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솔플의 제왕-2화 (2/192)

< 1화. 영웅도살자 (1). >

1.

울브드리의 숲.

250레벨 이상의 유저들만이 버틸 수 있는 최고 레벨의 사냥터 중 한 곳이다. 무시무시한 외뿔늑대들이 등장하는 숲으로, 특히 외뿔늑대 보스 몬스터인 스카페이스는 무려 355레벨이라는 어마어마한 몬스터 레벨을 가진 놈으로, 현재 발견된 몬스터 중 9위에 해당

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워로드에서도 최상위권 레벨의 유저들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었고, 때문에 언제나 한적했다. 이곳을 사냥터로 누릴 수 있는 자는 워로드를 즐기는 천만 유저 중에서도 절대 채 5천 명을 넘지 못했으니까.

그런 그곳에 북적거림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제법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적게 잡아도 마흔이 넘는 숫자의 인원이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처럼 높게 솟아오른 울브드리 숲의 나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몇몇은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누가 봐도 편해 보이는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을 떠올리게 만드는 카모플라쥬 패턴의 등산복은 주변 색과 퍽 어울렸다. 여기에 개성 없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누가 보더라도 주말에 조금 본격적으로 등산하기 위해 산에 나온 청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 그런 청년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노란색과 청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군간부들이 입을 듯한 잘빠진 코트를 입고 있었고, 여성들은 산행이나 숲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무릎 위까지만 내려오는 스커

트가 달린 제복을 입고 있었다. 패션으로 보면 그들이 괜찮았지만, 이 험악한 무대에 어울리는 제복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괴팍한 무대.

그 괴팍한 무대 속에서 등산복을 입은 사내, 안재현이 소리쳤다.

“동수 형!”

안재현의 외침에 그의 정면에 서 있던 사내가 꾹 다문 입을 다시 한 번 더 꽉 다물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그를 향해 안재현이 재차 말을 던졌다.

“미안하다.”

결국 사내가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사과의 말을 뱉었다. 안재현은 그런 사내의 사과, 김동수의 사과 앞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 가득한 한탄을 내뱉었다.

“와, 진짜 미치겠네.”

이 순간 안재현의 머릿속에는 4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2036년, 춘추전국시대였던 가상현실게임 시장을 워로드가 평정하고 1년이 지났을 무렵, 게임으로 돈 좀 벌겠다고, 유명세 좀 떨치겠다고 하는 이들은 죄다 워로드로 넘어왔다. 워로드가 가장 돈이 되는 게임이 됐으니까.

그때 김동수를 만났다. 이미 다른 가상현실게임에서 제법 명성을 떨쳤던 그는 워로드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자신과 함께 게임에 인생을 바칠 동료들을 모으고 있었고, 안재현은 그와 손을 잡았다.

질기디 질긴 인연이었다. 무려 4년 동안 김동수와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고, 보스 레이드를 하고, 경쟁자들과 목숨을 건 결투를 벌였으니, 정말 힘줄보다 더 질긴 인연이었다.

그냥 질긴 정도가 아니라 끈끈하기까지 했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느라 바친 목숨이 세 자릿수에 근접했다. 고작 48시간 게임 이용 불가와 소유한 아이템 랜덤 드롭이란 페널티가 전부인 게임 속 죽음이라지만, 서로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목숨을 줄 수 있었

다.

안재현에게 김동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친형제보다, 가족보다 더 친한 자.

그런 그가 다섯 개의 번개 문양이 소용돌이처럼 뭉쳐, 폭풍 형태를 하고 있는 엠블렘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우레사냥꾼 길드.

김동수와 안재현,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부와 명예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넘어야 하는 라이벌이었다. 최근까지, 무려 4개월 내내 충돌했던 철천지 원수들이기도 했다.

“동수 형, 서프라이즈 파티를 할 땐 하더라도 최소한 그 번개 맞은 미치광이 새끼들 코스프레는 하지 맙시다.”

번개 맞은 미치광이.

아마 우레사냥꾼 길드를 그리 부르는 건 안재현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전 세계 1천만 명이 직접 게임 속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1억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천만 명의 플레이를 보고 즐기는 게임,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워로드를 대표하는 30대 길드 중 한 곳을 누구집 앞마당 개취급 할 수 있는 자가 많을 리 없다.

“씨팔.”

물론 안재현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코스프레? 서프라이즈 파티?

“분위기 보니 말장난도 못 치겠네.”

안재현은 머리가 썩었다고 해도 될 만큼 좋지 못한 놈이지만,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까지 썩은 인간은 아니다.

“난 또 갑자기 울브드리 숲으로 오라기에 황금뿔늑대라도 발견한 줄 알고 먹던 치킨도 버리고 잽싸게 게임에 접속했는데, 함정이었을 줄이야. 더군다나 배신을 해서 붙은 게 우레사냥꾼? 30대 길드에 속한 29개 길드 놔두고 왜 하필 그 새끼들을 고른 겁니까?”

후우!

말 도중에 터지려는 가슴 속의 울분을 토해낸 안재현이 말을 마저 마무리했다.

“일단 이유부터 들어봅시다.”

“미안하다.”

“얼마를 받았습니까? 얼마를 받았기에 4년 동안 동고동락한 동료들 배때기에 칼을 쑤실 각오를 다지신 겁니까?”

“동료들을 배신하진 않았다.”

김동수의 말에 안재현이 과장된 몸짓으로, 펼친 손을 귓가에 가져간 채,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예? 동료들을 배신하지 않으셨다고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국립국어원에서 배신이란 단어의 의미가 바뀐 게 아니라면, 환청을 들었다는 건데, 버그로 신고해야겠네.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환청이라니.”

“하회탈 길드는 이 시간부로 우레사냥꾼 길드 산하 조직이 됐다.”

“허허허.”

안재현의 입에서 본인이 의도치 않은 헛웃음이 나왔다. 평생 살면서 많이 웃었지만, 안재현은 설마 자신의 입에서 이런 웃음이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런 안재현의 헛웃음에.

“재현아 미안하다. 너만 죽으면 된다.”

김동수가 비수를 꽂았다. 비수에 당한 웃음이 사그라졌다. 안재현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안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눈빛이었다. 게임 속임에도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그 무심하면서도 섬뜩한 눈빛이 좌중을 휩쓸었다. 몇몇 이들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굵직한 나무기둥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처럼 훤칠한 키에 훌륭한 몸매, 그 몸매를 드러내는 몸에 착 달라붙는 치마와 반팔 셔츠를 입은 여인이었다. 긴 생머리를 말꼬리처럼 질끈 묶었으며, 그 모습에서는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멋진 미인이었다.

그 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만연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길 정도로, 짙은 미소였다.

그 미소를 짓는 여인은 안재현을 바라보며.

“안재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빠득!

안재현이 이를 갈았다.

‘채설연.’

채설연.

그녀는 안재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안재현은 상상도 못할 인생을 살아갈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가, 그 재벌가의 상속자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언제나 최고만을 누렸다. 그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모델이었고, 수완 좋은 사업가이기도 했으며, 훗날 한국 재계를 이끌어갈 재력가 후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워로드를 시작했을 때, 세상은 그 사실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이 재능 넘치고, 배경 든든한 여인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그것을 궁금해 했다.

그런 세상의 관심에 부응하듯,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되었고, 한국 그리고 아시아 지역 내의 최고 실력자들을 모아 우레사냥꾼이란 길드를 만들어, 우레사냥꾼을 30대 길드 중 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질주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아시아 지역 내에서 그녀의 적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단언해도, 그건 오만이나 허세가 아닌 담담한 진실 고백이었다.

안재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안재현.”

“귀 멀쩡히 뚫려있는데 사람 이름 두 번이나 부르지 말지? 그리고 그쪽하고 나하고 실명 부를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닐 텐데, 그때처럼 목 잘리고, 잘린 머리로 족구하는 꼴 보기 싫으면 그 입 다물어.”

“안재현. 안재현, 안재현.”

빌어먹을 년!

안재현은 그리 터져나오려던 소리를 꿀꺽 삼켰다. 그런 안재현의 모습에 채설연이 방긋 웃었다.

“어때? 이 상황? 정말 멋지지 않아?”

4개월 전, 하회탈 길드와 우레사냥꾼 길드가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던 하회탈 길드는 설립 4년 차에 슈퍼 루키에서 이제는 30대 길드에 도전할 만한 도전자가 됐고, 그들의 첫 번째 챔피언 타이틀 매치 상대는 우레사냥꾼 길드였다.

작은 충돌이 몇 번 있었고, 이후 곧바로 두 길드는 길드를 대표할 최고의 실력자들이 나서서 정면승부를 했다.

채설연…… 아니, 우레여왕 시르와 안재현의 또 다른 이름인 영웅도살자 히르칸이 붙었다.

당시 둘의 대결을 앞두고 생중계 방송 관람 티켓, 라이브 티켓이 60만 장이나 팔렸다. 티켓 값이 1만 원이었음에도,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팔렸다. 그 정도로 세간의 관심은 어마어마했다.

갑론을박도 펼쳐졌다.

워로드 베타 테스트 당시부터 게임을 시작했고, 워로드 정식 서비스 시작 때부터 언제나 랭킹 50위 안에 이름을 올리던 우레여왕과 남들보다 1년이나 늦게 게임을 시작했으면서, 그렇다고 딱히 현실에서 돈이 많아 게임에 돈을 때려 박지도 못하는 주제에 게임 시

작 3년차에 이미 워로드 랭킹 100위 내에 이름을 올린 랭커들 서른세 명을 썰어버린 영웅도살자의 매치업은 호사가들마저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둘의 대결 결과는 세간의 기대나 예상과는 다르게 일방적인 승부였다.

안재현의 압승.

하룻강아지와 범을 서로 붙인 것보다 더 압도적인 수준으로, 안재현이 채설연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매치업을 기점으로 하회탈 길드는 30대 길드의 자리에 도전하는 무수히 많은 도전자 중 하나가 아니라, 이미 언제든 30대 길드 중 한 곳이 틈이 보이면 그 자리를 차지할 그들의 대항마가 됐다.

솔직히 말이 대항마지, 이미 승기는 하회탈 길드 것이었다. 워로드가 매년 워로드 게임 내에서의 활약상과 업적 등을 평가에 순위대로 배분하는 30개의 방송채널 중 하나를 하회탈 길드가 차지하리란 사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굵직한 스폰서들이

알게 모르게 하회탈 길드에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고, 반대로 우레사냥꾼 길드를 후원하던 스폰서들이 우레사냥꾼 길드를 상대하는 행동에 쌀쌀함이 깃들었다.

‘2개월 후면 라이브 채널이 우리께 되는데!’

즉, 안재현과 김동수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부와 명예가 손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입만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감나무의 감이 익어 입안으로 쏙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김동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을 배신할 걸까?

배신을 해서 얻는 게 대체 뭔데?

하나는 확실했다.

채설연, 그녀가 안재현을 엿 먹이기 위해서, 안재현만을 엿 먹이기 위해서 모든 걸 꾸몄다는 것. 어떤 음모를 꾸몄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안재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노려만 보지 말고 대답해 봐. 이 상황, 어때?”

“누군가에게 목이 잘렸는데, 내 목을 자른 인간이 내 머리통을 가지고 족구를 하는 느낌하고 비슷한 느낌인 것 같군. 아마 그쪽이 내 기분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도 아직 농담이 나오네? 역시 대단해.”

채설연이 표정을 바꿨다. 입가의 미소를 지웠고, 근엄한 표정으로, 우레사냥꾼 길드의 길드 마스터다운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마지막 제안이야. 내 발밑에 엎드려서, 평생 복종을 맹세해. 그럼 너도 받아주지.”

그녀의 마지막 통보.

기어코 채설연, 그녀는 자신을 가차 없이 뭉갠 안재현을 노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안재현은 짧게 고민했다.

여기서 채설연에게 엿이나 잡수셔, 그리 말한다면, 그는 이제부터 우레사냥꾼 길드로부터 걸리는 족족, PK로 살해당할 것이다. 게임 이용에 막대한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심지어 그를 지켜줘야 하는 하회탈 길드가 앞장서서 안재현을 해치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고개를 숙이는 게 맞다.

굴욕?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걸 잃는 것보다는 굴욕을 참는 게 나을 터. 예전의 안재현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재주 없고, 비루한 청년 안재현이라면 자존심 따윈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끝내주는 미녀 상사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 미녀 앞에서 없는 꼬리도 흔들고, 미녀 상사의 발까지 핥았겠지. 서비스로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퍼포먼스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지금 모든 걸 잃은 안재현에게 뭐가 남았단 말인가? 남은 건 평생 쓰레기취급 받은 자존심 하나밖에 없다.

개에게 줘도, 개조차 외면할 자존심이다.

그렇게 저렴하기 그지없는 풋내 나는 자존심뿐인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자아 발견을 할 줄은 몰랐는데.’

못주겠다.

안재현,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란 놈을 이름도 모를 동네 똥개한테는 줘도, 채설연에게 주긴 싫었다.

“대답은?”

채설연의 거듭된 물음에 안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현아!”

김동수가 안재현의 대답을 재촉했다. 안재현은 그 재촉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의 다이얼을 움직였다.

“아!”

“젠장, 저 미친 새끼가!”

“다들 전투 준비!”

그 모습에 모두가 기겁하며 각자 손목에 차고 있는 다이얼을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이얼을 원하는 숫자에 맞춘 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슬롯 온!”

외침을 뱉자마자 시계에서 튀어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외침을 뱉은 이들의 몸을 휘감았다. 끈적끈적한 액체는 곧바로 방어구 아이템이 됐다. 누군가는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었고, 누군가는 나풀거리는 천옷을 입었고, 누군가는 성스러운 성복(

안재현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옷을 입었다. 가죽옷을 입은 안재현이 허리춤에 만들어진 하회탈을 썼다.

하회탈 사이로 보이는 안재현의 입이 그제야 대답을 했다.

“오늘 이 날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마.”

영웅도살자 히르칸!

그가 자신을 배신한 하회탈 길드와 우레사냥꾼 길드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 1화. 영웅도살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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