 번 크게 투자해서 끝나면 모르겠지만, 네크로맨서 본인 레벨이 오르고, 보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효율적으로 사냥하려면, 당연히 소환물들의 코어도 레벨에 맞춰 새로 교환해줘야 한다.
여기에 의외로 큰 문제점이 하나 더 있다. 소환물이 비호감이다. 그냥 일반 PC게임에서 디자인된 해골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것과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현실에서 해골이 움직이는 걸 보는 건 느낌이 전혀 다르다. 하물며 좀비, 구울로 넘어가면…… 끔찍해진다.
그걸 취미처럼 보고 즐기는 인간이 없진 않지만, 그게 정상적인 취미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네크로맨서를 가지고, 랭킹 100위에 이름을 올렸던 유저가 있다.
게임 내 이름은 히말라, 별명은 리치 리치(Rich lich)다.
표현 그대로, 네크로맨서를 육성하는 그는 현실에서 엄청난 수준의 부자였다.
본명은 수브라타 두타, 앱 하나로 대박을 치면서, 33세의 나이에 5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대부호인 그의 취미는 게임이었다. 과금제 게임에서 막대한 현질로 상대를 깔아뭉개는 것으로 게임을 즐기는 아주 변태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재력은 워로드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는 가상현실게임을 잘하는 재주가 없었다. 제아무리 좋은 아이템으로 무장을 해도, 다른 유저들이 봤을 때는 PK로 털면 비싼 아이템을 냉큼 토해내는 짭짤한 녀석일 뿐이었다. 그에게 비싼 아이템을 쥐여주
는 건, 초보운전자에게 람보르기니를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좋은 아이템이 있으니, 그 아이템을 노린 다른 유저들에게 PK를 당해 죽는 경우가 오히려 더 잦아졌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자신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걸 포기했다. 네크로맨서가 되어, 소환물에게 전투를 치르게 했다. 돈이 많이 든다는 건, 그에게는 의미 없는 단점이었다.
그런 그가 어마어마한 투자를 통해, 자력으로 250레벨의 엘리트 몬스터, 여왕불꽃개미를 사냥했을 때, 네크로맨서에 대한 평가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리치리치란 별명도 그때 붙었다.
어쨌거나 리치리치의 등장으로 네크로맨서에 대한 재조명이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가 대세가 되는 일은 없었다. 워로드에서 가장 많은 투자비용을 요구하고, 육성이 힘들며, 무엇보다 네크로맨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당시에 이미 워로드의 게임 시스템 및 레이드 시스템은 네크로맨서를 배제한 채 완성된 상황이었다. 최
상위 랭커들이 본인의 캐릭터를 포기하고 다시 네크로맨서로 전향해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고레벨의 네크로맨서를 위해 기존의 공략법을 바꿀 수고를 할 이유도 없다.
때문에 안재현은 고민했다.
‘가능은 해.’
혼자서 다 해먹고 싶다?
그럼 네크로맨서가 딱이다. 딱히 전투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네크로맨서는 스스로를 언데드로 만든 후에, 육체 개조가 가능하다. 그 전투 능력이 동레벨 대의 다른 직업보다 우수하진 않지만, 원래 안재현은 자기보다 높은 능력치, 나은 아이템, 높은 레벨의
랭커들도 거뜬히 이겼다. 어느 정도 기준만 맞추면 된다.
돈이 많이 드는 것도 고려 대상이지만, 만약 사냥을 통해 나오는 모든 이익을 혼자서 독점할 수 있다면, 퉁을 치는 게 가능해진다. 쓰는 만큼 벌 수 있게 된다.
고민이 되는 점은 오직 하나.
‘가능은 한데…… 실패하면 끝장이야.’
성공 가능성이다.
네크로맨서에 대한 정보는 많다. 그러나 만약 도중에 정말 육성에 실패할 경우, 생각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심각해진다.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오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이번에 실패하면, 그때는 마음을 바꿔야 한다. 자존심을 버리고, 지나가는 개한테 자존심을 빌린 뒤에, 개처럼 남의 밑에 들어가서 왈왈 거릴 생각을 해야 한다.
안재현 말대로 실패하면 끝장이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하면?
정말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을 통해서 혼자 다 해먹을 수 있다면?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발아래 둘 수 있다. 실제로 리치리치도 그랬다. 그는 길드하고도 혼자 싸웠다. 30대 길드를 상대로 혼자 싸우는 건 불가능했지만, 어지간한 길드는 혼자 힘으로 박살을 내고는 했다. 단순히 1대1로 본다면,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랭커들을
다 뒤져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심지어 본인의 전투능력이 처참할 정도로 가소로웠던 걸 고려한다면, 만약 리치리치에게 안재현 수준의 개인 전투 능력이 있었다면…… 아마 워로드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안재현이 원하는 거다.
‘그래, 역사를 바꿔야지.’
안재현이 기억하는 역사는 필요 없다. 안재현이 원하는 건 자신이 중심이 된 새로운 역사다.
무엇보다 안재현은 장담할 수 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면, 30대 길드는 다시금 그를 뽑아내려고 작심을 할 것이다. 이미 배가 부를 만큼 부른 주제에, 자기들 밥그릇에 위기감을 느끼면, 성난 멧돼지가 되는 족속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안재현을 가만 놔둘 리 없다.
그때 안재현은 그들을 상대로 버텨야 한다.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좋아.’
결심이 섰다.
“이제 돈 빌리러 가야지.”
4.
안재현이 워로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작업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였다. 게임을 하는데 수천만 원 정도 되는 거금을 그냥 지불하는 자들이 즐기는 게임이다. 그런 그들이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 속칭 노가다 작업을 즐길 리 없다. 돈으로 그걸 대신할 수 있다
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한다.
그 점을 노리고, 워로드 작업장이 성행했다. 특히 아르바이트가 성행했다. 가상현실게임은 PC게임과 다르게 오토 프로그램을 돌릴 수가 없으니, 사람을 많이 고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장 아르바이트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재능을 발견했고, 이후 작업장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서 게임을 시작했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워로드를 시작한 건, 워로드를 접하고 석 달 정도가 흐른 뒤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재현은 지금 그 석 달을 다시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떠올린 게 사채였다.
사채라고 해도 불법 사채를 빌리는 게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돈놀이를 하는 인간들은 정말 머리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돌아간다.
V기어는 중고가 역시 굉장히 높은 거래에서 형성된다. 일단 작동만 하면, 정가의 80퍼센트는 받을 수 있다. 즉, V기어를 구매하는 구매자들에게, V기어 구매를 조건으로 붙이고 그 V기어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 원금 손실이 그리 크지 않다.
여기에 V기어를 사채를 이용하면서까지 사는 부류들은 대개 V기어로 게임을 해서 돈 좀 벌어보려는 애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게임을 순수하게 즐기려고 사채까지 쓰면서 돈 빌리는 인간은 거의 없다. 그럼 의외로 원금회수도 어렵지 않다. 작업장에 넘겨서 소개
료로 받으면 된다.
이게 일명 V기어론이다.
안재현이 작업장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에, 그 V기어론으로 돈을 빌렸다가 망해서 작업장 알바를 뛰는 인간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작업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만큼,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 접촉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안재현은 결심이 서고, 정확히 1시간 만에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받아먹을 수 있었다.
“V기어 구매를 위해 돈을 빌리고 싶다고 하셨죠?”
“예.”
안재현의 대답에 사채업자 박우영은 안재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윽 훑었다.
‘별 볼 일 없는 놈인데.’
사채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사람이 놈인지 아니면 고객인지, 그걸 구분하는 능력이다.
원금회수가 어느 정도 장담이 된다고 해도, 손해는 손해다. 동시에 이런 것도 봐야 한다.
이놈에게서 원금을 제외하고 얼마만큼 뜯어낼 수 있을까? 원금하고 이자를 깔끔하게 갚는 고객도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고객은 원금 상황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이자만 평생 납입해주는 고객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우영의 눈에 비친 안재현은 원금 회수도 힘든 타입이었다.
딱 봐도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요즘 워로드에서 대박을 치는 인간이 속속 나오니, 혹시? 하는 마음에 게임에 자기 인생을 베팅하는 부류들. 내게 혹시 게임을 겁나 잘하는 재능이 있지 않을까? 나도 영상에 나오는 유저들처럼 게임에서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으로 워로드를 하는 부류들.
특히 현실에서 보잘것없는 이들 중에서 현실도피를 위해 게임을 택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박우영이 보기에는 안재현은 딱 그 부류였다.
‘뭐, 못 해줄 건 없는데.’
물론 안재현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V기어를 담보로 잡는 건 물론, 안재현에게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지만, 그의 원룸보증금도 담보로 잡으면 된다.
원금회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당연히 이자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자는 29.9퍼센트입니다.”
박우영은 단지 가소로울 뿐이었다.
박우영은 확신했다. 석 달 후다. 3개월 동안의 무료 이용이 끝나고, 이제 돈 내고 게임을 해야 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 안재현은 울상이 될 것이고, 어느 순간 이자조차 못 내는 처지가 되고, 원룸 보증금으로 빚을 갚아야하는 순간이 오면, 질질 짜면서 선처를 구할
것이다.
“얼마를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그 광경에 눈앞에 선했기에, 박우영은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 박우영의 모습에 안재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천만 원만 빌립시다.”
“예?”
의외로 센 가격이 나왔다. 보통은 V기어론으로는 7백 정도를 빌린다. 딱 그 정도면 3개월 이용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거기서 3백을 더 부른다?
놀라는 박우영의 모습에 안재현이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나중에 못 갚으면, 작업장 소개시켜주십시오. 개처럼 일해서 어떻게든 갚아드릴 테니까.”
박우영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박우영을 보며, 안재현이 손가락을 딱딱! 두 번 튕겼다.
“저기 제가 조금 바빠서 그럽니다만, 빌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재현, 그는 박우영이 자신을 같잖게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생 그런 시선 속에서 살았으니까. 그게 기분 좋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안재현은 지금 그런 시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을 뭐로 보든 지금 안재현에게는 의미가 없다.
때문에 안재현은 조금의 가식도 없이, 정말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 그대로를 얼굴에 드러내며 말했다.
박우영이 그런 안재현을 보며 자세를 고쳤다.
“빌려드릴 순 있습니다. 대신 원룸 보증금도 담보로 잡아주셔야 합니다.”
“예, 좋습니다. 그럼 빨리 끝냅시다.”
말과 함께 안재현은 박우영이 건네주기도 전에, 그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계약서를 잡더니, 자기 것처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설명도 듣지 않은 채 본인이 빈 칸에 액수를 집어넣고, 이름을 집어넣었다. 가져온 인감도장도 본인이 찍었다.
그리고는 그 계약서를 거꾸로 박우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도장 찍으시죠?”
< 2화. 혼자서 잘하는 직업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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