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래서 말이야. 하하. 네가 대자연단을 준 덕분에, 큭큭큭. 보답으로 몇 명 더 살려 놨다. 고맙지?"
"누굴……?"
그때였다.
놈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음… 오는군."
누가 온다는 거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놈이 나를 본다.
굳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또 웃는다.
"살려 줄까? 아니면 죽일까?"
뭔 소리야?
누굴 살리고, 누굴 죽인다는… 설마?
"한 명도 아니고 둘인데? 나에게는 꽤 성가신 놈들이 둘씩이나 이곳으로 빠르게 오고 있어. 어때? 죽여? 말아?"
자연에게 물었지만 답이 없다.
내공은 고갈되고 내상이 심해 기감으로도 파악할 수 없다.
누가 온다는……. 아!
낭만개 아저씨와 무치개 장로일 테다.
살려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둘은 살려야 한다.
"살려… 줘."
부탁했다.
악마 놈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놈은 나를 빤히 보며 웃을 뿐.
대꾸하지 않는다.
"부탁이야. 살려 줘."
놈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이번엔 놈이 대꾸했다.
"빠졌어. ‘요’ 자가. 내가 너보다 다섯 살 더 많은 거 잊지 마."
"살려… 주세…요, 백둔… 형님."
나를 보는 놈의 얼굴이.
실룩실룩.
그러더니…….
"풉. 푸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숭산이 떠나갈 것 같은 대소를 터뜨린다.
"아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래, 진즉 그렇게 불렀어야지. 하하하하하!"
내 굴욕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괜찮다.
이런 굴욕 따위야.
낭만개 아저씨와 무치개 장로를 살릴 수 있다면, 발가벗고 개처럼 짖을 수도 있다.
뚝.
놈이 웃음을 뚝 하고 그쳤다.
나를 보는 눈이 진지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빨리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런 후.
나는 죽을 거다.
살 이유가 이제는 없다.
"태한아."
"……."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
"신. 내가 너를 신으로 만들어 줄게. 나처럼."
미친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래야 하는데.
왜 떨리지?
왜 무섭지?
놈은.
지금 진지하다.
"당장 결정하라는 거 아니야.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 물론, 거절하면 죽어. 너도 죽고, 네 주위 사람들도."
"왜… 나지?"
"재밌어서. 나에게 바보라고 가장 많이 부른 것도 너고, 나를 가장 많이 욕하고 무시했던 것도 너인데. 후훗. 웃기지? 나를 가장 인간적으로 대해 준 것도 너야. 그래서 네가 밉기도 하면서 또 고맙기도 했어."
"난……."
"내려가 봐. 가서 생각해. 그리고 결정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많은 이들이 죽고 살 거야. 물론, 내가 원하는 결정을 네가 내린다고 해도. 죽을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어. 그건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냥… 그냥 살려 주면 안 돼?"
"‘요’ 자를 붙이라고."
"안 돼…요, 백 형?"
놈이 웃는다.
놈은 만족스럽고 기쁘고 즐겁다.
"무릇 왕은!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무릇 신은! 종들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나는! 귀계의 왕이고 귀계의 신이야. 그들이 내게… 인간들을 달라고 하고 있어."
어둡다.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의 미래가 조금도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전부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가 곧 이곳의 왕이고 이곳의 신이 될 테니. 인간들 역시……. X새끼들. 나를 무시하고,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욕보이고. X새끼들은 죽어야 해. X새끼들만 죽일게. 내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만."
세상은 종말만이 남았다.
"가. 가서 네 아내들도 보고.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너를 배려했는지 깨닫게 될 거야. 고마워하게 될 테고. 내가 인간들에게 화가 난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베푼 자비를 보면, 또 얼마나 위대한 신인지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태한아."
"……."
"내 손으로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마. 이건 부탁이 아닌 충고야."
녀석이.
놈이.
악마가.
그 말을 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요구하는 것이다.
달라는 것이다.
내 허튼 생각을.
난,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었다.
행운석을 목에서 풀어, 놈의 손에 올려놓았다.
행운석이… 놈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 행운석의 주인은.
내가 아닌 놈이다.
* * *
내공을 쓸 수 없었지만, 가파른 숭산의 산길은 나를 막지 못했다.
미친 듯 달려 산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걸삼번이 거짓말을 했나?
아니다.
아닐 테다.
놈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낭만개 아저씨와 무치개 장로가 데리고 간 모양이다.
어디로 갔을까?
다행이다.
천주마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천주마야."
푸르릅(꼴이 왜 그 모양이냐)?
"사정이 좀 있어.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
풉풉(몰라).
아!
천주마 녀석도 모르는군.
어쩌지?
어디로 가야지?
만리상단으로 갔을까?
아니면 황천 분타?
풉. 풉. 푸푸. 푸풉.(석창림. 석창림. 석창림으로 간다고 했어. 난 거기가 어딘지 몰라).
다행이다.
"주마야! 달려! 귀주 석창림 무치개 장로의 은거지로 간다!"
* * *
닷새를 달려 석창림에 도착했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살아 있다.
모두는 아니다.
일부가.
나에 대해 이미 철저히 조사를 한 모양이다.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만이, 살 수 있었다.
아니, 걸삼번이 그들을 살려 줬다.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가 살아 있었다.
무치개 장로와 묘안개, 저육개가 살아 있다.
단씨 삼 형제까지 모두 살아 있고.
낭만개 아저씨도 살았다.
그리고…….
그리고……!
"얘들아……."
내 부름에.
단문령과 연주언, 담초희가.
눈물을 뚝뚝, 뚝뚝 흘리며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난 그녀들을 품에 안고, 정말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 * *
행운석이 없다.
이제 나는 뭘 할 수 있지?
도망갈까?
새외로 가면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럼 놈의 말대로 놈에게 붙을까?
최소한 내 사람들은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럼?
싸워?
걸삼번과?
어쩌면… 아니, 정말 신이 됐을지 모를 놈과 싸워?
행운석마저 놈에게 빼앗긴 내가?
웃음이 났다.
애초에 나란 인간은 말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그런 쓰레기였다.
쓰레기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쓰레기의 할 일이다.
그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수련에 매진하고.
석창림으로 전서구와 전서응이 수도 없이 오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무도 그런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입을 닫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았는데.
그런데 왜!
X팔.
천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보이고 다 들리냔 말이다.
보타암에서 전대의 검후가 바다를 건너 넘어왔다는 말이 들렸다.
무당파에서는 무려 전전대의 천하제일 검이 148세의 나이로 무당산을 내려왔다고 했다.
점창파에서는 우화등선을 눈앞에 둔 반선의 도사가 100년 만에 은거를 깨고, 손에 칼을 쥐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말이 들려왔다.
천하는 이 3인을 가리켜 구세선인(救世仙人)이라 불렀다.
나도!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불끈 쥐며.
간절히 그들을 응원했다.
구세선인이 놈을!
걸삼번을!
기적을!
사흘이 지나 그들의 소식이 들려 왔다.
모두 죽었다고.
다 죽었다고.
걸삼번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고.
귀계에서 넘어온 열여섯의 검은 귀신들.
암흑십육귀(暗黑十六鬼)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도륙당했다고.
닷새가 지났을 때 당혹스러운 소식이 또 들려왔다.
계속 참담한 소식이 연이어 날아드는 이곳 석창림이지만.
낮에 들었던 소식은 더더욱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연주언의 아버지.
만리상단의 상단주가 걸삼번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어 가며, 바닥에 피를 흥건히 뿌려 대며.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식이었다.
난 눈을 더 깊이 감았다.
귀를 더 단단히 막았다.
며칠이 더 지났고.
북해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중원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북해빙궁은, 이미 오래전 걸삼번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황궁이 놈의 손으로 넘어갔다.
120만에 달하던 황제의 대군은.
전멸했다.
어리지만 어질고 현명했던 황제는.
헌원문장과 함께 만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어린 황제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소림은 멸문했고, 무당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화산과 종남은 놈에게 무릎을 꿇고 울었다.
당가는 대부분이 멸족당했고.
아미와 청성파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모두가 그랬다.
모두.
천하가… 천하가 모두.
악마에게 무릎을 꿇었다.
* * *
남만에서 연락이 왔다.
반후인과 그의 막냇동생 반구삭이 거대한 독수리 청안을 타고 직접 나를 찾아왔다.
곧…….
야수왕과 태양왕이 직접 이끄는 수십 만의 남만 전사들이 중원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왕들의 맹세를 전했다.
천마신교에서 연락이 왔다.
담초희가 현 상황을 천마신교에 빠르게 전한 것이다.
곧, 답이 도착했다.
구천마제 교주가.
신교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겠다는 답신이었다.
혈우도마와 환영비마, 마뇌까지 모두.
10만의 천마신교 교도들 모두가.
나와 교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천하를 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멍청한 녹림왕 같으니라고.
그깟 도끼 한 자루가 뭐라고.
녹림왕이 녹림삼십육채를 모두 소환했고, 의형제였던 동정십팔채의 총채주까지 가세해 나와 함께 싸우겠다는 말을 전했다.
오면 죽는다.
모두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준비고 뭐고 없다.
이제 죽으면 끝이다.
죽으러 가는 거다.
우룡검을 챙기고, 순천검도 챙겼다.
신패……. 하!
돈.
이것저것.
거지 주제에 뭔 놈의 것들이 이리도 많냐?
그냥 우룡검과 순천검만 챙겼다.
그런 내 모습을, 낭만개 아저씨와 아내들 그리고 모두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떠나려는데.
"흑흑. 흑흑흑."
단문령이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은 전염병처럼 다른 아내들에게도 옮겨 갔다.
낭만개 아저씨가 붉어진 눈으로 다가왔다.
"함께 가자."
무치개 장로도, 상취개와 순화자 그리고 속리자까지.
단씨 삼 형제와 아내들 모두.
나와 함께 가려 했다.
난 그런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정말 간신히 이를 억눌렀다.
이젠 내 시간이다.
잘못된 모든 걸 되돌려 놓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간사해져야 한다.
의욕만으로 바뀔 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걸삼번은… 평생 바보 흉내를 내며 이 모든 것을 꾸몄다.
그리고 이루어 냈다.
놈을 죽이려면.
놈보다 더 간사해져야 한다.
나는, 석창림에 오른 지 넉 달하고 보름 만에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쉬이이이이이이잉.
어둠과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만리상단에 도착했다.
만기전(萬器殿).
만리상단의 병기를 보관하는 전각이다.
지난번, 연주언과 함께 성물과 성수를 실험했던 뇌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은형술을 극대로 펼쳤다.
만기전에 잠입해, 성수를 찾았다.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성수의 기운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 기운을 따라 만기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성수를 지키는 만리상단의 무인은 여럿이었고, 모두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잠재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성수가 보관된 방으로 들어갔다.
준비한 가죽 물통 여러 개에 성수를 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성물까지 챙겼다.
끝이 뾰족한 게.
좋다.
* * *
"휴우."
만리상단을 벗어났다.
새벽바람이 차다.
심호흡을 하고.
우룡검과 순천검, 성수와 성물까지 다시 확인하고.
가자!
오늘부터 걸삼번의 오른팔은 나다.
그를 왕으로 떠받들고.
그를 신으로 숭배하며.
놈이 나를 완벽히 신뢰할 때.
놈과 함께 죽을 것이다.
난, 새벽의 차가운 바람과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있는 힘껏!
모든 것을 걸고.
걸삼번이 있는 황궁을 향해 빠르게 달렸… 번쩍!