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75화 (174/174)

175화

마왕을……. 젠장!

상대해야 한다.

최대한 걸삼번에게 집중하려고 힘을 아껴 뒀는데.

어쩔 수 없다.

걸삼번의 뒤편에 있던 마왕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다.

앞으로, 위로, 허공으로 그렇게 떠 나에게 다가온다.

조금의 두려움도, 경계심 따위도 없다.

머리에 기다란 뿔이 두 개 달리고.

온몸이 검붉으며.

활활 불이 타오르는 모습.

휴우.

식겁하긴 했다.

그래도 뭐.

방법이 없다.

마왕부터 죽이고, 걸삼번을… 죽인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마왕을 향해.

나는 전력을 끄집어내 몸을 날려……. 엇?

"형!"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하늘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일흔여덟 마리의……. 아!

드래곤.

드래곤이다.

골드 드래곤 한 마리와 일흔일곱 마리의 레드 드래곤이.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골디야!"

"형! 늦은 거 아니지?"

"여긴 어떻게……?"

"자연이가 알려 줬어."

"그랬구나."

"형! 저 새끼 마왕 맞아?"

"응, 마왕이야. 그런데 골디야."

"응, 형. 우리가 상대할게. 형은 갓 오브 언데드를 상대해."

난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

수천 마리의 드래곤이 상대해도 역부족인 게 마왕이다.

내가, 내가 해야 한다.

그런데…….

"형!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저건 원래의 마왕이 아니야. 껍데기뿐이라고. 정신이 나간, 그냥 껍데기만 데리고 온 불사괴 마왕이야. 충분해."

골디의 말을 듣고 바라본 마왕.

아!

절대 팔찌를 통해 차원 이동 중이었던 놈을 보기만 했지, 제대로 된 완성체를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마왕치고는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하겠다.

골디도 골디지만, 싸움만큼은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잘한다는 레드 드래곤만 일흔일곱 마리다.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레드 드래곤들은 왜 온 거지?

저기 저, 내 우룡검의 뼈 주인인 오니푸네 녀석은 알겠는데.

다른 레드 드래곤은 전혀 모르는 드래곤들인데.

"형!"

"골디야, 레드 드래곤들은 어떻게 데리고 온 거야?"

"그게… 큭큭, 역시 예상대로군. 좀비 천지야. 큭큭."

"설마……?"

"응, 이 미친 레드 드래곤들이, 인간 맛을 못 본 지 1,000년이 넘어 미치겠다며. 내가 부탁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나한테 사정해서 데리고 와 준 거야. 하하."

"와!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형! 안 되겠다. 레드 드래곤들 침 흘린다. 우리가 후딱 마왕 해치우고, 좀비랑 스켈레톤 쓸어 버릴 테니까. 형은 알지?"

"그래. 고마워, 골디야."

그때.

오니푸네가 좀비와 스켈레톤을 보며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인간! 내 갈비뼈는 잘 들고 다니겠지?"

"고, 고마워, 오니푸네. 덕분에 잘 쓰고 있어."

"위대한 레드 드래곤의 갈비뼈로 검을 만들었으면, 어울리는 곳에 써라."

"그럴 생각이야."

"아! 배고파 못 참겠다. 가라, 인간! 마왕은 우리가 해치운다."

곧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일흔여덟 마리의 드래곤들이 일시에.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드래곤 브레스를 일시에 뿜어 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왕이 괴성을 지르며 맞서 보았지만.

골디의 말이 맞았다.

도토리국 불의 화산에서 봤던 마왕보다 더 약한.

그 힘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껍데기 마왕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왕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고.

"와아아! 인간이다! 좀비다!"

"먹어! 먹어 치우자고!"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지옥과 같은 전장에 일흔여덟 마리의 드래곤이 난입.

적들을 도륙……. 아니!

그냥 마구잡이로 먹어 버리기 시작했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다.

이건, 만찬이다.

드래곤들의 난입에.

오죽했으면 낭만개 아저씨와 교주까지 넋을 잃고 한발 뒤로 물러나 그 광경을 구경하겠는가.

모두가, 그렇게, 그냥.

하하하하하!

드래곤들의 만찬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나와.

걸삼번.

둘.

뿐이다.

놈이 하늘 위로 날았다.

그냥 떠 있다.

나를 보며.

걸삼번이 웃는다.

원래 순박하고, 좀 멍하고, 바보 같았는데.

오늘은 녀석의 웃음이, 슬퍼 보인다.

"표정이 좋구나, 걸이번. 도마뱀 몇 마리가 왔다고, 아주 의기양양해 보여. 큭큭큭."

"넌 안 좋아 보여, 걸삼번."

"내가? 내가 왜? 저깟 도마뱀 몇 마리가 왔다고, 내가… 하하! 내가! 곧 우주의 절대신이 될 내가! 무너질 것 같아?"

"걸삼번… 아니, 백둔. 둔아!"

"‘형’ 자가 빠졌다."

"백둔, 지금이라도… 멈춰. 용서를 구해. 그러면, 사람들이 용서해 줄지도 몰라."

"갈! 네가… 감히! 신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신인 나더러 인간 따위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백둔, 그만해. 다 끝났어."

놈이.

웃는다.

분노의 웃음이고.

마지막 웃음이다.

더는.

대화가.

없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놈이 귀계의 힘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불사괴들을 잡아먹던 드래곤 일족마저 움찔할 무시무시한 힘이 그에게 몰렸고,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

놈은 그 힘을.

온전히 나에게 쏟아부었다.

나는.

우룡검을 잡았고.

뽑았고.

천마가 그랬듯.

나에게 보여 줬듯.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걸삼번은.

죽었고.

나는, 검신이 되었다.

* * *

귀계대전(鬼界大戰) 후 5년.

"여보! 우리 오늘은 어디로 가?"

"낭군 여보! 난 도토리국 가고 싶어. 거기 가서 보석 구경할래."

"나는 소인국 갈래. 개미 타고 싶어."

"음, 나는 자연국. 거기 너무 좋아. 조용하고 아름답고. 난 자연국 갈래."

"칵뉴족도 전사들도 보고 싶다. 거기 남자들……. 아잉! 호호호."

"꺄르르르르."

"언니들,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 호호호호."

좋단다.

삼선녀는 모두 내 아내가 되었다.

단문령이 아들 하나 딸 둘.

연주언이 딸 하나 아들 하나.

담초희가 쌍둥이를 낳았다.

모두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내 아내들은 여전히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제.

밝힐 때가 됐다.

"부인들."

"응? 왜?"

"할 말이 있소."

"있소?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어험. 진지하게 들으시오."

"……?"

"실은… 부인들이 아직 가 보지 못한… 차원이 있소."

"어머! 정말? 거기가 어딘데?"

"가 보시면… 아오. 오늘은 그곳을 여행할 것이오."

나는 나의 세 아내를 데리고……. 아! 떨린다.

미인국으로 차원 이동을 했다.

* * *

"성좌님!"

"성좌님!"

"오셨습니까, 성좌님!"

"아빠아아아아!"

"와! 아빠 왔다!"

"아빠!"

우리가 미인국에 도착하자마자.

수천 명의 아내들과 1,000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이 내 품에 안겼고.

그 모습을…….

단문령, 연주언, 담초희가 떨리는 눈으로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눈치는 엿 바꿔 먹은 구넬샤찌국의 여왕 알리사 이바노바가.

나의 세 아내에게.

"어, 그러니까. 잠시만요. 아! 맞네요. 단문령 님이라고 하셨죠?"

"네."

"5673번입니다."

"네? 그게 뭔데요?"

"우리 나태한 성좌님의 5673번째 아내라는 뜻이지요."

여왕 알리사 이보노바의 말에.

단문령이.

또 연주언과 담초희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를 보았는데.

아! 이건 말이다.

살기다.

마왕이고 갓 오브 언데드고 뭐고.

그냥 모두 불에 태워 죽일 것만 같은 무지막지한 살기가, 순간 그녀들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뭐? 내가 5673번? 5673번째 부인이었다고?"

"언니! 나는 5674번째 부인이래. 아아아앙!"

"난… 나는 그럼 5675번째 부인……. 야! 나태한!"

"나태한! 너 오늘 좀 맞자!"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자!"

아! 미인국에는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젠장!

차원 이동으로 절대 검신이 된 나는, 그날 정말 많이 맞았다.

걸이번 여행기도 그렇게 끝을 맺어야 했다.

【 외전 】

"2082년 8월 22일 14시 18분. 미션 컴플리트. 시스템을 해제하겠습니다."

피우우우우우우웅.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캡슐이 열렸다.

캡슐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운 나.

단문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AZ50?"

"네, 나태한 님. AZ50입니다. 게임 속 마지막 순간, 나태한 님의 시선이 단문령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연주언이나 담초희, 혹은 다른 인물의 모습으로 변경하겠습니다. 시간은 대략 1분 52초 소요 예정입니다."

"아니야, 됐어. 그 모습 너무 좋아. 한번 안아 볼까?"

나는 단문령의 모습을 한 AZ50에게, 능글맞게 웃으며 슬쩍 다가가 안으려고 하였다.

역시나 AZ50은 그런 나를 거부하지 않……. 응?

"지금 접객실에 신조 님이 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조? 그 삼류 작가 신조? 그 녀석은 또 왜 왔는데?"

"드래곤 헌터 게임을 조금 전 마치고. 나태한 님의 걸이번 여행기가 끝날 시간에 맞춰, 게임 정보를 교환하고자 3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뭐, 어쩔 수 없지. 우리 조금 전에 하려던 거는 신조 녀석이랑 얘기 끝나고 이따가 다시 하자고. 알았지, AZ50?"

"네, 나태한 님."

"단문령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인조인간 AZ50이다.

207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AI가 세계를 정복했다.

150억 명을 훌쩍 뛰어넘었던 인류는, 선택받은 자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인간의 생존은, 신이 아닌 AI가 결정하였다.

현재 인류는 20,000명의 인구수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반란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인간이 AI에게 정복당하다니.

화가 났고, 사람들의 죽음에 분노하였다.

그 왜 있지 않은가?

터미… 어쩌고 하는 영화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두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

100억 명이 넘는 인류 모두가, 미소를 지은 채 끝났다.

그리고 남은 우리도.

행복하다.

무엇보다, 죽어 가던 지구가 되살아나고 있다.

AI가 인류에게 말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그리하였다고.

지구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AI의 그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나와 살아남은 인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이를 인정해야 했다.

인간들에 의해 파괴된 자연은, AI가 계속 복구 중이다.

플라스틱, 콘크리트, 화학물질, 원자로, 그 밖의 모든 인류의 쓰레기들.

AI가 로봇을 만들고, 그 로봇이 지구 곳곳, 저 깊은 심해까지 들어가 끄집어내 처음의 자연 상태 그대로로 되돌려 놓고 있는 중이다.

지구 각지에 살아남은 인간들은, AI가 만들어 준 돔 형태의 집에서 각자의 삶을 보내고 있다.

삼류 작가였던 신조 녀석이 우리 집을 찾아온 것처럼, 왕래와 모든 것이 자유롭다.

AI는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다.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AI가 완벽하게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느낌이 그렇지 않다.

나는, 그리고 살아남은 인류는.

AI가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인간들이 꿈꾸던 천국?

그런 삶을 살고 있다.

AI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런 삶을 588년 동안 더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완벽한 환경과 완벽한 영양분 섭취.

식물로 만든 고기가, 동물을 죽여 만든 고기보다 맛있다.

안전하고.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하다.

아!

중요한 사실을 깜빡할 뻔했군.

AI가 생존할 인류를 선택하는 기준.

단 한 가지였다.

분리수거 잘하는 인간만을 선택했다고.

"어이! 삼류 작가! 웬일이야?"

"어땠어? 걸이번 여행기 말이야. 재밌었어?"

"오! 진짜 재밌더라. 끝내줬어. 너도 꼭 해 봐."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해 보지도 않고 그럴 줄 알긴 뭘 그럴 줄 알아?"

"비밀 얘기 하나 해 줄까?"

"뭔 비밀?"

"그 게임 말이야. 걸이번 여행기. 사실은 내가 예전 쓴 작품이다. AI에게 말해서 게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지."

"진짜?"

"응. 큭큭큭."

"와! 진짜 재밌던데. 당연히 그 작품, 대박 났겠지?"

"당연히 대박 났었지. 그 작품이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독자님들이 좋아요 마구 눌러 주시고, 응원 댓글도 엄청나게 달아 주시고. 돈도 무지무지 많이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여자 친구도 처음으로 사귀어 봤……."

"신조야, 울어?"

"……."

"어이, 신조 작가님. 우냐고?"

"안 울어!"

"우는 것 같은데?"

"안 운다고! 그러는 나태한 너는 왜 우는데?"

"나? 나도 안 우는데?"

나와 신조는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걸이번 여행기… 대박 난 거 맞지, 신조야?"

"응, 대박… 대박 났어."

"울지 마."

"안 운다니까! 너야말로 왜 울고 지랄이야!"

"나도… 나도 안 울어, 새끼야!"

그때.

AZ50가 나와 신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신조 작가님, 나태한 님, 지금 두 분 다 울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이번 여행기』와 함께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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