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번쩍!
뭐, 뭐지?
번쩍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밝다.
세상이 밝고, 따스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마치,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니, 극락?
내가 죽었나?
아니다.
느낌이, 무릉도원도 극락도 아니다.
여긴… 아……!
여긴…….
차원 이동이다.
행운석도 없는데 어떻게 차원 이동이 가능하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은.
아!
아!
설마… 그곳이다.
아름다운 이곳을 걸었다.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꽃들이 있고, 바람이 분다.
그리고 저기 아름다운 호수에.
한 사람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한 노인이 여유롭게 낚시를 하고 있다.
평범한 누더기 옷을 입고.
누더기 옷?
깨끗한데.
심지어 무명 누더기 옷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난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비롭다.
난,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그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왔느냐? 앉아라."
나를 아나?
난 대꾸하지 않고.
아니,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용히, 또 조심스레 아무것도 낚이지 않는 낚싯대를 가만히 보고 있는 노인 곁에 앉았다.
"고생 많았다."
그냥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뭔가 울컥했다.
창피해서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여전히 낚싯대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인자하고 여유롭고 따스한 눈빛을 가진 노인이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또 울컥.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대꾸를 하면,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만 끄덕끄덕.
그가 그런 나를 보며, ‘괜찮다. 다 괜찮으니라.’라고 눈빛으로 말해 주었다.
"9대 방주 행운개니라."
안다.
알고 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차원 이동은…….
선계(仙界)다.
행운개 방주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다시 낚싯대로 향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모양이구나. 이만 일어나자."
아무런 대화도 없이 정말 한참이 지나서야 나와 행운개 방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걸었다.
나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
젊고 잘생긴, 신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정말 너무 젊고 잘생긴 한 사나이가 그곳에 있었다.
"네가 태한이구나? 행운개가 말하던."
웃는 모습마저 멋있다.
같은 남자인 내가 다 빠져들 정도로 초월적 멋짐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난 그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그의 시원하고 멋진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일단 앉자.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행운개 방주는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젊고 잘생긴 신선과 함께 그곳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조심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웃는다.
"곽청이라고 한다. 300년 전 인세에서는 그렇게 불렸다."
곽청?
알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분명 들어봤는데.
내가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자, 그가 다시금 멋들어진 미소와 함께 나에게 말했다.
"『오늘도 램프를 주웠다』라는 무림 영웅전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
음… 이거.
음… 그게 말이다.
심각한 상황인데, 그게… 아… 좀…….
그러니까 이 양반, 아니 이 젊고 잘생긴 신선 말이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천마신교를 가기 전에 우리 개방 방주와 대화를 나눌 때 말이다.
그때 방주가 뜬금없이 무림 영웅전 홍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추천하는 책이라며 『오늘도 램프를 주웠다』라는 무림 영웅전을 강력히 홍보했었……. 뭐, 그랬다.
그 무림 영웅전의 주인공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읽어 봤겠지? 엄청 유명할 텐데. 하하."
잘생기고, 멋지고, 자체적으로 빛이 난다.
그런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직 못 읽어 봤습니다."
"아! 그, 그 유명한 책을?"
"신선님, 죄송하지만 지금 분위기에 홍보는 좀……."
"아! 그래. 하하. 미안하구나. 하하하."
신선 곽청은 뻘쭘하게 웃으며 시선을 건너편으로 향했다.
나와 나란히 앉아, 우리는 저 멀리 건너편 산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던 지니라는 요정이 있었단다."
"네."
"신의 분노로 벌을 받아 램프에 갇혔고. 지니는 그 램프에 갇혀 계속 인간들의 소원을 수만 년이나 들어주어야 했지."
"네."
"이젠 자유를 얻었다. 램프에 갇히지도 않았고, 자유로운 몸이 됐으며,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요정이 됐단다. 아! 얼마 전에 승진해서 이젠 녀석도 요정이 아닌 신이 됐다고 하더라. 하하."
"그렇군요."
"지니가 만든 것이다."
"무얼 말씀이십니까?"
신선 곽청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설, 설마. 행운석을 지니가 만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 신께서 내린 벌이었지만, 지니는 그 벌을 받으며 인간과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뭐, 내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지. 하하. 아무튼 지니는 억겁의 세월 동안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인간의 많은 면모를 보게 되었지."
"선과 악을 모두 보았겠군요."
신선 곽청이 다시 고개를 두 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니는 인간을 사랑했다. 신의 벌이 끝나 램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는 인간의 소원을 계속해서 들어주고 싶었지. 그런데 그게 나쁜 놈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지 않겠느냐?"
"희생……."
"맞다. 지니는 행운석을 통해 인간의 소원을 계속 들어주려고 했고. 착한 인간만이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희생’이라는 제약을 걸어 둔 것이니라."
"아……."
행운석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신선 곽청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무공에 관련한 이야기는 없었다.
삶에 관한 이야기였고, 지니와 인간 그리고 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행운석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갔어도, 그 소유가 계속 나에게 종속된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대화가 끝나고.
나는 다시 행운개를 따라 걸었다.
* * *
"지금 소개해 줄 자는… 음, 신선은 아니다."
"신선 방주님."
"그냥 방주라고 불러라."
"네, 방주님. 이곳이 선계 아닌가요?"
"맞다."
"선계가 아닌데 신선이 아닌 존재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 너부터 신선은 아니지 않느냐? 허허."
"그, 그렇기는 한데."
"딱 둘이다. 너와 그자. 이곳 선계에서 신선이 아닌 존재 말이다."
"아… 네. 그럼… 지금 만나려는 분은 누구인가요?"
"글쎄다. 그자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우화등선을 한 게 아니니 신선도 아니고. 신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애초에 인간일 때부터 죽은 게 아니지만, 그자를 또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고. 허허. 신선인 내가 이렇게 헷갈릴 지경인데. 그냥 그런 자가 있다고만 생각해라. 규정을 내릴 수 없는 존재이니라."
"아, 네.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네, 방주님."
"이건 행운석 때문이 아니다. 네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석이 작동하였기 때문이지만, 그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정말 너의 천운이니라."
도대체 누구이기에 신선인 행운개 방주가 이렇게까지 말을 할까?
궁금했다.
"그렇게 궁금한 얼굴을 할 필요 없다. 곧 만날 것이고, 만나 보면 안다. 우리 신선들도 보기 힘든 자이니, 그저 감사히 생각하여라. 말은 이미 내가 다 해 놨으니 말이다."
"네, 방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눈에 담고, 머리로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여라. 꼭, 명심하여야 한다."
무슨 말일까?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난 그렇게 의문을 품고 방주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사나이.
인간이다.
하지만 행운개의 말처럼 인간이 아닌 인간이다.
그래, 맞다.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그곳에서 천마를 만나게 되었다.
* * *
하아!
내가 만난 인간.
인간이 맞긴 맞나?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바로.
천마다.
"어디부터 갈래?"
그가 나를 빤히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어디부터 가고 싶냐고."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다녀온 차원들. 다른 시공간 말이야. 행운개하고 곽청에게 말 다 들었어."
"아! 그게… 그게 가능한가요?"
그는 대꾸 대신 방긋 미소를 짓기만 하였다.
가능하다는, 천마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미소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간 참아 왔던 눈물이, 설움이 일시에 터져 버린 것이다.
"엉엉. 엉엉엉. 꼭… 엉엉. 꼭 보고 싶었어요. 엉엉. 그들을 꼭… 엉엉,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천마가 내 등을 두들겨 주었다.
괜찮다고.
이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그렇게 서럽게 우는 내 등을 한참이나 두들겨 주었다.
* * *
정말 평생 울 것을 다 운 후.
"소인국에 가고 싶어요."
천마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아야 한다."
"네."
그는 일부러 천천히.
내가 잘 볼 수 있게 천천히 또 세심하게 움직였다.
팔을 허공으로 뻗었고.
검지와 중지를 쭉 뻗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으로 허공에 하나의 선을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으로……. 아!
공간의 문이.
시공간의 문이.
그냥 그렇게 열렸다.
마계의 신이라는 마왕조차 절대 팔찌를 통해서야 가능한 차원 이동이.
이제는 귀계의 신이 됐다는 걸삼번조차 아직 불가능한 그 일을.
천마는.
정말 아주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시공간의 문을 열었다.
"가자, 태한아."
"네."
* * *
뼈에 사무쳤을 만큼 그리웠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크고 거대한 그곳.
오로지 인간만이 개미만큼 작은 그곳.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천마를 뒤로하고 곧바로 달렸다.
개미굴을 찾아서.
우리 부락을 찾아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비실대다 쓰러져!"
"어? 진짜네? 비실대다 쓰러져!"
"어떻게 된 거야, 비실대다 쓰러져?"
"이봐! 다들 와 봐! 비실대다 쓰러져가 왔어! 녀석이 살아 있다고!"
개미굴의 보수 작업을 한창 하던 사람들.
한두 명이 손을 멈추는가 싶더니.
수백,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
또 수천, 수만 마리에 달하는 개미들.
모두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폭포수처럼 터졌고.
"동생! 비실대다 쓰러져 동생!"
살아… 있었다.
바위를 부숴라 형님이!
살아 있다.
"형님!"
나는 곧장 그를 향해 달렸고.
그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려 나에게로 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또 엉엉 울고.
그 모습에 모든 부족 사람들이 또 다 함께 엉엉 울고.
"바위를 부숴라 형님! 엉엉."
"비실대다 쓰러져 동생! 엉엉."
"무지개 끝자락 형수님하고 연못의 흰 꽃과 검은 돌 던져는요?"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삼촌! 비실대 삼촌! 와아아아아!"
"삼촌! 살아 있었어! 삼촌!"
두 조카 녀석들까지 눈물을 뿌리며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들 뒤로 역시나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무지개 끝자락 형수까지 함께하였다.
비 사이로 막 가도 멀쩡하였고.
깐 데 또 까는 몇 군데 상처를 입긴 하였지만, 큰 부상은 아니고.
씨앗 껍질 까 족장과 원로들도.
친절한 개미 등에 올라타도.
또 불타는 머리까지도.
모두가.
부족 사람들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긴 하였으나, 모두 살아 있었다.
그리고 또.
"오빠! 아아앙!"
"오빠! 엉엉엉."
얇은 발목하고 개미허리까지?
둘이 여긴 어떻게?
모르겠다.
일단 두 사람까지.
난 모두를 그렇게 꽉 끌어안고, 평생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강하고 뜨겁게 끌어안고 한참을 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